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3일 수요일
인왕재색도를 보고 와서
오늘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이건희 컬렉션 전시회를 보고 왔습니다. 가기 전에 이번 전시회의 주인공격인 겸재 정선의 ‘인왕재색도’에 대해 살짝 야트막하게 공부를 해봤습니다. 잠깐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이런저런 글을 찾아보니 겸재 정선은 그냥 화가가 아니더군요.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인데,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다 전국적으로는 물론 저 멀리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친 조선 후기 최고 인기 화가라고 합니다. 유명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왕이 되기 직전의 어린 영조에게 그림을 가르치기까지 했고 집권세력인 노론의 정치인들과도 각별한 친분을 쌓아, 나중에는 작은 고을의 수령도 해보고 중앙에서 중요한 관직을 맡기도 하는 등 승승장구하였다고 하네요.
일흔이 넘어 그의 인생 말년에 그린 대작이 바로 ‘인왕재색도’인데요, 한양 인왕산에 막 비가 그치면서 운무가 피어오르는 광경을 웅장하게 묘사한 그림입니다. ‘齋色’의 ‘齋’는 ‘비 그칠 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왕재색’은 인왕산에 비가 그쳐 본래의 색(모습)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되구요.
그냥 가만히 있는 산 풍경을 그린 게 아니라 이제 막 비가 그쳐 땅에서부터 안개가 피어오르는 바로 그 순간을 그린 거라서, 정적이지 않고 동적인 느낌을 줍니다. 비 내린 직후에 산 골짜기 여기저기서 물줄기를 뱉어내는 작은 폭포들도 그려놓아선지 더욱 힘차고 생동감 넘쳐 보이네요.
그저 시원스런 풍경이고 다 좋은데, 이상한 장면도 하나 들어있어요. 오른쪽 밑에 있는 집, 지붕이 좀 괴이합니다. 찌그러진 건지 잘못 그린 건지, 3차원적으로 말이 안 되는 지붕 모양이 퍽 어색합니다. 지붕을 왜 이렇게 그린 건지 딱부러지게 설명한 글은 못 찾겠네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작년에 재밌게 본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마지막 회에선가 인왕산 아랫동네에 막 이사 온 편의점 사장님이 동네 지리를 익히느라 이 그림을 꼼꼼히 살펴보던 장면도 떠오르네요.
정선이 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단지 인왕산 풍경이 좋아서만은 아닌 거 같구요, 학설이 분분하네요. 정선도 인왕산 아랫동네 주민이었다는데 혹자는 같은 동네 사는 절친의 쾌유를 기원하며 그린 그림(비가 개듯이 건강 회복을 기원한다는 취지)이라고 하고, 혹자는 사도세자 문제로 영조와 갈등을 겪고 있던 노론 집권세력의 정치적 견해가 은밀하게 담긴 그림(비가 개듯이 왕과의 관계 회복을 바란다는 취지)이라고도 합니다.
인왕산은 참 멋있는 산이고, 인왕산 아랫동네는 경복궁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촌’이라 불리며 경복궁 너머에 있는 ‘북촌’과 더불어 수년 전부터 외국인이나 관광객들을 무지하게 끌어들이고 있는 핫한 동네입니다. 조선 왕조가 들어서고 한양으로 도읍을 정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해서 동쪽을 바라보게 궁궐을 짓자고 하고 정도전은 북악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궁궐이 들어서야 한다고 다투다, 결국 정도전이 이긴 거라고 하죠.
인왕산은 밑에서 보는 것보다 정상에 올라서 서울 사대문 안의 전경, 특히 산등성이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져 나가는 한양도성 성곽을 바라보는 뷰가 아주 일품입니다.
최근에 국립대구미술관에서도 이건희 컬렉션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요새 이건희 컬렉션 붐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무려 2만 점이 넘는 이건희 컬렉션 작품들은 수도권에 있는 한두 박물관에만 기증된 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에 나누어 기증되었다고 해요. 워낙 기증된 작품 수가 많아서 전국의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내년 2024년까지 전시일정이 죽 잡혀있고, 전국에서 전시회가 열리니 전국적으로 사람들 관심을 끌고 붐이 생긴 것이죠.
