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1일 일요일
[독서일기]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서울대 동양사학과 구범진 교수님의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2019, 까치)을 읽었습니다.
제가 병자호란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렸을 때 본 KBS 대하드라마 "대명"에서였습니다. 그동안 각종 소설,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잘 알려진 병자호란이지만, 이 책에서 또다른 새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구범진 교수님은 중국사 전공자로서, 특히 명청대의 역사가 주 전공이라고 합니다. 명과 청의 사료들을 풍부하게 검토하여 중국쪽에서 바라본 병자호란의 사실관계도 빠짐없이 잘 정리하였습니다.
한번 읽고 바로 잊어버리기는 아까워, 이 책을 통해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을 간단히 정리해 봅니다.
- 병자호란은 양력으로 따지면, 병자년인 1636년에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 그 해를 넘어 1637년 정축년 1월 3일에 시작된 전쟁입니다. 음력으로 따지면 병자년 12월이기 때문에 병자호란이라고 하는 것이구요.
- 청 태종 홍타이지는 1636년 4월 수도인 심양에서 황제 즉위식을 열고 황제가 됩니다. 황제 즉위식 때 마침 심양에 와있던 조선 사신들을 참석시켜 삼궤구고두를 하도록 하였는데, 조선 사신들은 명나라와의 관계상 감히 청이 황제를 칭함을 용납할 수 없어 이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홍타이지는 이들에 의해 권위가 훼손된 자신의 황제 즉위식을 제대로 완성하기 위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게 됩니다.
조선의 항복 후 삼전도에서 벌어진 행사 역시 단순히 조선 왕의 항복을 위한 자리라기보다는, 이 황제 즉위식의 완성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기존에 10만설, 12만 8천명설 등이 있는데, 당시의 청이 그 정도의 대군을 구성할 정도의 국력에는 미치지 않았고, 실제로는 청의 지배 하에 있던 몽골의 군사까지 합하여 3만 4천명으로 추정됩니다.
- 불과 10년 전에 있었던 정묘호란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지 못한 조선 조정의 무능함이, 병자호란에서 아무런 대비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원인이라는 것이 기존의 통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묘호란 후 조선은 청의 재침에 대비한 대책을 분명히 마련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안 한 것이 아닙니다. 조선의 대책은, 전면전으로는 승산이 희박한 점을 감안하여 각 거점에 마련한 산성을 중심으로 지구전 형태의 방어전을 펼치고, 그 사이 조정은 강화도로 이동하여 당시 최강의 조선 수군으로 강화도의 조정을 방어하고, 팔도의 속오군을 신속하게 소집하여 침략군을 물리친다는 전략이었습니다.
다만, 청군은 정묘호란 때처럼 조선 왕이 강화도로 피신하여 지구전을 펼치는 상황을 방지하고자, 신속하게 한양으로 이동하여 조선 왕만 사로잡겠다는 전략으로 조선의 각 거점은 그대로 지나치는 패싱 전략을 구사하였고, 그 바람에 산꼭대기 산성에 숨어있던 조선군은 이를 넋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청군은 강화도의 조류를 잘 계산하여 썰물에 이리저리 밀린 최강의 조선 수군을 무력화하였으며, 각지에서 접근하는 근왕병들을 각개격파함으로써, 결국 조선의 새로운 방어전략은 전혀 힘도 써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 남한산성 공략을 위한 청군의 당초 전략은, 남한산성에 고립된 조선 조정이 식량 부족 등으로 고사하여 제발로 걸어나오길 기다리는 느긋한 계획이었으나, 갑자기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조선이나 명나라에 만연한 천연두에 만주족이 취약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죠. 당시만 해도 천연두는 거의 사망에 이르게 되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이었는데, 이는 특히 겨울과 봄에 창궐하곤 하였다고 합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1월에서 2월 역시 조선에 천연두가 유행하는 계절이었는데, 1월 16일경 청군 진영에서 처음으로 천연두가 발견되었고, 이에 두려움을 느낀 홍타이지는 신속히 전쟁을 끝내기로 전략을 변경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인조가 직접 성에서 나와 항복하고 척화를 주장한 신하 두 세 명을 포로로 달라는, 조선과 인조로서는 조선의 멸망이나 괴뢰정부 설립과 같은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는 후한 대가만 요구한 것이죠.
그리고 홍타이지는 드디어 완성판 황제 즉위식을 마치고는, 이틀 후 곧바로 조선을 떠납니다. 한겨울에 먼길을 와서 이제 전쟁을 승리로 끝냈으니, 조선 궁궐에서 뒤풀이를 벌이거나 봄이 올 때까지 한가하게 휴식을 즐길 수도 있었으련만, 그런 모습은 전혀 없이 귀국 준비만 서둘렀던 것입니다. 그만큼 천연두가 그들에게는 큰 공포였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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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병자호란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렸을 때 본 KBS 대하드라마 "대명"에서였습니다. 그동안 각종 소설,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잘 알려진 병자호란이지만, 이 책에서 또다른 새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구범진 교수님은 중국사 전공자로서, 특히 명청대의 역사가 주 전공이라고 합니다. 명과 청의 사료들을 풍부하게 검토하여 중국쪽에서 바라본 병자호란의 사실관계도 빠짐없이 잘 정리하였습니다.
한번 읽고 바로 잊어버리기는 아까워, 이 책을 통해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을 간단히 정리해 봅니다.
- 병자호란은 양력으로 따지면, 병자년인 1636년에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 그 해를 넘어 1637년 정축년 1월 3일에 시작된 전쟁입니다. 음력으로 따지면 병자년 12월이기 때문에 병자호란이라고 하는 것이구요.
- 청 태종 홍타이지는 1636년 4월 수도인 심양에서 황제 즉위식을 열고 황제가 됩니다. 황제 즉위식 때 마침 심양에 와있던 조선 사신들을 참석시켜 삼궤구고두를 하도록 하였는데, 조선 사신들은 명나라와의 관계상 감히 청이 황제를 칭함을 용납할 수 없어 이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홍타이지는 이들에 의해 권위가 훼손된 자신의 황제 즉위식을 제대로 완성하기 위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게 됩니다.
조선의 항복 후 삼전도에서 벌어진 행사 역시 단순히 조선 왕의 항복을 위한 자리라기보다는, 이 황제 즉위식의 완성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기존에 10만설, 12만 8천명설 등이 있는데, 당시의 청이 그 정도의 대군을 구성할 정도의 국력에는 미치지 않았고, 실제로는 청의 지배 하에 있던 몽골의 군사까지 합하여 3만 4천명으로 추정됩니다.
- 불과 10년 전에 있었던 정묘호란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지 못한 조선 조정의 무능함이, 병자호란에서 아무런 대비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원인이라는 것이 기존의 통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묘호란 후 조선은 청의 재침에 대비한 대책을 분명히 마련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안 한 것이 아닙니다. 조선의 대책은, 전면전으로는 승산이 희박한 점을 감안하여 각 거점에 마련한 산성을 중심으로 지구전 형태의 방어전을 펼치고, 그 사이 조정은 강화도로 이동하여 당시 최강의 조선 수군으로 강화도의 조정을 방어하고, 팔도의 속오군을 신속하게 소집하여 침략군을 물리친다는 전략이었습니다.
다만, 청군은 정묘호란 때처럼 조선 왕이 강화도로 피신하여 지구전을 펼치는 상황을 방지하고자, 신속하게 한양으로 이동하여 조선 왕만 사로잡겠다는 전략으로 조선의 각 거점은 그대로 지나치는 패싱 전략을 구사하였고, 그 바람에 산꼭대기 산성에 숨어있던 조선군은 이를 넋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청군은 강화도의 조류를 잘 계산하여 썰물에 이리저리 밀린 최강의 조선 수군을 무력화하였으며, 각지에서 접근하는 근왕병들을 각개격파함으로써, 결국 조선의 새로운 방어전략은 전혀 힘도 써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 남한산성 공략을 위한 청군의 당초 전략은, 남한산성에 고립된 조선 조정이 식량 부족 등으로 고사하여 제발로 걸어나오길 기다리는 느긋한 계획이었으나, 갑자기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조선이나 명나라에 만연한 천연두에 만주족이 취약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죠. 당시만 해도 천연두는 거의 사망에 이르게 되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이었는데, 이는 특히 겨울과 봄에 창궐하곤 하였다고 합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1월에서 2월 역시 조선에 천연두가 유행하는 계절이었는데, 1월 16일경 청군 진영에서 처음으로 천연두가 발견되었고, 이에 두려움을 느낀 홍타이지는 신속히 전쟁을 끝내기로 전략을 변경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인조가 직접 성에서 나와 항복하고 척화를 주장한 신하 두 세 명을 포로로 달라는, 조선과 인조로서는 조선의 멸망이나 괴뢰정부 설립과 같은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는 후한 대가만 요구한 것이죠.
그리고 홍타이지는 드디어 완성판 황제 즉위식을 마치고는, 이틀 후 곧바로 조선을 떠납니다. 한겨울에 먼길을 와서 이제 전쟁을 승리로 끝냈으니, 조선 궁궐에서 뒤풀이를 벌이거나 봄이 올 때까지 한가하게 휴식을 즐길 수도 있었으련만, 그런 모습은 전혀 없이 귀국 준비만 서둘렀던 것입니다. 그만큼 천연두가 그들에게는 큰 공포였던 것이죠.
2018년 12월 17일 월요일
[독서일기] <호모 히스토리쿠스>,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최근에 역사에 관한 좋은 책 두 권을 읽었습니다. 오항녕 지음 <호모 히스토리쿠스>(2016년 8월, 개마고원)와 젊은역사학자모임 지음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2018년 10월, 서해문집)입니다.
