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8일 토요일
프랑스 판결정보 Open Data 소식
이 블로그의 2019년 4월 15일자 "프랑스 대법원과 전국변호사협회의 Open Data 공동성명" 글의 후속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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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2019년 3월 25일 프랑스 대법원과 전국변호사협회가 판결정보 공개 추진을 위해 협력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는 내용입니다.
2019년 12월 13일자 프랑스 법무부 홈페이지의 글 "Projet de décret relatif à l’open data des décisions de justice(판결정보의 오픈 데이터에 관한 총리령 안)"에 의하면, 법무부의 주도로 판결정보 공개를 위한 총리령이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법원은 일반적인 사법법원 외에, 행정법원이 별도로 조직되어 있는데, 이번 판결정보 공개정책은 사법법원과 행정법원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http://www.justice.gouv.fr/le-ministere-de-la-justice-10017/projet-de-decret-relatif-a-lopen-data-des-decisions-de-justice-32835.html] |
이 총리령 안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2019년 12월 2일자 Dalloz actualité 사이트의 "Open data des décisions de justice : le projet de décret(판결정보의 오픈 데이터 : 총리령 안)"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 일단 자료 수집 차원에서 요 정도만 적어 놓습니다.
2019년 12월 25일 수요일
[독서일기] 파기환송 (feat. 플리바기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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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iMagistrat
시간:
12/25/2019 12:15: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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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하는 책은 마이클 코넬리의 미키 할러 변호사 시리즈 중 세 번째 작품, ‘파기환송(The Reversal)'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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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파기환송'에서 플리바기닝이 활약하는 장면 소개는 요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위 사건의 결말은 정확히 소개되지 않은 채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지만, 할러 변호사가 검사의 제안을 1년형으로 더 깎으면서 플리바기닝에 성공하는 듯한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작품에서 미키 할러 변호사는 총기 상해범죄 피고인을 위한 플리바기닝을 시도하였고, 다음 작품 '다섯 번째 증인'에서는 살인범죄 피고인을 위한 플리바기닝을 시도하였습니다. 이런 사건은 피해자가 존재하는 강력 사건인데요, 우리나라라면 이런 류의 사건에서 플리바기닝을 한다는 것은 최소한 검사 입장에선 쉽지 않아 보입니다. 범인임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가해자가 수사기관에 잡혀있기까지 한 상황인데, 증거가 좀 부족하다고 해서, 무죄판결 가능성이 좀 있다고 해서 가벼운 죄로만 살짝 처벌하고 만다는 것은 누구도 수긍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중범죄인을 봐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수사기관은 어떻게 해서든 중범죄인일수록 법정에 세우려고 기를 쓰게 마련입니다. 수사기관이라도 그렇게 안 하면 불쌍한 피해자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요?
게다가 이런 류의 강력 사건은, 수사가 아주 어렵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잘하면 범인을 잡아낼 가능성이 꽤 있습니다. 왜냐하면 강력 사건은 눈에 보이는 범행현장이 있고, 확실한 피해자가 있고, 세상이 좋아져서 지문 감식이나 DNA 감정과 같은 과학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동네 여기저기에 설치되어 있는 CCTV에 범인의 단서가 포착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긴 세월 오리무중이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도 결국에는 범인이 잡히고야 말지 않습니까?
이런 류의 강력 사건 말고, 정작 플리바기닝이 필요하거나 적절한 사건은 따로 있습니다.
우선은, 범죄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자가 없는 사건이 좋겠습니다. 피해자의 피해감정을 해하면서까지 국가가 범인에게 혜택을 부여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론, 수사가 정말로 쉽지 않은 성격의 사건입니다. 예를 들어, 화이트칼라 사건, 기업 비리 사건, 금융경제 사건, 뇌물 사건, 조직범죄 사건, 마약 사건, 테러 사건, 보이스피싱 사건 같은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사건의 특징은, 가담자들이 다수인데 범죄가 은밀히 이루어지는데다 직접적인 피해자가 없고 범죄자나 그 관련자 모두 서로 win-win 하는 성격의 사건이어서 적발이 쉽지 않고, 어쩌다 잡힌 가담자가 나는 잘 모르는 일이라며 입을 닫아버리면 증거수집도 쉽지 않고 더 이상 윗선으로 올라갈 수 없어 주동자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된다는 점입니다.
즉, 이런 사건은 적발과 증거수집을 위해서는 내부자의 제보나 협조가 필수적입니다. 내부자의 제보나 협조 없이는 그런 범죄를 제대로 잡아내거나 예방하기는 힘듭니다. 내부자의 제보나 협조를 기대하기 힘든 경우에는, 통신감청이나 잠입수사, 함정수사와 같은 극단적인 형태의 수사기법이라도 동원하여야 하나, 이런 수사기법은 우리 법상 인정되지 않거나 매우 제한적으로만 쓸 수 있고, 설령 가능한 경우라도 인권이나 사생활 침해의 위험이 큰 만큼 함부로 휘두를 수도 없습니다. 이런 사건은 직접적인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아 당장은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법질서를 망가뜨리고 사회와 국가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범죄이기 때문에 국가가 반드시 적발하고 처벌해야 하는 사건입니다.
수년 전 우리나라 법무부와 검찰에서 플리바기닝 제도의 도입을 시도하였다가 무산된 적이 있습니다. 법무부나 검찰에서 플리바기닝 제도에 대해 얘기할 때 흔히 있을 수 있는 비판이, 수사의 효율성만을 강조하여 물증 확보에 노력하지 않고 쉽게 피의자의 자백만 받아내려는 수사편의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형사절차 실무는, 검사에게 범죄의 성립요건에 대해 엄격한 입증책임을 부담시키고 정밀한 입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극히 간단한 수사만 진행한 채 곧바로 재판절차로 직행하여 대부분의 입증활동이 재판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미국의 형사사법제도와 달리, 우리의 형사사법제도는 수사기관이 충분한 수사를 통해 혐의 입증까지 성공한 다음에야 비로소 재판절차로 넘어가게 되고 재판절차는 수사 과정에서 입증된 사실을 재확인하는 정도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검사는 재판으로 가기 전에 미리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을 위해 물증을 확보하고 피의자나 참고인들을 조사하여 진술증거를 충분히 확보하려고 노력합니다. 물증이라는 게 말처럼 쉽게 수집되는 게 아니지만, 설령 아무리 많은 물증이 확보되어 있더라도 물증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범죄가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진술을 통해 물증과 범죄와의 연관성까지 밝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앞에서 말한 플리바기닝에 적합한 성격의 사건들은, 범죄를 적발하고 처벌하기 위해서 내부자들의 진술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사기관이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을 위한 수사에 주력하다보니 부작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혹시라도 무죄판결을 받는 불상사를 방지하고 어떻게든 증거 하나라도 더 수집해서 확실하게 유죄판결을 받기 위해, 압수수색을 과도하게 한다거나, 예컨대 휴대폰이나 카카오톡 같은 지극히 사적인 물건을 그야말로 탈탈탈 턴다거나, 자백을 받기 위해 피의자를 강압적 또는 반복적으로 조사한다거나 하는 인권 침해나 사생활 침해 등의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수사기관이 단지 법과 절차를 잘 지켜 수사를 하는 것만으로는 이런 부작용 예방에 부족할 수 있습니다. 수사기관의 선의에만 기대지 않고 이런 부작용을 근본적으로 예방하려면, 수사기관이 수사라는 걸 좀 적당히 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만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런 부담을 좀 덜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사법자원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국가재정상 사법자원은 물적으로나 인적으로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 한계 내에서 효율적으로 배분되어야 한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수사기관이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활동에 나설 수 있는 사건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이런 식의 반론이 가능할 겁니다. 국가의 수사기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범죄자들을 잡아들이고, 다른 한편으론 억울한 사람이 누명을 쓰는 일이 없도록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활동을 다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죠.
네, 당연히 지당하고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은 바로 보려 하지 않고 애써 눈을 감은 채, 마치 공자님인 양 맹자님인 양 늘 점잖은 목소리로 지당하고 옳은 말을 하는 데만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저는 2019년 하반기 대한민국을 온통 휘어잡은 소동들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인사이트를 얻었습니다. 바로, '이제 제발 위선 떨지 말자'라는 생각입니다. 사실은 진심도 아니면서 그저 남 듣기 좋으라고 아름답고 번드르르한 말만 늘어놓는 이중성과 위선, 우린 그걸 올해 새삼스레 많이도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이젠 우리도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점잖게 지당하고 옳은 말만 하기에 앞서, 과연 그게 실현은 가능한 얘기인지, 과연 우리 앞에 놓인 실상과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똑바로 보고 제대로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제 우리는 수사기관이 전지전능하지 않은 존재라는 현실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수사기관이 행사하는 수사권이 뭔가 대단한 권한이라고 생각하고, 이 요술방망이 같은 권한으로 해결 못하는 일이 없고 못 밝히는 진실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형사법 만능주의 국가가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회적 논쟁과 문제점은 죄다 형사절차 안에 집합시켜 놓고 형사법에 따른 해결을 기다립니다. 사회적 논쟁과 문제점의 직접당사자들은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해결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그 일의 당사자도 아니고 문외한에 불과한 판검사의 손에 해결을 맡겨버리고는 그 처분만 하염없이 기다리곤 합니다. 그러고도 정작 그 결과에는 승복하지 않고 각 진영별로 아전인수격 주장만 일삼습니다.
그러나 "조사하면 다 나와", 이런 말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조사한다고 속 시원하게 알고 싶은 게 다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몇 사람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어떤 사건을 제3자인 수사기관이 증거라는 형식으로 완벽하게 재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즉, 수사기관은 제아무리 애를 써도 누구나 수긍하는 진실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수사기관의 능력이 모자라서이기도 하고, 수사라는 행위만으로는 진실을 밝히는 데 턱없이 부족해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언제나 진실을 발견하는 게 가능함을 전제로, 수사기관의 도리와 의무를 말해서는 곤란합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범죄를 빠짐없이 적발하겠다고 모든 장소에 빠짐없이 CCTV를 설치하자거나 모든 사람들의 휴대폰과 카카오톡을 수사기관이 마음껏 보게 하자는 게 전혀 말이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더구나 갈수록 수사환경은 열악해지고 있습니다. 범죄는 고도로 지능적이고 은밀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수사기관이 범죄의 단서조차 찾기 쉽지 않고, 범죄자들은 묵비권을 행사하며 입을 닫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고, 참고인들은 괜한 불이익이라도 당할까 싶어 남의 사건에 개입하기 꺼려합니다. 범죄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자가 있는 사건의 경우에는 피해자의 진술이라도 확보하여 어찌어찌 수사를 진행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건은 사람의 진술을 확보하기 힘들어 수사 진행 자체가 곤란한 경우도 많습니다.
사법선진국 수사기관의 최신 수사기법과 제도를 우리나라에도 수입하려면 온갖 반대론에 맞닥뜨리게 되어, 아직까지 우리나라 수사기관은 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하던 구식 무기로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당연한 현실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수사기관의 권한을 늘리고 힘을 키워주자는 주장이 아닙니다. 그런 해결책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수사기관의 과욕에 따른 부작용을 조장하는 위험한 주장일 수 있습니다. 단지, 수사기관이 모든 범죄를 엄격하고 정밀하게 입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수사기관의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이 가능하고, 수사기관이 언제나 진실을 발견하는 게 가능하더라도, 그 때문에 야기될 수 있는 인권 침해 등의 부작용을 예방한다는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서, 이제 수사기관의 도리와 의무에 대해 현실과는 유리된, 그저 지당하고 옳아 보이기만 한 말은 더 이상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이미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있고, 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바로 플리바기닝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플리바기닝 제도의 취지는 수사기관의 한계를 인정하고 수사기관의 수사를 줄이자는 것으로, 바로 수사기관의 입증이 부족할 수밖에 없어 생기는 빈 틈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 빈 틈을 그냥 방치해두지만 말고 어떻게든 뭐라도 메워놓자는 게 그 취지라고 생각합니다. 플리바기닝 제도는 수사편의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 맞습니다. 사회적으로 필요성이 있으면 수사편의주의적 발상도 할 수 있는 것이고, 수사편의주의를 위해 플리바기닝을 하자는데 이를 수사편의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동어반복에 불과하고 적절한 비난이 아닙니다.
일본의 경우 미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변형된 형태의 플리바기닝 제도를 2016년에 도입하였습니다. 그 도입 이유가 재미있는데, 갈수록 진술증거의 수집이 곤란해지고 있는 수사환경을 고려하여 조사의 비중을 줄이고 사건 관련자들로부터 자발적인 진술을 이끌어내기 위한 새로운 수사방법으로서 이 플리바기닝 제도를 도입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역시 수사기관의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을 수긍하는 데서 이끌어낸 적절한 대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도 2004년부터 변형된 형태의 플리바기닝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나라인데, 최근인 2019년 9월부터는 종전의 배심재판 대상사건을 축소해서 시민배심원들의 사법절차 참여를 점차 줄여가고 있습니다. 이는 배심재판으로 야기될 수 있는 형사사법절차의 지연을 방지하여 신속한 재판 진행과 사법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대책인데, '시민의 사법참여'니 '사법의 민주화' 같은 지고지순한 말만 앞세워 배심재판 제도를 숭배대상으로 삼으려 하지 않고, 위선 떨지 않으면서 그리고 실상을 인정하면서 과감하게 문제점을 고쳐나가겠다는 프랑스 국민들의 실용적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사례입니다.
결론을 정리하면, 우리나라에도 플리바기닝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저는 우리 국민정서법상 100년 안에는 우리나라에 이 제도가 도입되는 일이 절대 없을 거라 예상합니다.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제 우리 솔직해지고 제발 위선 떨지 말자는 것입니다. 모자라고 부족한 현실은 현실 그대로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나갈 수 있습니다. 실상은 외면한 채, 하나마나 한, 그럴듯하기만 한, 그저 번드르르하기만 한 말만 해서는 아무런 해결책도 마련할 수 없습니다.
왜 미국이 스스로도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자인하면서도 플리바기닝 제도를 그렇게 오랜 세월 운영하고 있는지, 왜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은 지극히 미국스러운 제도인 플리바기닝 제도를 굳이 자국에 도입한 것인지, 우리는 그 이유를 솔직하게 들여다보면서 우리의 문제점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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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된 미키 할러 변호사 시리즈는 모두 4권입니다. 저작 순서로는,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탄환의 심판', '파기환송', '다섯 번째 증인', 이렇게 됩니다. 마지막 작품인 'The Gods of Guilt'도 조만간 번역되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흥미로운 시리즈를 죽 읽어가면서, 저는 미국의 형사사법제도 중 특히 한 가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로 '플리바기닝(plea bargaining)'이라는 제도입니다.
앞서 '다섯 번째 증인' 편에서도 소개하였듯이, 우리말로는 유죄인정 합의, 유죄답변 거래, 유죄답변 협상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는 플리바기닝 절차는, 피의자나 피고인이 현재 자신이 받고 있는 혐의보다 가벼운 내용의 혐의를 인정하고 그 가벼운 혐의에 해당하는 처벌만 받기로 하고 정식재판 없이 사건을 종결시키는 검사와 피의자 또는 피고인 사이의 공적 계약을 말합니다.
미국에서 플리바기닝 제도를 도입한 취지는, 형사사건을 효율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사법자원을 절약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플리바기닝은 재판이 끝나기 전이라면 기소 전이든 재판 중이든 언제든 가능합니다. 다만, 수사 초기에 협상이 이루어진다면 검사 입장에선 수사와 재판에 들이는 수고를 대폭 절약할 수 있어 유리합니다. 만약 피고인이 끝까지 자신에게 죄가 없음을 주장해서 결국 정식재판인 배심재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면, 배심원 선정부터 시작해서 여러 날이 걸리는 이 재판절차를 위해 사법기관은 막대한 노력과 자원을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이죠.
같은 취지로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도 미국과 비슷하거나 다소 변형된 형태의 플리바기닝 제도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미키 할러 변호사 시리즈에는 플리바기닝이 아주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형사사건의 시작은 바로 플리바기닝을 할지 말지 여부에 대한 검사와 변호인의 머리싸움입니다. 보통은 전세가 불리한 편에서 먼저 플리바기닝을 시도합니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건에서 플리바기닝이 검토되고 있고, 실제로도 미국에서는 이 절차를 통해 90퍼센트 이상의 형사사건이 정식재판 없이 종결된다고 하는데, 이처럼 플리바기닝은 미국 형사사법절차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제도입니다.
앞서 '다섯 번째 증인' 편에서도 소개하였듯이, 우리말로는 유죄인정 합의, 유죄답변 거래, 유죄답변 협상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는 플리바기닝 절차는, 피의자나 피고인이 현재 자신이 받고 있는 혐의보다 가벼운 내용의 혐의를 인정하고 그 가벼운 혐의에 해당하는 처벌만 받기로 하고 정식재판 없이 사건을 종결시키는 검사와 피의자 또는 피고인 사이의 공적 계약을 말합니다.
미국에서 플리바기닝 제도를 도입한 취지는, 형사사건을 효율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사법자원을 절약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플리바기닝은 재판이 끝나기 전이라면 기소 전이든 재판 중이든 언제든 가능합니다. 다만, 수사 초기에 협상이 이루어진다면 검사 입장에선 수사와 재판에 들이는 수고를 대폭 절약할 수 있어 유리합니다. 만약 피고인이 끝까지 자신에게 죄가 없음을 주장해서 결국 정식재판인 배심재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면, 배심원 선정부터 시작해서 여러 날이 걸리는 이 재판절차를 위해 사법기관은 막대한 노력과 자원을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이죠.
같은 취지로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도 미국과 비슷하거나 다소 변형된 형태의 플리바기닝 제도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미키 할러 변호사 시리즈에는 플리바기닝이 아주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형사사건의 시작은 바로 플리바기닝을 할지 말지 여부에 대한 검사와 변호인의 머리싸움입니다. 보통은 전세가 불리한 편에서 먼저 플리바기닝을 시도합니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건에서 플리바기닝이 검토되고 있고, 실제로도 미국에서는 이 절차를 통해 90퍼센트 이상의 형사사건이 정식재판 없이 종결된다고 하는데, 이처럼 플리바기닝은 미국 형사사법절차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제도입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실체적 진실 발견과 정의 구현이 최고이념인 형사사법절차에서 죄와 벌을 놓고 '협상'이니 '거래'니 하는 단어를 입에 담는 것 자체에 대한 극심한 알레르기 반응이 존재합니다. 즉, '국민정서법'상 용납되기 매우 힘든 제도입니다. 단언컨대, 100년 안에는 우리나라에 이 제도가 도입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왜 이 제도가 그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이 작품을 통해 해답을 한번 찾아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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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03쪽] 형사재판소 건물 13층, 제124호 법정 옆에 있는 유치장에는 내 의뢰인 카시우스 클레이 몽고메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
......
"...... 그리고 우린 지금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잖아. 오늘 심리는 잠깐이면 끝날 거야. 그것도 아주 기분 좋게. 재판 날짜만 정하면 그걸로 끝이니까. 그렇지만 우리의 검사 헬먼 씨는 자기가 제안한 협상안이 오늘까지만 유효하다고 말한다는 거지. 만약 우리가 샴페인 판사에게 재판에 임할 준비가 됐다고 오늘 말한다면, 그 거래는 없던 일이 되고, 우리는 재판으로 가는 거야. 어때,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겠어?"
---> 할러 변호사가 법원에 가서 구속되어 있는 의뢰인을 만나고 있습니다. 검사가 제안한 플리바기닝 안에 대해 의뢰인의 의사를 물어보고 있네요. 좀 있다 바로 법정에 나가 판사 앞에 서야 하는데, 법정에 나가기 전에 검사가 제안한 안을 받아들이고 절차를 여기서 끝낼지 아니면 검사의 제안을 거부하고 판사에게 정식재판을 위한 날짜를 잡아달라고 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103-104쪽] 몽고메리가 철창 사이에 고개를 기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47살이고 살아오면서 이미 9년이라는 세월을 감방 안에서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무장 강도죄와 신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 폭행죄로 기소되어 나락으로 추락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몽고메리는 로디아 가든스 빈민 주택단지 내에 있는,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물건을 구할 수 있는 마약 시장을 찾아가 구매자 행세를 했다. 그렇지만 돈을 지불하는 대신 총을 빼들어 마약상이 가진 약과 현찰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러자 마약상이 그의 총을 빼앗으려 하다가 총이 발사되고 만 것이다. 갱단의 일원이기도 한 다넬 힉스라는 그 마약상은 현재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으며, 앞으로 남은 평생 동안 그 위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 의뢰인 몽고메리의 혐의는 마약을 빼앗기 위해 마약상을 총으로 쏘고 불구자로 만든 것이로군요. 마약은 해야겠는데, 돈이 없어서 총을 가지고 갔던 모양입니다.
경찰의 수사결과에 의하면, 의뢰인이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일부러 총을 쏜 건 아니고 총으로 피해자를 협박만 하고 있었는데 이 총을 빼앗으려는 피해자와 실랑이를 벌이다 우발적으로 총이 발사된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일부러 쏜 건 아니라도, 총으로 피해자를 위협함으로써 먼저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니 단순한 과실범은 아니고 그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겠습니다.
[104쪽] 빈민 주택단지가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그곳 주민들은 아무도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심지어 피해자조차도 자신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갱단 동료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해주리라 믿었기에 침묵 쪽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 됐건 경찰은 수사를 진행했다. 주택단지 입구에 설치된 비디오카메라를 판독해 내 의뢰인의 차량을 확인해서 숨겨둔 차량을 찾아냈고, 차량 문짝에서 피해자의 혈흔을 발견했다.
---> 그럼 그와 같은 혐의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경찰과 검사가 현재까지 확보한 증거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증거는 피해자의 진술이 될 텐데, 피해자는 당시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당시 상황이 잘 기억나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스스로 마약을 판매한 범죄를 자인하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는 갱단의 일원입니다. 자칫 곧이곧대로 진술했다가 자신의 갱단에까지 피해를 입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입은 피해는 갱단 동료들이 보복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해줄 것이기 때문에 굳이 국가에서 제공하는 형사사법 서비스에 기댈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부류들에겐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깝고 편리한 것이죠. 혹시 피해자가 나중에 마음을 바꿔먹어 사실 그대로 말을 하게 되더라도, 이미 '진술의 일관성'에 흠이 생겨버린 상태여서 진실한 진술도 신빙성 없는 진술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무튼 피해자가 이 모양이니,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가 수사기관의 손에는 없는 겁니다.
다음으로, 범행이 발생할 무렵 범행장소 부근을 지나가는 몽고메리의 차가 촬영된 비디오카메라 영상, 그리고 몽고메리의 차에서 발견된 피해자의 혈흔이라는 두 개의 증거가 확보되어 있습니다. 몽고메리가 죄를 저질렀음을 추정할 수 있는 좋은 증거이지만, 이것만 가지고 몽고메리가 피해자를 총으로 쐈다는 사실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피해자가 제대로 말을 하지 않으면, 이를 틈타 몽고메리가 둘러댈 수 있는 변명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말을 하지 않으니, 그 사이를 연결할 뭔가 다른 증거가 더 필요합니다.