그 덕분에, 남들 다 가본다고 하니 저처럼 평소 미술에 아무 관심 없던 사람도 여기 대구에서 인왕재색도가 뭔지 공부를 하고 이걸 직접 보려고 박물관이란 델 가볼 생각을 하는 것이겠구요. 이 기증이 우리 사회와 문화에 큰 기여를 한 셈입니다.
이번 전시회는 7월까지 계속되지만, 이 인왕재색도는 안전한 보존을 위해 전시한 지 딱 한 달이 되는 5월 7일까지만 여기 있다 다른 작품으로 교체된다고 합니다. 타이밍 잘 맞춰 잘 보고 왔습니다.
2023년 5월 2일 화요일
전문증거에 관한 쟁점 한 가지
전문증거의 의미와 관련하여, 평소 갖고 있던 생각 한 가지를 메모합니다.
수사과정에서 피의자의 진술을 기록한 피의자신문조서는 전문증거입니다. 재판에서 증거로 제출되는 경우 형사소송법 제312조에 따라 증거능력 여부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수사과정에서 혐의사실을 자백해서 재판을 받던 피고인이 종전의 진술을 번복해서 공소사실을 부인하는 경우, 대개 그의 자백진술이 기록된 피의자신문조서는 증거능력이 부정되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피고인의 수사과정에서의 자백진술은 온데간데 없이 증거로 쓸 길이 없어지게 됩니다. 현재의 판례에 따르면요.
그런데 만약 피고인이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수사과정에서 자백진술을 한 일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한다면, 피고인의 법정진술 중 그의 수사과정에서의 자백진술 부분은 전문증거가 아니라 본래증거이므로 증거능력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우리 형사소송법상 전문증거의 개념은 제310조의2(“제311조 내지 제316조에 규정한 것 이외에는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서의 진술에 대신하여 진술을 기재한 ①서류나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 외에서의 타인의 진술을 내용으로 하는 ②진술은 이를 증거로 할 수 없다”)로부터 도출되는데, 이 규정에 대한 정확한 해석에 의할 때 피고인의 법정진술 중 그의 수사과정에서의 자백진술 부분은 전문증거의 개념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위 규정에서 ‘①서류’는 법정 외에서 작성된 것으로서 법정 외에서의 ‘진술’이 담겨있는 것이고 ‘②진술’은 법정에서의 진술로서 법정 외에서의 ‘타인의 진술’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①서류’는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누구의 진술이라도 전달하는 것이면 되나, ‘②진술’은 타인의 진술만을 전달하는 것이 전문증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정에 나온 증인이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이 공판 외에서 했던 진술 내용에 관해 증언한다면 이 증언은 전문증거이지만, 법정에 나온 증인이 자기 자신이 공판 외에서 했던 진술 내용에 관해 증언한다면 이 증언은 전문증거가 아닙니다. 법정진술에 관한 형사소송법 제316조 제1항과 제2항의 내용을 봐도 그렇게 해석됩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전문법칙의 취지상 당연한 이치이기도 합니다. 전문법칙이라는 건 본래 요증사실에 관해 증언을 해야 할 어떤 사람이 법정에 나올 수 없을 때, 그의 증언 대신 다른 대체물을 증거로 인정하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증언을 해야 할 사람이 이미 법정에 나와 있다면, 궁금한 걸(그 사람의 법정 외 진술) 바로 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지 굳이 전문법칙을 따지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이치로, 피고인이 수사과정에서는 혐의사실을 자백하였다가 공판과정에서 이를 번복하여 공소사실을 부인하는 사안에서, 만약 피고인이 법정에서 ‘수사과정에서 혐의사실을 자백하였다’라고 진술한다면 이는 ‘타인의 진술’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러한 피고인의 법정진술은 전문증거가 아닙니다. 이는 본래증거이므로, 곧바로 증거능력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즉, 피고인이 법정에서 수사과정에서의 자백진술을 번복하는 경우, 피의자신문조서야 전문증거여서 피고인의 내용부인을 사유로 증거능력이 부정되는 건 당연하다 치더라도, 현재 법정에 나와 있는 피고인의 진술에 의해 그 내용이 인정된 수사과정에서의 자백진술은 본래증거이므로 당연히 증거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는 판례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형사소송법 제310조의2 문언상 명백한 논리임에도, 피고인의 '내용부인'이라는 한 마디로 수사과정에서의 피의자의 진술이 온데간데 없어져야 한다는 이런 이상한 법해석은 하루 속히 바로잡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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