전자는 역사란 무엇이고 역사 공부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는 점을, 후자는 유사역사학을 비판하면서 역사 공부의 바른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책의 저자들이 이 책들을 저술하게 된 각각의 출발점은 다르겠지만, 결국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 주겠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즉, 역사를 섣불리 단정 지어 보지 말고, 또 악의를 갖고 역사를 호도하는 사람들을 경계하자는 것입니다.
두 책 모두 느끼는 바가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고, 거의 암기 정도 해놔야 되지 않을까 싶은 주옥같은 내용들이 많습니다. 비단 역사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사회를 정확히 바라보는 데도 유용한 사고 틀을 발견할 수 있네요. 두고두고 기억해 놓기 위해 여기 일부 내용을 옮겨보려 합니다.
<호모 히스토리쿠스>
제1부 내 발길이 만드는 역사
- 모든 사건에는 언제나 객관적 조건, 사람의 의지, 그리고 우연이 함께 들어 있다. 모든 사건은 조건, 의지, 우연이 합쳐져서 발생합니다. 역사는 사건에 대한 탐구이므로 모든 사건을 탐구할 때는 조건, 의지, 우연을 다 살펴야 합니다. (34쪽)
- 구조라고 해서 불변은 아닙니다. 구조도 변합니다. 구조는 다음에 살펴볼 자유의지와 대립적이지 않습니다.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 나중에는 구조가 됩니다. (52쪽)
- 객관적 조건과 구조를 고려하지 않으면 사태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조만 고려하면 설명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이 사라집니다. --- 인간의 의지가 빠진 역사적 사건이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53쪽)
- 모든 역사적 사건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용하고 있지만, 사건을 해석할 때는 자유의지를 조심스럽게 대입해야 할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60쪽)
- 역사에는 서로 원인이 다른 둘 이상의 사태가 만나서 생기는 사건이 많습니다. 아니 모든 사건에는 우연이 내재합니다. (68쪽)
제2부 역사의 영역
제3부 기억, 기록, 그리고 시간의 존재
- 이렇게 잘못된 기억이 증언이나 기록으로 남고, 이것이 역사자료로 활용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연스럽게 역사의 오류를 낳거나 왜곡으로 이어지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132쪽)
- 핵심은 주관(성)이란 것이 객관(성)과 대립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니 그보다 객관성의 토대이자 자양분이며, 실질적 내용이자 풍부하게 해주는 질료가 주관성입니다. 주관을 객관의 대립으로 설정하는 사유는 결국 하나의 '객관'만을 강요하기에 이릅니다. (151쪽)
- 역사기록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일기나 편지에서 교과서, 논문까지 역사기록의 스펙트럼은 넓습니다. 전자를 주로 사료, 역사기록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역사서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 이런 스펙트럼을 고려하면 사실과 해석,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데도 유용합니다. (164쪽)
- 역사성에 대한 인식이 중요한 이유는, 역사성을 놓치면 시대착오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이 오류는 어떤 사건이 실제 일어난 시기(시대)가 아닌 다른 시기에 일어난 것처럼 묘사, 분석,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 시대착오의 오류 중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현재주의의 오류입니다. 현재주의는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의 어떤 사실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175쪽)
제4부 오해와 이해의 갈림길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고조선 역사, 어떻게 볼 것인가
- 고조선 문화권에서 세 유물이 모두 균일한 밀도로 갖추어져 있었다고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유물을 통해 확인되는 문화적 분포권을 고대국가의 영역과 간단히 동일시해 버리는 태도 역시 위험하다. 문화는 국경을 넘어서도 전파될 수 있기 때문이다. (29쪽)
낙랑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 사이비 역사가들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광대한 대륙을 호령했던 우리 역사를 반도로 축소했다고 열을 올려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대륙의 역사는 우월하고 반도의 역사는 열등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넓은 영토에 대한 환상과 욕망에 취해 정작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살고 있는 한반도를 혐오하고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60쪽)
광개토왕비 발견과 한중일 역사전쟁
- 광개토대왕비는 이러한 정사 기록이 아니다. 장수왕이 자기 부왕인 광개토왕의 업적을 대외에 과시하고자 작성한 훈적비인 셈이다. 또한 비문은 고구려 왕가의 입장에서 과거에 일으킨 전쟁이 정당한 명분하에 치러졌으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수행했음을 국내성의 귀족과 주민에게 널리 알리는 정치 선전물이기도 했다. (88쪽)
- 정작 중요한 것은 비문에서 드러난 국제 정세에 대한 고구려인의 '인식'과 자기 '욕망'이며, 여기에 토대를 둔 정치적 발언 자체를 사실로 보는 것은 순진한 발상에 불과하다. (92쪽)
백제는 정말 요서로 진출했나
- 백제의 요서 진출 정보가 중국 정사에 기록됐기 때문에 타자의 '객관적 시각'에 따라 서술된 '역사적 사실'이라는 믿음도 있다. 타자의 기록이 가진 긍정적 속성도 있지만, 무지와 편견과 이해관계에 따른 왜곡 역시 적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남조 역사서를 해석할 때는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 --- 백제의 요서 진출 문제는 백제만의 관점에서 벗어나서 요서와 중국 내륙, 나아가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혀 입체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조'라는 타자를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한다. 그들 입장에서 왜 기록하게 됐는지를 다각도로 따져 보는 과정 속에서 백제의 요서 진출에 대한 이해도 풍부해질 것이다. (125쪽)
칠지도가 들려주는 백제와 왜 이야기
- 백제에서 만들어진 칠지도는 기본적으로 왜에 대한 백제의 '인식'을 보여 주는 물건이다. <일본서기>가 백제에 대한 일본의 '인식'을 보여 주는 사료라는 점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칠지도에 보이는 백제의 인식이 당시 백제와 왜의 실제 관계를 보여 주는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151쪽)
- 국가 간의 외교 관계에 있어서 어느 한쪽의 인식이 두 나라의 실제 관계와 다르게 기록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여러 나라들은 백제왕을 책봉할 때, 자국 중심의 인식에 맞춰 외교문서를 보냈다. 백제왕도 그러한 인식에 어긋나지 않게끔 형식을 갖추어 외교문서를 보냈다. 이러한 관계를 흔히 '조공책봉 관계'라고 하지만, 둘 사이의 실제 관계는 그러한 인식과는 조금 달랐다. 백제왕은 국내의 필요성과 중국의 상황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백제의 외교적 이익에 따라 행동하기도 했다. (151쪽)
- 칠지도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내려준다는 백제의 인식에 따라 제작됐다. 다만, 실제 백제와 왜의 관계는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우호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우호 관계를 고려한다면, 칠지도의 실제 성격은 '헌상품'이나 '하사품'이라기보다, 외교적 선물에 가까웠을 것이다. (153쪽)
생존을 위한 전쟁, 신라의 삼국통일
- 지금까지 신라의 외교와 전쟁 수행 과정을 살펴보면 결국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 입장에서 상황에 따라 적국이 되거나 동맹국이 될 수 있는, 혹은 상대를 복속시켜서 속국으로 삼기도 한 타국이었다. 이들 사이에 언어가 통한다거나 혹은 문화적 공통점이 어느 정도 있다 할지라도 이들은 같은 민족으로 서로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각기 다른 국가로서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합종연횡을 거듭했다. 신라가 백제를 상대할 대상으로 고구려를 선택한 것도 전략적이었으며, 왜나 당을 선택해 외교를 펼친 것 또한 전략적 이득을 감안한 것이었다. (184~5쪽)
- 이 시기에 고구려나 백제, 왜, 당은 신라 입장에서 모두 외세였으며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고구려, 신라, 백제라는 삼국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의 관계에 민족이라는 터울을 씌우는 순간 역사는 역사가 아닌 현재의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관점 속에 있는 상상 속 산물이 될 것이다. 그러한 산물 속에서 김춘추는 사대주의자로 포장돼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후대의 산물, 인식을 그것이 실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실재한 것처럼 덮어씌워 이야기하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미안한 일이 아닐까. (185쪽)
신라 김씨 왕실은 흉노의 후예였나
- 선조에 대한 여러 기록에는 사람들의 욕망이 투영돼 있다.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고대사를 바라보며 여러 욕망을 투영한다. 사람들이 신라 김씨 왕실의 선조에 대한 여러 기록 가운데서도 유독 김일제가 선조였다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던 데에는 우리 민족의 범위를 확장하고 싶은 욕구가 반영돼 있다. 즉 김일제가 신라 김씨 왕실의 선조이면 흉노가 아우르던 드넓은 영토가 곧 우리 민족의 영토가 되고, 중국 왕조를 위협하던 흉노의 강한 군사력이 곧 우리 민족의 힘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김일제에 대한 기록은 관념적인 표방이며, 오히려 김일제란 인물은 이민족으로서 중국 왕조에 충성을 바친 상징적 인물이란 사실을 떠올리는 편이 좋을 것이다. (216쪽)
임나일본부설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 과연 고대를 살아간 고대인들을 현대의 국가와 민족 관점에서 해석하는 일이 타당할까?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과 남해안 교통로의 거점에서 발견되는 왜계 무덤들, 그리고 일본열도에서 발견되는 한반도계 유적들은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가로놓인 바다가 당시 사람들에게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일 수 있다.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왜인계 관료들의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넘나드는 활동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이처럼 현대인이 아닌 고대인의 관점을 염두에 두고 연구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 (246쪽)
발해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 요컨대, 당은 대조영이 실제 말갈인지 아닌지와 관계없이 '발해는 말갈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복속시키지 못한 집단에 대한 오기이자, 일종의 타자화였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 타자에 대한 멸시를 담은 '말갈'이라는 단어를 근거로 현재 중국은 발해를 자기화하려 한다. 이 얼마나 역설인가. (271~2쪽)
- 일제는 만주국과 조선에 대한 효율적 식민 통치를 위해 역사적으로 만주는 중국과 분리된 지역이었고, 조선은 만주에 종속적이었다는 논리를 만들어 냈다. 발해사 연구는 이런 만선사관 시각에서 진행됐다. (273쪽)
고대국가의 전성기, 언제로 봐야 할까?