[104쪽] 그다지 강력한 증거는 아니었지만, 우리 쪽에서 검찰의 협상을 끌어내기에는 충분했다. 만약 몽고메리가 검찰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3년 형을 선고받고 대략 2년 6개월 정도 복역하면 풀려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도박하기로 결정해서 재판 마지막에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면, 최소한 15년은 꼼짝없이 감방에서 썩게 될 터였다. GBI(신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 폭행죄)와 강도행위 중에 무기를 사용했다는 혐의가 합해졌으니 거의 구원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나는 주디스 샴페인 판사가 총기 범죄에 전혀 관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증거가 뭔가 좀 더 있을 줄 알았더니, 그게 전부로군요. 현재까지의 증거만으로는 유죄판결을 받기에 부족합니다. 몽고메리 차에 묻은 피해자의 혈흔과 몽고메리가 피해자를 쏜 사실을 바로 연결할 연결고리가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겨우 이 상태에서 재판으로 가려면 검사의 입장에선 피해자의 입을 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피해자의 입을 열지 않으면 유죄판결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피해자가 계속해서 입을 닫고 있겠다면 큰 문제입니다. 사람의 입을, 그것도 피해자의 입을 강제로 열게 할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학수사'나 '물적 증거'와 같이 '사람'이 배제된 수사가 능사는 아닙니다. 반드시 형사재판에는 '인적 증거', 즉 '사람의 진술'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수사기관은 사람으로부터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증거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검사가 먼저 할러 변호사에게 플리바기닝을 제안한 것입니다. 원래는 최소 15년의 형을 받아야 할 사건을 3년 형으로 줄여 준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총을 쏜 행위를 고의범이 아닌 과실범으로 의율해 주겠다는 제안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변호인은 유리한 입장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변호인의 입장에서도 검사가 가진 증거가 저게 다라고 해서 무죄판결을 장담할 수만은 없습니다. 총의 발사경위에 대해 몽고메리가 할 수 있는 변명이 아무리 많더라도, 배심원들을 자기 편으로 확 끌어올 만한 그럴듯한 변명이 과연 얼마나 되겠어요. 몽고메리가 마약상을 만나러 가는데 왜 총을 가지고 간 것이며, 왜 하필 그의 차에 피해자의 혈흔이 묻게 된 것이며 등등, 깔끔한 설명이 곤란한 부분이 많습니다. 게다가 그는 전과도 많습니다. 배심원들에게 신뢰를 주기 힘든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배심원들은 확실한 증거가 없더라도 이런저런 정황만으로 몽고메리가 유죄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위험부담이 있으니, 할러 변호사도 15년과 3년 사이에서 고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렇게 검사도 변호인도 자신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팽팽한 상황이니, 협상과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냥 그쪽으로 가서 유죄를 받든 무죄를 받든 하면 그만인 거죠. 플리바기닝이 그렇게 많이 이용된다는 것은, 그만큼 이렇게 팽팽한 상황에 있는 사건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사건이란 게 생각만큼 그렇게 쉽게 수사가 이루어지고 쉽게 증거가 수집되고 쉽게 유죄를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형사소송의 대원칙인 '엄격한 증명의 원칙'과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 등의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105쪽] 나는 의뢰인에게 검찰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권유했다. 내게는 쉬운 결정이었지만, 사실 형을 살게 될 사람은 내가 아니지 않은가. 몽고메리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
......
"자네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군." 내가 말했다. "우리에겐 상당히 좋은 제안이야. 검사가 이 건을 재판까지 끌고 가고 싶어하지 않아. 법정에 서고 싶어하지 않는 피해자를 굳이 거기다 끌어다 놓고 싶지 않은 거야. 그랬다가는 도움이 아니라 오히려 해를 입히는 꼴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최대한 선심을 베풀어서 가장 짧은 형기를 제시하는 거라고. 하지만 모든 건 자네에게 달렸어. 자네가 결정해야 해. 앞으로 2주 정도 시간이 있고, 그 이후로는 끝이야. 어쨌든 몇 분만 있으면 법정에 나가야 해."
---> 할러 변호사가 검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나은 전략이라고 의뢰인을 설득합니다. 결정은 의뢰인이 하는 것이지만, 변호인 자신의 의견도 의뢰인에게 솔직하게 전달합니다.
할러 변호사의 말대로 검사는 피해자를 법정에 증인으로 세우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피해자가 제대로 진술을 하려 하지 않는 건 둘째치더라도, 갱단에 몸담고 있는 데서 연상할 수 있는 피해자의 우락부락한 인상이라든가 몸 여기저기에 문신들이 또아리 틀고 있는 이미지라든가, 배심원들에게 점수 딸만한 꺼리가 하나도 없어서이겠죠. '메시지보다 메신저'를 고려해볼 때 유리할 게 없는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105-106쪽] "...... 자네가 선택해. 3년을 받든가, 아니면 재판으로 가는 거야. 그리고 전에도 말했듯이 재판으로 가도 뭔가 방법이 있기는 할 거야. 검찰 측에서 무기를 찾아내지도 못했고, 피해자는 진술을 거부하고 있잖아. 하지만 여전히 자네 차에 묻어있는 혈흔이 문제야. 그리고 검사 측은 총격 직후에 자네가 차를 운전해서 로디아를 빠져나가는 비디오 영상도 가지고 있잖아. 물론 자네가 얘기했던 대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고 배심원을 설득할 수도 있겠지. 정당방위였다고. 거기에 약을 사러 갔었는데, 그가 자네 돈뭉치를 보고는 그걸 빼앗으려다가 그렇게 됐다고 말이지. 어쩌면 배심원단도 그 말을 믿을지 몰라. 특히 피해자가 증언을 안 하려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설사 그가 증언을 하더라도 자네 말을 더 믿을지도 모르지. 일단 변론을 시작하면 난 그가 수도 없이 묵비권을 행사하도록 만들 작정이거든. 그럼 배심원들은 그가 증언대에 올라서기도 전에 그를 마치 알 카포네라도 되는 듯이 생각하게 될 거라고."
---> 이제 보니, 범행에 사용된 총도 몽고메리가 이미 어딘가에 버려버린 모양이군요. 총도 없으니 정확한 발사경위를 확인하기도 더 어려워, 몽고메리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이겠습니다.
그리고 몽고메리는 정당방위를 주장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일응 해볼 수는 있는 변명 같기는 합니다만, 그 변명이 그럴듯해 보이려면 그 당시 피해자가 탐낼 만한 돈뭉치를 몽고메리가 갖고 있었음을 몽고메리가 입증하여야 할 텐데요. 돈도 전혀 없어서 총으로 협박해 마약을 빼앗으려던 사람이 과연 자신에게 돈뭉치가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을까요?
아무튼 할러 변호사의 탁월한 변론실력을 감안한다면, 정식재판으로 가도 해볼만한 싸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만......
[106쪽] "검사가 지금 자네에게 제안하는 형량과 만약 우리가 재판에서 졌을 때 선고받게 될 형량 사이에 틈이 너무 벌어져 있다고. 최소한 12년 정도는 예상하고 있어야 해, 캐시. 그 기간을 도박에 걸기에는 너무 길잖아."
---> 아무래도 실패했을 경우의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피고인의 위험부담 뿐만 아니라, 실패했을 경우 변호인이 입게될 데미지도 어마어마할 겁니다.
게다가 빨리 결정을 못하고 어정쩡하게 정식재판으로 가기로 했다가, 그 사이에 어디선가 몽고메리의 총이라도 발견되어 그에게 불리한 상황이 초래될 위험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빨리 결정을 내리는 게 유리할 수 있습니다.
-------------------------------------------
......
"...... 그리고 우린 지금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잖아. 오늘 심리는 잠깐이면 끝날 거야. 그것도 아주 기분 좋게. 재판 날짜만 정하면 그걸로 끝이니까. 그렇지만 우리의 검사 헬먼 씨는 자기가 제안한 협상안이 오늘까지만 유효하다고 말한다는 거지. 만약 우리가 샴페인 판사에게 재판에 임할 준비가 됐다고 오늘 말한다면, 그 거래는 없던 일이 되고, 우리는 재판으로 가는 거야. 어때,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겠어?"
---> 할러 변호사가 법원에 가서 구속되어 있는 의뢰인을 만나고 있습니다. 검사가 제안한 플리바기닝 안에 대해 의뢰인의 의사를 물어보고 있네요. 좀 있다 바로 법정에 나가 판사 앞에 서야 하는데, 법정에 나가기 전에 검사가 제안한 안을 받아들이고 절차를 여기서 끝낼지 아니면 검사의 제안을 거부하고 판사에게 정식재판을 위한 날짜를 잡아달라고 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103-104쪽] 몽고메리가 철창 사이에 고개를 기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47살이고 살아오면서 이미 9년이라는 세월을 감방 안에서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무장 강도죄와 신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 폭행죄로 기소되어 나락으로 추락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몽고메리는 로디아 가든스 빈민 주택단지 내에 있는,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물건을 구할 수 있는 마약 시장을 찾아가 구매자 행세를 했다. 그렇지만 돈을 지불하는 대신 총을 빼들어 마약상이 가진 약과 현찰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러자 마약상이 그의 총을 빼앗으려 하다가 총이 발사되고 만 것이다. 갱단의 일원이기도 한 다넬 힉스라는 그 마약상은 현재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으며, 앞으로 남은 평생 동안 그 위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 의뢰인 몽고메리의 혐의는 마약을 빼앗기 위해 마약상을 총으로 쏘고 불구자로 만든 것이로군요. 마약은 해야겠는데, 돈이 없어서 총을 가지고 갔던 모양입니다.
경찰의 수사결과에 의하면, 의뢰인이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일부러 총을 쏜 건 아니고 총으로 피해자를 협박만 하고 있었는데 이 총을 빼앗으려는 피해자와 실랑이를 벌이다 우발적으로 총이 발사된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일부러 쏜 건 아니라도, 총으로 피해자를 위협함으로써 먼저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니 단순한 과실범은 아니고 그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겠습니다.
[104쪽] 빈민 주택단지가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그곳 주민들은 아무도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심지어 피해자조차도 자신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갱단 동료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해주리라 믿었기에 침묵 쪽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 됐건 경찰은 수사를 진행했다. 주택단지 입구에 설치된 비디오카메라를 판독해 내 의뢰인의 차량을 확인해서 숨겨둔 차량을 찾아냈고, 차량 문짝에서 피해자의 혈흔을 발견했다.
---> 그럼 그와 같은 혐의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경찰과 검사가 현재까지 확보한 증거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증거는 피해자의 진술이 될 텐데, 피해자는 당시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당시 상황이 잘 기억나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스스로 마약을 판매한 범죄를 자인하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는 갱단의 일원입니다. 자칫 곧이곧대로 진술했다가 자신의 갱단에까지 피해를 입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입은 피해는 갱단 동료들이 보복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해줄 것이기 때문에 굳이 국가에서 제공하는 형사사법 서비스에 기댈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부류들에겐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깝고 편리한 것이죠. 혹시 피해자가 나중에 마음을 바꿔먹어 사실 그대로 말을 하게 되더라도, 이미 '진술의 일관성'에 흠이 생겨버린 상태여서 진실한 진술도 신빙성 없는 진술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무튼 피해자가 이 모양이니,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가 수사기관의 손에는 없는 겁니다.
다음으로, 범행이 발생할 무렵 범행장소 부근을 지나가는 몽고메리의 차가 촬영된 비디오카메라 영상, 그리고 몽고메리의 차에서 발견된 피해자의 혈흔이라는 두 개의 증거가 확보되어 있습니다. 몽고메리가 죄를 저질렀음을 추정할 수 있는 좋은 증거이지만, 이것만 가지고 몽고메리가 피해자를 총으로 쐈다는 사실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피해자가 제대로 말을 하지 않으면, 이를 틈타 몽고메리가 둘러댈 수 있는 변명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말을 하지 않으니, 그 사이를 연결할 뭔가 다른 증거가 더 필요합니다.
[104쪽] 그다지 강력한 증거는 아니었지만, 우리 쪽에서 검찰의 협상을 끌어내기에는 충분했다. 만약 몽고메리가 검찰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3년 형을 선고받고 대략 2년 6개월 정도 복역하면 풀려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도박하기로 결정해서 재판 마지막에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면, 최소한 15년은 꼼짝없이 감방에서 썩게 될 터였다. GBI(신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 폭행죄)와 강도행위 중에 무기를 사용했다는 혐의가 합해졌으니 거의 구원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나는 주디스 샴페인 판사가 총기 범죄에 전혀 관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증거가 뭔가 좀 더 있을 줄 알았더니, 그게 전부로군요. 현재까지의 증거만으로는 유죄판결을 받기에 부족합니다. 몽고메리 차에 묻은 피해자의 혈흔과 몽고메리가 피해자를 쏜 사실을 바로 연결할 연결고리가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겨우 이 상태에서 재판으로 가려면 검사의 입장에선 피해자의 입을 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피해자의 입을 열지 않으면 유죄판결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피해자가 계속해서 입을 닫고 있겠다면 큰 문제입니다. 사람의 입을, 그것도 피해자의 입을 강제로 열게 할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학수사'나 '물적 증거'와 같이 '사람'이 배제된 수사가 능사는 아닙니다. 반드시 형사재판에는 '인적 증거', 즉 '사람의 진술'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수사기관은 사람으로부터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증거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검사가 먼저 할러 변호사에게 플리바기닝을 제안한 것입니다. 원래는 최소 15년의 형을 받아야 할 사건을 3년 형으로 줄여 준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총을 쏜 행위를 고의범이 아닌 과실범으로 의율해 주겠다는 제안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변호인은 유리한 입장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변호인의 입장에서도 검사가 가진 증거가 저게 다라고 해서 무죄판결을 장담할 수만은 없습니다. 총의 발사경위에 대해 몽고메리가 할 수 있는 변명이 아무리 많더라도, 배심원들을 자기 편으로 확 끌어올 만한 그럴듯한 변명이 과연 얼마나 되겠어요. 몽고메리가 마약상을 만나러 가는데 왜 총을 가지고 간 것이며, 왜 하필 그의 차에 피해자의 혈흔이 묻게 된 것이며 등등, 깔끔한 설명이 곤란한 부분이 많습니다. 게다가 그는 전과도 많습니다. 배심원들에게 신뢰를 주기 힘든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배심원들은 확실한 증거가 없더라도 이런저런 정황만으로 몽고메리가 유죄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위험부담이 있으니, 할러 변호사도 15년과 3년 사이에서 고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렇게 검사도 변호인도 자신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팽팽한 상황이니, 협상과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냥 그쪽으로 가서 유죄를 받든 무죄를 받든 하면 그만인 거죠. 플리바기닝이 그렇게 많이 이용된다는 것은, 그만큼 이렇게 팽팽한 상황에 있는 사건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사건이란 게 생각만큼 그렇게 쉽게 수사가 이루어지고 쉽게 증거가 수집되고 쉽게 유죄를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형사소송의 대원칙인 '엄격한 증명의 원칙'과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 등의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105쪽] 나는 의뢰인에게 검찰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권유했다. 내게는 쉬운 결정이었지만, 사실 형을 살게 될 사람은 내가 아니지 않은가. 몽고메리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
......
"자네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군." 내가 말했다. "우리에겐 상당히 좋은 제안이야. 검사가 이 건을 재판까지 끌고 가고 싶어하지 않아. 법정에 서고 싶어하지 않는 피해자를 굳이 거기다 끌어다 놓고 싶지 않은 거야. 그랬다가는 도움이 아니라 오히려 해를 입히는 꼴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최대한 선심을 베풀어서 가장 짧은 형기를 제시하는 거라고. 하지만 모든 건 자네에게 달렸어. 자네가 결정해야 해. 앞으로 2주 정도 시간이 있고, 그 이후로는 끝이야. 어쨌든 몇 분만 있으면 법정에 나가야 해."
---> 할러 변호사가 검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나은 전략이라고 의뢰인을 설득합니다. 결정은 의뢰인이 하는 것이지만, 변호인 자신의 의견도 의뢰인에게 솔직하게 전달합니다.
할러 변호사의 말대로 검사는 피해자를 법정에 증인으로 세우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피해자가 제대로 진술을 하려 하지 않는 건 둘째치더라도, 갱단에 몸담고 있는 데서 연상할 수 있는 피해자의 우락부락한 인상이라든가 몸 여기저기에 문신들이 또아리 틀고 있는 이미지라든가, 배심원들에게 점수 딸만한 꺼리가 하나도 없어서이겠죠. '메시지보다 메신저'를 고려해볼 때 유리할 게 없는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105-106쪽] "...... 자네가 선택해. 3년을 받든가, 아니면 재판으로 가는 거야. 그리고 전에도 말했듯이 재판으로 가도 뭔가 방법이 있기는 할 거야. 검찰 측에서 무기를 찾아내지도 못했고, 피해자는 진술을 거부하고 있잖아. 하지만 여전히 자네 차에 묻어있는 혈흔이 문제야. 그리고 검사 측은 총격 직후에 자네가 차를 운전해서 로디아를 빠져나가는 비디오 영상도 가지고 있잖아. 물론 자네가 얘기했던 대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고 배심원을 설득할 수도 있겠지. 정당방위였다고. 거기에 약을 사러 갔었는데, 그가 자네 돈뭉치를 보고는 그걸 빼앗으려다가 그렇게 됐다고 말이지. 어쩌면 배심원단도 그 말을 믿을지 몰라. 특히 피해자가 증언을 안 하려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설사 그가 증언을 하더라도 자네 말을 더 믿을지도 모르지. 일단 변론을 시작하면 난 그가 수도 없이 묵비권을 행사하도록 만들 작정이거든. 그럼 배심원들은 그가 증언대에 올라서기도 전에 그를 마치 알 카포네라도 되는 듯이 생각하게 될 거라고."
---> 이제 보니, 범행에 사용된 총도 몽고메리가 이미 어딘가에 버려버린 모양이군요. 총도 없으니 정확한 발사경위를 확인하기도 더 어려워, 몽고메리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이겠습니다.
그리고 몽고메리는 정당방위를 주장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일응 해볼 수는 있는 변명 같기는 합니다만, 그 변명이 그럴듯해 보이려면 그 당시 피해자가 탐낼 만한 돈뭉치를 몽고메리가 갖고 있었음을 몽고메리가 입증하여야 할 텐데요. 돈도 전혀 없어서 총으로 협박해 마약을 빼앗으려던 사람이 과연 자신에게 돈뭉치가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을까요?
아무튼 할러 변호사의 탁월한 변론실력을 감안한다면, 정식재판으로 가도 해볼만한 싸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만......
[106쪽] "검사가 지금 자네에게 제안하는 형량과 만약 우리가 재판에서 졌을 때 선고받게 될 형량 사이에 틈이 너무 벌어져 있다고. 최소한 12년 정도는 예상하고 있어야 해, 캐시. 그 기간을 도박에 걸기에는 너무 길잖아."
---> 아무래도 실패했을 경우의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피고인의 위험부담 뿐만 아니라, 실패했을 경우 변호인이 입게될 데미지도 어마어마할 겁니다.
게다가 빨리 결정을 못하고 어정쩡하게 정식재판으로 가기로 했다가, 그 사이에 어디선가 몽고메리의 총이라도 발견되어 그에게 불리한 상황이 초래될 위험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빨리 결정을 내리는 게 유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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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파기환송'에서 플리바기닝이 활약하는 장면 소개는 요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위 사건의 결말은 정확히 소개되지 않은 채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지만, 할러 변호사가 검사의 제안을 1년형으로 더 깎으면서 플리바기닝에 성공하는 듯한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작품에서 미키 할러 변호사는 총기 상해범죄 피고인을 위한 플리바기닝을 시도하였고, 다음 작품 '다섯 번째 증인'에서는 살인범죄 피고인을 위한 플리바기닝을 시도하였습니다. 이런 사건은 피해자가 존재하는 강력 사건인데요, 우리나라라면 이런 류의 사건에서 플리바기닝을 한다는 것은 최소한 검사 입장에선 쉽지 않아 보입니다. 범인임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가해자가 수사기관에 잡혀있기까지 한 상황인데, 증거가 좀 부족하다고 해서, 무죄판결 가능성이 좀 있다고 해서 가벼운 죄로만 살짝 처벌하고 만다는 것은 누구도 수긍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중범죄인을 봐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수사기관은 어떻게 해서든 중범죄인일수록 법정에 세우려고 기를 쓰게 마련입니다. 수사기관이라도 그렇게 안 하면 불쌍한 피해자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요?
게다가 이런 류의 강력 사건은, 수사가 아주 어렵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잘하면 범인을 잡아낼 가능성이 꽤 있습니다. 왜냐하면 강력 사건은 눈에 보이는 범행현장이 있고, 확실한 피해자가 있고, 세상이 좋아져서 지문 감식이나 DNA 감정과 같은 과학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동네 여기저기에 설치되어 있는 CCTV에 범인의 단서가 포착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긴 세월 오리무중이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도 결국에는 범인이 잡히고야 말지 않습니까?
이런 류의 강력 사건 말고, 정작 플리바기닝이 필요하거나 적절한 사건은 따로 있습니다.
우선은, 범죄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자가 없는 사건이 좋겠습니다. 피해자의 피해감정을 해하면서까지 국가가 범인에게 혜택을 부여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론, 수사가 정말로 쉽지 않은 성격의 사건입니다. 예를 들어, 화이트칼라 사건, 기업 비리 사건, 금융경제 사건, 뇌물 사건, 조직범죄 사건, 마약 사건, 테러 사건, 보이스피싱 사건 같은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사건의 특징은, 가담자들이 다수인데 범죄가 은밀히 이루어지는데다 직접적인 피해자가 없고 범죄자나 그 관련자 모두 서로 win-win 하는 성격의 사건이어서 적발이 쉽지 않고, 어쩌다 잡힌 가담자가 나는 잘 모르는 일이라며 입을 닫아버리면 증거수집도 쉽지 않고 더 이상 윗선으로 올라갈 수 없어 주동자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된다는 점입니다.
즉, 이런 사건은 적발과 증거수집을 위해서는 내부자의 제보나 협조가 필수적입니다. 내부자의 제보나 협조 없이는 그런 범죄를 제대로 잡아내거나 예방하기는 힘듭니다. 내부자의 제보나 협조를 기대하기 힘든 경우에는, 통신감청이나 잠입수사, 함정수사와 같은 극단적인 형태의 수사기법이라도 동원하여야 하나, 이런 수사기법은 우리 법상 인정되지 않거나 매우 제한적으로만 쓸 수 있고, 설령 가능한 경우라도 인권이나 사생활 침해의 위험이 큰 만큼 함부로 휘두를 수도 없습니다. 이런 사건은 직접적인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아 당장은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법질서를 망가뜨리고 사회와 국가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범죄이기 때문에 국가가 반드시 적발하고 처벌해야 하는 사건입니다.
수년 전 우리나라 법무부와 검찰에서 플리바기닝 제도의 도입을 시도하였다가 무산된 적이 있습니다. 법무부나 검찰에서 플리바기닝 제도에 대해 얘기할 때 흔히 있을 수 있는 비판이, 수사의 효율성만을 강조하여 물증 확보에 노력하지 않고 쉽게 피의자의 자백만 받아내려는 수사편의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형사절차 실무는, 검사에게 범죄의 성립요건에 대해 엄격한 입증책임을 부담시키고 정밀한 입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극히 간단한 수사만 진행한 채 곧바로 재판절차로 직행하여 대부분의 입증활동이 재판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미국의 형사사법제도와 달리, 우리의 형사사법제도는 수사기관이 충분한 수사를 통해 혐의 입증까지 성공한 다음에야 비로소 재판절차로 넘어가게 되고 재판절차는 수사 과정에서 입증된 사실을 재확인하는 정도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검사는 재판으로 가기 전에 미리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을 위해 물증을 확보하고 피의자나 참고인들을 조사하여 진술증거를 충분히 확보하려고 노력합니다. 물증이라는 게 말처럼 쉽게 수집되는 게 아니지만, 설령 아무리 많은 물증이 확보되어 있더라도 물증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범죄가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진술을 통해 물증과 범죄와의 연관성까지 밝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앞에서 말한 플리바기닝에 적합한 성격의 사건들은, 범죄를 적발하고 처벌하기 위해서 내부자들의 진술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사기관이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을 위한 수사에 주력하다보니 부작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혹시라도 무죄판결을 받는 불상사를 방지하고 어떻게든 증거 하나라도 더 수집해서 확실하게 유죄판결을 받기 위해, 압수수색을 과도하게 한다거나, 예컨대 휴대폰이나 카카오톡 같은 지극히 사적인 물건을 그야말로 탈탈탈 턴다거나, 자백을 받기 위해 피의자를 강압적 또는 반복적으로 조사한다거나 하는 인권 침해나 사생활 침해 등의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수사기관이 단지 법과 절차를 잘 지켜 수사를 하는 것만으로는 이런 부작용 예방에 부족할 수 있습니다. 수사기관의 선의에만 기대지 않고 이런 부작용을 근본적으로 예방하려면, 수사기관이 수사라는 걸 좀 적당히 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만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런 부담을 좀 덜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사법자원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국가재정상 사법자원은 물적으로나 인적으로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 한계 내에서 효율적으로 배분되어야 한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수사기관이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활동에 나설 수 있는 사건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이런 식의 반론이 가능할 겁니다. 국가의 수사기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범죄자들을 잡아들이고, 다른 한편으론 억울한 사람이 누명을 쓰는 일이 없도록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활동을 다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죠.
