2019년 7월 3일 수요일
프랑스 명예훼손죄 사례, 외국 정부의 명예훼손 고소
바로 지난번 글에서 프랑스의 명예훼손죄를 간단히 정리해봤습니다.우연히 명예훼손죄와 관련된 사례를 하나 발견하게 되어, 마저 정리해보려 합니다.
사례가 소개된 글은, 파리-소르본 대학의 공법학 교수 Roseline Letteron(Professeur de droit public à l'Université Paris-Sorbonne)의 블로그 "Liberté, Libertés chéries"에 올라온 2019년 5월 14일자 글 "명예훼손 : Chérif를 공격하지 마!(Diffamation : Ne tirez pas sur le Chérif !)"입니다.
Chérif는 아랍국가의 왕을 이르는 말이라고 하네요. Chérif를 공격하는 말은 Chérif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의미의 제목인 것 같습니다.
글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2019년 5월 10일 프랑스 대법원이 전원합의체에서, 모로코 정부가 프랑스 법원에 제기한 명예훼손 고소(plainte)를 기각(irrecevable)하는 결정을 하였다고 합니다. 사건 표시는, Arrêt n°646 du 10 mai 2019 (18-82.737) -Cour de cassation - Assemblée plénière - ECLI:FR:CCASS:2019:AP00646.
2015년 1월 11일 '파리 샤를리엡도 테러 사건 관련 집회'와 관련하여 전 모로코 권투선수인 Zakaria Moumni가 프랑스 방송 인터뷰를 통해 모로코 대표는 위 집회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한 일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자신이 모로코 당국으로부터 간첩 혐의로 조사받으면서 고문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죠. 이에 발끈한 모로코 정부가 내무부장관의 명의로 프랑스 주재 자국 대사관을 통해, Moumni와 그의 인터뷰를 보도한 언론사들을 파리 법원에 형사고소하였습니다. 그들의 발언과 방송으로 인해 모로코 정부의 명예가 훼손되었다는 이유입니다.
형사고소의 형식은, plainte avec constitution de partie civile, 즉 '사소(私訴)당사자 구성 고소'를 예심수사판사에게 한 것입니다. 범죄의 피해자는 사소당사자의 자격으로 예심수사판사에게 고소를 제기하여 피해자의 처벌과 아울러 그 범죄피해로 인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소를 접수한 예심수사판사는 물론, 고등법원과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법원은 이 고소를 기각합니다. 이유는, 위 고소는 지난번 글에서 소개해드린 '1881년 7월 29일자 언론자유에 관한 법률(la loi sur la liberté de la presse, 이하 ‘언론법’)’ 제32조 제1항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외국 정부는 이 규정에 따라 고소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언론법 제32조 제1항을 다시 볼까요.
Article 32
La diffamation commise envers les particuliers par l'un des moyens énoncés en l'article 23 sera punie d'une amende de 12 000 euros.
제32조
제23조에서 규정된 수단 중의 하나의 방법에 의해 사인에 대해 행해진 명예훼손은 1만 2,000유로의 벌금에 처한다.
La diffamation commise envers les particuliers par l'un des moyens énoncés en l'article 23 sera punie d'une amende de 12 000 euros.
제32조
제23조에서 규정된 수단 중의 하나의 방법에 의해 사인에 대해 행해진 명예훼손은 1만 2,000유로의 벌금에 처한다.
여기서 '사인'이란, 私人 내지 개인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외국 정부는 이 조문에서의 '사인'과 유사(assimilé)하지 않으므로, 즉 외국 정부는 공적인 존재이니 私人이 아니고 법인이나 단체에 해당하니 개인도 아니므로, 결국 이 조문에 따른 고소권이 생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인 2018년 5월 7일에도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아제르바이잔을 테러리스트들로 조직된 나라라고 비난한 프랑스 외교관을 상대로 프랑스 법원에 제기한 모욕 혐의 고소도 같은 이유로 기각되었다고 하네요.
모로코 정부는 1심 예심수사판사가 고소를 기각하자 항소하면서 헌법위원회에 위 제32조에 대한 선결적 합헌심사(une question prioritaire de constitutionnalité, 우리로 치면 위헌법률심판)도 함께 청구하였는데, 프랑스 정부는 명예훼손을 이유로 고소를 제기할 수 있는데 외국 정부는 이것이 불가능하니 위 규정이 평등원칙에 위배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날 대법원은 이 청구도 함께 기각하였습니다. 대법원은, 선결적 합헌심사를 요청하기 위해 필요한 요건인 "사안의 중대성(caractère de sérieux)"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위 규정 문언상 사인이나 개인이 아닌 외국 정부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명확하다는 것이죠. 프랑스 정부가 명예훼손을 이유로 고소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은 제32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제30조와 제31조 제1항에 정부를 대상으로 한 명예훼손죄를 처벌한다는 별도의 규정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이 글에서는 중간에 2016년 1월 21일자 유럽인권법원의 판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arrêt de Carolis et France Télévision c. France 라는 사건인데요, 9.11 테러사건과 사우디아라비아 왕자와의 관련성에 대해 보도한 TV 프로그램의 작가에게 사우디아라비아 왕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선고한 프랑스 판사들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내용이었습니다. 위 방송작가에게 유죄를 인정한 것은 정보의 자유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라고 본 것이죠.
위 명예훼손 사건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왕자가 고소를 제기한 것이어서 무난히 유죄판결에 이른 것이라고 하는데요, 모로코 사건도 모로코 정부가 아니라 정부 관계자 중 누군가가 개인의 자격으로 고소를 제기하였으면 나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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