<환단고기>에 숨은 군부독재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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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역사란 무엇이고 역사 공부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는 점을, 후자는 유사역사학을 비판하면서 역사 공부의 바른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책의 저자들이 이 책들을 저술하게 된 각각의 출발점은 다르겠지만, 결국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 주겠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즉, 역사를 섣불리 단정 지어 보지 말고, 또 악의를 갖고 역사를 호도하는 사람들을 경계하자는 것입니다.
두 책 모두 느끼는 바가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고, 거의 암기 정도 해놔야 되지 않을까 싶은 주옥같은 내용들이 많습니다. 비단 역사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사회를 정확히 바라보는 데도 유용한 사고 틀을 발견할 수 있네요. 두고두고 기억해 놓기 위해 여기 일부 내용을 옮겨보려 합니다.
<호모 히스토리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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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내 발길이 만드는 역사
- 모든 사건에는 언제나 객관적 조건, 사람의 의지, 그리고 우연이 함께 들어 있다. 모든 사건은 조건, 의지, 우연이 합쳐져서 발생합니다. 역사는 사건에 대한 탐구이므로 모든 사건을 탐구할 때는 조건, 의지, 우연을 다 살펴야 합니다. (34쪽)
- 구조라고 해서 불변은 아닙니다. 구조도 변합니다. 구조는 다음에 살펴볼 자유의지와 대립적이지 않습니다.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 나중에는 구조가 됩니다. (52쪽)
- 객관적 조건과 구조를 고려하지 않으면 사태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조만 고려하면 설명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이 사라집니다. --- 인간의 의지가 빠진 역사적 사건이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53쪽)
- 모든 역사적 사건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용하고 있지만, 사건을 해석할 때는 자유의지를 조심스럽게 대입해야 할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60쪽)
- 역사에는 서로 원인이 다른 둘 이상의 사태가 만나서 생기는 사건이 많습니다. 아니 모든 사건에는 우연이 내재합니다. (68쪽)
제2부 역사의 영역
제3부 기억, 기록, 그리고 시간의 존재
- 이렇게 잘못된 기억이 증언이나 기록으로 남고, 이것이 역사자료로 활용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연스럽게 역사의 오류를 낳거나 왜곡으로 이어지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132쪽)
- 핵심은 주관(성)이란 것이 객관(성)과 대립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니 그보다 객관성의 토대이자 자양분이며, 실질적 내용이자 풍부하게 해주는 질료가 주관성입니다. 주관을 객관의 대립으로 설정하는 사유는 결국 하나의 '객관'만을 강요하기에 이릅니다. (151쪽)
- 역사기록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일기나 편지에서 교과서, 논문까지 역사기록의 스펙트럼은 넓습니다. 전자를 주로 사료, 역사기록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역사서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 이런 스펙트럼을 고려하면 사실과 해석,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데도 유용합니다. (164쪽)
- 역사성에 대한 인식이 중요한 이유는, 역사성을 놓치면 시대착오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이 오류는 어떤 사건이 실제 일어난 시기(시대)가 아닌 다른 시기에 일어난 것처럼 묘사, 분석,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 시대착오의 오류 중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현재주의의 오류입니다. 현재주의는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의 어떤 사실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175쪽)
제4부 오해와 이해의 갈림길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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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역사, 어떻게 볼 것인가
- 고조선 문화권에서 세 유물이 모두 균일한 밀도로 갖추어져 있었다고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유물을 통해 확인되는 문화적 분포권을 고대국가의 영역과 간단히 동일시해 버리는 태도 역시 위험하다. 문화는 국경을 넘어서도 전파될 수 있기 때문이다. (29쪽)
낙랑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 사이비 역사가들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광대한 대륙을 호령했던 우리 역사를 반도로 축소했다고 열을 올려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대륙의 역사는 우월하고 반도의 역사는 열등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넓은 영토에 대한 환상과 욕망에 취해 정작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살고 있는 한반도를 혐오하고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60쪽)
광개토왕비 발견과 한중일 역사전쟁
- 광개토대왕비는 이러한 정사 기록이 아니다. 장수왕이 자기 부왕인 광개토왕의 업적을 대외에 과시하고자 작성한 훈적비인 셈이다. 또한 비문은 고구려 왕가의 입장에서 과거에 일으킨 전쟁이 정당한 명분하에 치러졌으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수행했음을 국내성의 귀족과 주민에게 널리 알리는 정치 선전물이기도 했다. (88쪽)
- 정작 중요한 것은 비문에서 드러난 국제 정세에 대한 고구려인의 '인식'과 자기 '욕망'이며, 여기에 토대를 둔 정치적 발언 자체를 사실로 보는 것은 순진한 발상에 불과하다. (92쪽)
백제는 정말 요서로 진출했나
- 백제의 요서 진출 정보가 중국 정사에 기록됐기 때문에 타자의 '객관적 시각'에 따라 서술된 '역사적 사실'이라는 믿음도 있다. 타자의 기록이 가진 긍정적 속성도 있지만, 무지와 편견과 이해관계에 따른 왜곡 역시 적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남조 역사서를 해석할 때는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 --- 백제의 요서 진출 문제는 백제만의 관점에서 벗어나서 요서와 중국 내륙, 나아가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혀 입체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조'라는 타자를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한다. 그들 입장에서 왜 기록하게 됐는지를 다각도로 따져 보는 과정 속에서 백제의 요서 진출에 대한 이해도 풍부해질 것이다. (125쪽)
칠지도가 들려주는 백제와 왜 이야기
- 백제에서 만들어진 칠지도는 기본적으로 왜에 대한 백제의 '인식'을 보여 주는 물건이다. <일본서기>가 백제에 대한 일본의 '인식'을 보여 주는 사료라는 점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칠지도에 보이는 백제의 인식이 당시 백제와 왜의 실제 관계를 보여 주는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151쪽)
- 국가 간의 외교 관계에 있어서 어느 한쪽의 인식이 두 나라의 실제 관계와 다르게 기록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여러 나라들은 백제왕을 책봉할 때, 자국 중심의 인식에 맞춰 외교문서를 보냈다. 백제왕도 그러한 인식에 어긋나지 않게끔 형식을 갖추어 외교문서를 보냈다. 이러한 관계를 흔히 '조공책봉 관계'라고 하지만, 둘 사이의 실제 관계는 그러한 인식과는 조금 달랐다. 백제왕은 국내의 필요성과 중국의 상황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백제의 외교적 이익에 따라 행동하기도 했다. (151쪽)
- 칠지도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내려준다는 백제의 인식에 따라 제작됐다. 다만, 실제 백제와 왜의 관계는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우호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우호 관계를 고려한다면, 칠지도의 실제 성격은 '헌상품'이나 '하사품'이라기보다, 외교적 선물에 가까웠을 것이다. (153쪽)
생존을 위한 전쟁, 신라의 삼국통일
- 지금까지 신라의 외교와 전쟁 수행 과정을 살펴보면 결국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 입장에서 상황에 따라 적국이 되거나 동맹국이 될 수 있는, 혹은 상대를 복속시켜서 속국으로 삼기도 한 타국이었다. 이들 사이에 언어가 통한다거나 혹은 문화적 공통점이 어느 정도 있다 할지라도 이들은 같은 민족으로 서로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각기 다른 국가로서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합종연횡을 거듭했다. 신라가 백제를 상대할 대상으로 고구려를 선택한 것도 전략적이었으며, 왜나 당을 선택해 외교를 펼친 것 또한 전략적 이득을 감안한 것이었다. (184~5쪽)
- 이 시기에 고구려나 백제, 왜, 당은 신라 입장에서 모두 외세였으며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고구려, 신라, 백제라는 삼국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의 관계에 민족이라는 터울을 씌우는 순간 역사는 역사가 아닌 현재의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관점 속에 있는 상상 속 산물이 될 것이다. 그러한 산물 속에서 김춘추는 사대주의자로 포장돼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후대의 산물, 인식을 그것이 실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실재한 것처럼 덮어씌워 이야기하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미안한 일이 아닐까. (185쪽)
신라 김씨 왕실은 흉노의 후예였나
- 선조에 대한 여러 기록에는 사람들의 욕망이 투영돼 있다.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고대사를 바라보며 여러 욕망을 투영한다. 사람들이 신라 김씨 왕실의 선조에 대한 여러 기록 가운데서도 유독 김일제가 선조였다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던 데에는 우리 민족의 범위를 확장하고 싶은 욕구가 반영돼 있다. 즉 김일제가 신라 김씨 왕실의 선조이면 흉노가 아우르던 드넓은 영토가 곧 우리 민족의 영토가 되고, 중국 왕조를 위협하던 흉노의 강한 군사력이 곧 우리 민족의 힘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김일제에 대한 기록은 관념적인 표방이며, 오히려 김일제란 인물은 이민족으로서 중국 왕조에 충성을 바친 상징적 인물이란 사실을 떠올리는 편이 좋을 것이다. (216쪽)
임나일본부설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 과연 고대를 살아간 고대인들을 현대의 국가와 민족 관점에서 해석하는 일이 타당할까?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과 남해안 교통로의 거점에서 발견되는 왜계 무덤들, 그리고 일본열도에서 발견되는 한반도계 유적들은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가로놓인 바다가 당시 사람들에게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일 수 있다.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왜인계 관료들의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넘나드는 활동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이처럼 현대인이 아닌 고대인의 관점을 염두에 두고 연구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 (246쪽)
발해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 요컨대, 당은 대조영이 실제 말갈인지 아닌지와 관계없이 '발해는 말갈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복속시키지 못한 집단에 대한 오기이자, 일종의 타자화였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 타자에 대한 멸시를 담은 '말갈'이라는 단어를 근거로 현재 중국은 발해를 자기화하려 한다. 이 얼마나 역설인가. (271~2쪽)
- 일제는 만주국과 조선에 대한 효율적 식민 통치를 위해 역사적으로 만주는 중국과 분리된 지역이었고, 조선은 만주에 종속적이었다는 논리를 만들어 냈다. 발해사 연구는 이런 만선사관 시각에서 진행됐다. (273쪽)
고대국가의 전성기, 언제로 봐야 할까?