네, 당연히 지당하고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은 바로 보려 하지 않고 애써 눈을 감은 채, 마치 공자님인 양 맹자님인 양 늘 점잖은 목소리로 지당하고 옳은 말을 하는 데만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저는 2019년 하반기 대한민국을 온통 휘어잡은 소동들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인사이트를 얻었습니다. 바로, '이제 제발 위선 떨지 말자'라는 생각입니다. 사실은 진심도 아니면서 그저 남 듣기 좋으라고 아름답고 번드르르한 말만 늘어놓는 이중성과 위선, 우린 그걸 올해 새삼스레 많이도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이젠 우리도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점잖게 지당하고 옳은 말만 하기에 앞서, 과연 그게 실현은 가능한 얘기인지, 과연 우리 앞에 놓인 실상과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똑바로 보고 제대로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제 우리는 수사기관이 전지전능하지 않은 존재라는 현실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수사기관이 행사하는 수사권이 뭔가 대단한 권한이라고 생각하고, 이 요술방망이 같은 권한으로 해결 못하는 일이 없고 못 밝히는 진실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형사법 만능주의 국가가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회적 논쟁과 문제점은 죄다 형사절차 안에 집합시켜 놓고 형사법에 따른 해결을 기다립니다. 사회적 논쟁과 문제점의 직접당사자들은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해결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그 일의 당사자도 아니고 문외한에 불과한 판검사의 손에 해결을 맡겨버리고는 그 처분만 하염없이 기다리곤 합니다. 그러고도 정작 그 결과에는 승복하지 않고 각 진영별로 아전인수격 주장만 일삼습니다.
그러나 "조사하면 다 나와", 이런 말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조사한다고 속 시원하게 알고 싶은 게 다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몇 사람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어떤 사건을 제3자인 수사기관이 증거라는 형식으로 완벽하게 재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즉, 수사기관은 제아무리 애를 써도 누구나 수긍하는 진실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수사기관의 능력이 모자라서이기도 하고, 수사라는 행위만으로는 진실을 밝히는 데 턱없이 부족해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언제나 진실을 발견하는 게 가능함을 전제로, 수사기관의 도리와 의무를 말해서는 곤란합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범죄를 빠짐없이 적발하겠다고 모든 장소에 빠짐없이 CCTV를 설치하자거나 모든 사람들의 휴대폰과 카카오톡을 수사기관이 마음껏 보게 하자는 게 전혀 말이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더구나 갈수록 수사환경은 열악해지고 있습니다. 범죄는 고도로 지능적이고 은밀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수사기관이 범죄의 단서조차 찾기 쉽지 않고, 범죄자들은 묵비권을 행사하며 입을 닫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고, 참고인들은 괜한 불이익이라도 당할까 싶어 남의 사건에 개입하기 꺼려합니다. 범죄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자가 있는 사건의 경우에는 피해자의 진술이라도 확보하여 어찌어찌 수사를 진행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건은 사람의 진술을 확보하기 힘들어 수사 진행 자체가 곤란한 경우도 많습니다.
사법선진국 수사기관의 최신 수사기법과 제도를 우리나라에도 수입하려면 온갖 반대론에 맞닥뜨리게 되어, 아직까지 우리나라 수사기관은 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하던 구식 무기로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당연한 현실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수사기관의 권한을 늘리고 힘을 키워주자는 주장이 아닙니다. 그런 해결책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수사기관의 과욕에 따른 부작용을 조장하는 위험한 주장일 수 있습니다. 단지, 수사기관이 모든 범죄를 엄격하고 정밀하게 입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수사기관의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이 가능하고, 수사기관이 언제나 진실을 발견하는 게 가능하더라도, 그 때문에 야기될 수 있는 인권 침해 등의 부작용을 예방한다는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서, 이제 수사기관의 도리와 의무에 대해 현실과는 유리된, 그저 지당하고 옳아 보이기만 한 말은 더 이상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이미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있고, 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바로 플리바기닝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플리바기닝 제도의 취지는 수사기관의 한계를 인정하고 수사기관의 수사를 줄이자는 것으로, 바로 수사기관의 입증이 부족할 수밖에 없어 생기는 빈 틈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 빈 틈을 그냥 방치해두지만 말고 어떻게든 뭐라도 메워놓자는 게 그 취지라고 생각합니다. 플리바기닝 제도는 수사편의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 맞습니다. 사회적으로 필요성이 있으면 수사편의주의적 발상도 할 수 있는 것이고, 수사편의주의를 위해 플리바기닝을 하자는데 이를 수사편의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동어반복에 불과하고 적절한 비난이 아닙니다.
일본의 경우 미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변형된 형태의 플리바기닝 제도를 2016년에 도입하였습니다. 그 도입 이유가 재미있는데, 갈수록 진술증거의 수집이 곤란해지고 있는 수사환경을 고려하여 조사의 비중을 줄이고 사건 관련자들로부터 자발적인 진술을 이끌어내기 위한 새로운 수사방법으로서 이 플리바기닝 제도를 도입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역시 수사기관의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을 수긍하는 데서 이끌어낸 적절한 대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도 2004년부터 변형된 형태의 플리바기닝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나라인데, 최근인 2019년 9월부터는 종전의 배심재판 대상사건을 축소해서 시민배심원들의 사법절차 참여를 점차 줄여가고 있습니다. 이는 배심재판으로 야기될 수 있는 형사사법절차의 지연을 방지하여 신속한 재판 진행과 사법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대책인데, '시민의 사법참여'니 '사법의 민주화' 같은 지고지순한 말만 앞세워 배심재판 제도를 숭배대상으로 삼으려 하지 않고, 위선 떨지 않으면서 그리고 실상을 인정하면서 과감하게 문제점을 고쳐나가겠다는 프랑스 국민들의 실용적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사례입니다.
결론을 정리하면, 우리나라에도 플리바기닝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저는 우리 국민정서법상 100년 안에는 우리나라에 이 제도가 도입되는 일이 절대 없을 거라 예상합니다.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제 우리 솔직해지고 제발 위선 떨지 말자는 것입니다. 모자라고 부족한 현실은 현실 그대로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나갈 수 있습니다. 실상은 외면한 채, 하나마나 한, 그럴듯하기만 한, 그저 번드르르하기만 한 말만 해서는 아무런 해결책도 마련할 수 없습니다.
왜 미국이 스스로도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자인하면서도 플리바기닝 제도를 그렇게 오랜 세월 운영하고 있는지, 왜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은 지극히 미국스러운 제도인 플리바기닝 제도를 굳이 자국에 도입한 것인지, 우리는 그 이유를 솔직하게 들여다보면서 우리의 문제점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2019년 12월 21일 토요일
프랑스 파리 지방검찰청의 조직 구성, 그리고 국가대테러검찰과 조직범죄검찰
댓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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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iMagistrat
시간:
12/21/2019 11:52: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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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지방검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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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사법제도
프랑스 파리 지방법원 홈페이지인 'Tribunal de Paris'에서 파리 지방검찰청의 조직도를 찾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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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parquet de Paris se compose du cabinet du procureur de la République, de 6 divisions, de 16 sections et d'un pôle.
- 1ère Division
> Section P20 Action publique territoriale
> Section P4 Mineurs auteurs et victimes
> Section P12 Unité de traitement en temps réel
> Pôle des procédures alternatives
- 2ème Division
> Section F1 Cybercriminalité (JIRS)
> Section F2 Affaires économiques, financières & commerciales (JIRS)
> Section C2 Lutte contre la criminalité organisée non financière (JIRS)
- 3ème Division
> Section A1 Bureau d'ordre, audiencement & suivi des appels
> Section A2 Exécution des peines - BEX - Entraide pénale internationale
- 4ème Division
> Section C1 Terrorisme et atteinte à la sûreté de l'Etat
> Section C3 Affaires militaires
> Section AC5 Pôle crimes contre l'humanité - crimes et délits de guerre
- 5ème Division
> Section S1 Pôle santé publique (JIRS)
> Section S2 Social, consommation et environnement (JIRS)
- 6ème Division
> Section AC1 Droit civil et professions juridiques
> Section AC4 Presse et protection des libertés
> Section P30 Pôle accidents collecti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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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검찰청도 몇 년 사이에 조직 구성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검사장(procureur de la République), 6개의 디비전(Division, 우리로 치면 차장검사의 지휘를 받는 여러 개의 '부'의 집합), 16개의 섹션(Section, 우리로 치면 '부'), 그리고 1개의 폴(Pôle)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제가 파리에서 연수를 했던 2008년에 5개의 디비전과 14개의 섹션이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규모가 꽤 커졌고 이름이 생소한 부서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파리 지방검찰청에 소속된 검찰 조직은 이게 다가 아닙니다. 현재 2개의 검찰 조직이 더 있습니다.
먼저, 'Parquet National Financier(국가금융검찰)'입니다.
위 'Tribunal de Paris' 홈페이지에는 'Parquet de Paris(파리 검찰)' 항목 외에 'Parquet National Financier' 항목이 별도로 있습니다. 이 국가금융검찰은 2014년에 신설된 부서로서, 파리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국을 관할지역으로 하는 금융경제범죄 전문검찰청입니다. 이 부서의 수장은 일반검찰 디비전의 수장인 차장검사급이 아니라 검사장급입니다. 즉, 파리 지방검찰청 안에 일반검찰 조직을 지휘감독하는 검사장 외에 국가금융검찰 조직을 지휘감독하는 다른 검사장이 한 명 더 있는 구조이고, 그래서 파리 법원 홈페이지에도 일반검찰 조직 항목 외에 이 국가금융검찰 조직에 관한 항목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현재 이 부서에는 18명의 검사가 근무하고 있습니다.
위 일반검찰의 조직도를 보면, 제2디비전의 F2섹션은 'Affaires économiques, financières & commerciales(경제, 금융, 상사 사건)'을 전담하는 부서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건 중 전국을 관할지역으로 하는 사건은 국가금융검찰에서, 그렇지 않은 사건은 바로 이 F2섹션에서 각각 담당하는 구조인 것입니다.
국가금융검찰 외의 또다른 검찰조직으로는, 올해 7월 신설된 'Parquet National Antiterroriste(국가대테러검찰)'이 있습니다.
그동안 테러 사건은 1986년부터 제4디비전 C1섹션(Terrorisme et atteinte à la sûreté de l'Etat, 테러 및 공안부)에서 담당하여 왔는데, 국가대테러검찰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됩니다. 국가대테러검찰은 2015년부터 프랑스를 강타하고 있는 일련의 테러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금융검찰을 모델로 삼아 신설된 조직으로서, 역시 검사장급이 수장을 맡고 있습니다. 현재 이 부서를 이끌고 있는 초대 검사장은 Jean-François Ricard입니다.
2019년 7월 1일자 Le Point지의 'À quoi va servir le Parquet national antiterroriste?' 기사의 설명에 의하면, 이 부서의 초대 구성원은 27명의 검사인데 검사장을 비롯해, 2명의 차장검사, 1명의 비서실장, 4명의 수석부장검사, 12명의 부장검사, 그리고 7명의 평검사(최연소자는 29세)가 그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2개의 특수한 부서 외에 또다른 전문부서가 파리 지방검찰청에 추가로 신설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2019년 12월 19일자 Le Monde지의 'Le parquet de Paris se réorganise face à la grande criminalité organisée' 기사에 의하면, 파리 지방검찰청의 Rémy Heitz 검사장은 복잡하고 사안이 중대한 조직범죄와 금융범죄를 전담하기 위한 부서를 신설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고 합니다. 이 부서 역시 전국을 관할지역으로 할 예정입니다. 이 검사장은 이 부서의 명칭에 대해 일단 'Juridiction nationale de lutte contre la criminalité organisée(Junalco)'라고 표현하고 있군요.
아무리 프랑스가 이미 오래 전 선진국 지위에 올라선 안정되고 정적인 사회라 하더라도, 꾸준히 변화하는 세상일에 발맞추어 사법기관의 역할과 구성도 수시로 손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 검찰의 역할 확대와 전문화가 눈에 띕니다. 물론 이른바 '다이나믹 코리아'와의 비교는 도저히 불가능하겠지만요.
2019년 12월 1일 일요일
[독서일기] 퇴사하겠습니다
저자 이나가키 에미코는 전직 일본인 기자입니다. 1987년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하여 2016년에 퇴사하였는데, 이 책은 퇴사 직후에 쓴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40세에 처음 퇴사할 마음을 먹게된 계기와 그 쉽지 않은 결심을 결국 50세에 실행에 옮기기까지의 과정을 가벼운 문체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퇴사하겠습니다'라는 제목이 시선을 확 잡아끕니다. 얼추 30대부터 50대 사이에 걸쳐있는 어마어마한 인구의 직장인들은 죄다 이 제목을 예사롭지 않게 볼 듯합니다.
저는 '퇴사'라는 단어에서 이런 단어들이 연상됩니다. 곤경, 당혹, 불안, 막연, 궁핍 등 부정적인 말들이 먼저 떠오르는 듯 하더니, 반대로 설렘, 희망, 자유, 해방 등과 같은 긍정적인 말들도 함께 떠오릅니다. 저는 아직 직장에 몸담고 있긴 하지만 이제 막 50대에 접어든 처지여서인지, 극단의 이미지를 한데 품고 있는 묘한 단어로 보이는군요.
책은 분량이 여백 많은 200쪽에 불과하지만, 나름 다양한 에피소드와 생각거리들이 담겨 있습니다. 다만, 아마도 독자마다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공감을 느낄 부분은 각양각색일 것 같습니다. 제가 공감한 부분은 딱 한 군데입니다. 그 부분만 여기 옮겨보겠습니다.
당시 나는 오사카 본사 데스크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직접 기사를 쓰는 게 아니라 남이 쓴 기사를 수정하거나 줄이거나 해서 '완성품'으로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중간관리직, 직장인도 마흔 가까이 되면 이런 일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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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무엇보다 '퇴사하겠습니다'라는 제목이 시선을 확 잡아끕니다. 얼추 30대부터 50대 사이에 걸쳐있는 어마어마한 인구의 직장인들은 죄다 이 제목을 예사롭지 않게 볼 듯합니다.
저는 '퇴사'라는 단어에서 이런 단어들이 연상됩니다. 곤경, 당혹, 불안, 막연, 궁핍 등 부정적인 말들이 먼저 떠오르는 듯 하더니, 반대로 설렘, 희망, 자유, 해방 등과 같은 긍정적인 말들도 함께 떠오릅니다. 저는 아직 직장에 몸담고 있긴 하지만 이제 막 50대에 접어든 처지여서인지, 극단의 이미지를 한데 품고 있는 묘한 단어로 보이는군요.
책은 분량이 여백 많은 200쪽에 불과하지만, 나름 다양한 에피소드와 생각거리들이 담겨 있습니다. 다만, 아마도 독자마다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공감을 느낄 부분은 각양각색일 것 같습니다. 제가 공감한 부분은 딱 한 군데입니다. 그 부분만 여기 옮겨보겠습니다.
당시 나는 오사카 본사 데스크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직접 기사를 쓰는 게 아니라 남이 쓴 기사를 수정하거나 줄이거나 해서 '완성품'으로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중간관리직, 직장인도 마흔 가까이 되면 이런 일을 하게 됩니다.
요컨대 출세경쟁 비슷한 것의 입구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그때까지는 선배와 상사들이 나름대로 신경 써주었고, 나는 기회를 얻어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면서 무럭무럭 자라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복한 무명 시절은 슬슬 종말을 고하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나는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인간인가 아닌가 하는 '판별'이 시작되는 나이대에 접어들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인생의 반환점'에서 내가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한 세대 전인 고도 성장기라면 또 모를까, 지금 시대에 그런 출세경쟁을 벅찬 마음으로 맞이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야, 마지막까지 '이기는' 사람이 되면 좋긴 하겠지요. 하지만 마지막까지 이긴다는 게, 요약하자면 사장이 된다는 겁니다. 사장이란 사람은 사내보나 주간지 사진으로 말고는 직접 본 적도 없습니다. 그만큼 멀고 먼 존재입니다. 그 외 모두는 어딘가에서 반드시 '지게' 되어 있습니다.
회사원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리고 회사원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사람의 욕망이란 것에는 정말 무서운 구석이 있습니다. 나는 그걸 회사원이 되고 나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만족한다’는 것이 의외로 어려운 일입니다.
평범한 시선으로 보면, 뭐 사장까지 안되더라도 과장이나 부장쯤이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겠느냐 싶겠지요. 그 말이 백번 옳습니다. 나 역시 늘 그렇게 생각했고요. 그러나 실제 회사속에 있다보면 그게 말이 쉽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부장이 되지 못했을 때(실제로 대다수 사람들이 부장이 되지 못합니다), 당연히 자기 이외의 누군가가, 그것도 동기나 후배 중에서 누군가가 부장이 됩니다. 그건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줍니다.
입사하고 나서 내내 그렇게 상처 입고 주눅 들고 투지를 잃어가며, 불만과 불우한 감정에 터져버릴 것 같은 심경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선배들을 정말로 많이 봐왔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임원만 되어도 그야말로 엄청난 출세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사장이 되지 못한 것을 끊임없이 한스럽게 생각하는 전무도 있다니까요, 그 회사라는 곳에는!
정말 어쩌면 그렇게 출세주의자들의 집합체인지!
원래는 모두 '신문기자'가 되고 싶어서 입사한 거 아니에요? 평생 '기자' 해도 좋잖아요!
......라고 그렇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나는. 그런데 뜻밖에도, 나 역시 어느덧 인사이동이 발표될 때마다 일희일비하게 되더란 말이죠.
29쪽부터 31쪽까지에 나오는 내용으로, 저자가 인생의 반환점으로 생각하는 40세에 처음으로 퇴사를 머릿속에 떠올렸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제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든 딱 한 구절이 바로 "그 외 모두는 어딘가에서 반드시 '지게' 되어 있습니다"라는 부분입니다. 피라미드의 정점인 사장이 되지 않는 한, 그 사장 한 사람만 빼고는 회사에 있는 사람 누구나 '지는 상황'이 반드시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한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그 앞뒤 부분을 길게 인용하였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중간관리자가 되면 이제 엄격하고 냉정한 '판별'의 단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냥 있다보면 당장의 위기는 어찌어찌 모면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반드시 지게 되어' 있기도 합니다. 사실 모두들 정답도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는 다 마지막엔 지게 되는 길을 향해 오늘도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고, 받아들여야 할 현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그런 당연한 정답보다 저자가 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겁니다. 즉, '퇴사'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미리 준비하느냐 안 하느냐 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저자 자신은 무려 10년이나 퇴사를 준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0세에 이르렀을 때, 앞으로 10년 후인 50세가 되면 퇴사해야지 라는 다짐을 하며 10년 동안 퇴사를 준비하였답니다. 퇴사를 미리 준비한다는 게 물론 퇴사라는 목표를 위해 현재의 일은 대충대충 하며 시간을 때우겠다는 의미는 분명히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이 하루하루를 허투루 살지 않으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로, 퇴사를 준비하는 사람이야말로 지금의 일에 더 애정을 갖고 최선을 다하게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서 말하는 '퇴사 준비'라는 게, 퇴사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준비한다는 의미 외에 현재부터 퇴사 직전까지의 지금 직장에서의 생활과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든 딱 한 구절이 바로 "그 외 모두는 어딘가에서 반드시 '지게' 되어 있습니다"라는 부분입니다. 피라미드의 정점인 사장이 되지 않는 한, 그 사장 한 사람만 빼고는 회사에 있는 사람 누구나 '지는 상황'이 반드시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한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그 앞뒤 부분을 길게 인용하였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중간관리자가 되면 이제 엄격하고 냉정한 '판별'의 단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냥 있다보면 당장의 위기는 어찌어찌 모면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반드시 지게 되어' 있기도 합니다. 사실 모두들 정답도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는 다 마지막엔 지게 되는 길을 향해 오늘도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고, 받아들여야 할 현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그런 당연한 정답보다 저자가 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겁니다. 즉, '퇴사'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미리 준비하느냐 안 하느냐 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저자 자신은 무려 10년이나 퇴사를 준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0세에 이르렀을 때, 앞으로 10년 후인 50세가 되면 퇴사해야지 라는 다짐을 하며 10년 동안 퇴사를 준비하였답니다. 퇴사를 미리 준비한다는 게 물론 퇴사라는 목표를 위해 현재의 일은 대충대충 하며 시간을 때우겠다는 의미는 분명히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이 하루하루를 허투루 살지 않으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로, 퇴사를 준비하는 사람이야말로 지금의 일에 더 애정을 갖고 최선을 다하게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서 말하는 '퇴사 준비'라는 게, 퇴사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준비한다는 의미 외에 현재부터 퇴사 직전까지의 지금 직장에서의 생활과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9년 11월 26일 화요일
[독서일기] '다섯 번째 증인' (feat. 미국 형사사법제도) 제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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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iMagistrat
시간:
11/26/2019 09:30: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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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439-445쪽] “변호인 측은 피고인 리사 트래멀을 증인으로 부르겠습니다.”
......
피고인이 증인으로 불려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워서 법정 안 곳곳에서 속삭임과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첫 번째 증인으로 불려 나왔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일반적으로 변호인들은 의뢰인을 증인으로 세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 전술은 위험 대비 보상률이 상당히 낮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의뢰인이 한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의뢰인이 무슨 말을 할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증인선서를 하고 나서, 자신의 유무죄를 결정지을 열두 명의 배심원들 앞에서 하나라도 거짓말을 하다가 들키면 그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
변호인 측 첫 증인으로 피고인 리사 트래멀을 부른 목적은 세 가지였다. 첫째, 그녀의 부인하는 말과 설명이 기록되기를 바랐다. 둘째, 증인석에 앉은 그녀의 모습이 배심원들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살인 사건에 인간의 얼굴을 입히기를 바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작고 연약해 보이는 여성이 몰래 숨어서 기다렸다가 남자의 머리를 망치로 강력하게 그것도 세 번이나 가격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배심원들의 마음속에 싹트기를 바랐다.
---> 검찰 측 증인들에 대한 신문절차가 모두 끝나고, 이제부터는 피고인과 변호인 측 증인들에 대한 신문절차가 시작됩니다. 이제 할러 변호사가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서는 시간이죠.
할러 변호사는 첫 번째 증인으로 피고인 본인을 내세우는데요, 여기서 우리 제도와 미국 제도의 차이점 한 가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제도에서는 피고인은 증인으로서의 자격이 없기 때문에 증인신문의 대상이 아닙니다. 대신 ‘피고인신문’이라는 절차가 별도로 있어서 양쪽 당사자의 증인신문이 모두 끝나면 피고인신문 절차에서 피고인이 신문을 받게 됩니다. 증인신문의 대상인 경우는 허위진술을 하면 위증죄의 처벌을 받을 수 있지만, 피고인신문의 대상인 경우는 허위진술을 하더라도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에 피고인 입장에선 증인신문보다 부담이 적습니다. 게다가 실제 재판에서 피고인신문은 사건에 따라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합니다.
미국은 피고인도 증인신문의 대상이 될 뿐이고, 우리와 같은 피고인신문이라는 절차 자체가 없습니다. 과거에는 미국에도 피고인신문 절차가 있었으나, 피고인이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는 일이 일반화되면서 피고인신문의 실익이 없어져 아예 이 절차가 사라지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피고인신문 대신 피고인을 증인신문의 대상이 될 수 있게 한 것인데, 피고인이 증인신문에 나오는 경우에는 다른 증인들과 마찬가지로 진술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어서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여야 하고 그러다 허위진술을 하면 위증죄로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피고인이 증인신문에 나오는 것은 피고인에게 불리한 측면도 있으므로, 할러 변호사의 설명대로 실제 재판에서 피고인이 증인신문에 나서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러 변호사가 굳이 피고인을 첫 번째 증인으로 내세운 이유는, 그도 그녀가 결백하다고 믿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결백한 그녀가 배심원들에게 충분히 우호적인 인상을 주고 배심원들의 마음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결백한 피고인만큼 우월한 증거는 더 없을 테니까요.
아무튼 저는 형사재판에서는 피고인신문이든 증인신문이든 어떤 형태로든 피고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기회가 가장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피고인으로부터 자백이든 변명이든 일단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사건 내용을 가장 잘 아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피고인이기 때문입니다. 사건 내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가만히 놔두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만 모여서 이게 맞네 저게 맞네 떠들고 있는 건 매우 우스꽝스런 일이기 때문입니다.
[446-447쪽]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증인. 미첼 본듀란트를 살해했습니까?”