<환단고기>에 숨은 군부독재의 유산
2018년 10월 15일 월요일
한양도성 순성길 가이드
걷는 게 유행인 세상, 아니 저한테만 유행인 걸까요. 요새 걷는 게 참 재미있습니다. 제 생각엔 가까이에 걷기 좋은 길들이 많아져서이지 않나 싶습니다. 여기저기 둘레길, 자락길, 철길 공원, 이런 게 흔해졌죠.
제가 사는 서울엔 산길과 동네길이 이어지며 풍경과 역사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한양도성 순성길'로, 서울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한양도성 성곽을 한 바퀴 도는 길입니다. 도성 성곽이 남대문, 남산, 동대문, 낙산, 혜화문, 북악산, 인왕산을 오르락내리락 죽 연결하고 있는데, 전체 길이가 18.6km 정도라고 합니다. 성곽의 많은 부분이 일제시대에 헐렸지만, 그동안 상당 부분을 복원해 오면서 현재 13km 정도 길이의 성곽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부터 이 도성을 한 바퀴 도는 것을 '순성놀이'라고 하며 즐겼다고 하기에, 저도 한번 시도해 보았습니다. 제가 하루에 한꺼번에 돌아보니 잠시 밥 먹고 쉬는 시간까지 합해 7시간 반 정도가 걸리더군요. 바로 어제 두 번째 만의 도전 끝에 하루 한 바퀴의 순성놀이에 성공하였는데요, 처음 순성놀이를 시도했을 때는 여러 실수를 거듭하는 바람에 이걸 제대로 마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게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입니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서울 한양도성' 홈페이지에서 한양도성 순성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의 여러 경험담과 후기들을 통해서도 역시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구요. 그런데도 까딱 잘못하면 순성을 아예 진행하지 못하거나 즐길거리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혹시 저처럼 순간의 실수로 이 좋은 여행에 펑크를 낼 분이 계실지 몰라, 제 실수담을 토대로 꼭 유의해야 할 내용만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유의사항 외에 위 '서울 한양도성' 홈페이지에서 코스 전체의 정보도 꼭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출발하기 전에 스마트폰에 서울시에서 만든 '한양도성' 앱을 설치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앱에는 여러 기능이 있지만, 무엇보다 지도 보기 기능이 매우 유용합니다. 길이 애매한 곳, 특히 성곽이 복원되지 않은 시내 구간의 경우 갈림길을 만나 어디로 가야 할지 애매한 경우가 많은데요, 이 앱의 지도를 불러서 자신이 있는 위치와 본래의 진행로를 알 수 있습니다. 순성길 여기저기에 있는 볼거리를 놓치지 않고 확인할 수도 있구요. 아, 증강현실 기능도 있던데, 이건 안 써 봤네요.
위 그림이 이 앱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간략한 지도인데, 이걸로 갈 길을 잘 모르겠다 싶으면 위 그림 왼쪽 아래에 있는 까맣고 둥근 버튼을 눌러 보세요. 아래 그림과 같이 네이버 지도에 그려진 더 자세한 순성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혹시 이 앱을 켜서 지도 보기가 귀찮으시면, 사방을 잘 둘러보시지요. 아래와 같은 표지판들이 여기저기 잘 설치되어 있답니다.
특히, 시내 구간의 바닥을 잘 보시면 아래 사진과 같은 표지가 보도블럭 사이사이에 박혀 있습니다. 이게 보이면 안심하고 그 길을 계속 가시면 됩니다.
인왕산에서 내려와 남대문을 향하는 길에 정동길을 통과하여야 하는데요, 지도를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성곽이 남아있지 않은 구간이라 요기가 약간 길이 헷갈릴 수 있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보시는 것처럼 왼쪽 아래에 있는 강북삼성병원 앞 횡단보도를 건너서 경향신문사를 지나 정동극장 앞 사거리에 도착하시면 바로 우회전하신 후, 배재학당 방향으로 다시 우회전하시면 됩니다.
순성놀이 계획을 잡을 때 어디서 출발하고, 또 어느 방향으로 돌면 좋을까요.
물론 출발점은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그리고 교통편이 편한 곳으로 잡으시면 될 텐데요, 그 외에 따져봐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북악산의 경우 청와대를 경비하는 구역이기 때문에 산 중턱에 있는 말바위 안내소에 오후 3시까지는 도착하여 신분증을 제시하고 통행표찰을 받으셔야 통과가 가능합니다. 어느 쪽에서 출발하든 이곳에 3시에는 도착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리고 도성 순성길은 기본적으로 북악산(342m), 인왕산(338m), 남산(262m), 낙산(125m) 등 네 군데의 산 정상을 넘나드는 코스인데, 이 중 북악산과 인왕산이 특히 급경사가 많아 등정이 만만찮습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오르기 수월한 남산과 낙산을 먼저 오른 다음 나중에 북악산과 인왕산을 넘으려면 꽤나 힘이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는 방향과 관련해서는, 저는 반시계 방향으로만 돌아봐서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창의문에서 북악산으로 오르는 길과 국립극장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길이 짧지만 경사가 매우 급한 편이고, 강북삼성병원에서 인왕산으로 오르는 길과 광희문에서 반얀트리 호텔까지의 길이 경사는 완만하지만 지속적인 오르막이 길게 이어져 있어 힘도 들고 지루한 느낌이 들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계 방향보다는 반시계 방향이 걷기에는 좀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왕산에서 남산을 바라보며 내려올 때 보이는 장쾌한 풍경을 즐기기 위해서도 이 방향이 좋아 보입니다.
그리고 월요일은 반드시 피하시기 바랍니다. 북악산과 인왕산은 매주 월요일에는 입산이 금지된답니다. 이 역시 경비구역인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처음에 멋모르고 모처럼 월요일에 휴가까지 내고 도성 순성을 시도했다가, 대참사를 겪고 말았습니다. 남산부터 시작해 낙산을 지나 북악산 중턱 말바위 안내소까지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굳게 닫힌 성곽 길을 확인하게 되었거든요. 휴가까지 내고 왔는데 여기서 그대로 포기할 순 없어 바로 삼청공원 쪽으로 하산해서 삼청동 길과 청와대 앞길을 통과해 북악산을 건너뛰고 인왕산 등정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인왕산 입구에 다다라, 역시 눈 앞에 가로막힌 등산로를 어찌할 수 없어 일정을 도중에 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꼭 미리 입산금지 여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북악산에 갈 때는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는 사실도요.
대부분의 성곽길은 탐방로가 거의 한 길로 정해져 있지만, 외성길과 내성길이라는 표현으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구간도 있습니다. 외성길은 성곽 바깥으로 난 길을, 내성길은 성곽 안쪽으로 난 길을 말하는데요, 성곽 안쪽에서 그 바깥의 풍경을 내다보는 것도 좋지만 저의 경우 높다란 성곽 자체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외성길이 보다 매력적이었습니다.
위 사진은 동대문에서 낙산을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표지판인데요, 이 구간은 외성길보다는 내성길로 가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멋없는 축대를 사이에 두고 성곽이 외성길과는 약간 떨어져 있어 성곽을 감상하기가 그다지 편리하지 않고, 조금 올라가다 보면 벽화마을로 유명한 이화마을이 성곽 안쪽에 자리 잡고 있어 이 마을을 구경하기 위해서도 내성길이 보다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낙산 중턱에 있는 이화마을부터 정상부에 있는 낙산공원까지도 마찬가지로 내성길을 따라 그대로 올라간 후, 아래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낙산공원의 암문을 통해 외성길로 빠져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래 사진과 같이 외성길을 따라 낙산 구간의 하이라이트를 만날 수 있습니다.
또 인왕산에서 내성길을 따라 강북삼성병원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중간에 차도, 즉 인왕산 자락길을 만나게 되는데요, 여기서도 외성길에 접어들 수 있습니다. 즉, 이 차도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아래 사진과 같이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는 나무계단을 볼 수 있고, 이 계단으로 내려가면 외성길을 따라 성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남산 구간에서도 멋진 외성길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남산타워가 있는 정상에서 국립극장 방향으로 조금 내려오면 넓은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요, 여기 있는 세븐일레븐 편의점을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왼쪽으로 난 샛길로 가보시지요. 아래 사진이 역광에서 찍은 거라 잘 안 보이실 텐데, 오른쪽 건물이 세븐일레븐이 있는 건물이고 그 왼쪽 옆에 밑으로 내려가는 나무계단이 있습니다.
그러면 아래 사진과 같은 아름다운 외성길이 아름드리 소나무 숲과 함께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 길에서는 주로 태조 시대에 처음 도성을 쌓았을 때의 성곽을 만날 수 있는데요, 아래 사진과 같은 '각자석'도 볼 수 있습니다. 성곽 아랫 부분에 하나씩 끼워져 있는데, 이 구간 공사 감독자의 실명이 적힌 돌입니다.
짧지만 조용하고 걷기 좋은 길이 끝나면 관광버스들이 관광객들을 실어나르는 차도가 다시 나오면서 일단 성곽길이 끊깁니다. 이때 주의하셔야 하는 게, 차도를 따라 그냥 내려 가시거나 아래 사진과 같이 저 멀리 성곽 끝에 보이는 철탑 쪽으로 가시면 안 되구요, 더 아래 사진과 같이 다시 남산타워를 바라보고 위쪽으로 100미터 정도 올라가셔야 합니다. 그러면 오른쪽에 다시 순성길이 기다리고 있을 거구요.
마냥 걷는 데만 집중하느라, 순성길 중간중간에 있는 볼거리를 놓치시면 안 됩니다. 몇 가지 볼거리를 말씀드리지요.
광희문에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거쳐 동대문으로 가실 때, 반드시 디자인플라자 앞쪽이 아니라 뒷쪽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정확히 말하면 서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가시라는 얘기입니다. 서쪽으로 가면 동대문만 바라보고 가다 자칫 이간수문을 못 보고 지나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간수문은 수십년 동안 동대문운동장 밑에 묻혀 있다가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되면서 비로소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청계천 지류가 도성 성곽 밑을 통과하는 문입니다. 이간수문은 아치가 두 개 뿐이지만, 청계천 본류가 성곽을 통과하는 문은 아치가 다섯 개, 즉 오간수문이라고 하지요.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실제 보시면 훨씬 더 웅장하고 우직스런 매력이 있습니다. 저는 이간수문을 처음 보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왔었는데요, 마치 영화 '퍼시픽 림'에 나오는, 단순무식 돌쇠처럼 생겨서 오히려 매력적인 로봇 '체르노 알파'를 보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혜화문을 내려오자마자 현재 명칭은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인 옛 서울시장 공관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유서깊은 2층 단독주택이고, 한양도성 순성에 대한 역사도 잠시 배울 수 있는 공간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건물이 도성 성곽을 축대 겸 담으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곽 살짝 안쪽에 위치해 있는 셈이지요.
아래 사진은 혜화문에서 내려오자마자 볼 수 있는 모습인데요, 이 축대 위에 옛 서울시장 공관이 얹어져 있습니다. 이 공관을 방문하려면 왼쪽으로 가시면 되고, 방문을 마치고 다시 북악산 방향으로 길을 가시려면 이곳으로 되돌아와 사진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시면 됩니다.
또 인왕산에서 남대문 방향으로 내려오면, 아래 사진과 같이 홍난파 선생이 살던 집도 방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주말엔 이곳도 쉬네요. 밖에서만 봐도 이쁩니다.
이렇게 긴 도성을 한 바퀴 돌려면 도중에 식사도 한번쯤 하셔야겠죠. 가급적 시간 절약, 다리품 절약을 위해 순성길에서 가까운 곳이 좋겠구요.
제가 이용해 본 곳은, 창의문 바로 밑에 위치한 '자하손만두'(원래 유명한 곳이기도 했지만 미슐랭 가이드 빕구르망 편 선정으로 다시금 유명세를 떨쳤죠), 광희문 근처에 위치한 '장충동 평양면옥'(유명한 평양냉면 계열 중 장충동 계열을 대표하는 곳이죠)입니다.
마지막으로, 제 결론은 "한양도성을 하루에 전부 다 도는 것은 무리이다"입니다.
몸도 많이 힘들지만, 마음도 많이 바쁜 일정입니다. 북악산, 인왕산, 남산 구간은 그냥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등산과 똑같기 때문에 평소 등산을 안 하시는 분들에겐 힘만 드는 일정일 수 있습니다.
등산이 그다지 썩 내키지 않는 분들을 위해 제가 적당한 코스를 추천해드릴까 합니다.
바로 반얀트리 호텔부터 시작해서 광희문과 동대문을 거쳐 낙산에 올랐다 혜화문을 지나 옛 서울시장 공관에서 마무리하는 코스입니다. 이 코스는 내리막이 많아 그다지 힘들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모양의 성곽이 남아있고 멀리 보이는 장대한 북한산 봉우리들과 조용한 주택가 풍경을 계속 볼 수 있는 명품 구간입니다. 한 마디로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저도 등산이라면 딱 질색을 하는 가족들과 조만간 꼭 다시 가볼까 합니다.
반얀트리 호텔이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엔 좀 불편하니, 조금 더 욕심을 내서 남산을 케이블카나 버스를 타고 올라간 다음 성곽길을 따라 걸어내려와 반얀트리 호텔을 만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습니다.
모쪼록 모두들 헛걸음하지 않고 즐거운 순성놀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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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서울엔 산길과 동네길이 이어지며 풍경과 역사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한양도성 순성길'로, 서울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한양도성 성곽을 한 바퀴 도는 길입니다. 도성 성곽이 남대문, 남산, 동대문, 낙산, 혜화문, 북악산, 인왕산을 오르락내리락 죽 연결하고 있는데, 전체 길이가 18.6km 정도라고 합니다. 성곽의 많은 부분이 일제시대에 헐렸지만, 그동안 상당 부분을 복원해 오면서 현재 13km 정도 길이의 성곽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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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eoulcitywall.seoul.go.kr/front/kor/sub02/sub0205.do] |
조선시대부터 이 도성을 한 바퀴 도는 것을 '순성놀이'라고 하며 즐겼다고 하기에, 저도 한번 시도해 보았습니다. 제가 하루에 한꺼번에 돌아보니 잠시 밥 먹고 쉬는 시간까지 합해 7시간 반 정도가 걸리더군요. 바로 어제 두 번째 만의 도전 끝에 하루 한 바퀴의 순성놀이에 성공하였는데요, 처음 순성놀이를 시도했을 때는 여러 실수를 거듭하는 바람에 이걸 제대로 마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게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입니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서울 한양도성' 홈페이지에서 한양도성 순성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의 여러 경험담과 후기들을 통해서도 역시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구요. 그런데도 까딱 잘못하면 순성을 아예 진행하지 못하거나 즐길거리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혹시 저처럼 순간의 실수로 이 좋은 여행에 펑크를 낼 분이 계실지 몰라, 제 실수담을 토대로 꼭 유의해야 할 내용만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유의사항 외에 위 '서울 한양도성' 홈페이지에서 코스 전체의 정보도 꼭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출발하기 전에 스마트폰에 서울시에서 만든 '한양도성' 앱을 설치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앱에는 여러 기능이 있지만, 무엇보다 지도 보기 기능이 매우 유용합니다. 길이 애매한 곳, 특히 성곽이 복원되지 않은 시내 구간의 경우 갈림길을 만나 어디로 가야 할지 애매한 경우가 많은데요, 이 앱의 지도를 불러서 자신이 있는 위치와 본래의 진행로를 알 수 있습니다. 순성길 여기저기에 있는 볼거리를 놓치지 않고 확인할 수도 있구요. 아, 증강현실 기능도 있던데, 이건 안 써 봤네요.
위 그림이 이 앱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간략한 지도인데, 이걸로 갈 길을 잘 모르겠다 싶으면 위 그림 왼쪽 아래에 있는 까맣고 둥근 버튼을 눌러 보세요. 아래 그림과 같이 네이버 지도에 그려진 더 자세한 순성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혹시 이 앱을 켜서 지도 보기가 귀찮으시면, 사방을 잘 둘러보시지요. 아래와 같은 표지판들이 여기저기 잘 설치되어 있답니다.
특히, 시내 구간의 바닥을 잘 보시면 아래 사진과 같은 표지가 보도블럭 사이사이에 박혀 있습니다. 이게 보이면 안심하고 그 길을 계속 가시면 됩니다.
인왕산에서 내려와 남대문을 향하는 길에 정동길을 통과하여야 하는데요, 지도를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성곽이 남아있지 않은 구간이라 요기가 약간 길이 헷갈릴 수 있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보시는 것처럼 왼쪽 아래에 있는 강북삼성병원 앞 횡단보도를 건너서 경향신문사를 지나 정동극장 앞 사거리에 도착하시면 바로 우회전하신 후, 배재학당 방향으로 다시 우회전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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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 방향으로 빨간 선을 따라가 보세요] |
순성놀이 계획을 잡을 때 어디서 출발하고, 또 어느 방향으로 돌면 좋을까요.