“아뇨, 죽이지 않았습니다.”
“망치를 갖고 가서 은행 주차장에서 망치로 그를 가격했습니까?”
“아뇨, 전 거기에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증인의 차고에서 사라진 망치가 본듀란트 씨를 살해하는 데 사용되었을까요?”
“모르겠어요.”
“본듀란트 씨의 혈흔이 어떻게 증인의 신발에서 발견됐을까요?”
“모르겠어요!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저한테 누명을 씌운 거예요!”
나는 잠깐 숨을 고르고 목소리를 차분히 한 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증인. 증인은 키가 몇입니까?”
......
“160센티미터요.”
---> 할러 변호사가 증인 자격으로 나온 리사 트래멀을 상대로 주신문을 하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가 사건의 쟁점을 적절히 정리해서 던지는 질문 내용들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마지막 질문을 리사 트래멀의 키가 얼마인지로 마무리하는 장면도 배심원들에게 상당히 극적인 효과와 긴 여운을 남길 것으로 보입니다. 할러 변호사는 배심원들에게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지 잘 좀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작은 여자가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큰 남자를 혼자서 살해할 수 있느냐고요!”
[447-448쪽] ...... 프리먼은 적어도 하나의 카드를 몰래 숨겨놓았다가 결국에는 꺼내서 사용했다.
“아까 할러 변호사가 증인에게 이 범죄를 저질렀느냐고 물었을 때, 증인은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직업이 교사이고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라고요. 기억나세요?”
“네, 사실입니다.”
“하지만 4년 전 학생을 3면으로 이루어진 자로 때려서 강제로 전근을 가게 되었고, 분노조절 장애 치료를 받아야 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나는 재빨리 일어서서 이의를 제기했고 재판부 협의를 요청했다. 판사가 우리에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재판장님.” 페리 판사가 묻기도 전에 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개시된 증거에는 3면으로 이루어진 자는 없었는데요. 갑자기 어디서 툭 튀어나온 겁니까?”
......
판사는 배심원들에게 검사의 질문을 무시하라고 지시했고 프리먼에게는 다른 질문을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배심원들이 이미 다 알아버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 질문을 기록에서는 삭제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배심원들의 기억 속에서는 삭제할 수 없을 것이었다.
---> 이번에는 리사 트래멀에 대한 프리먼 검사의 반대신문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프리먼 검사는 할러 변호사가 주신문에서 만들어놓은 리사 트래멀의 무고하고 억울한 사람 이미지를 흔들어놓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검사는 남을 살해하기까지 한 사람이니 평소에도 어느 정도의 폭력적 성향이 있었으리라는 점을 부각시키려 합니다. 그러다 리사 트래멀의 과거 폭력 전력이라는, 미리 상대방에게 오픈하지 않은 자료를 갖고 꼼수를 쓰게 됩니다. 할러 변호사가 미처 손을 쓸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죠. 앞서 할러 변호사가 검찰 측 증인 구티에레스 박사에게 과거의 잘못된 증언 전력에 관한 불의타를 날리는 꼼수를 쓴 데 대한 보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 장군 멍군입니다.
서로 이렇게 꼼수를 쓰더라도 재판장이 할 수 있는 제재수단이라곤, 경고를 날리고 기록에서 삭제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모양입니다.
[449쪽] 검사는 반대신문을 5시까지 끌고 가서, 밤사이 뭔가를 마련해서 다음날 아침 리사 트래멀을 재공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판사는 그날 재판의 휴회를 선언했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
---> 프리먼 검사가 오후 몇 시부터 리사 트래멀에 대한 반대신문을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재판을 마칠 오후 5시까지 반대신문을 계속 진행합니다. 퇴근시간이 되어 반대신문은 중지되고 다음날로 넘어가게 됩니다.
검사 입장에선 반대신문 중간에 이렇게 긴 간격이 생기는 게 유리한 일일 것 같습니다. 저녁식사를 하거나 잠자리에 들 때 문득 피고인을 공격할 새로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죠.
[459-465쪽] 금요일 아침, 안드레아 프리먼 검사가 전날에 이어 리사 트래멀을 반대신문한 지 20분 만에 전날 내가 세운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졌다.
......
“페이스북도 하고 있고요, 그렇죠?”
“네.”
......
“...... 그리고 증인은 페이스북에 가입한 이후 담벼락에 정기적으로 글을 올려왔고요, 그렇죠?”
“네, 꽤 정기적으로 올린 편이죠.”
“사실 이 재판에 관해서도 업데이트를 했고요, 그렇죠?”
“네,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제 견해를 올렸습니다.”
나는 혈압이 확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입고 있는 정장이 비닐로 만들어진 땀복처럼, 체온을 그대로 가둬놓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싶었지만 혹시 배심원이 그 동작을 본다면 변호인이 너무 초조해한다는 인상을 줄 것 같았다.
---> 아하, 그동안 리사 트래멀이 페이스북을 통해 그녀의 지지자들에게 재판상황을 열심히 실시간 중계하고 있었군요. 그녀가 쓴 글 수도 어마어마합니다. 1,200건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많은 글 중 이제까지 할러 변호사가 변론해온 내용과 모순되거나 그녀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도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매사 남에게 들이대는 잣대나 자신에게 들이대는 잣대나 대동소이한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만, 말로든 글로든 사람이 흔적을 많이 남겨놓으면 그것이 나중에 자신에게 덫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리사 트래멀이 헤비 페북러인 줄 까맣게 모르고 있던 할러 변호사로선 초강력 불의타지만, 검사가 바로 전날 밤에 리사 트래멀의 페북 계정을 발견했다는데야 증거개시절차 위반이든 뭐든 어찌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역시 프리먼 검사가 어제 재판 끝날 때까지 반대신문을 길게 끌어 하룻밤이라는 작전타임을 가진 게 주효하였네요.
할러 변호사는 갑자기 오른 혈압을 진정시키기 위해 넥타이를 좀 풀고 싶지만, 참습니다. 무대 위에 오른 사람은 극히 사소한 동작만으로도 관객들에게 별의별 상상과 억측의 여지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우는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에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합니다. 아무리 근엄하게 무게잡는 재판이라도, 결국은 ‘쇼’라는 성격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네요.
[465-467쪽] “살인 사건이 발생한 날 아침, 증인은 그 주차장에 다시 가서 미첼 본듀란트를 기다렸습니까?”
“아뇨, 안 갔어요! 저는 거기에 가지 않았습니다.”
“증인은 커피숍에서 미첼 본듀란트를 보고 분노했고 그가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증인은 주차장으로 가서 그를 기다렸고 ......”
“이의 있습니다.” 내가 소리쳤다.
“...... 망치로 때려서 그를 살해했습니다, 그렇죠?”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리사 트래멀이 외쳤다. “안 그랬다고요!”
그녀는 궁지에 몰린 동물처럼 큰 소리로 헉헉거리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 프리먼 검사는 리사 트래멀에게 페이스북 글 인쇄자료를 건네주고는 몇 군데를 낭독하도록 하는데, 리사 트래멀이 페이스북에 쓴 그 많은 글 중 딱 두 편의 글이 그녀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 사건 이전인 작년 9월에 그녀가 피해자의 직장 주차장과 주차 위치를 알아내 그곳에서 피해자를 기다린 일이 있었다는 내용의 글입니다. 피해자의 주차 위치를 알고 있을 정도이니 그곳에서의 계획적인 살인범행이 가능하였으리라는 추론도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승기를 잡자마자 검사는 가차 없이 몰아쳐 피고인으로부터 극적인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이제까지 할러 변호사가 만들어놓은 피고인의 선량하고 평범한 소시민의 인상을, 이제까지 봐온 것과는 뭔가 좀 다른 구석도 있어 보이는, 뭔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인물의 인상으로 바꿔버립니다.
[473-478쪽] “재판장님, 이 문서를 증인에게 보여줘도 되겠습니까? 증인의 페이스북 친구들 명단을 인쇄한 것입니다.”
......
“증인의 페이스북 친구인 도널드 드리스콜이라는 사람이 ALOFT 직원이었다고 한다면 무슨 생각이 드실 것 같습니까?”
“ALOFT에서 제 게시글들을 보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생각이요.”
“그럼 이 드리스콜이라는 사람은 증인이 어디 갔다 왔는지 어디 갈 건지 다 알았을 거란 말이죠,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증인이 은행 건물에서 본듀란트 씨의 주차 자리를 찾았고 그를 기다릴 거라고 썼던 지난 9월의 게시글에 드리스콜이 접근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죠?”
“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증인. 더 이상 질문 없습니다.”
---> 할러 변호사의 순발력이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프리먼 검사의 뜻밖의 공격으로 의뢰인과 마찬가지로 혼이 나가있을 법도 한데, 재판장에게 이른 휴식시간을 요청한 후 그 짧은 시간 동안 동료들과 함께 리사 트래멀에 대한 재주신문을 급히 준비합니다.
휴식시간 동안 재빠르게 리사 트래멀의 페이스북 친구 명단에서 돈 드리스콜이라는 사람을 찾아내는데, 마침 그는 할러 변호사가 이 사건의 진범으로 몰고 있는 오파리지오의 회사인 ALOFT의 직원입니다. 이 작은 끈을 어떻게든 활용해서 다시 음모론을 제기하여 이 위기를 벗어나야 합니다.
다행히 재주신문에서 리사 트래멀은 할러 변호사의 의도대로 드리스콜이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을 감시해왔다는 생각이 든다고 진술하며 음모론을 적절히 뒷받침해 줍니다.
또 다행히, 프리먼 검사가 좀 전에 페이스북이라는 불의타를 날린 데 대한 보상격으로, 재판장은 할러 변호사에게 드리스콜을 증인으로 부를 기회를 허락합니다.
이제 할러 변호사는 오파리지오가 드리스콜이라는 자신의 직원을 통해 평소 페이스북으로 리사 트래멀을 감시하다 이번에 그녀를 피해자의 살인범으로 몬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진행시켜 나가기로 합니다. 프리먼 검사의 페이스북 공격 속에서 드리스콜을 찾아내 순식간에 자신의 음모론을 공고히 해버리는 솜씨가 정말 대단합니다. 소설이라 그런 걸까요?
[479-483쪽] ...... 그녀는 하버드와 MIT, 존제이 칼리지에서 학위를 받았고, 현재 존제이의 연구원이었다. 외모가 출중하고 상냥한 여성이었다. 게다가 증인석에서는 한 마디 한 마디 성실하게 진실만을 말해서 스스로 빛이 났다. 형사소송 변호사들에겐 그야말로 꿈의 증인이었다. ......
......
아슬래니안은 망치를 갖고 증인석을 떠나 배심원들 앞에 서서 시연을 시작했다.
“제가 가졌던 의문은 피고인의 키를 가진 여성이, 저와 마찬가지로 160센티미터인 여성이 구두를 신고 키가 185센티미터가 넘는 남성의 정수리를 가격해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
......
“...... 피해자의 자세에 대해서 이틀을 고민했습니다. ......”
......
“...... 그렇다면 이 자세만 남게 되죠.”
아슬래니안은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혀 얼굴이 천장을 향해 있는 마네킹의 머리를 가리켰다. ......
---> 또다시 돋보이는 매력의 ‘메신저’가 할러 변호사의 증인으로 등장하는데, 그 메신저는 심지어 ‘메시지’도 훌륭히 전달합니다.
이번 증인은 샤미람 아슬래니안이라는 이름의 법과학 전문가입니다. 피해자와 같은 키인 187센티미터의 마네킹을 법정에 데려와 160센티미터 키의 여성이 이 키 큰 남성을 공격하는 것은 도대체 가능하지가 않다는 논리를 시각적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단, 이 한 가지 경우에는, 이 작은 여성이 키 큰 남성을 공격하는 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남성이 얼굴이 천장을 향하도록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힌 상태로 서 있는 경우 말이죠. 만약 피해자가 그런 자세로 서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리사 트래멀도 유력한 용의자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사람이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주차하고 막 내리자마자 그런 자세로 서 있을 일이 있을까요? 그런데 이 소설의 맨 마지막 결론을 보면, 바로 이 부분이 이 사건의 핵심 포인트가 됩니다.
[485쪽] ...... 4시가 가까워지자 페리 판사는 주말 동안의 휴회를 선언했다. 이틀 동안의 휴가에 들어가는 내 마음은 우리가 우세하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우리는 검찰이 제시하는 증거의 상당 부분에 대해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검찰의 주장을 약화시켰고, 리사 트래멀이 범행을 부인하고 자신은 누명을 썼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법과학 전문가가 증인으로 나서서 피고인이 그 범죄를 저지르기가 신체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추정하면서 한 주를 마감했다. 피해자가 고개를 번쩍 들고 주차장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치명적인 가격을 가하지 않은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 금요일의 재판은 재판장의 개인적 사정으로 4시가 되기 전에 일찍 마감합니다. 이제 이 법정에 있던 사람들 모두 주말이라는 휴식이 기다립니다.
할러 변호사는 프리먼 검사의 반격으로 잠시 궁지에 몰린 듯했지만 일단 위기에서는 벗어났고, 그 역시 과학을 이용해 배심원들의 마음에 합리적 의심을 심어놓는 데 성공했다고 자신하며 주말을 맞이합니다.
[502쪽] 배심원단이 법정에 들어와 착석하고 애런슨이 증인석에 앉자 나는 직접신문(direct examination)을 시작했다. 우선 애런슨이 리사 트래멀의 자택 압류에 관한 변호인 측 전문가가 된 경위부터 물었다.
---> 이 소설은 첫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그 무대가 거의 법정 안을 떠나지 않습니다. 전작인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서는 법정 밖에서 다양한 에피소드가 벌어지고, 할러 변호사의 수사관이 의문의 죽음을 맞고 할러 자신까지 총을 맞기도 하는 등 변화무쌍한 스토리 덕에 영화화도 가능했을 것 같지만, 이 『다섯 번째 증인』은 도통 법정을 떠나지 않고 미첼 본듀란트 외엔 죽는 사람도 없으니 영화로 만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제 재판 둘째 주를 맞는 월요일 아침, 할러 변호사의 두 번째 증인은 그가 고용한 신참 변호사 애런슨입니다. 애런슨 변호사는 할러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주택압류 민사사건을 주로 담당하였기에, 이날 증인으로 나와서는 리사 트래멀의 집이 피해자의 회사로부터 압류를 당한 과정과 그 압류에 절차적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이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나라 제도와의 큰 차이를 또 한 가지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형사재판에서는 모름지기 증인이라는 자격으로 재판에 나올 수 있는 사람으로는, 양쪽 당사자(즉, 검사와 피고인)의 그 누구와도 가깝지 않은, 그 중간에 위치한, 전적으로 제3자적 입장에 있는 사람을 우선 떠올리게 됩니다. 가장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예가, 길을 가다 우연히 어떤 범죄장면을 본 목격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미국이나 우리나 최적의 증인입니다. 물론 양쪽 당사자 중 어느 한 쪽과 가까운, 사실상 그 어느 한 쪽의 부탁으로 법정에 나와 전적으로 그쪽에 유리한 증언을 하는 증인들도 있긴 합니다만, 그럴 경우 그 진술의 신빙성은 확 떨어지기 때문에 사실 그다지 영양가 있는 증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런 증인은 사건과 크게 관련도 없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경우 재판부에서 증인으로 서게 해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애런슨 변호사는 할러 변호사에게 고용되어 할러 변호사의 지시에 따라 이 사건 재판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즉 전적으로 피고인과 같은 편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 애런슨 변호사도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 증인으로 나와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재판 같으면 십중팔구 증인으로 나오기도 힘들었을 사람이 말이죠.
자, 여기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 애런슨 증인의 증언이 신빙성 있느냐 없느냐는 실제 그 증언을 들어본 다음에 판단하여야 할 나중 일입니다. 어떤 사건에 대해 알고 있거나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단 법정에 나와 그가 경험한 사실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배심원들은 법정에서 가급적 많은 증거들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배심원들이 법정에 펼쳐지는 풍부한 증거들을 직접 보고 들어야 유죄냐 무죄냐의 판단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이른바 ‘공판중심주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배심원들이 만나야 할 증거를, 이런저런 제약을 걸어(특히 증거능력을 이유로) 아주 조금밖에 허용하지 않는 재판은 곤란한 것이고 공판중심주의에 반하는 재판입니다.
[513-517쪽] 나는 도널드 드리스콜을 증인으로 불렀다.
......
“네, 그녀가 페이스북 계정을 갖고 있고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한다고, 그녀의 FLAG 활동과 계획을 감시하기에 좋을 것 같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상관이 뭐라던가요?”
“페이스북을 감시하고 그 결과를 요약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이메일로 보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했고요.”
......
“그럼 증인이 매주 리사 트래멀의 활동에 관해 요약한 보고서 중에 그녀가 웨스트랜드 내셔널 주차장에 가서 미첼 본듀란트를 기다리고 있다고 올린 게시글 내용을 포함한 보고서도 있었나요?”
“네, 있었습니다. ......”
---> 할러 변호사의 네 번째 증인은 페이스북을 통해 리사 트래멀의 동향을 감시하였다는 도널드 드리스콜입니다.
이 증인신문을 통해 할러 변호사는 피해자를 살해하고 리사 트래멀에게 누명을 씌운 진범은 평소 드리스콜을 통해 리사 트래멀의 동향을 감시해온 오파리지오라는 의혹 쪽으로 배심원들을 몰고 갑니다.
[520-522쪽] 이제 프리먼 검사가 믿어마지 않는 서류철을 들고 독서대로 와서 자리를 잡고 서류철을 펼쳤다.
......
“ALOFT에서 갑자기 해고된 것은 증인이 회사 자산을 체계적으로 훔치다가 발각됐기 때문이 아닌가요?”
......
“회사 명의로 고가의 소프트웨어를 주문하고, 보안번호를 해킹해 들어간 후, 소프트웨어를 불법 복제해 해적판으로 인터넷에 팔지 않았습니까?”
......
“검찰 측 증거물 9호입니다, 재판장님.”
...... ALOFT의 내부감사 보고서 사본이었다.
---> 확실한 반대신문 전략은 증인의 신뢰성을 공격하는 것이고,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증인이 주장하는 내용 자체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중 문제입니다. 증인이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걸 부각시켜 결국 그의 말만 믿고 판단하여서는 안 된다는 인상을 배심원들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프리먼 검사가 드리스콜에 대한 반대신문에서 바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드리스콜의 과거 지저분한 잘못들, 특히 그의 정직하지 못했던 과거 행적을 공개합니다. 그가 오파리지오의 회사인 ALOFT에서 해고된 것은 회사에 배임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공개됨으로써, 이 일로 오파리지오와 적대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그의 증언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 돼버리고 맙니다.
드리스콜은 결국 프리먼 검사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무너져버리고, 할러 변호사를 또다시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534쪽] 화요일 아침 루이스 오파리지오가 증인석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 그는 내가 부른 증인이었지만 우린 서로를 증오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재판 초기부터 나는 내 의뢰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오파리지오를 지목해왔는데, 이제 그가 내 앞에 앉았다. ......
---> 드디어 할러 변호사가 심혈을 기울여 소환한 다섯 번째 증인이 등장합니다. 여태 이 증인을 위해 법정에서 여러 의혹의 실타래들을 풀어놓았었습니다. 이제 이 실타래들을 한데 끌어 모아서 작품을 만들어 보여야 합니다. 할러 변호사가 제기한 의혹대로, 이 증인은 뭔가 어둠의 세계에서 서식하는 인물, 리사 트래멀보다는 누군가를 살해하는 데 훨씬 더 적합해 보이는 인물로 비쳐져야 합니다.
할러 변호사와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긴장감이 최고조로 달하는 장면입니다. 이런 클라이맥스에 등장한 증인이어서 이 작품의 제목이 ‘다섯 번째 증인’인 걸까요?
[539-546쪽] “...... 이 비공개 논의가 실은 증인의 회사 ALOFT를 어느 상장기업에 매각하기 위한 협상이었습니다, 맞습니까?”
......
...... 프리먼이 힘을 준 낮은 목소리로 이의를 제기했다.
“이게 이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변호인이 우리를 월스트리트로 끌고 가는 것 같은데요, 재판장님. 이 내용은 리사 트래멀과, 이 사건 증거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재판장님, 이것도 제삼자 범인설과 관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디지털 영업일지의 한 페이지인데 증거개시절차를 통해 변호인 측에 전달되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으면 배심원들은 이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저 증인을 은근히 갈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살인의 동기입니다.”
......
“...... 본듀란트는 저 남자에게서 6천1백만 달러를 빼앗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건 너무나 자명한 일이고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죠. 그게 살인의 동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
“동기는 증거가 아니잖아요.” 프리먼이 말했다. “그건 증거가 아니고 변호인은 아무런 증거도 갖고 있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변호인의 주장은 오로지 말뿐입니다. 증거가 없죠. ......”
--->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오파리지오와 피해자 간의 갈등을 부각시켜보려 하지만 할러 변호사의 질문은 자꾸 변죽만 울리면서 핵심에는 다가가지 못하고, 이게 뭐하는 작전인가 싶은 의심을 잔뜩 품은 프리먼 검사와 페리 판사로부터 잇달아 제지를 받게 됩니다. 아직까지 오파리지오와 이 사건 사이의 관련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령 할러 변호사의 주장대로 사업상 있었던 문제로 평소 피해자가 오파리지오를 협박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래서 궁지에 몰려있는 오파리지오의 입장에선 피해자가 없어져주면 좋을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런 오파리지오의 피해자에 대한 적개심만 가지고 그가 피해자를 살해한 진범이라는 의심을 배심원들이 갖게 하는 데 충분한 걸까요? 여기까지만 읽어서는 프리먼 검사와 페리 판사의 불만처럼 할러 변호사의 전략이 여러모로 허황되게 보입니다.
[551-557쪽] “뉴욕 주가 보유하고 있는 기업 기록에 따르면, AA 베스트의 최대 주주가 도미닉 카펠리라는 사람이던데, 그를 잘 아십니까?”
“아뇨.”
......
나는 ...... 오파리지오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거였다. 당장 항복해, 안 그러면 당신 비밀이 온 세상에 알려질 거야. 르무어가 알게 될 거야. 당신 주주들이 알게 될 거고. 모두가 알게 될 거야.
......
나는 메모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이 기회였다. 오파리지오를 생포하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오파리지오 씨, 당신이 모른다고 주장하는 파트너인 도미닉 카펠리가 뉴욕......”
“재판장님?”
오파리지오였다. 그가 내 말을 끊었다.
“제 변호인의 충고와, 미합중국 헌법과 캘리포니아 주 법이 보장하는 진술을 거부할 권리(Fifth Amendment right)에 따라, 이 질문과 앞으로 나올 추가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하기를 정중히 거절하는 바입니다.”
나왔다.
나는 깜짝 놀란 듯 멍하니 서 있었지만, 연기였다. ......
그때 프리먼 검사가 날카롭고 높은 목소리로 이의를 제기했고, 재판부 협의를 요청했다.
---> 할러 변호사가 불만에 가득 찬 프리먼 검사와 페리 판사의 따가운 시선을 간신히 이겨 내가며 오파리지오 증인을 몰아붙입니다. 오파리지오의 사업 파트너들을 잔뜩 언급해가더니, 마침내는 그가 지분을 갖고 있던 윙 넛츠라는 택배 회사의 다른 지분권자인 도미닉 카펠리를 알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가는데, 여기서 갑자기 증인이 진술거부권을 행사합니다.
여기서 오파리지오가 언급한 ‘진술거부권’은, 원문상 ‘Fifth Amendment right’입니다. Fifth가 대문자로 시작하는 게 특이합니다. 이는 직역하면 ‘수정헌법 제5조의 권리’라는 의미입니다. 미국 수정헌법 제5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No person shall be held to answer for any capital, or otherwise infamous crime, unless on a presentment or indictment of a Grand Jury, except in cases arising in the land or naval forces, or in the Militia, when in actual service in time of War or public danger; nor shall any person be subject for the same offence to be twice put in jeopardy of life or limb; nor shall be compelled in any criminal case to be a witness against himself, nor be deprived of life, liberty, or property, without due process of law; nor shall private property be taken for public use, without just compensation.