물론 출발점은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그리고 교통편이 편한 곳으로 잡으시면 될 텐데요, 그 외에 따져봐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북악산의 경우 청와대를 경비하는 구역이기 때문에 산 중턱에 있는 말바위 안내소에 오후 3시까지는 도착하여 신분증을 제시하고 통행표찰을 받으셔야 통과가 가능합니다. 어느 쪽에서 출발하든 이곳에 3시에는 도착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리고 도성 순성길은 기본적으로 북악산(342m), 인왕산(338m), 남산(262m), 낙산(125m) 등 네 군데의 산 정상을 넘나드는 코스인데, 이 중 북악산과 인왕산이 특히 급경사가 많아 등정이 만만찮습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오르기 수월한 남산과 낙산을 먼저 오른 다음 나중에 북악산과 인왕산을 넘으려면 꽤나 힘이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는 방향과 관련해서는, 저는 반시계 방향으로만 돌아봐서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창의문에서 북악산으로 오르는 길과 국립극장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길이 짧지만 경사가 매우 급한 편이고, 강북삼성병원에서 인왕산으로 오르는 길과 광희문에서 반얀트리 호텔까지의 길이 경사는 완만하지만 지속적인 오르막이 길게 이어져 있어 힘도 들고 지루한 느낌이 들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계 방향보다는 반시계 방향이 걷기에는 좀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왕산에서 남산을 바라보며 내려올 때 보이는 장쾌한 풍경을 즐기기 위해서도 이 방향이 좋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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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을 바라보며 인왕산을 내려오는 길. 한양도성 순성길 최고의 장관입니다] |
그리고 월요일은 반드시 피하시기 바랍니다. 북악산과 인왕산은 매주 월요일에는 입산이 금지된답니다. 이 역시 경비구역인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처음에 멋모르고 모처럼 월요일에 휴가까지 내고 도성 순성을 시도했다가, 대참사를 겪고 말았습니다. 남산부터 시작해 낙산을 지나 북악산 중턱 말바위 안내소까지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굳게 닫힌 성곽 길을 확인하게 되었거든요. 휴가까지 내고 왔는데 여기서 그대로 포기할 순 없어 바로 삼청공원 쪽으로 하산해서 삼청동 길과 청와대 앞길을 통과해 북악산을 건너뛰고 인왕산 등정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인왕산 입구에 다다라, 역시 눈 앞에 가로막힌 등산로를 어찌할 수 없어 일정을 도중에 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꼭 미리 입산금지 여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북악산에 갈 때는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는 사실도요.
대부분의 성곽길은 탐방로가 거의 한 길로 정해져 있지만, 외성길과 내성길이라는 표현으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구간도 있습니다. 외성길은 성곽 바깥으로 난 길을, 내성길은 성곽 안쪽으로 난 길을 말하는데요, 성곽 안쪽에서 그 바깥의 풍경을 내다보는 것도 좋지만 저의 경우 높다란 성곽 자체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외성길이 보다 매력적이었습니다.
위 사진은 동대문에서 낙산을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표지판인데요, 이 구간은 외성길보다는 내성길로 가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멋없는 축대를 사이에 두고 성곽이 외성길과는 약간 떨어져 있어 성곽을 감상하기가 그다지 편리하지 않고, 조금 올라가다 보면 벽화마을로 유명한 이화마을이 성곽 안쪽에 자리 잡고 있어 이 마을을 구경하기 위해서도 내성길이 보다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낙산 중턱에 있는 이화마을부터 정상부에 있는 낙산공원까지도 마찬가지로 내성길을 따라 그대로 올라간 후, 아래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낙산공원의 암문을 통해 외성길로 빠져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래 사진과 같이 외성길을 따라 낙산 구간의 하이라이트를 만날 수 있습니다.
또 인왕산에서 내성길을 따라 강북삼성병원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중간에 차도, 즉 인왕산 자락길을 만나게 되는데요, 여기서도 외성길에 접어들 수 있습니다. 즉, 이 차도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아래 사진과 같이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는 나무계단을 볼 수 있고, 이 계단으로 내려가면 외성길을 따라 성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남산 구간에서도 멋진 외성길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남산타워가 있는 정상에서 국립극장 방향으로 조금 내려오면 넓은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요, 여기 있는 세븐일레븐 편의점을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왼쪽으로 난 샛길로 가보시지요. 아래 사진이 역광에서 찍은 거라 잘 안 보이실 텐데, 오른쪽 건물이 세븐일레븐이 있는 건물이고 그 왼쪽 옆에 밑으로 내려가는 나무계단이 있습니다.
그러면 아래 사진과 같은 아름다운 외성길이 아름드리 소나무 숲과 함께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 길에서는 주로 태조 시대에 처음 도성을 쌓았을 때의 성곽을 만날 수 있는데요, 아래 사진과 같은 '각자석'도 볼 수 있습니다. 성곽 아랫 부분에 하나씩 끼워져 있는데, 이 구간 공사 감독자의 실명이 적힌 돌입니다.
짧지만 조용하고 걷기 좋은 길이 끝나면 관광버스들이 관광객들을 실어나르는 차도가 다시 나오면서 일단 성곽길이 끊깁니다. 이때 주의하셔야 하는 게, 차도를 따라 그냥 내려 가시거나 아래 사진과 같이 저 멀리 성곽 끝에 보이는 철탑 쪽으로 가시면 안 되구요, 더 아래 사진과 같이 다시 남산타워를 바라보고 위쪽으로 100미터 정도 올라가셔야 합니다. 그러면 오른쪽에 다시 순성길이 기다리고 있을 거구요.
마냥 걷는 데만 집중하느라, 순성길 중간중간에 있는 볼거리를 놓치시면 안 됩니다. 몇 가지 볼거리를 말씀드리지요.
광희문에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거쳐 동대문으로 가실 때, 반드시 디자인플라자 앞쪽이 아니라 뒷쪽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정확히 말하면 서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가시라는 얘기입니다. 서쪽으로 가면 동대문만 바라보고 가다 자칫 이간수문을 못 보고 지나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간수문은 수십년 동안 동대문운동장 밑에 묻혀 있다가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되면서 비로소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청계천 지류가 도성 성곽 밑을 통과하는 문입니다. 이간수문은 아치가 두 개 뿐이지만, 청계천 본류가 성곽을 통과하는 문은 아치가 다섯 개, 즉 오간수문이라고 하지요.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실제 보시면 훨씬 더 웅장하고 우직스런 매력이 있습니다. 저는 이간수문을 처음 보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왔었는데요, 마치 영화 '퍼시픽 림'에 나오는, 단순무식 돌쇠처럼 생겨서 오히려 매력적인 로봇 '체르노 알파'를 보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혜화문을 내려오자마자 현재 명칭은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인 옛 서울시장 공관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유서깊은 2층 단독주택이고, 한양도성 순성에 대한 역사도 잠시 배울 수 있는 공간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건물이 도성 성곽을 축대 겸 담으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곽 살짝 안쪽에 위치해 있는 셈이지요.
아래 사진은 혜화문에서 내려오자마자 볼 수 있는 모습인데요, 이 축대 위에 옛 서울시장 공관이 얹어져 있습니다. 이 공관을 방문하려면 왼쪽으로 가시면 되고, 방문을 마치고 다시 북악산 방향으로 길을 가시려면 이곳으로 되돌아와 사진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시면 됩니다.
또 인왕산에서 남대문 방향으로 내려오면, 아래 사진과 같이 홍난파 선생이 살던 집도 방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주말엔 이곳도 쉬네요. 밖에서만 봐도 이쁩니다.
이렇게 긴 도성을 한 바퀴 돌려면 도중에 식사도 한번쯤 하셔야겠죠. 가급적 시간 절약, 다리품 절약을 위해 순성길에서 가까운 곳이 좋겠구요.
제가 이용해 본 곳은, 창의문 바로 밑에 위치한 '자하손만두'(원래 유명한 곳이기도 했지만 미슐랭 가이드 빕구르망 편 선정으로 다시금 유명세를 떨쳤죠), 광희문 근처에 위치한 '장충동 평양면옥'(유명한 평양냉면 계열 중 장충동 계열을 대표하는 곳이죠)입니다.
마지막으로, 제 결론은 "한양도성을 하루에 전부 다 도는 것은 무리이다"입니다.
몸도 많이 힘들지만, 마음도 많이 바쁜 일정입니다. 북악산, 인왕산, 남산 구간은 그냥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등산과 똑같기 때문에 평소 등산을 안 하시는 분들에겐 힘만 드는 일정일 수 있습니다.
등산이 그다지 썩 내키지 않는 분들을 위해 제가 적당한 코스를 추천해드릴까 합니다.
바로 반얀트리 호텔부터 시작해서 광희문과 동대문을 거쳐 낙산에 올랐다 혜화문을 지나 옛 서울시장 공관에서 마무리하는 코스입니다. 이 코스는 내리막이 많아 그다지 힘들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모양의 성곽이 남아있고 멀리 보이는 장대한 북한산 봉우리들과 조용한 주택가 풍경을 계속 볼 수 있는 명품 구간입니다. 한 마디로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저도 등산이라면 딱 질색을 하는 가족들과 조만간 꼭 다시 가볼까 합니다.
반얀트리 호텔이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엔 좀 불편하니, 조금 더 욕심을 내서 남산을 케이블카나 버스를 타고 올라간 다음 성곽길을 따라 걸어내려와 반얀트리 호텔을 만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습니다.
| [오른쪽 파란색 선으로 표시한 길이 제 추천 코스입니다] |
모쪼록 모두들 헛걸음하지 않고 즐거운 순성놀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3년 8월 25일 일요일
프랑스 검찰 'Parquet' 용어의 기원
그동안 프랑스 검찰을 지칭하는 용어인 'Parquet'의 기원에 대한 국내문헌의 통설은 이러했습니다.
[검사의 전신인 왕의 대관이 법정에서 재판장이 있는 단상 밑 마룻바닥(Parquet)에서 선 채로 변론을 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오늘날 검찰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런데 최근 읽은 [김영식, 프랑스 검사제도의 형성과 그 시사점, 한국프랑스학논집 제78집, 2012. 5.]에 의하면 Parquet의 유래는 이렇다고 합니다.