누구라도, 대배심에 의한 고발 또는 기소가 있지 아니하는 한, 사형에 해당하는 죄 또는 파렴치죄에 관하여 심리를 받지 아니한다. 다만, 육군이나 해군에서 또는 전시나 사변시에 복무중에 있는 민병대에서 발생한 사건에 관하여서는 예외로 한다. 누구라도 동일한 범행으로 생명이나 신체에 대한 위협을 재차 받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사사건에 있어서도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당하지 아니하며, 누구라도 정당한 법의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또 정당한 보상 없이, 사유재산을 공공용(公共用)으로 수용당하지 아니한다.
[출처 : 세계법제정보센터, http://world.moleg.go.kr/web/tl/themaLgslReadPage.do?A=A&code=700201&searchType=all&searchPageRowCnt=10&CTS_SEQ=28071&AST_SEQ=1061&ETC=]
수정헌법 제5조에 규정된 여러 권리들 중 ‘어떠한 형사사건에 있어서도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를 '자기부죄금지 특권(the privilege against compelled self-incrimination)'이라고 하는데, 이로부터 유래되는 권리가 바로 진술거부권 또는 묵비권입니다.
[559-562쪽] “재판장님, 저는 이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변호인이 이 법정과 사법부를 모독해왔다고 생각합니다. ...... 이제 그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오파리지오는 묵비권 증인(a Fifth witness)이었습니다. 배심원단 앞에 허수아비처럼 내세웠다가 묵비권을 행사하면 바로 꺼내서 던져버릴 수 있는 증인 말입니다. 그게 변호인의 계획이었습니다. ......”
......
“이건 너무나 부당한 일입니다, 재판장님. 할러 변호사가 세운 계획이 틀림없고요. 직접신문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진술을 이끌어내고는 오파리지오를 몰아세워 묵비권을 행사하게 해서 검찰은 반대신문도 못 하고 어떤 식으로도 시정할 수가 없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이게 과연 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재판장님?”
......
“오파리지오의 진술 전체를 삭제하겠습니다.” 페리 판사가 선포했다. “배심원들에게 그 진술은 고려하지 말라고 할 거고요.”
......
판사가 배심원들에게 오파리지오가 말한 것을 모두 고려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있었지만 너무 늦었다. 메시지는 이미 전달되었고 모두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의도했던 대로.
---> 프리먼 검사가 할러 변호사에 대한 격한 분노의 감정을 재판장에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재판장 역시 할러 변호사에게 대단히 서운한 감정을 표시합니다.
원문의 ‘take the Fifth’를 번역자는 ‘묵비권을 행사하다’로 옮겼습니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take the Fifth (Amendment)’라는 표현이 있는데, 역시 ‘묵비권을 행사하다’라는 의미네요.
결국 이 소설의 원제목 ‘The Fifth Witness’의 한글 제목은 ‘묵비권을 행사하는 증인’ 정도가 옳고, ‘다섯 번째 증인’은 적절하지 않은 제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번역자도 위 대목을 정확히 번역하였듯이 분명히 대문자로 시작하는 ‘Fifth’가 ‘다섯 번째’가 아니라 ‘수정헌법 제5조’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는데, 왜 제목은 ‘다섯 번째 증인’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출판사 측에서 더 쉬운 제목을 원했던 것일까요.
아무튼, 할러 변호사는 오파리지오를 신문하면서 그가 마피아와 관련을 맺고 있는 등 뭔가 어두운 뒷배경이나 있는 듯이 거세게 몰아붙입니다. 그런 신문 과정에서 자칫 자신에게 제기되는 어두운 의혹으로 인해 주주의 불신이나 주가 하락 등 사업상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오파리지오로 하여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도중에 묵비권을 행사하도록 유도합니다.
할러 변호사가 이 증인을 이용해서 배심원들에게 의혹이나 잔뜩 심어주고 검사의 반대신문은 막아버린 것이라는 계략을 알아챈 프리먼 검사는 거칠게 항의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습니다. 이미 오파리지오가 먼저 할러 변호사의 계략에 말려들었고, 다음으로 배심원들도 그 계략에 말려들어버린 후입니다.
뒷부분에서 할러 변호사는 애런슨 변호사에게 이 당시의 자신의 속내를 다음과 같이 직접 밝힙니다.
[585쪽] “마피아와 관련 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밝혀질 거라는 게 분명해지면, 그걸 막아보려고 애쓸 거라고 생각했어. 그럼 어떻게 하겠어? 묵비권밖에 없지.”
이런 꼼수의 달인 할러 변호사를 얄미워해야 할지, 기발하다고 해야 할지, 참......
[564쪽] “...... 증인은 나를 위해 수사를 맡아서 해주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데니스?”
“네, 그게 내 직업이죠.”
“미첼 본듀란트 살인 사건 피고인의 변호를 위해서 광범위하게 수사를 했고요, 그렇죠?”
---> 이제 할러 변호사의 수사관 시스코가 마지막 증인으로 나섭니다. 오파리지오 묵비권 유도작전이 성공했으니, 이제 자신의 수사관을 이용해 쐐기를 박아버리려 하겠죠.
여기서도 앞서 애런슨 변호사가 증인으로 나왔을 때의 문제 제기를 똑같이 할 수 있겠습니다. 시스코 수사관 역시 중립적 입장에 선 제3자가 아니라 일방 당사자 편에 일방적으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다면 일단 증인으로 나올 자격이 있는 것이고, 그 증언이 신빙성 있냐 없냐는 별개의 문제에 불과합니다. 그게 ‘공판중심주의’입니다.
우리 형사법정 같으면, 이런 사람이 증인으로 채택될 가능성은 많지 않습니다. 중립적인 제3자가 아니니, 굳이 증언을 들어볼 필요가 있겠느냐는 이유로 말이죠. 같은 이유로, 검사 입장에서 중요한 증인인 수사담당 경찰관도 거의 증인으로 서지 못합니다. 피고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진술만 할 거라는 일방적인 의심 덕분이죠. 그런데도 우리 법정은 ‘공판중심주의’를 추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65-568쪽] “...... 웨스트랜드 내셔널 주차장의 출입구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컬렌 형사와 롱스트레치 형사가 카메라 녹화분을 살펴보면서 주차장이 문을 연 시각인 오전 7시부터 본듀란트 씨가 이미 사망했다고 확인된 시각인 오전 9시까지 그 주차장에 들어온 모든 차량의 번호를 적어놨더군요. ......”
......
“...... ALOFT가 웨스트랜드 내셔널에 정기적으로 문서를 전달할 때 윙 넛츠 택배를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목한 것은 왜 그 차량이 8시 5분에 주차장에 들어와서 은행 영업 시작 시각인 9시도 되기 전에 떠났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나는 시스코를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필요한 것은 전부 얻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뼈에 살이 붙어 있어도 접시를 물려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때로는 배심원들에게 의문만 제기하고 끝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질문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 시스코 증인이 미리 할러 변호사와 짠 대로 그들의 작전에 척척 맞는 증언을 해나갑니다. 할러 변호사와 시스코는 범행시점 무렵 범행장소인 주차장에 다녀간 택배회사 차량이 오파리지오와 어떻게든 몇 단계를 거쳐 연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군요. 그 사실을 피해자가 오파리지오에게 보낸 협박편지와 또 연결시켜 오파리지오 음모론을 만들어낸 것이구요.
아무튼 할러 변호사와 시스코는 오파리지오의 택배회사 차량이 이날 주차장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마치 대단히 특이하고 중요한 일인 것처럼 한껏 부각시킵니다. 아니, 평소 배달 일로 그곳을 오가던 택배 차량이 아침 일찍 다녀간 게 뭐가 이상한가요, 그 택배 차량이 다른 때도 그 시간대에 거길 다녀갔다는 사실만 밝혀진다면 이건 아무 의미도 없는 얘기인데, 결국 공연히 의혹이나 던져보겠다는 부적절한 증언이지 않은가요?
한편, 여기서 할러 변호사의 작은 변론기술 내지 연기 한 가지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시스코를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이 기대한 중요한 장면이 나왔을 때, 잠시 정적을 만들면서 배심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죠. “자, 여기 좀 봐봐” 하는 것이죠.
[568쪽] 내 직접신문은 범위가 매우 정확해서 차량번호판에 관한 진술만을 포함했다. 덕분에 프리먼이 반대신문에서 다툴 거리가 거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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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9-445쪽] “변호인 측은 피고인 리사 트래멀을 증인으로 부르겠습니다.”
......
피고인이 증인으로 불려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워서 법정 안 곳곳에서 속삭임과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첫 번째 증인으로 불려 나왔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일반적으로 변호인들은 의뢰인을 증인으로 세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 전술은 위험 대비 보상률이 상당히 낮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의뢰인이 한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의뢰인이 무슨 말을 할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증인선서를 하고 나서, 자신의 유무죄를 결정지을 열두 명의 배심원들 앞에서 하나라도 거짓말을 하다가 들키면 그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
변호인 측 첫 증인으로 피고인 리사 트래멀을 부른 목적은 세 가지였다. 첫째, 그녀의 부인하는 말과 설명이 기록되기를 바랐다. 둘째, 증인석에 앉은 그녀의 모습이 배심원들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살인 사건에 인간의 얼굴을 입히기를 바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작고 연약해 보이는 여성이 몰래 숨어서 기다렸다가 남자의 머리를 망치로 강력하게 그것도 세 번이나 가격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배심원들의 마음속에 싹트기를 바랐다.
---> 검찰 측 증인들에 대한 신문절차가 모두 끝나고, 이제부터는 피고인과 변호인 측 증인들에 대한 신문절차가 시작됩니다. 이제 할러 변호사가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서는 시간이죠.
할러 변호사는 첫 번째 증인으로 피고인 본인을 내세우는데요, 여기서 우리 제도와 미국 제도의 차이점 한 가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제도에서는 피고인은 증인으로서의 자격이 없기 때문에 증인신문의 대상이 아닙니다. 대신 ‘피고인신문’이라는 절차가 별도로 있어서 양쪽 당사자의 증인신문이 모두 끝나면 피고인신문 절차에서 피고인이 신문을 받게 됩니다. 증인신문의 대상인 경우는 허위진술을 하면 위증죄의 처벌을 받을 수 있지만, 피고인신문의 대상인 경우는 허위진술을 하더라도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에 피고인 입장에선 증인신문보다 부담이 적습니다. 게다가 실제 재판에서 피고인신문은 사건에 따라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합니다.
미국은 피고인도 증인신문의 대상이 될 뿐이고, 우리와 같은 피고인신문이라는 절차 자체가 없습니다. 과거에는 미국에도 피고인신문 절차가 있었으나, 피고인이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는 일이 일반화되면서 피고인신문의 실익이 없어져 아예 이 절차가 사라지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피고인신문 대신 피고인을 증인신문의 대상이 될 수 있게 한 것인데, 피고인이 증인신문에 나오는 경우에는 다른 증인들과 마찬가지로 진술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어서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여야 하고 그러다 허위진술을 하면 위증죄로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피고인이 증인신문에 나오는 것은 피고인에게 불리한 측면도 있으므로, 할러 변호사의 설명대로 실제 재판에서 피고인이 증인신문에 나서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러 변호사가 굳이 피고인을 첫 번째 증인으로 내세운 이유는, 그도 그녀가 결백하다고 믿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결백한 그녀가 배심원들에게 충분히 우호적인 인상을 주고 배심원들의 마음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결백한 피고인만큼 우월한 증거는 더 없을 테니까요.
아무튼 저는 형사재판에서는 피고인신문이든 증인신문이든 어떤 형태로든 피고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기회가 가장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피고인으로부터 자백이든 변명이든 일단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사건 내용을 가장 잘 아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피고인이기 때문입니다. 사건 내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가만히 놔두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만 모여서 이게 맞네 저게 맞네 떠들고 있는 건 매우 우스꽝스런 일이기 때문입니다.
[446-447쪽]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증인. 미첼 본듀란트를 살해했습니까?”
“아뇨, 죽이지 않았습니다.”
“망치를 갖고 가서 은행 주차장에서 망치로 그를 가격했습니까?”
“아뇨, 전 거기에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증인의 차고에서 사라진 망치가 본듀란트 씨를 살해하는 데 사용되었을까요?”
“모르겠어요.”
“본듀란트 씨의 혈흔이 어떻게 증인의 신발에서 발견됐을까요?”
“모르겠어요!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저한테 누명을 씌운 거예요!”
나는 잠깐 숨을 고르고 목소리를 차분히 한 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증인. 증인은 키가 몇입니까?”
......
“160센티미터요.”
---> 할러 변호사가 증인 자격으로 나온 리사 트래멀을 상대로 주신문을 하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가 사건의 쟁점을 적절히 정리해서 던지는 질문 내용들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마지막 질문을 리사 트래멀의 키가 얼마인지로 마무리하는 장면도 배심원들에게 상당히 극적인 효과와 긴 여운을 남길 것으로 보입니다. 할러 변호사는 배심원들에게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지 잘 좀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작은 여자가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큰 남자를 혼자서 살해할 수 있느냐고요!”
[447-448쪽] ...... 프리먼은 적어도 하나의 카드를 몰래 숨겨놓았다가 결국에는 꺼내서 사용했다.
“아까 할러 변호사가 증인에게 이 범죄를 저질렀느냐고 물었을 때, 증인은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직업이 교사이고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라고요. 기억나세요?”
“네, 사실입니다.”
“하지만 4년 전 학생을 3면으로 이루어진 자로 때려서 강제로 전근을 가게 되었고, 분노조절 장애 치료를 받아야 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나는 재빨리 일어서서 이의를 제기했고 재판부 협의를 요청했다. 판사가 우리에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재판장님.” 페리 판사가 묻기도 전에 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개시된 증거에는 3면으로 이루어진 자는 없었는데요. 갑자기 어디서 툭 튀어나온 겁니까?”
......
판사는 배심원들에게 검사의 질문을 무시하라고 지시했고 프리먼에게는 다른 질문을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배심원들이 이미 다 알아버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 질문을 기록에서는 삭제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배심원들의 기억 속에서는 삭제할 수 없을 것이었다.
---> 이번에는 리사 트래멀에 대한 프리먼 검사의 반대신문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프리먼 검사는 할러 변호사가 주신문에서 만들어놓은 리사 트래멀의 무고하고 억울한 사람 이미지를 흔들어놓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검사는 남을 살해하기까지 한 사람이니 평소에도 어느 정도의 폭력적 성향이 있었으리라는 점을 부각시키려 합니다. 그러다 리사 트래멀의 과거 폭력 전력이라는, 미리 상대방에게 오픈하지 않은 자료를 갖고 꼼수를 쓰게 됩니다. 할러 변호사가 미처 손을 쓸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죠. 앞서 할러 변호사가 검찰 측 증인 구티에레스 박사에게 과거의 잘못된 증언 전력에 관한 불의타를 날리는 꼼수를 쓴 데 대한 보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 장군 멍군입니다.
서로 이렇게 꼼수를 쓰더라도 재판장이 할 수 있는 제재수단이라곤, 경고를 날리고 기록에서 삭제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모양입니다.
[449쪽] 검사는 반대신문을 5시까지 끌고 가서, 밤사이 뭔가를 마련해서 다음날 아침 리사 트래멀을 재공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판사는 그날 재판의 휴회를 선언했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
---> 프리먼 검사가 오후 몇 시부터 리사 트래멀에 대한 반대신문을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재판을 마칠 오후 5시까지 반대신문을 계속 진행합니다. 퇴근시간이 되어 반대신문은 중지되고 다음날로 넘어가게 됩니다.
검사 입장에선 반대신문 중간에 이렇게 긴 간격이 생기는 게 유리한 일일 것 같습니다. 저녁식사를 하거나 잠자리에 들 때 문득 피고인을 공격할 새로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죠.
[459-465쪽] 금요일 아침, 안드레아 프리먼 검사가 전날에 이어 리사 트래멀을 반대신문한 지 20분 만에 전날 내가 세운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졌다.
......
“페이스북도 하고 있고요, 그렇죠?”
“네.”
......
“...... 그리고 증인은 페이스북에 가입한 이후 담벼락에 정기적으로 글을 올려왔고요, 그렇죠?”
“네, 꽤 정기적으로 올린 편이죠.”
“사실 이 재판에 관해서도 업데이트를 했고요, 그렇죠?”
“네,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제 견해를 올렸습니다.”
나는 혈압이 확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입고 있는 정장이 비닐로 만들어진 땀복처럼, 체온을 그대로 가둬놓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싶었지만 혹시 배심원이 그 동작을 본다면 변호인이 너무 초조해한다는 인상을 줄 것 같았다.
---> 아하, 그동안 리사 트래멀이 페이스북을 통해 그녀의 지지자들에게 재판상황을 열심히 실시간 중계하고 있었군요. 그녀가 쓴 글 수도 어마어마합니다. 1,200건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많은 글 중 이제까지 할러 변호사가 변론해온 내용과 모순되거나 그녀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도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매사 남에게 들이대는 잣대나 자신에게 들이대는 잣대나 대동소이한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만, 말로든 글로든 사람이 흔적을 많이 남겨놓으면 그것이 나중에 자신에게 덫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리사 트래멀이 헤비 페북러인 줄 까맣게 모르고 있던 할러 변호사로선 초강력 불의타지만, 검사가 바로 전날 밤에 리사 트래멀의 페북 계정을 발견했다는데야 증거개시절차 위반이든 뭐든 어찌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역시 프리먼 검사가 어제 재판 끝날 때까지 반대신문을 길게 끌어 하룻밤이라는 작전타임을 가진 게 주효하였네요.
할러 변호사는 갑자기 오른 혈압을 진정시키기 위해 넥타이를 좀 풀고 싶지만, 참습니다. 무대 위에 오른 사람은 극히 사소한 동작만으로도 관객들에게 별의별 상상과 억측의 여지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우는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에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합니다. 아무리 근엄하게 무게잡는 재판이라도, 결국은 ‘쇼’라는 성격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네요.
[465-467쪽] “살인 사건이 발생한 날 아침, 증인은 그 주차장에 다시 가서 미첼 본듀란트를 기다렸습니까?”
“아뇨, 안 갔어요! 저는 거기에 가지 않았습니다.”
“증인은 커피숍에서 미첼 본듀란트를 보고 분노했고 그가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증인은 주차장으로 가서 그를 기다렸고 ......”
“이의 있습니다.” 내가 소리쳤다.
“...... 망치로 때려서 그를 살해했습니다, 그렇죠?”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리사 트래멀이 외쳤다. “안 그랬다고요!”
그녀는 궁지에 몰린 동물처럼 큰 소리로 헉헉거리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 프리먼 검사는 리사 트래멀에게 페이스북 글 인쇄자료를 건네주고는 몇 군데를 낭독하도록 하는데, 리사 트래멀이 페이스북에 쓴 그 많은 글 중 딱 두 편의 글이 그녀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 사건 이전인 작년 9월에 그녀가 피해자의 직장 주차장과 주차 위치를 알아내 그곳에서 피해자를 기다린 일이 있었다는 내용의 글입니다. 피해자의 주차 위치를 알고 있을 정도이니 그곳에서의 계획적인 살인범행이 가능하였으리라는 추론도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승기를 잡자마자 검사는 가차 없이 몰아쳐 피고인으로부터 극적인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이제까지 할러 변호사가 만들어놓은 피고인의 선량하고 평범한 소시민의 인상을, 이제까지 봐온 것과는 뭔가 좀 다른 구석도 있어 보이는, 뭔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인물의 인상으로 바꿔버립니다.
[473-478쪽] “재판장님, 이 문서를 증인에게 보여줘도 되겠습니까? 증인의 페이스북 친구들 명단을 인쇄한 것입니다.”
......
“증인의 페이스북 친구인 도널드 드리스콜이라는 사람이 ALOFT 직원이었다고 한다면 무슨 생각이 드실 것 같습니까?”
“ALOFT에서 제 게시글들을 보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생각이요.”
“그럼 이 드리스콜이라는 사람은 증인이 어디 갔다 왔는지 어디 갈 건지 다 알았을 거란 말이죠,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증인이 은행 건물에서 본듀란트 씨의 주차 자리를 찾았고 그를 기다릴 거라고 썼던 지난 9월의 게시글에 드리스콜이 접근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죠?”
“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증인. 더 이상 질문 없습니다.”
---> 할러 변호사의 순발력이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프리먼 검사의 뜻밖의 공격으로 의뢰인과 마찬가지로 혼이 나가있을 법도 한데, 재판장에게 이른 휴식시간을 요청한 후 그 짧은 시간 동안 동료들과 함께 리사 트래멀에 대한 재주신문을 급히 준비합니다.
휴식시간 동안 재빠르게 리사 트래멀의 페이스북 친구 명단에서 돈 드리스콜이라는 사람을 찾아내는데, 마침 그는 할러 변호사가 이 사건의 진범으로 몰고 있는 오파리지오의 회사인 ALOFT의 직원입니다. 이 작은 끈을 어떻게든 활용해서 다시 음모론을 제기하여 이 위기를 벗어나야 합니다.
다행히 재주신문에서 리사 트래멀은 할러 변호사의 의도대로 드리스콜이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을 감시해왔다는 생각이 든다고 진술하며 음모론을 적절히 뒷받침해 줍니다.
또 다행히, 프리먼 검사가 좀 전에 페이스북이라는 불의타를 날린 데 대한 보상격으로, 재판장은 할러 변호사에게 드리스콜을 증인으로 부를 기회를 허락합니다.
이제 할러 변호사는 오파리지오가 드리스콜이라는 자신의 직원을 통해 평소 페이스북으로 리사 트래멀을 감시하다 이번에 그녀를 피해자의 살인범으로 몬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진행시켜 나가기로 합니다. 프리먼 검사의 페이스북 공격 속에서 드리스콜을 찾아내 순식간에 자신의 음모론을 공고히 해버리는 솜씨가 정말 대단합니다. 소설이라 그런 걸까요?
[479-483쪽] ...... 그녀는 하버드와 MIT, 존제이 칼리지에서 학위를 받았고, 현재 존제이의 연구원이었다. 외모가 출중하고 상냥한 여성이었다. 게다가 증인석에서는 한 마디 한 마디 성실하게 진실만을 말해서 스스로 빛이 났다. 형사소송 변호사들에겐 그야말로 꿈의 증인이었다. ......
......
아슬래니안은 망치를 갖고 증인석을 떠나 배심원들 앞에 서서 시연을 시작했다.
“제가 가졌던 의문은 피고인의 키를 가진 여성이, 저와 마찬가지로 160센티미터인 여성이 구두를 신고 키가 185센티미터가 넘는 남성의 정수리를 가격해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
......
“...... 피해자의 자세에 대해서 이틀을 고민했습니다. ......”
......
“...... 그렇다면 이 자세만 남게 되죠.”
아슬래니안은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혀 얼굴이 천장을 향해 있는 마네킹의 머리를 가리켰다. ......
---> 또다시 돋보이는 매력의 ‘메신저’가 할러 변호사의 증인으로 등장하는데, 그 메신저는 심지어 ‘메시지’도 훌륭히 전달합니다.
이번 증인은 샤미람 아슬래니안이라는 이름의 법과학 전문가입니다. 피해자와 같은 키인 187센티미터의 마네킹을 법정에 데려와 160센티미터 키의 여성이 이 키 큰 남성을 공격하는 것은 도대체 가능하지가 않다는 논리를 시각적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단, 이 한 가지 경우에는, 이 작은 여성이 키 큰 남성을 공격하는 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남성이 얼굴이 천장을 향하도록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힌 상태로 서 있는 경우 말이죠. 만약 피해자가 그런 자세로 서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리사 트래멀도 유력한 용의자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사람이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주차하고 막 내리자마자 그런 자세로 서 있을 일이 있을까요? 그런데 이 소설의 맨 마지막 결론을 보면, 바로 이 부분이 이 사건의 핵심 포인트가 됩니다.
[485쪽] ...... 4시가 가까워지자 페리 판사는 주말 동안의 휴회를 선언했다. 이틀 동안의 휴가에 들어가는 내 마음은 우리가 우세하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우리는 검찰이 제시하는 증거의 상당 부분에 대해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검찰의 주장을 약화시켰고, 리사 트래멀이 범행을 부인하고 자신은 누명을 썼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법과학 전문가가 증인으로 나서서 피고인이 그 범죄를 저지르기가 신체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추정하면서 한 주를 마감했다. 피해자가 고개를 번쩍 들고 주차장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치명적인 가격을 가하지 않은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 금요일의 재판은 재판장의 개인적 사정으로 4시가 되기 전에 일찍 마감합니다. 이제 이 법정에 있던 사람들 모두 주말이라는 휴식이 기다립니다.