[법정에서 왕의 대관과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가 병존하기 시작했을 때는 재판정 바닥에 마룻바닥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던 시대이고, Parquet란 용어가 마룻바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중세 이 용어는 Parquet 또는 Parchet란 형태로 단순히 말뚝 울타리나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의 땅을 의미하였다. 즉, 이 용어는 중세에 어떠한 법적인 개념을 내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6세기에 들어 이 용어가 ‘재판이 진행되는 폐쇄된 공간 전체’ 즉, 법정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17세기 Parquet란 용어는 이전의 개념들을 모두 포함하면서 새로이 건조물의 방(方), 실(室)의 바닥을 덮는 판자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 후 법원에서 왕의 대관들이 모이던 장소를 특정하여 Parquet라고 부르다가 18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Parquet란 용어가 특정하여 왕의 대관을 지칭하는 용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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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의 전신인 왕의 대관이 법정에서 재판장이 있는 단상 밑 마룻바닥(Parquet)에서 선 채로 변론을 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오늘날 검찰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런데 최근 읽은 [김영식, 프랑스 검사제도의 형성과 그 시사점, 한국프랑스학논집 제78집, 2012. 5.]에 의하면 Parquet의 유래는 이렇다고 합니다.
[법정에서 왕의 대관과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가 병존하기 시작했을 때는 재판정 바닥에 마룻바닥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던 시대이고, Parquet란 용어가 마룻바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중세 이 용어는 Parquet 또는 Parchet란 형태로 단순히 말뚝 울타리나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의 땅을 의미하였다. 즉, 이 용어는 중세에 어떠한 법적인 개념을 내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6세기에 들어 이 용어가 ‘재판이 진행되는 폐쇄된 공간 전체’ 즉, 법정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17세기 Parquet란 용어는 이전의 개념들을 모두 포함하면서 새로이 건조물의 방(方), 실(室)의 바닥을 덮는 판자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 후 법원에서 왕의 대관들이 모이던 장소를 특정하여 Parquet라고 부르다가 18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Parquet란 용어가 특정하여 왕의 대관을 지칭하는 용어가 된 것이다.]
2013년 8월 11일 일요일
[독서일기] 서울, 건축의 도시를 걷다
(딸애의 독서신문 숙제 때문에 적어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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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건축의 도시를 걷다』
지오 아빠
아빠의 사랑스런 딸 지오야.
너 요새는 주로 만화책만 읽는 것 같던데, 아빠가 책 읽는 거 보면서 반성 좀 하여라.
이번 여름방학에는 아빠 때문에 서울 여기저기를 끌려 다니며 돌아다니느라 고생 많았지?
음, 어디를 가봤더라, 청계천을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봤고, 아름다운 정동길을 죽 따라 걸으며 덕수궁, 서울시립미술관, 중명전, 정동제일교회, 옛 러시아 공사관, 옛 배재학당 등 멋진 건물들을 보기도 하였구나.
아빠는 서울의 역사, 거리, 명소, 건축물들에 대한 책이 재미있어 많이 읽는 편인데, 그런 책들에 나오는 멋진 장소와 건축물들을 너와 함께 보고 싶어 이번 방학 때 그리 고생을 시킨 것이었단다.
너는 다리가 아프기만 하고, 재미는 없고, 거기다 날씨까지 무척 더워 힘들기만 하였지? 그래도 나중에 네가 커서 아빠가 읽었던 책들을 읽고 이번에 가보았던 곳을 다시 가본다면, 이번 방학의 추억들이 떠오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좋은 공부를 하게 되는 유쾌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란다.
그럼 이제 우리 다음 방학 때는 어디어디를 돌아다니며 또 좋은 시간을 가질지 지금부터 함께 의논하기로 하자꾸나, 요잇!!!
2011년 8월 26일 금요일
[독서일기] 서울은 깊다
2008년 돌베개 출판사에서 나온 책입니다. "서울은 깊다". 서울의 역사를 구한말 시절에 촬영된 여러 사진을 감상하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속표지를 보니 저자 전우용님은 저의 같은 대학 과 선배님이시군요. 사진을 보니 뵌 적이 있는 분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트위터에서는 가끔 뵌 적이 있습니다.
요새는 책을 차분히 정독하지 못하고 후다닥 훑어보고 마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아이패드에 읽어야 할 자료들이 갈수록 쌓여만 가고, 이제 대학원 방학도 끝나가니 다음 학기 발표문 준비도 슬슬 시작해야 하고, 11월에 있을 학회 발표문도 준비해야 해서, 공연히 마음이 급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읽을거리가 넘쳐나서 행복하기도 한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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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표지를 보니 저자 전우용님은 저의 같은 대학 과 선배님이시군요. 사진을 보니 뵌 적이 있는 분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트위터에서는 가끔 뵌 적이 있습니다.
요새는 책을 차분히 정독하지 못하고 후다닥 훑어보고 마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아이패드에 읽어야 할 자료들이 갈수록 쌓여만 가고, 이제 대학원 방학도 끝나가니 다음 학기 발표문 준비도 슬슬 시작해야 하고, 11월에 있을 학회 발표문도 준비해야 해서, 공연히 마음이 급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읽을거리가 넘쳐나서 행복하기도 한 요즘입니다.
2011년 8월 25일 목요일
[독서일기] 황제의 특사 이준
"황제의 특사 이준", 2011. 7. 문이당에서 출간된 책으로, 임무영님과 한영희님 부부가 쓰신 장편소설입니다.
우리는 이준 열사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순국, 고종황제, 이상설, 이위종 등의 단어와 교차되는 분으로 대부분 알고 있죠. 그런데, 이 책에서는 여기에 '검사'라는 단어를 하나 더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준 열사는 구한말 근대사법제도를 도입하면서 초창기 검사로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이준 열사의 검사로서의 활약상에 대해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다만, 국운이 날로 위태로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던 당시의 어려운 상황에서 낯선 근대사법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였을 리 없고, 이준 열사가 검사로 활동한 기간이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설속 주인공에게 검사로서의 자의식을 다소 과하게 부여한 것이 옥에 티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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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준 열사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순국, 고종황제, 이상설, 이위종 등의 단어와 교차되는 분으로 대부분 알고 있죠. 그런데, 이 책에서는 여기에 '검사'라는 단어를 하나 더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준 열사는 구한말 근대사법제도를 도입하면서 초창기 검사로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이준 열사의 검사로서의 활약상에 대해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다만, 국운이 날로 위태로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던 당시의 어려운 상황에서 낯선 근대사법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였을 리 없고, 이준 열사가 검사로 활동한 기간이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설속 주인공에게 검사로서의 자의식을 다소 과하게 부여한 것이 옥에 티가 아닌가 싶습니다.
2011년 7월 31일 일요일
[독서일기] 서울, 건축의 도시를 걷다
이번 책은 인물과 사상사에서 펴낸 임석재 저 '서울, 건축의 도시를 걷다'입니다.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서울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는 역사적으로 의미있거나 건축양식적으로 특이한 건축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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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비시 신드롬
600페이지 가까운 분량 때문에 다 읽느라 좀 힘들었던 책입니다. 결국 나중엔 주마간산격으로 대충대충 읽어버렸네요.
이번 책은 2006년에 휴머니스트라는 출판사에서 발간한 Henry Rousso의 '비시 신드롬'입니다.
원제는 'Le syndrome de Vichy de 1944 a nos jour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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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은 2006년에 휴머니스트라는 출판사에서 발간한 Henry Rousso의 '비시 신드롬'입니다.
원제는 'Le syndrome de Vichy de 1944 a nos jours'입니다.
2011년 5월 25일 수요일
[독서일기]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오랜만에 [독서일기] 포스팅을 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밤 11시 반 사무실, 대기할 일이 있어 피곤한 눈으로 구글리더를 읽고 있다가 그저께 쓰려다 못 쓴 글이나 쓰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마음놓고 읽을 수 있는 때가 그나마 출퇴근길 지하철에서인데, 요즘같이 하루에 서너시간 자고 버티는 상황에서는 지하철을 타면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수면모드로 들어서기 때문에, 책 읽는 진도가 잘 나가지 않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책이, 이용주라는 서양사 연구자가 쓰신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역사비평사)이라는 책입니다.
원래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해 워낙 관심이 많기도 하지만, 그 나라의 역사 중 특히 1940년부터 1944년 사이의 독일 강점기 시절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욕심이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오랜 세월 강대국의 지위를 누려온 터라 다른 어느 나라 국민들보다 자존심 세고 독일에 대해서는 훨씬 우월감을 갖고 있었을 프랑스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독일에 항복하고, 그리고 무려 5년이나 독일의 점령을 받고 있었다는 게, 그리 잘 상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점령을 당하고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비시정부라는 친독정부가 수립되어 독일에 협력하기도 하고, 독일에 아부를 하기도 하고, 독일을 추종하기까지 했다니요, 프랑스 사람들이 말이에요.
프랑스 사람이 아닌 저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정작 프랑스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겠지요. 그래서 해방 직후 독일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에도 적극 나섰고, 그 결과 지금 우리에게 롤모델이 되어 저런 책도 출간되고 하는 것이겠지요.
저자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해방 이후 프랑스에서 부역자 숙청작업이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쉽게 생각하듯이 이상적으로만,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진행된 것도 사실은 아니라고 합니다.
독일 패망 직전, 레지스탕스와의 전투과정에서 사망하거나 처형된 사람들, 해방 직후 약식재판이라는 법외적 방식으로 처형된 사람들도 모두 과거사 청산 개념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해방 후 본격적으로 부역자들에 대한 재판을 담당할 특별법원들이 구성되어 숙청작업이 진행되었는데, 광범위한 범위의 부역자들을 대상으로 수사나 재판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부역자숙청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비시정부의 패탱 원수와 라발 총리에 대한 재판이었는데, 패탱 원수는 사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용되어 있다가 고령으로 사망하였고, 라발은 사형을 선고받고 곧바로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합니다.