할러 변호사는 프리먼 검사의 반격으로 잠시 궁지에 몰린 듯했지만 일단 위기에서는 벗어났고, 그 역시 과학을 이용해 배심원들의 마음에 합리적 의심을 심어놓는 데 성공했다고 자신하며 주말을 맞이합니다.
[502쪽] 배심원단이 법정에 들어와 착석하고 애런슨이 증인석에 앉자 나는 직접신문(direct examination)을 시작했다. 우선 애런슨이 리사 트래멀의 자택 압류에 관한 변호인 측 전문가가 된 경위부터 물었다.
---> 이 소설은 첫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그 무대가 거의 법정 안을 떠나지 않습니다. 전작인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서는 법정 밖에서 다양한 에피소드가 벌어지고, 할러 변호사의 수사관이 의문의 죽음을 맞고 할러 자신까지 총을 맞기도 하는 등 변화무쌍한 스토리 덕에 영화화도 가능했을 것 같지만, 이 『다섯 번째 증인』은 도통 법정을 떠나지 않고 미첼 본듀란트 외엔 죽는 사람도 없으니 영화로 만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제 재판 둘째 주를 맞는 월요일 아침, 할러 변호사의 두 번째 증인은 그가 고용한 신참 변호사 애런슨입니다. 애런슨 변호사는 할러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주택압류 민사사건을 주로 담당하였기에, 이날 증인으로 나와서는 리사 트래멀의 집이 피해자의 회사로부터 압류를 당한 과정과 그 압류에 절차적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이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나라 제도와의 큰 차이를 또 한 가지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형사재판에서는 모름지기 증인이라는 자격으로 재판에 나올 수 있는 사람으로는, 양쪽 당사자(즉, 검사와 피고인)의 그 누구와도 가깝지 않은, 그 중간에 위치한, 전적으로 제3자적 입장에 있는 사람을 우선 떠올리게 됩니다. 가장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예가, 길을 가다 우연히 어떤 범죄장면을 본 목격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미국이나 우리나 최적의 증인입니다. 물론 양쪽 당사자 중 어느 한 쪽과 가까운, 사실상 그 어느 한 쪽의 부탁으로 법정에 나와 전적으로 그쪽에 유리한 증언을 하는 증인들도 있긴 합니다만, 그럴 경우 그 진술의 신빙성은 확 떨어지기 때문에 사실 그다지 영양가 있는 증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런 증인은 사건과 크게 관련도 없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경우 재판부에서 증인으로 서게 해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애런슨 변호사는 할러 변호사에게 고용되어 할러 변호사의 지시에 따라 이 사건 재판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즉 전적으로 피고인과 같은 편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 애런슨 변호사도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 증인으로 나와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재판 같으면 십중팔구 증인으로 나오기도 힘들었을 사람이 말이죠.
자, 여기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 애런슨 증인의 증언이 신빙성 있느냐 없느냐는 실제 그 증언을 들어본 다음에 판단하여야 할 나중 일입니다. 어떤 사건에 대해 알고 있거나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단 법정에 나와 그가 경험한 사실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배심원들은 법정에서 가급적 많은 증거들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배심원들이 법정에 펼쳐지는 풍부한 증거들을 직접 보고 들어야 유죄냐 무죄냐의 판단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이른바 ‘공판중심주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배심원들이 만나야 할 증거를, 이런저런 제약을 걸어(특히 증거능력을 이유로) 아주 조금밖에 허용하지 않는 재판은 곤란한 것이고 공판중심주의에 반하는 재판입니다.
[513-517쪽] 나는 도널드 드리스콜을 증인으로 불렀다.
......
“네, 그녀가 페이스북 계정을 갖고 있고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한다고, 그녀의 FLAG 활동과 계획을 감시하기에 좋을 것 같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상관이 뭐라던가요?”
“페이스북을 감시하고 그 결과를 요약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이메일로 보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했고요.”
......
“그럼 증인이 매주 리사 트래멀의 활동에 관해 요약한 보고서 중에 그녀가 웨스트랜드 내셔널 주차장에 가서 미첼 본듀란트를 기다리고 있다고 올린 게시글 내용을 포함한 보고서도 있었나요?”
“네, 있었습니다. ......”
---> 할러 변호사의 네 번째 증인은 페이스북을 통해 리사 트래멀의 동향을 감시하였다는 도널드 드리스콜입니다.
이 증인신문을 통해 할러 변호사는 피해자를 살해하고 리사 트래멀에게 누명을 씌운 진범은 평소 드리스콜을 통해 리사 트래멀의 동향을 감시해온 오파리지오라는 의혹 쪽으로 배심원들을 몰고 갑니다.
[520-522쪽] 이제 프리먼 검사가 믿어마지 않는 서류철을 들고 독서대로 와서 자리를 잡고 서류철을 펼쳤다.
......
“ALOFT에서 갑자기 해고된 것은 증인이 회사 자산을 체계적으로 훔치다가 발각됐기 때문이 아닌가요?”
......
“회사 명의로 고가의 소프트웨어를 주문하고, 보안번호를 해킹해 들어간 후, 소프트웨어를 불법 복제해 해적판으로 인터넷에 팔지 않았습니까?”
......
“검찰 측 증거물 9호입니다, 재판장님.”
...... ALOFT의 내부감사 보고서 사본이었다.
---> 확실한 반대신문 전략은 증인의 신뢰성을 공격하는 것이고,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증인이 주장하는 내용 자체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중 문제입니다. 증인이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걸 부각시켜 결국 그의 말만 믿고 판단하여서는 안 된다는 인상을 배심원들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프리먼 검사가 드리스콜에 대한 반대신문에서 바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드리스콜의 과거 지저분한 잘못들, 특히 그의 정직하지 못했던 과거 행적을 공개합니다. 그가 오파리지오의 회사인 ALOFT에서 해고된 것은 회사에 배임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공개됨으로써, 이 일로 오파리지오와 적대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그의 증언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 돼버리고 맙니다.
드리스콜은 결국 프리먼 검사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무너져버리고, 할러 변호사를 또다시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534쪽] 화요일 아침 루이스 오파리지오가 증인석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 그는 내가 부른 증인이었지만 우린 서로를 증오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재판 초기부터 나는 내 의뢰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오파리지오를 지목해왔는데, 이제 그가 내 앞에 앉았다. ......
---> 드디어 할러 변호사가 심혈을 기울여 소환한 다섯 번째 증인이 등장합니다. 여태 이 증인을 위해 법정에서 여러 의혹의 실타래들을 풀어놓았었습니다. 이제 이 실타래들을 한데 끌어 모아서 작품을 만들어 보여야 합니다. 할러 변호사가 제기한 의혹대로, 이 증인은 뭔가 어둠의 세계에서 서식하는 인물, 리사 트래멀보다는 누군가를 살해하는 데 훨씬 더 적합해 보이는 인물로 비쳐져야 합니다.
할러 변호사와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긴장감이 최고조로 달하는 장면입니다. 이런 클라이맥스에 등장한 증인이어서 이 작품의 제목이 ‘다섯 번째 증인’인 걸까요?
[539-546쪽] “...... 이 비공개 논의가 실은 증인의 회사 ALOFT를 어느 상장기업에 매각하기 위한 협상이었습니다, 맞습니까?”
......
...... 프리먼이 힘을 준 낮은 목소리로 이의를 제기했다.
“이게 이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변호인이 우리를 월스트리트로 끌고 가는 것 같은데요, 재판장님. 이 내용은 리사 트래멀과, 이 사건 증거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재판장님, 이것도 제삼자 범인설과 관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디지털 영업일지의 한 페이지인데 증거개시절차를 통해 변호인 측에 전달되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으면 배심원들은 이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저 증인을 은근히 갈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살인의 동기입니다.”
......
“...... 본듀란트는 저 남자에게서 6천1백만 달러를 빼앗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건 너무나 자명한 일이고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죠. 그게 살인의 동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
“동기는 증거가 아니잖아요.” 프리먼이 말했다. “그건 증거가 아니고 변호인은 아무런 증거도 갖고 있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변호인의 주장은 오로지 말뿐입니다. 증거가 없죠. ......”
--->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오파리지오와 피해자 간의 갈등을 부각시켜보려 하지만 할러 변호사의 질문은 자꾸 변죽만 울리면서 핵심에는 다가가지 못하고, 이게 뭐하는 작전인가 싶은 의심을 잔뜩 품은 프리먼 검사와 페리 판사로부터 잇달아 제지를 받게 됩니다. 아직까지 오파리지오와 이 사건 사이의 관련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령 할러 변호사의 주장대로 사업상 있었던 문제로 평소 피해자가 오파리지오를 협박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래서 궁지에 몰려있는 오파리지오의 입장에선 피해자가 없어져주면 좋을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런 오파리지오의 피해자에 대한 적개심만 가지고 그가 피해자를 살해한 진범이라는 의심을 배심원들이 갖게 하는 데 충분한 걸까요? 여기까지만 읽어서는 프리먼 검사와 페리 판사의 불만처럼 할러 변호사의 전략이 여러모로 허황되게 보입니다.
[551-557쪽] “뉴욕 주가 보유하고 있는 기업 기록에 따르면, AA 베스트의 최대 주주가 도미닉 카펠리라는 사람이던데, 그를 잘 아십니까?”
“아뇨.”
......
나는 ...... 오파리지오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거였다. 당장 항복해, 안 그러면 당신 비밀이 온 세상에 알려질 거야. 르무어가 알게 될 거야. 당신 주주들이 알게 될 거고. 모두가 알게 될 거야.
......
나는 메모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이 기회였다. 오파리지오를 생포하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오파리지오 씨, 당신이 모른다고 주장하는 파트너인 도미닉 카펠리가 뉴욕......”
“재판장님?”
오파리지오였다. 그가 내 말을 끊었다.
“제 변호인의 충고와, 미합중국 헌법과 캘리포니아 주 법이 보장하는 진술을 거부할 권리(Fifth Amendment right)에 따라, 이 질문과 앞으로 나올 추가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하기를 정중히 거절하는 바입니다.”
나왔다.
나는 깜짝 놀란 듯 멍하니 서 있었지만, 연기였다. ......
그때 프리먼 검사가 날카롭고 높은 목소리로 이의를 제기했고, 재판부 협의를 요청했다.
---> 할러 변호사가 불만에 가득 찬 프리먼 검사와 페리 판사의 따가운 시선을 간신히 이겨 내가며 오파리지오 증인을 몰아붙입니다. 오파리지오의 사업 파트너들을 잔뜩 언급해가더니, 마침내는 그가 지분을 갖고 있던 윙 넛츠라는 택배 회사의 다른 지분권자인 도미닉 카펠리를 알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가는데, 여기서 갑자기 증인이 진술거부권을 행사합니다.
여기서 오파리지오가 언급한 ‘진술거부권’은, 원문상 ‘Fifth Amendment right’입니다. Fifth가 대문자로 시작하는 게 특이합니다. 이는 직역하면 ‘수정헌법 제5조의 권리’라는 의미입니다. 미국 수정헌법 제5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No person shall be held to answer for any capital, or otherwise infamous crime, unless on a presentment or indictment of a Grand Jury, except in cases arising in the land or naval forces, or in the Militia, when in actual service in time of War or public danger; nor shall any person be subject for the same offence to be twice put in jeopardy of life or limb; nor shall be compelled in any criminal case to be a witness against himself, nor be deprived of life, liberty, or property, without due process of law; nor shall private property be taken for public use, without just compensation.
누구라도, 대배심에 의한 고발 또는 기소가 있지 아니하는 한, 사형에 해당하는 죄 또는 파렴치죄에 관하여 심리를 받지 아니한다. 다만, 육군이나 해군에서 또는 전시나 사변시에 복무중에 있는 민병대에서 발생한 사건에 관하여서는 예외로 한다. 누구라도 동일한 범행으로 생명이나 신체에 대한 위협을 재차 받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사사건에 있어서도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당하지 아니하며, 누구라도 정당한 법의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또 정당한 보상 없이, 사유재산을 공공용(公共用)으로 수용당하지 아니한다.
[출처 : 세계법제정보센터, http://world.moleg.go.kr/web/tl/themaLgslReadPage.do?A=A&code=700201&searchType=all&searchPageRowCnt=10&CTS_SEQ=28071&AST_SEQ=1061&ETC=]
수정헌법 제5조에 규정된 여러 권리들 중 ‘어떠한 형사사건에 있어서도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를 '자기부죄금지 특권(the privilege against compelled self-incrimination)'이라고 하는데, 이로부터 유래되는 권리가 바로 진술거부권 또는 묵비권입니다.
[559-562쪽] “재판장님, 저는 이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변호인이 이 법정과 사법부를 모독해왔다고 생각합니다. ...... 이제 그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오파리지오는 묵비권 증인(a Fifth witness)이었습니다. 배심원단 앞에 허수아비처럼 내세웠다가 묵비권을 행사하면 바로 꺼내서 던져버릴 수 있는 증인 말입니다. 그게 변호인의 계획이었습니다. ......”
......
“이건 너무나 부당한 일입니다, 재판장님. 할러 변호사가 세운 계획이 틀림없고요. 직접신문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진술을 이끌어내고는 오파리지오를 몰아세워 묵비권을 행사하게 해서 검찰은 반대신문도 못 하고 어떤 식으로도 시정할 수가 없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이게 과연 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재판장님?”
......
“오파리지오의 진술 전체를 삭제하겠습니다.” 페리 판사가 선포했다. “배심원들에게 그 진술은 고려하지 말라고 할 거고요.”
......
판사가 배심원들에게 오파리지오가 말한 것을 모두 고려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있었지만 너무 늦었다. 메시지는 이미 전달되었고 모두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의도했던 대로.
---> 프리먼 검사가 할러 변호사에 대한 격한 분노의 감정을 재판장에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재판장 역시 할러 변호사에게 대단히 서운한 감정을 표시합니다.
원문의 ‘take the Fifth’를 번역자는 ‘묵비권을 행사하다’로 옮겼습니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take the Fifth (Amendment)’라는 표현이 있는데, 역시 ‘묵비권을 행사하다’라는 의미네요.
결국 이 소설의 원제목 ‘The Fifth Witness’의 한글 제목은 ‘묵비권을 행사하는 증인’ 정도가 옳고, ‘다섯 번째 증인’은 적절하지 않은 제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번역자도 위 대목을 정확히 번역하였듯이 분명히 대문자로 시작하는 ‘Fifth’가 ‘다섯 번째’가 아니라 ‘수정헌법 제5조’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는데, 왜 제목은 ‘다섯 번째 증인’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출판사 측에서 더 쉬운 제목을 원했던 것일까요.
아무튼, 할러 변호사는 오파리지오를 신문하면서 그가 마피아와 관련을 맺고 있는 등 뭔가 어두운 뒷배경이나 있는 듯이 거세게 몰아붙입니다. 그런 신문 과정에서 자칫 자신에게 제기되는 어두운 의혹으로 인해 주주의 불신이나 주가 하락 등 사업상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오파리지오로 하여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도중에 묵비권을 행사하도록 유도합니다.
할러 변호사가 이 증인을 이용해서 배심원들에게 의혹이나 잔뜩 심어주고 검사의 반대신문은 막아버린 것이라는 계략을 알아챈 프리먼 검사는 거칠게 항의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습니다. 이미 오파리지오가 먼저 할러 변호사의 계략에 말려들었고, 다음으로 배심원들도 그 계략에 말려들어버린 후입니다.
뒷부분에서 할러 변호사는 애런슨 변호사에게 이 당시의 자신의 속내를 다음과 같이 직접 밝힙니다.
[585쪽] “마피아와 관련 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밝혀질 거라는 게 분명해지면, 그걸 막아보려고 애쓸 거라고 생각했어. 그럼 어떻게 하겠어? 묵비권밖에 없지.”
이런 꼼수의 달인 할러 변호사를 얄미워해야 할지, 기발하다고 해야 할지, 참......
[564쪽] “...... 증인은 나를 위해 수사를 맡아서 해주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데니스?”
“네, 그게 내 직업이죠.”
“미첼 본듀란트 살인 사건 피고인의 변호를 위해서 광범위하게 수사를 했고요, 그렇죠?”
---> 이제 할러 변호사의 수사관 시스코가 마지막 증인으로 나섭니다. 오파리지오 묵비권 유도작전이 성공했으니, 이제 자신의 수사관을 이용해 쐐기를 박아버리려 하겠죠.
여기서도 앞서 애런슨 변호사가 증인으로 나왔을 때의 문제 제기를 똑같이 할 수 있겠습니다. 시스코 수사관 역시 중립적 입장에 선 제3자가 아니라 일방 당사자 편에 일방적으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다면 일단 증인으로 나올 자격이 있는 것이고, 그 증언이 신빙성 있냐 없냐는 별개의 문제에 불과합니다. 그게 ‘공판중심주의’입니다.
우리 형사법정 같으면, 이런 사람이 증인으로 채택될 가능성은 많지 않습니다. 중립적인 제3자가 아니니, 굳이 증언을 들어볼 필요가 있겠느냐는 이유로 말이죠. 같은 이유로, 검사 입장에서 중요한 증인인 수사담당 경찰관도 거의 증인으로 서지 못합니다. 피고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진술만 할 거라는 일방적인 의심 덕분이죠. 그런데도 우리 법정은 ‘공판중심주의’를 추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65-568쪽] “...... 웨스트랜드 내셔널 주차장의 출입구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컬렌 형사와 롱스트레치 형사가 카메라 녹화분을 살펴보면서 주차장이 문을 연 시각인 오전 7시부터 본듀란트 씨가 이미 사망했다고 확인된 시각인 오전 9시까지 그 주차장에 들어온 모든 차량의 번호를 적어놨더군요. ......”
......
“...... ALOFT가 웨스트랜드 내셔널에 정기적으로 문서를 전달할 때 윙 넛츠 택배를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목한 것은 왜 그 차량이 8시 5분에 주차장에 들어와서 은행 영업 시작 시각인 9시도 되기 전에 떠났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나는 시스코를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필요한 것은 전부 얻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뼈에 살이 붙어 있어도 접시를 물려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때로는 배심원들에게 의문만 제기하고 끝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질문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 시스코 증인이 미리 할러 변호사와 짠 대로 그들의 작전에 척척 맞는 증언을 해나갑니다. 할러 변호사와 시스코는 범행시점 무렵 범행장소인 주차장에 다녀간 택배회사 차량이 오파리지오와 어떻게든 몇 단계를 거쳐 연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군요. 그 사실을 피해자가 오파리지오에게 보낸 협박편지와 또 연결시켜 오파리지오 음모론을 만들어낸 것이구요.
아무튼 할러 변호사와 시스코는 오파리지오의 택배회사 차량이 이날 주차장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마치 대단히 특이하고 중요한 일인 것처럼 한껏 부각시킵니다. 아니, 평소 배달 일로 그곳을 오가던 택배 차량이 아침 일찍 다녀간 게 뭐가 이상한가요, 그 택배 차량이 다른 때도 그 시간대에 거길 다녀갔다는 사실만 밝혀진다면 이건 아무 의미도 없는 얘기인데, 결국 공연히 의혹이나 던져보겠다는 부적절한 증언이지 않은가요?
한편, 여기서 할러 변호사의 작은 변론기술 내지 연기 한 가지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시스코를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이 기대한 중요한 장면이 나왔을 때, 잠시 정적을 만들면서 배심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죠. “자, 여기 좀 봐봐” 하는 것이죠.
[568쪽] 내 직접신문은 범위가 매우 정확해서 차량번호판에 관한 진술만을 포함했다. 덕분에 프리먼이 반대신문에서 다툴 거리가 거의 없었다. ......
......
30분 후, 프리먼이 패배를 인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 프리먼 검사 입장에선 시스코 증인의 택배 차량 운운은 전혀 예상 못한 내용의 증언이었을 겁니다. 이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어 이 반대신문 때 제대로 대처하기는 곤란하였을 것이구요.
일단 오늘은 여기서 물러서고, 재판이 끝난 다음 택배 차량과 관련된 기록을 확인해서 내일 재판 때 반격을 시도해야겠습니다.
[568쪽] 그러자 판사가 내게 더 부를 증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습니다, 재판장님.” 내가 말했다. “변호인 측은 이것으로 모든 증인신문을 마치겠습니다.”
판사는 배심원단을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다음 날 아침 9시에 회의실로 다시 모이라고 지시했다. 배심원들이 나가자 판사는 재판을 마무리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양측에 반박 증인(rebuttal witness)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프리먼은 반박 증인을 부를 권리를 내일 아침까지 유보하고 싶다고 말했다.
---> 드디어 피고인과 변호인 측의 증인신문이 모두 끝납니다.
30분 후, 프리먼이 패배를 인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 프리먼 검사 입장에선 시스코 증인의 택배 차량 운운은 전혀 예상 못한 내용의 증언이었을 겁니다. 이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어 이 반대신문 때 제대로 대처하기는 곤란하였을 것이구요.
일단 오늘은 여기서 물러서고, 재판이 끝난 다음 택배 차량과 관련된 기록을 확인해서 내일 재판 때 반격을 시도해야겠습니다.
[568쪽] 그러자 판사가 내게 더 부를 증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습니다, 재판장님.” 내가 말했다. “변호인 측은 이것으로 모든 증인신문을 마치겠습니다.”
판사는 배심원단을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다음 날 아침 9시에 회의실로 다시 모이라고 지시했다. 배심원들이 나가자 판사는 재판을 마무리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양측에 반박 증인(rebuttal witness)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프리먼은 반박 증인을 부를 권리를 내일 아침까지 유보하고 싶다고 말했다.
---> 드디어 피고인과 변호인 측의 증인신문이 모두 끝납니다.
이제 프리먼 검사 입장에서, 오늘 새로 나온 증언들에 대한 반박자료를 준비해서 내일 들이밀 일이 남았습니다.
[570쪽] 다음 날 아침 안드레아 프리먼은 나를 놀라게 하지 않음으로써 나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판사 앞에 서서 반박 증인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검찰 측의 증인신문을 모두 끝내겠다고 말했다.
......
프리먼은 혈흔으로 밀고 나가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셰에라자드의 클라이맥스를 빼앗았든 빼앗지 않았든 상관없이 그녀는 이 재판에서 반박의 여지가 없는 딱 하나의 증거인 혈흔으로 승부를 보려는 거였다.
---> 마지막 재판날이 되었습니다.
프리먼 검사가 적어도 택배 차량 문제 등 몇 가지 반박자료를 준비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냥 다 포기하고 맙니다. 전날 할러 변호사의 꼼수에 모든 기가 빠져나가 전의를 상실하였거나, 아니면 가장 확실한 혈흔 증거가 건재한 이상 할러 변호사가 잔뜩 제기한 의혹들은 결국 아무 쓸모도 없는 거라고 자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571쪽] 프리먼 검사는 전형적인 검찰의 논고 방식을 따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먼저 사실들로 집을 짓고 그다음에는 감성적으로 호소하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리사 트래멀이 범인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재판이 시작된 이후로 법정에 제시된 증거물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언급한 것 같았다. 논고는 무미건조했지만 축적되면서 설득력이 더 커졌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고 혈흔 증거로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망치, 신발, 논란의 여지가 없는 DNA 검사 결과들.
“이 재판이 시작됐을 때 제가 여러분께 혈흔이 진실을 말해줄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프리먼 검사가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것은 다 무시할 수 있지만 혈흔 증거는 그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혈흔 증거 하나만 가지고도 제가 주장한 바와 같이 유죄 평결을 내리시게 될 것입니다. ......”
---> 오후 1시부터 최종의견 진술 절차가 시작됩니다. 할러 변호사의 설명에 의하면, 검사가 ‘최종논고(closing arguments)’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처음과 나중에 하고 변호인이 그 중간에 ‘최종변론(closing arguments)’을 한다고 합니다.
번역자는 closing arguments라는 하나의 용어를 검사의 경우엔 ‘최종논고’로, 변호인의 경우엔 ‘최종변론’으로 각각 달리 번역하였네요. 우리 법의 용어로는 보통 ‘최종의견 진술’이라고 하고, 그 순서는 검사 먼저, 피고인과 변호인이 나중이 됩니다. 나중에 의견을 진술할수록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더 이롭다는 장점이 있어,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유리한 순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LA에서는 이렇게 검사가 두 번이나 유리한 순서를 잡을 수 있는 모양이군요.
아무튼 프리먼 검사는 혈흔 증거가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초지일관인 프리먼 검사를 위해서라도 배심원들이 할러 변호사가 꼼수와 쇼의 제왕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 주어야 할 텐데요.
[571-575쪽] 그때부터 나는 우리가 내놓은 증거들과 검찰 측의 반박 내용과 검찰 측 주장의 결함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러고는 대답이 나오지 않은 질문들을 던졌다. 서류가방은 왜 열려 있었을까? 망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은 채로 있었을까? 리사 트래멀의 차고는 왜 잠겨있지 않았을까? 자택의 압류를 막아낼 수 있었을 사람이 왜 본듀란트를 죽였을까?
그러고는 마침내 내 최종변론의 핵심인 마네킹 이야기로 넘어갔다.
“아슬래니안 박사의 증언만 가지고도 검찰의 주장이 거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변호인 측 주장의 다른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매니(아슬래니안 박사의 증인신문 때 등장했던 마네킹) 하나만 보더라도 여러분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
......
“이 재판은 물리적 증거(the physical evidence)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황적 증거(the circumstantial evidence)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The case doesn’t bear scrutiny in the light of day. 결국 이 재판의 결과를 결정하게 될 것은 합리적인 의심(reasonable doubt)입니다. 상식(common sense)이 여러분을 인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감(instinct)이 여러분을 인도할 것입니다. ......”
---> 할러 변호사가 최종의견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의 주장을 듣고 보면, 그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작정 의혹들을 던지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충분히 제기해볼 수 있는 의혹들입니다. 설득력이 상당히 있는 주장입니다.
특히 저는, 피고인이 아무리 자신의 집을 압류한 피해자에게 불만이나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굳이 그를 살해까지 할 정도로 미워했을까, 더구나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피고인은 피해자를 제대로 한 번 만나본 적도 없다는데 한 번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을 굳이 살해까지 할 마음이 어떻게 생길 수 있을까, 살해할 마음을 먹을 만큼 피해자와의 사이에 무슨 특별한 계기나 사건도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들만 갖고는 아무래도 범행 동기가 약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도 배심원이라면 할러 변호사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저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데 대해 ‘합리적 의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원서를 보니 “The case doesn’t bear scrutiny in the light of day”라는 한 문장이 번역서의 중간에 빠져있길래 추가해 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577-580쪽] 페리 판사는 곧바로 배심원들에게 내리는 최종 지시사항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숙의(deliberations)를 할 때의 일반적인 규칙들뿐만 아니라 이 사건 재판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사항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특히 루이스 오파리지오의 증인신문에 대해 주의를 주면서 숙의를 하는 동안 그의 진술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말라고 다시 한 번 경고했다.
판사가 배심원들에게 주는 지시사항을 읽는 데 걸린 시간이 내가 최종변론을 하는 데 걸린 시간에 맞먹었지만, 마침내, 3시 직후에, 판사는 열두 명의 배심원이 임무를 시작하도록 숙의실로 돌려보냈다.
......
“벌써 평결이 나왔대. 5분 만에.”
---> 양측의 증거 공방이 끝나면 이제 배심원들의 시간이 됩니다. 배심원들끼리 별도의 방에서 사건의 결론에 대해 토론하고 정하는 deliberations를 하게 됩니다. 우리 법의 용어로는 ‘평의’라고 하고, 흔히 ‘숙의’ 또는 ‘합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평의를 앞두고 재판장은 배심원들에게 그들이 고려하여야 할 사항이나 주의사항 등을 자세히 설명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평의는 배심원 12명의 만장일치로 결론을 정하여야 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립니다. 1명이라도 반대하는 경우 몇날 며칠이 소요되었더라도 재판은 무효가 됩니다. 새로 재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만장일치에 이르기 위해 토론, 토론, 또 토론을 계속 이어가게 됩니다.
우리 국민참여재판도 법상 만장일치가 원칙이나, 만장일치에 이르지 못한 경우 다수결도 허용하고 있습니다. 다수결도 가능하기 때문에 사실 토론, 토론, 또 토론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좀 토론을 하다 말고 그냥 투표로 결정하자고 할 수 있습니다. 다수결로는 제대로 된 평의도 없이 성급한 책임회피성 결론만 내고 말 수도 있습니다. 결국 배심재판 흉내만 내는 것이죠.
자, 그런데 이 사건은 이례적으로 5분 만에 배심원들의 평의 결론, 즉 평결이 이루어집니다. 예상했던 대로 만장일치로 무죄평결입니다. 할러 변호사의 ‘승리’입니다.
[583-584쪽] 그들은 남부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떼로 몰려왔다. 다들 리사 트래멀이 페이스북에 올린 유혹의 공지 글을 보고 달려온 것이다. 리사는 평결이 내려진 다음 날 오전에 파티를 공지했고, 지금 토요일 오후에 손님들이 캐시 바에 10줄로 서 있었다.
......
부당한 기소라는 가마솥에 던져져 고통받다가 멀쩡하게 살아나온 리사 트래멀은 이제 활동가에서 우상으로 도약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
내 직원들과 나는 뒷마당의 파라솔을 단 피크닉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
“우와, 이 사람들 좀 봐.” 로나가 말했다. “다들 무죄 평결(a not-guilty verdict)이 곧 결백하다(innocent)는 뜻은 아니라는 걸 모르나 봐?”
---> 할러 변호사와 그의 동료들이 리사 트래멀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초대받습니다.
할러 변호사의 동료인 로나 테일러의 마지막 말은 매우 당연한 얘기입니다. 무죄판결의 의미는, 단지 유죄판결을 하기에는 증거가 다소 부족하다는 의미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죄가 없다거나 진실이 발견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사건의 무죄판결은 ‘할러 변호사와 피고인’의 승리이지, ‘진실’의 승리나 ‘정의’의 승리는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도 무죄판결을 받은 사람,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이 당연한 말을 애써 외면하려 합니다. 진실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합니다. 아마도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기가 두려워서이겠죠.
끝으로,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의미 있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다음 작품에서 할러 변호사는 검사장 선거에 도전한다고 하는데요, 혹시 이 사건에서의 안 좋은 경험이 그 계기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570쪽] 다음 날 아침 안드레아 프리먼은 나를 놀라게 하지 않음으로써 나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판사 앞에 서서 반박 증인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검찰 측의 증인신문을 모두 끝내겠다고 말했다.
......
프리먼은 혈흔으로 밀고 나가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셰에라자드의 클라이맥스를 빼앗았든 빼앗지 않았든 상관없이 그녀는 이 재판에서 반박의 여지가 없는 딱 하나의 증거인 혈흔으로 승부를 보려는 거였다.
---> 마지막 재판날이 되었습니다.
프리먼 검사가 적어도 택배 차량 문제 등 몇 가지 반박자료를 준비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냥 다 포기하고 맙니다. 전날 할러 변호사의 꼼수에 모든 기가 빠져나가 전의를 상실하였거나, 아니면 가장 확실한 혈흔 증거가 건재한 이상 할러 변호사가 잔뜩 제기한 의혹들은 결국 아무 쓸모도 없는 거라고 자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571쪽] 프리먼 검사는 전형적인 검찰의 논고 방식을 따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먼저 사실들로 집을 짓고 그다음에는 감성적으로 호소하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리사 트래멀이 범인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재판이 시작된 이후로 법정에 제시된 증거물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언급한 것 같았다. 논고는 무미건조했지만 축적되면서 설득력이 더 커졌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고 혈흔 증거로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망치, 신발, 논란의 여지가 없는 DNA 검사 결과들.
“이 재판이 시작됐을 때 제가 여러분께 혈흔이 진실을 말해줄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프리먼 검사가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것은 다 무시할 수 있지만 혈흔 증거는 그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혈흔 증거 하나만 가지고도 제가 주장한 바와 같이 유죄 평결을 내리시게 될 것입니다. ......”
---> 오후 1시부터 최종의견 진술 절차가 시작됩니다. 할러 변호사의 설명에 의하면, 검사가 ‘최종논고(closing arguments)’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처음과 나중에 하고 변호인이 그 중간에 ‘최종변론(closing arguments)’을 한다고 합니다.
번역자는 closing arguments라는 하나의 용어를 검사의 경우엔 ‘최종논고’로, 변호인의 경우엔 ‘최종변론’으로 각각 달리 번역하였네요. 우리 법의 용어로는 보통 ‘최종의견 진술’이라고 하고, 그 순서는 검사 먼저, 피고인과 변호인이 나중이 됩니다. 나중에 의견을 진술할수록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더 이롭다는 장점이 있어,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유리한 순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LA에서는 이렇게 검사가 두 번이나 유리한 순서를 잡을 수 있는 모양이군요.
아무튼 프리먼 검사는 혈흔 증거가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초지일관인 프리먼 검사를 위해서라도 배심원들이 할러 변호사가 꼼수와 쇼의 제왕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 주어야 할 텐데요.
[571-575쪽] 그때부터 나는 우리가 내놓은 증거들과 검찰 측의 반박 내용과 검찰 측 주장의 결함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러고는 대답이 나오지 않은 질문들을 던졌다. 서류가방은 왜 열려 있었을까? 망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은 채로 있었을까? 리사 트래멀의 차고는 왜 잠겨있지 않았을까? 자택의 압류를 막아낼 수 있었을 사람이 왜 본듀란트를 죽였을까?
그러고는 마침내 내 최종변론의 핵심인 마네킹 이야기로 넘어갔다.
“아슬래니안 박사의 증언만 가지고도 검찰의 주장이 거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변호인 측 주장의 다른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매니(아슬래니안 박사의 증인신문 때 등장했던 마네킹) 하나만 보더라도 여러분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
......
“이 재판은 물리적 증거(the physical evidence)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황적 증거(the circumstantial evidence)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The case doesn’t bear scrutiny in the light of day. 결국 이 재판의 결과를 결정하게 될 것은 합리적인 의심(reasonable doubt)입니다. 상식(common sense)이 여러분을 인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감(instinct)이 여러분을 인도할 것입니다. ......”
---> 할러 변호사가 최종의견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의 주장을 듣고 보면, 그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작정 의혹들을 던지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충분히 제기해볼 수 있는 의혹들입니다. 설득력이 상당히 있는 주장입니다.
특히 저는, 피고인이 아무리 자신의 집을 압류한 피해자에게 불만이나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굳이 그를 살해까지 할 정도로 미워했을까, 더구나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피고인은 피해자를 제대로 한 번 만나본 적도 없다는데 한 번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을 굳이 살해까지 할 마음이 어떻게 생길 수 있을까, 살해할 마음을 먹을 만큼 피해자와의 사이에 무슨 특별한 계기나 사건도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들만 갖고는 아무래도 범행 동기가 약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도 배심원이라면 할러 변호사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저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데 대해 ‘합리적 의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원서를 보니 “The case doesn’t bear scrutiny in the light of day”라는 한 문장이 번역서의 중간에 빠져있길래 추가해 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577-580쪽] 페리 판사는 곧바로 배심원들에게 내리는 최종 지시사항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숙의(deliberations)를 할 때의 일반적인 규칙들뿐만 아니라 이 사건 재판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사항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특히 루이스 오파리지오의 증인신문에 대해 주의를 주면서 숙의를 하는 동안 그의 진술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말라고 다시 한 번 경고했다.
판사가 배심원들에게 주는 지시사항을 읽는 데 걸린 시간이 내가 최종변론을 하는 데 걸린 시간에 맞먹었지만, 마침내, 3시 직후에, 판사는 열두 명의 배심원이 임무를 시작하도록 숙의실로 돌려보냈다.
......
“벌써 평결이 나왔대. 5분 만에.”
---> 양측의 증거 공방이 끝나면 이제 배심원들의 시간이 됩니다. 배심원들끼리 별도의 방에서 사건의 결론에 대해 토론하고 정하는 deliberations를 하게 됩니다. 우리 법의 용어로는 ‘평의’라고 하고, 흔히 ‘숙의’ 또는 ‘합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평의를 앞두고 재판장은 배심원들에게 그들이 고려하여야 할 사항이나 주의사항 등을 자세히 설명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평의는 배심원 12명의 만장일치로 결론을 정하여야 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립니다. 1명이라도 반대하는 경우 몇날 며칠이 소요되었더라도 재판은 무효가 됩니다. 새로 재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만장일치에 이르기 위해 토론, 토론, 또 토론을 계속 이어가게 됩니다.
우리 국민참여재판도 법상 만장일치가 원칙이나, 만장일치에 이르지 못한 경우 다수결도 허용하고 있습니다. 다수결도 가능하기 때문에 사실 토론, 토론, 또 토론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좀 토론을 하다 말고 그냥 투표로 결정하자고 할 수 있습니다. 다수결로는 제대로 된 평의도 없이 성급한 책임회피성 결론만 내고 말 수도 있습니다. 결국 배심재판 흉내만 내는 것이죠.
자, 그런데 이 사건은 이례적으로 5분 만에 배심원들의 평의 결론, 즉 평결이 이루어집니다. 예상했던 대로 만장일치로 무죄평결입니다. 할러 변호사의 ‘승리’입니다.
[583-584쪽] 그들은 남부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떼로 몰려왔다. 다들 리사 트래멀이 페이스북에 올린 유혹의 공지 글을 보고 달려온 것이다. 리사는 평결이 내려진 다음 날 오전에 파티를 공지했고, 지금 토요일 오후에 손님들이 캐시 바에 10줄로 서 있었다.
......
부당한 기소라는 가마솥에 던져져 고통받다가 멀쩡하게 살아나온 리사 트래멀은 이제 활동가에서 우상으로 도약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
내 직원들과 나는 뒷마당의 파라솔을 단 피크닉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
“우와, 이 사람들 좀 봐.” 로나가 말했다. “다들 무죄 평결(a not-guilty verdict)이 곧 결백하다(innocent)는 뜻은 아니라는 걸 모르나 봐?”
---> 할러 변호사와 그의 동료들이 리사 트래멀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초대받습니다.
할러 변호사의 동료인 로나 테일러의 마지막 말은 매우 당연한 얘기입니다. 무죄판결의 의미는, 단지 유죄판결을 하기에는 증거가 다소 부족하다는 의미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죄가 없다거나 진실이 발견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사건의 무죄판결은 ‘할러 변호사와 피고인’의 승리이지, ‘진실’의 승리나 ‘정의’의 승리는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도 무죄판결을 받은 사람,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이 당연한 말을 애써 외면하려 합니다. 진실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합니다. 아마도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기가 두려워서이겠죠.
끝으로,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의미 있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다음 작품에서 할러 변호사는 검사장 선거에 도전한다고 하는데요, 혹시 이 사건에서의 안 좋은 경험이 그 계기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019년 11월 24일 일요일
[독서일기] '다섯 번째 증인' (feat. 미국 형사사법제도) 제3편
댓글 없음
:
작성자:
iMagistrat
시간:
11/24/2019 11:30:00 오후
라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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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바기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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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소송
[제2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371쪽] 프리먼은 연방 수사 대상 통지서(federal target letter) 문제를 다뤄야 할 급박한 필요를 느낀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부른 다음 증인은 비밀경호국의 찰스 바스케즈 요원이었다.
---> 앞서 할러 변호사는 컬렌 형사에 대한 반대신문에서 '연방 수사 대상 통지서'라는 자료를 갖고 컬렌 형사를 공격하였습니다. 오파리지오가 연방 수사기관의 조사대상이 됨으로써 이 사건의 피해자 본듀란트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그렇다면 그런 동기로 인해 오파리지오가 피해자를 살해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프리먼 검사는 그 연방 수사 대상 통지서를 작성한 사람을 증인으로 불러 할러 변호사가 제기한 의혹을 해소하려고 노력합니다.
[375쪽] 나는 정원사가 망치를 발견하기 전에도 그 생울타리 주변에서 적어도 열두 번은 더 작업을 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배심원단을 위해 심은 작은 씨앗이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누군가가 거기에 망치를 갖다 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의 씨앗이었다.
---> 프리먼 검사는 다음 증인으로, 살인 사건 현장에서 한 블록 반 떨어진 곳에 있는 주택의 생울타리 안에서 망치를 발견한 정원사를 증언대에 올렸습니다. 검사가 범행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망치를 증거로 제출했으니, 그 망치를 발견해 수사기관에 넘긴 사람도 그 입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법정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재판은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석 달 정도가 지나 비로소 열리게 되었습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석 달이나 지난 시점에 범행도구가 발견되었으니, 할러 변호사 입장에선 당연히 그 발견경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작전을 씁니다.
[375-376쪽] 나는 굳이 반대신문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관리의 연속성이나 망치가 범행도구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 망치가 미첼 본듀란트를 죽게 한 무기였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것이 리사 트래멀의 것이었다는 사실까지 인정할 계획이었다.
예상치 못한 조치가 될 터이지만 모함이라는 변호인 측 주장과 잘 어울리는 유일한 조치였다.
---> 이번 검찰 측 증인은, 망치가 발견된 집의 소유자와 망치를 과학수사대 실험실에 인계한 경찰관들입니다.
비록 석 달이나 지나 발견되긴 했지만, 이 망치에는 피해자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그리고 리사 트래멀의 집 차고에 보관되어 있던 공구세트에 구비된 연장들 중에서, 사건 발생 무렵부터 지금까지 이 망치만 유일하게 행방이 묘연해 왔구요. 따라서 이 망치가 범행도구이고 피고인의 소유라는 걸 부인하긴 힘든 상황입니다.
때문에 할러 변호사는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하고서, 누군가 리사 트래멀을 모함하려 꾸민 짓이라고 주장하는 작전을 계속 고수하기로 합니다.
[378쪽] “...... 하지만 산은 갈수록 험해지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검사가 아직 과학을 끌어들이지 않았는데, 배심원들은 과학을 사랑해요. 과학이 그들에게 탈출구를, 군말 없이 남의 의견에 따르는 길을 보여주거든요. 사람들은 배심원이 되고 싶어 하죠. 직장도 빠지고 흥미로운 사건을 재판하는 법정의 맨 앞줄에 앉아서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실제 삶의 드라마를 구경하는 거잖아요. 집에서 TV로 보는 게 아니라. 하지만 조만간 배심원실로 돌아가서 서로를 쳐다보며 평결을 내려야 하는 때가 오죠.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아요. 근데 과학이 있으면 결정이 쉬워지는 거예요. ‘아, DNA가 일치하면 틀릴 수가 없잖아. 혐의대로 유죄.' 알겠어요? 이게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에요, 리사. 그리고 난 그 미래에 대해 당신이 오해나 착각을 하고 있지 않기를 바라요.”
---> 지금까지 진행된 재판상황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던 의뢰인에게 할러 변호사는 미리 김칫국물 마시면 안 된다고 초를 칩니다. 지금 상황이 꼭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만은 아니고 재판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자중자애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핵심을 찌르는 말을 하네요. 누구나 고통스런 선택의 순간이 닥치면 손쉬운 탈출구를 찾기 마련이고, 그런 자신의 선택에 대해 자기합리화를 시도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럴 때 바로 과학이 손쉬운 탈출구가 되고 자기합리화를 위한 훌륭한 근거가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렵디 어려운 결정과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 도처에 널려있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과학을 쉽게 맹신하는 이유 중 하나를 알 수 있는데요, 그래서 과학에 대한 지나친 맹신은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과학은 단지 우릴 도울 뿐이고, 우리가 과학으로 도피하거나 과학을 핑계거리 삼을 순 없는 것이며, 결국 결정과 선택은 인간 자신이 하는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인간이 져야 하는 것입니다.
[385쪽] 공판이 재개되자 검찰은 신시아 롱스트레치 형사를 증인으로 불렀다. ...... 영리한 계획이었다. 의문을 제기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을 내미는 거다. 컬렌과 롱스트레치를 통해 수사의 전반적인 경과를 설명하고, 법과학 전문가를 증인으로 내세워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종합한다. 그러고는 법의관을 불러 DNA 증거를 내놓으면서 증인신문을 마무리할 것이다. 치밀하고 깔끔한 계획이었다.
---> 프리먼 검사는 이 사건 수사에 참여한 롱스트레치 형사를 증인으로 불러 전반적인 수사 과정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과학수사의 결과물들을 내세워 이들의 사건 설명이 옳음을 증명할 것입니다.
밑줄 부분이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되지 않아 원문을 찾아봤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검사는 컬렌과 롱스트레치의 증언을 통해 수사 과정을 설명하고 이를 과학수사(the forensics)로 종합한다. 그녀는 법의학 전문가(medical examiner)와 DNA 증거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할 것이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386쪽] “우선 압수수색 영장 신청서(request)를 작성해야 합니다. 대상 건물을 수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게 만든 여러 사실과 증거를 열거해서 영장 신청의 상당한 이유를 진술(a probable cause statement)해야 하죠. 저는 은행 근처에서 용의자를 보았다고 한 목격자의 진술과 앞뒤가 맞지 않았던 용의자의 진술을 인용해서 수색 영장 신청 사유를 작성했습니다. ......”
---> 프리먼 검사는 롱스트레치 증인을 통해 주로 리사 트래멀의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 과정과 그때 발견된 증거물에 대한 설명을 이끌어내려고 합니다. 먼저, 증인에게 압수수색영장(a search warrant)을 발부받는 절차에 대해 묻자, 증인은 위와 같이 대답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을 때 필요한 요건은 범죄혐의, 필요성, 관련성이고, 이 요건들이 압수수색영장 신청서에 잘 설명되어 있어야 합니다. 즉, 대상자의 범죄혐의가 어느 정도는 인정될 가능성이 있어야 하고, 대상자의 범죄혐의를 밝히는 데 이 수색과 압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어야 하며, 이 수색을 통해 압수하려는 물건이 이 사건 및 이 피의자와 관련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롱스트레치 형사도 비슷한 취지로 압수수색영장의 신청절차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386-387쪽] “우리는 수색 중에 찾아낼 증거물을 잘 확보하고 처리하기 위해서 비디오 촬영기사와 범죄현장 감식반을 불러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수색의 전 과정이 비디오로 촬영되었나요?”
......
90분짜리 비디오가 배심원단 앞에서 재생되었고 간간히 롱스트레치의 설명이 곁들여졌다.
---> LA 경찰은 수색을 하러 나갈 때 경찰관들만 가는 게 아니라 비디오 촬영기사와 범죄현장 감식반을 대동하는군요. 특히 비디오 촬영까지 한다는 것은 그만큼 신중하게 수색과 압수 업무를 행한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신중하게 일을 한다는 것은 LA 경찰이 원래 법을 잘 지켜서 일을 꼼꼼하고 정확하게 처리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피고인과 변호인으로부터 수시로 경찰 수사에 절차적 하자가 있다는 어필을 받아 시달려온 때문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수색 과정에 참여한 경찰관의 증인신문 기회에, 이 수색 과정을 촬영한 동영상도 함께 배심원들에게 소개되는군요. 무려 90분짜리 동영상이라는데, 우리나라 법정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미국에서는 법정이 이렇게 ‘극장’이 되어도 괜찮은 모양입니다.
[389-390쪽] “어떤 종류의 망치였죠?”
“장도리였습니다.”
......
[391-392쪽] “망치 손잡이에서 혈흔을 발견했습니다.”
“몇 주 동안이나 관목 속에 있다가 발견됐는데도요?”
내가 벌떡 일어서서 망치가 관목 속에 있었던 기간에 대해서는 어떤 증언이나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재판장님, 망치는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몇 주가 지나서야 발견됐습니다. 그 기간 동안 망치가 관목 속에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리먼이 대응했다.
......
판사가 고함을 질렀다. “변호인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입니다. 프리먼 검사, 질문할 때 증거로 제출되지 않은 사실을 추정하지 않도록 잘 생각해서 하세요.”
---> 프리먼 검사가 롱스트레치 형사를 상대로 주신문을 하던 중, 할러 변호사가 끼어들어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 망치는 누군가가 피고인을 모함하기 위해 최근에 그 덤불 속에 놓아둔 것이라고 몰고 가려는 할러 변호사 앞에서, 프리먼 검사는 범인이 범행 직후 그곳에 버린 것이라는 ‘주장성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사자 쌍방의 공방이 치열하면, 중간에 있는 진행자 입장에선 규칙을 더 깐깐하고 엄격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범죄사실을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도록 입증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검사로서는,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주장은 함부로 하여서는 안 됩니다. 추정만 갖고 어떠한 주장을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때문에 재판장은 할러 변호사의 손을 들어줍니다.