부역자숙청 과정에서 언론인이나 문인, 경찰관 등 그 부역의 증거가 뚜렷한 사람들이 쉽게 처벌을 받은 반면, 정작 큰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공무원이나 기업인 등은 오히려 부역사실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아 법망을 벗어나는 일도 많았고, 이에 공정성 논란이나 숙청작업의 효용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실제로 행위를 한 말단직원은 범죄를 입증하기 쉬워도, 그에게 범죄를 지시한 윗사람은 입증이 쉽지 않은 경우와 매한가지지요.
그래서 해방 직후 처음 얼마간은 부역자처벌에 대한 열기가 거셌다가, 곧 숙청작업에 대한 회의나 실망감으로 그 열기가 급속히 식어갔다고 합니다. 프랑승에서도 역시 과거사 청산작업이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해방 후 수십년이 지나면서 국내법에 의한 부역행위의 공소시효는 모두 지났지만, 가끔씩 언론의 발굴보도로 새로운 부역자들이 발견되면서 이를 국제법상의 '반인륜범죄'로 의율하여 기소하여 재판이 열리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반인륜범죄라는 것은 유대인 학살행위를 공소시효 없는 범죄로 규정한 것이라고 하는데, 유대인 학살행위와의 연관성이 입증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처벌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간간이 반인륜범죄 재판이 열려 독일 강점기의 기억이 다시금 사회적 이슈가 되고, 국민적 관심을 받고 그랬다는군요.
다만, 이제는 2차 세계대전도 워낙 오래된 옛날 이야기가 되고 보니, 학살행위에 가담했던 대부분의 사람이 사망하거나 곧 사망을 앞둔 상태인지라, 더 이상의 부역행위자에 대한 재판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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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밤 11시 반 사무실, 대기할 일이 있어 피곤한 눈으로 구글리더를 읽고 있다가 그저께 쓰려다 못 쓴 글이나 쓰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마음놓고 읽을 수 있는 때가 그나마 출퇴근길 지하철에서인데, 요즘같이 하루에 서너시간 자고 버티는 상황에서는 지하철을 타면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수면모드로 들어서기 때문에, 책 읽는 진도가 잘 나가지 않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책이, 이용주라는 서양사 연구자가 쓰신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역사비평사)이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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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장면으로 보이는 사진의 표지인물은 비시정부의 총리였던 삐에르 라발이라고 합니다] |
유럽에서 오랜 세월 강대국의 지위를 누려온 터라 다른 어느 나라 국민들보다 자존심 세고 독일에 대해서는 훨씬 우월감을 갖고 있었을 프랑스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독일에 항복하고, 그리고 무려 5년이나 독일의 점령을 받고 있었다는 게, 그리 잘 상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점령을 당하고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비시정부라는 친독정부가 수립되어 독일에 협력하기도 하고, 독일에 아부를 하기도 하고, 독일을 추종하기까지 했다니요, 프랑스 사람들이 말이에요.
프랑스 사람이 아닌 저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정작 프랑스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겠지요. 그래서 해방 직후 독일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에도 적극 나섰고, 그 결과 지금 우리에게 롤모델이 되어 저런 책도 출간되고 하는 것이겠지요.
저자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해방 이후 프랑스에서 부역자 숙청작업이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쉽게 생각하듯이 이상적으로만,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진행된 것도 사실은 아니라고 합니다.
독일 패망 직전, 레지스탕스와의 전투과정에서 사망하거나 처형된 사람들, 해방 직후 약식재판이라는 법외적 방식으로 처형된 사람들도 모두 과거사 청산 개념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해방 후 본격적으로 부역자들에 대한 재판을 담당할 특별법원들이 구성되어 숙청작업이 진행되었는데, 광범위한 범위의 부역자들을 대상으로 수사나 재판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부역자숙청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비시정부의 패탱 원수와 라발 총리에 대한 재판이었는데, 패탱 원수는 사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용되어 있다가 고령으로 사망하였고, 라발은 사형을 선고받고 곧바로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합니다.
부역자숙청 과정에서 언론인이나 문인, 경찰관 등 그 부역의 증거가 뚜렷한 사람들이 쉽게 처벌을 받은 반면, 정작 큰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공무원이나 기업인 등은 오히려 부역사실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아 법망을 벗어나는 일도 많았고, 이에 공정성 논란이나 숙청작업의 효용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실제로 행위를 한 말단직원은 범죄를 입증하기 쉬워도, 그에게 범죄를 지시한 윗사람은 입증이 쉽지 않은 경우와 매한가지지요.
그래서 해방 직후 처음 얼마간은 부역자처벌에 대한 열기가 거셌다가, 곧 숙청작업에 대한 회의나 실망감으로 그 열기가 급속히 식어갔다고 합니다. 프랑승에서도 역시 과거사 청산작업이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해방 후 수십년이 지나면서 국내법에 의한 부역행위의 공소시효는 모두 지났지만, 가끔씩 언론의 발굴보도로 새로운 부역자들이 발견되면서 이를 국제법상의 '반인륜범죄'로 의율하여 기소하여 재판이 열리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반인륜범죄라는 것은 유대인 학살행위를 공소시효 없는 범죄로 규정한 것이라고 하는데, 유대인 학살행위와의 연관성이 입증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처벌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간간이 반인륜범죄 재판이 열려 독일 강점기의 기억이 다시금 사회적 이슈가 되고, 국민적 관심을 받고 그랬다는군요.
다만, 이제는 2차 세계대전도 워낙 오래된 옛날 이야기가 되고 보니, 학살행위에 가담했던 대부분의 사람이 사망하거나 곧 사망을 앞둔 상태인지라, 더 이상의 부역행위자에 대한 재판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1년 3월 18일 금요일
[독서일기] 조선의 힘
오랜만에 읽은 역사책입니다.
"조선의 힘", 오항녕 지음, 역사비평사
역사비평사의 역사책은 왠지 신뢰가 갑니다. 재미도 있고 시사성도 있고, 아무튼 좋은 출판사입니다. 간만에 좋은 역사책을 읽었습니다.
오항녕이라는 분은 처음 보는 분인데, 역사공부의 깊이가 대단하다는 게 글 자체에서 느껴집니다. 한겨레에 역사칼럼을 연재하는 이덕일씨의 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데, 굉장히 공부가 많이 되어 있는 분입니다. 역사공부가 아무나 함부로 아마추어틱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여실히 보여줍니다.
지은이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우리가 흔히 사대주의, 당쟁, 봉건, 전근대적 등등의 부정적인 어휘로 쉽게 폄하할 수 있는, 이분법적 사고(식민주의 사관 대 민족주의 사관)만으로 쉽게 재단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논쟁이 살아있고, 건강한 상식이 살아있고, 견고한 시스템이 잘 마련되어 있는, 어쩌면 앞으로 우리가 충분히 바람직한 롤모델로 삼을 수 있는 나라였다고 말합니다.
또 지은이는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 대동법, 성리학, 당쟁, 단종과 사육신, 광해군에 대한 오해 등등을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해 나갑니다.
특히, 이제까지 모르고 있던, 단종의 복위과정, 광해군의 폭정과 중립외교의 허상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책의 첫 단원에서 지은이가 든 조선 문치주의의 세 가지 시스템도 인상적입니다. 언관, 사관, 경연관.
언관은 임금에게 간하는 것으로, 사관은 임금과 나라의 일상을 역사로 남기는 것으로, 경연관은 임금과 하루 세번 토론하는 것으로, 조선이 건강성과 합리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역할을 각각 담당하였다고 합니다.
이 책을 읽다보니, 조선 역사의 1차 사료로서 우리에게 넉넉히 남아있는 조선왕조실록을 꼭 완독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런 생생하고 엄청난 사료를 우리에게 남겨준 조선의 힘을 한번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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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힘", 오항녕 지음, 역사비평사
역사비평사의 역사책은 왠지 신뢰가 갑니다. 재미도 있고 시사성도 있고, 아무튼 좋은 출판사입니다. 간만에 좋은 역사책을 읽었습니다.
오항녕이라는 분은 처음 보는 분인데, 역사공부의 깊이가 대단하다는 게 글 자체에서 느껴집니다. 한겨레에 역사칼럼을 연재하는 이덕일씨의 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데, 굉장히 공부가 많이 되어 있는 분입니다. 역사공부가 아무나 함부로 아마추어틱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여실히 보여줍니다.
지은이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우리가 흔히 사대주의, 당쟁, 봉건, 전근대적 등등의 부정적인 어휘로 쉽게 폄하할 수 있는, 이분법적 사고(식민주의 사관 대 민족주의 사관)만으로 쉽게 재단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논쟁이 살아있고, 건강한 상식이 살아있고, 견고한 시스템이 잘 마련되어 있는, 어쩌면 앞으로 우리가 충분히 바람직한 롤모델로 삼을 수 있는 나라였다고 말합니다.
또 지은이는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 대동법, 성리학, 당쟁, 단종과 사육신, 광해군에 대한 오해 등등을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해 나갑니다.
특히, 이제까지 모르고 있던, 단종의 복위과정, 광해군의 폭정과 중립외교의 허상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책의 첫 단원에서 지은이가 든 조선 문치주의의 세 가지 시스템도 인상적입니다. 언관, 사관, 경연관.
언관은 임금에게 간하는 것으로, 사관은 임금과 나라의 일상을 역사로 남기는 것으로, 경연관은 임금과 하루 세번 토론하는 것으로, 조선이 건강성과 합리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역할을 각각 담당하였다고 합니다.
이 책을 읽다보니, 조선 역사의 1차 사료로서 우리에게 넉넉히 남아있는 조선왕조실록을 꼭 완독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런 생생하고 엄청난 사료를 우리에게 남겨준 조선의 힘을 한번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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