[392쪽] 프리먼이 여기서 말을 멈추고 망치에 관한 DNA 분석결과 보고서(the forensic report)를 검찰 측 증거물(a prosecution exhibit)로 채택해줄 것을 판사에게 요청했다.
---> 이 망치에서는 혈흔이 발견되었고, 그 DNA와 피해자의 DNA가 서로 일치한다는 분석결과가 있었습니다. 이 분석결과 보고서 역시 망치와 별도로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됩니다.
[394쪽] “...... 근데 그 신발은 집 안이 아니라 차고에 있었습니다. 판지 상자에 들어 있었는데 상자에는 흙이 많이 묻어 있었어요. 아마도 정원에서 나온 흙인 듯했습니다. 그런데 신발은 아주 깨끗하더라고요. 그 점이 우리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
“그러니까 신발은 아주 깨끗한데 더러운 상자에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 의심을 샀다고 말씀하시는 거죠?(So you are saying that ......?)”
나는 검사가 증인을 이끌고 있다(she was leading the witness)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의 제기는 받아들여졌지만 검사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배심원단에 전달되었다.
---> 롱스트레치 형사에 대한 프리먼 검사의 주신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증인을 신청한 당사자가 자신의 증인에 대해 먼저 신문하는 것을 주신문이라 하고, 그 반대편 당사자가 상대편 증인에 대해 증언의 신빙성 등을 문제 삼기 위해 공격적으로 신문하는 것을 반대신문이라고 합니다. 둘 간의 차이점 중 중요한 것은, 주신문에서는 유도신문이 금지된다는 것입니다. 주신문에서는 증인이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자연스럽게’ 법정에 내놓아야 합니다.
실제 신문에서 유도신문은 대개 “~~~라는 거죠?”라는 형태의 질문으로 나타납니다. “~~~라는 거죠?”는 어떤 특정한 방향의 대답을 끌어내려는 뉘앙스의 질문이어서, 신문하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묻게 되면 증인은 자기도 모르게 그에 이끌려서 “네, 그렇습니다”라는 식으로, 신문하는 사람이 원하는 방향의 대답을 하게 되기 쉽습니다. 원래 자기가 하려던 대답 방향을 잠시 잊고서 말이죠.
그래서 유도신문이 금지되는 것인데, 유도신문과 그렇지 않은 신문을 구별하는 게 실제로는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프리먼 검사의 질문도, 그게 증인으로부터 특정한 말을 유도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단지 증인이 한 말의 취지를 한 문장으로 명확하게 정리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증인의 말을 쉽게 이해하게 하려는 선량한 의도의 질문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396-397쪽] 프리먼이 왜 증언 순서를 정할 때 컬렌과 롱스트레치 사이를 떨어뜨려 놨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롱스트레치는 증언을 매우 잘했고 어쩌면 자신의 베테랑 파트너보다도 더 잘하는 것 같았다.
---> 이 대목에선, 증인이 여럿 있는 경우 이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하느냐도 중요한 재판전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네요.
[401쪽] “가정하는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증인. 증인은 살인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사람이 혈흔이 묻은 신발을 잠그지 않은 차고에 놔둘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특히 시간을 들여서 살인 무기는 갖다버리고 나서요?”
프리먼이 일어서더니 질문이 복잡하고, 증거로 제시되지 않은 사실들을 추정하고 있다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질문은 롱스트레치에게 던진 것이 아니었다. 배심원단을 향해 던진 것이었다.
“재판장님, 질문을 철회합니다.” 내가 선언했다. “그리고 이 증인에 대한 반대신문을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 롱스트레치 형사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반대신문 장면입니다.
프리먼 검사의 이의 제기 내용을 보니,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만 하여야 하는 거군요. 그리고 추정적 질문이나 가정적 질문도 하여서는 안 되는 거구요.
한편, 검사나 변호인이나 이렇게 증인을 신문하는 기회를 이용해서 배심원들에게 자기 자신의 논리와 주장을 전달하는 방법도 있을 수는 있겠군요.
그리고 할러 변호사는 배심원들에게 자신의 논리와 주장을 전달하는 중요한 말을 던진 다음, 그 순간 더 이상의 말 없이 신문을 종료함으로써 마지막 말의 여운이 배심원단의 마음속에 한동안 머물게 하는 변론기술도 쓰고 있습니다.
[412쪽] 목요일은 검찰의 모든 관현악적 요소들이 하나로 합쳐져 절정에 달하기로 되어 있는 날이었다. ...... 목요일은 과학의 날이었다. 모든 증거와 증언이 과학적 사실이라는 끊을 수 없는 끈으로 단단히 묶이는 날이 될 것이었다.
---> 재판은 월요일에 시작해서 이제 목요일에 이르고 있습니다.
[429-432쪽] "재판 시간을 절약하고 배심원단이 DNA 비교 분석에 관한 길고 지루한 설명에 시달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변호인 측은 명기하겠습니다(the defense stipul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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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쪽] 프리먼은 연방 수사 대상 통지서(federal target letter) 문제를 다뤄야 할 급박한 필요를 느낀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부른 다음 증인은 비밀경호국의 찰스 바스케즈 요원이었다.
---> 앞서 할러 변호사는 컬렌 형사에 대한 반대신문에서 '연방 수사 대상 통지서'라는 자료를 갖고 컬렌 형사를 공격하였습니다. 오파리지오가 연방 수사기관의 조사대상이 됨으로써 이 사건의 피해자 본듀란트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그렇다면 그런 동기로 인해 오파리지오가 피해자를 살해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프리먼 검사는 그 연방 수사 대상 통지서를 작성한 사람을 증인으로 불러 할러 변호사가 제기한 의혹을 해소하려고 노력합니다.
[375쪽] 나는 정원사가 망치를 발견하기 전에도 그 생울타리 주변에서 적어도 열두 번은 더 작업을 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배심원단을 위해 심은 작은 씨앗이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누군가가 거기에 망치를 갖다 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의 씨앗이었다.
---> 프리먼 검사는 다음 증인으로, 살인 사건 현장에서 한 블록 반 떨어진 곳에 있는 주택의 생울타리 안에서 망치를 발견한 정원사를 증언대에 올렸습니다. 검사가 범행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망치를 증거로 제출했으니, 그 망치를 발견해 수사기관에 넘긴 사람도 그 입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법정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재판은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석 달 정도가 지나 비로소 열리게 되었습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석 달이나 지난 시점에 범행도구가 발견되었으니, 할러 변호사 입장에선 당연히 그 발견경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작전을 씁니다.
[375-376쪽] 나는 굳이 반대신문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관리의 연속성이나 망치가 범행도구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 망치가 미첼 본듀란트를 죽게 한 무기였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것이 리사 트래멀의 것이었다는 사실까지 인정할 계획이었다.
예상치 못한 조치가 될 터이지만 모함이라는 변호인 측 주장과 잘 어울리는 유일한 조치였다.
---> 이번 검찰 측 증인은, 망치가 발견된 집의 소유자와 망치를 과학수사대 실험실에 인계한 경찰관들입니다.
비록 석 달이나 지나 발견되긴 했지만, 이 망치에는 피해자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그리고 리사 트래멀의 집 차고에 보관되어 있던 공구세트에 구비된 연장들 중에서, 사건 발생 무렵부터 지금까지 이 망치만 유일하게 행방이 묘연해 왔구요. 따라서 이 망치가 범행도구이고 피고인의 소유라는 걸 부인하긴 힘든 상황입니다.
때문에 할러 변호사는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하고서, 누군가 리사 트래멀을 모함하려 꾸민 짓이라고 주장하는 작전을 계속 고수하기로 합니다.
[378쪽] “...... 하지만 산은 갈수록 험해지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검사가 아직 과학을 끌어들이지 않았는데, 배심원들은 과학을 사랑해요. 과학이 그들에게 탈출구를, 군말 없이 남의 의견에 따르는 길을 보여주거든요. 사람들은 배심원이 되고 싶어 하죠. 직장도 빠지고 흥미로운 사건을 재판하는 법정의 맨 앞줄에 앉아서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실제 삶의 드라마를 구경하는 거잖아요. 집에서 TV로 보는 게 아니라. 하지만 조만간 배심원실로 돌아가서 서로를 쳐다보며 평결을 내려야 하는 때가 오죠.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아요. 근데 과학이 있으면 결정이 쉬워지는 거예요. ‘아, DNA가 일치하면 틀릴 수가 없잖아. 혐의대로 유죄.' 알겠어요? 이게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에요, 리사. 그리고 난 그 미래에 대해 당신이 오해나 착각을 하고 있지 않기를 바라요.”
---> 지금까지 진행된 재판상황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던 의뢰인에게 할러 변호사는 미리 김칫국물 마시면 안 된다고 초를 칩니다. 지금 상황이 꼭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만은 아니고 재판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자중자애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핵심을 찌르는 말을 하네요. 누구나 고통스런 선택의 순간이 닥치면 손쉬운 탈출구를 찾기 마련이고, 그런 자신의 선택에 대해 자기합리화를 시도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럴 때 바로 과학이 손쉬운 탈출구가 되고 자기합리화를 위한 훌륭한 근거가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렵디 어려운 결정과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 도처에 널려있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과학을 쉽게 맹신하는 이유 중 하나를 알 수 있는데요, 그래서 과학에 대한 지나친 맹신은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과학은 단지 우릴 도울 뿐이고, 우리가 과학으로 도피하거나 과학을 핑계거리 삼을 순 없는 것이며, 결국 결정과 선택은 인간 자신이 하는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인간이 져야 하는 것입니다.
[385쪽] 공판이 재개되자 검찰은 신시아 롱스트레치 형사를 증인으로 불렀다. ...... 영리한 계획이었다. 의문을 제기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을 내미는 거다. 컬렌과 롱스트레치를 통해 수사의 전반적인 경과를 설명하고, 법과학 전문가를 증인으로 내세워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종합한다. 그러고는 법의관을 불러 DNA 증거를 내놓으면서 증인신문을 마무리할 것이다. 치밀하고 깔끔한 계획이었다.
---> 프리먼 검사는 이 사건 수사에 참여한 롱스트레치 형사를 증인으로 불러 전반적인 수사 과정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과학수사의 결과물들을 내세워 이들의 사건 설명이 옳음을 증명할 것입니다.
밑줄 부분이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되지 않아 원문을 찾아봤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검사는 컬렌과 롱스트레치의 증언을 통해 수사 과정을 설명하고 이를 과학수사(the forensics)로 종합한다. 그녀는 법의학 전문가(medical examiner)와 DNA 증거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할 것이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386쪽] “우선 압수수색 영장 신청서(request)를 작성해야 합니다. 대상 건물을 수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게 만든 여러 사실과 증거를 열거해서 영장 신청의 상당한 이유를 진술(a probable cause statement)해야 하죠. 저는 은행 근처에서 용의자를 보았다고 한 목격자의 진술과 앞뒤가 맞지 않았던 용의자의 진술을 인용해서 수색 영장 신청 사유를 작성했습니다. ......”
---> 프리먼 검사는 롱스트레치 증인을 통해 주로 리사 트래멀의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 과정과 그때 발견된 증거물에 대한 설명을 이끌어내려고 합니다. 먼저, 증인에게 압수수색영장(a search warrant)을 발부받는 절차에 대해 묻자, 증인은 위와 같이 대답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을 때 필요한 요건은 범죄혐의, 필요성, 관련성이고, 이 요건들이 압수수색영장 신청서에 잘 설명되어 있어야 합니다. 즉, 대상자의 범죄혐의가 어느 정도는 인정될 가능성이 있어야 하고, 대상자의 범죄혐의를 밝히는 데 이 수색과 압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어야 하며, 이 수색을 통해 압수하려는 물건이 이 사건 및 이 피의자와 관련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롱스트레치 형사도 비슷한 취지로 압수수색영장의 신청절차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386-387쪽] “우리는 수색 중에 찾아낼 증거물을 잘 확보하고 처리하기 위해서 비디오 촬영기사와 범죄현장 감식반을 불러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수색의 전 과정이 비디오로 촬영되었나요?”
......
90분짜리 비디오가 배심원단 앞에서 재생되었고 간간히 롱스트레치의 설명이 곁들여졌다.
---> LA 경찰은 수색을 하러 나갈 때 경찰관들만 가는 게 아니라 비디오 촬영기사와 범죄현장 감식반을 대동하는군요. 특히 비디오 촬영까지 한다는 것은 그만큼 신중하게 수색과 압수 업무를 행한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신중하게 일을 한다는 것은 LA 경찰이 원래 법을 잘 지켜서 일을 꼼꼼하고 정확하게 처리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피고인과 변호인으로부터 수시로 경찰 수사에 절차적 하자가 있다는 어필을 받아 시달려온 때문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수색 과정에 참여한 경찰관의 증인신문 기회에, 이 수색 과정을 촬영한 동영상도 함께 배심원들에게 소개되는군요. 무려 90분짜리 동영상이라는데, 우리나라 법정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미국에서는 법정이 이렇게 ‘극장’이 되어도 괜찮은 모양입니다.
[389-390쪽] “어떤 종류의 망치였죠?”
“장도리였습니다.”
......
프리먼은 망치를 가지고 롱스트레치에게로 걸어가 망치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롱스트레치 형사, 지금 증인이 들고 있는 망치가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프리먼은 롱스트레치에게서 망치를 돌려받은 후 검찰 측 증거물로 제출한다고 말했다.
---> 최근 범행현장 부근 덤불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범행도구인 망치도 롱스트레치 증인의 설명과 함께 배심원들에게 보여지는 기회를 얻습니다.
“롱스트레치 형사, 지금 증인이 들고 있는 망치가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프리먼은 롱스트레치에게서 망치를 돌려받은 후 검찰 측 증거물로 제출한다고 말했다.
---> 최근 범행현장 부근 덤불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범행도구인 망치도 롱스트레치 증인의 설명과 함께 배심원들에게 보여지는 기회를 얻습니다.
[391-392쪽] “망치 손잡이에서 혈흔을 발견했습니다.”
“몇 주 동안이나 관목 속에 있다가 발견됐는데도요?”
내가 벌떡 일어서서 망치가 관목 속에 있었던 기간에 대해서는 어떤 증언이나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재판장님, 망치는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몇 주가 지나서야 발견됐습니다. 그 기간 동안 망치가 관목 속에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리먼이 대응했다.
......
판사가 고함을 질렀다. “변호인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입니다. 프리먼 검사, 질문할 때 증거로 제출되지 않은 사실을 추정하지 않도록 잘 생각해서 하세요.”
---> 프리먼 검사가 롱스트레치 형사를 상대로 주신문을 하던 중, 할러 변호사가 끼어들어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 망치는 누군가가 피고인을 모함하기 위해 최근에 그 덤불 속에 놓아둔 것이라고 몰고 가려는 할러 변호사 앞에서, 프리먼 검사는 범인이 범행 직후 그곳에 버린 것이라는 ‘주장성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사자 쌍방의 공방이 치열하면, 중간에 있는 진행자 입장에선 규칙을 더 깐깐하고 엄격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범죄사실을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도록 입증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검사로서는,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주장은 함부로 하여서는 안 됩니다. 추정만 갖고 어떠한 주장을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때문에 재판장은 할러 변호사의 손을 들어줍니다.
[392쪽] 프리먼이 여기서 말을 멈추고 망치에 관한 DNA 분석결과 보고서(the forensic report)를 검찰 측 증거물(a prosecution exhibit)로 채택해줄 것을 판사에게 요청했다.
---> 이 망치에서는 혈흔이 발견되었고, 그 DNA와 피해자의 DNA가 서로 일치한다는 분석결과가 있었습니다. 이 분석결과 보고서 역시 망치와 별도로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됩니다.
[394쪽] “...... 근데 그 신발은 집 안이 아니라 차고에 있었습니다. 판지 상자에 들어 있었는데 상자에는 흙이 많이 묻어 있었어요. 아마도 정원에서 나온 흙인 듯했습니다. 그런데 신발은 아주 깨끗하더라고요. 그 점이 우리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
“그러니까 신발은 아주 깨끗한데 더러운 상자에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 의심을 샀다고 말씀하시는 거죠?(So you are saying that ......?)”
나는 검사가 증인을 이끌고 있다(she was leading the witness)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의 제기는 받아들여졌지만 검사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배심원단에 전달되었다.
---> 롱스트레치 형사에 대한 프리먼 검사의 주신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증인을 신청한 당사자가 자신의 증인에 대해 먼저 신문하는 것을 주신문이라 하고, 그 반대편 당사자가 상대편 증인에 대해 증언의 신빙성 등을 문제 삼기 위해 공격적으로 신문하는 것을 반대신문이라고 합니다. 둘 간의 차이점 중 중요한 것은, 주신문에서는 유도신문이 금지된다는 것입니다. 주신문에서는 증인이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자연스럽게’ 법정에 내놓아야 합니다.
실제 신문에서 유도신문은 대개 “~~~라는 거죠?”라는 형태의 질문으로 나타납니다. “~~~라는 거죠?”는 어떤 특정한 방향의 대답을 끌어내려는 뉘앙스의 질문이어서, 신문하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묻게 되면 증인은 자기도 모르게 그에 이끌려서 “네, 그렇습니다”라는 식으로, 신문하는 사람이 원하는 방향의 대답을 하게 되기 쉽습니다. 원래 자기가 하려던 대답 방향을 잠시 잊고서 말이죠.
그래서 유도신문이 금지되는 것인데, 유도신문과 그렇지 않은 신문을 구별하는 게 실제로는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프리먼 검사의 질문도, 그게 증인으로부터 특정한 말을 유도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단지 증인이 한 말의 취지를 한 문장으로 명확하게 정리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증인의 말을 쉽게 이해하게 하려는 선량한 의도의 질문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396-397쪽] 프리먼이 왜 증언 순서를 정할 때 컬렌과 롱스트레치 사이를 떨어뜨려 놨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롱스트레치는 증언을 매우 잘했고 어쩌면 자신의 베테랑 파트너보다도 더 잘하는 것 같았다.
---> 이 대목에선, 증인이 여럿 있는 경우 이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하느냐도 중요한 재판전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네요.
[401쪽] “가정하는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증인. 증인은 살인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사람이 혈흔이 묻은 신발을 잠그지 않은 차고에 놔둘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특히 시간을 들여서 살인 무기는 갖다버리고 나서요?”
프리먼이 일어서더니 질문이 복잡하고, 증거로 제시되지 않은 사실들을 추정하고 있다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질문은 롱스트레치에게 던진 것이 아니었다. 배심원단을 향해 던진 것이었다.
“재판장님, 질문을 철회합니다.” 내가 선언했다. “그리고 이 증인에 대한 반대신문을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 롱스트레치 형사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반대신문 장면입니다.
프리먼 검사의 이의 제기 내용을 보니,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만 하여야 하는 거군요. 그리고 추정적 질문이나 가정적 질문도 하여서는 안 되는 거구요.
한편, 검사나 변호인이나 이렇게 증인을 신문하는 기회를 이용해서 배심원들에게 자기 자신의 논리와 주장을 전달하는 방법도 있을 수는 있겠군요.
그리고 할러 변호사는 배심원들에게 자신의 논리와 주장을 전달하는 중요한 말을 던진 다음, 그 순간 더 이상의 말 없이 신문을 종료함으로써 마지막 말의 여운이 배심원단의 마음속에 한동안 머물게 하는 변론기술도 쓰고 있습니다.
[412쪽] 목요일은 검찰의 모든 관현악적 요소들이 하나로 합쳐져 절정에 달하기로 되어 있는 날이었다. ...... 목요일은 과학의 날이었다. 모든 증거와 증언이 과학적 사실이라는 끊을 수 없는 끈으로 단단히 묶이는 날이 될 것이었다.
---> 재판은 월요일에 시작해서 이제 목요일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검찰 측 증인들에 대한 신문이 진행되고 있는데, 오늘 목요일에는 그동안 프리먼 검사가 아끼고 아껴둔 과학수사의 결과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럼 할러 변호사의 말대로 오늘 배심원들은 손쉬운 탈출구를 발견하고 스스로 자기합리화를 하며 안심들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413쪽] 목요일 아침 프리먼이 부른 첫 번째 증인은 미첼 본듀란트의 시신을 부검한 법의관보 요아킴 구티에레스 박사였다. 그 의사는 끔찍한 슬라이드 영상을 배심원들에게 보여주면서 모든 타박상, 찰과상, 부러진 이 등을 분류해서 설명했다. 나는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슬라이드 영상 사용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기각되었다. ......
---> 지금은 프리젠테이션의 시대, 사진이나 영상은 말이나 글을 필요 없게 만드는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부작용을 생각할 때 물론 남용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런 시대에 없어서는 절대 안 되는 필수품입니다. 더구나 기나긴 재판에 지치고 지친 배심원들의 주의를 그나마 이런 방법으로라도 그때그때 적절히 환기시켜주어야 합니다.
[417-419쪽] 우월감 콤플렉스를 자극하라. ‘나는 의사다. 나는 틀리지 않는다’라는 자부심을 자극하라.
“예전에 법정에서 증언하셨을 때 잘못된 판단에 근거하여 잘못된 진술을 하신 적이 있죠?”
“누구나 실수를 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랬고요.”
“스톤리지 사건은 어떻습니까?”
내가 예상했던 대로 프리먼이 재빨리 이의를 제기했다. ...... 나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배심원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낸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배심원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별말 없이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과거에 구티에레스가 거짓 증언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내가 원한 건 그것뿐이었다.
[413쪽] 목요일 아침 프리먼이 부른 첫 번째 증인은 미첼 본듀란트의 시신을 부검한 법의관보 요아킴 구티에레스 박사였다. 그 의사는 끔찍한 슬라이드 영상을 배심원들에게 보여주면서 모든 타박상, 찰과상, 부러진 이 등을 분류해서 설명했다. 나는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슬라이드 영상 사용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기각되었다. ......
---> 지금은 프리젠테이션의 시대, 사진이나 영상은 말이나 글을 필요 없게 만드는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부작용을 생각할 때 물론 남용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런 시대에 없어서는 절대 안 되는 필수품입니다. 더구나 기나긴 재판에 지치고 지친 배심원들의 주의를 그나마 이런 방법으로라도 그때그때 적절히 환기시켜주어야 합니다.
[417-419쪽] 우월감 콤플렉스를 자극하라. ‘나는 의사다. 나는 틀리지 않는다’라는 자부심을 자극하라.
“예전에 법정에서 증언하셨을 때 잘못된 판단에 근거하여 잘못된 진술을 하신 적이 있죠?”
“누구나 실수를 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랬고요.”
“스톤리지 사건은 어떻습니까?”
내가 예상했던 대로 프리먼이 재빨리 이의를 제기했다. ...... 나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배심원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낸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배심원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별말 없이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과거에 구티에레스가 거짓 증언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내가 원한 건 그것뿐이었다.
......
“질문을 취소하겠습니다.”
---> 할러 변호사가 구티에레스 박사를 반대신문하고 있습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우월감 콤플렉스를 자극하기 위한 전략을 쓰기 위해, 미리 증인에 대한 뒷조사까지 하고 나온 모양이군요. 물론 증인에게는 이 사건과 관련해 증인이 경험한 사실에 대해서만 질문해야지, 할러 변호사처럼 이 사건과 관련도 없는 증인의 과거 개인적인 문제까지 거론해서는 안 됩니다. 할러 변호사는 금지된 질문을 던져 놓고는 재빨리 그 질문을 철회해버리는 방법으로 배심원들이 어떠한 예단을 갖게 만드는 꼼수를 동원합니다. 프리먼 검사가 흥분할 만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런 세세한 데까지 신경을 쓰며 배심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자신이 의도한 데로 사고방향을 이끌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배심원들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는 이 지루한 재판을 지켜보면서 과연 이런 세세한 부분에까지 모두 집중하며 할러 변호사가 의도한 상황을 제대로 알아채고는 있을까요? 사람의 집중력이 기껏해야 15분 정도밖에 못 간다고 해서 ‘TED’나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가 있는 거라는데요.
[421-426쪽] “증인은 방금 전 다른 부상들을 보면 ‘피해자는 서 있다가 곧바로 쓰러져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피해자가 뒤에서 공격을 받았을 때 서 있는 상태였다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시죠?”
......
“그러니까 피해자는 치명적인 가격을 당할 당시 서 있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
“증인, 최초의 치명적인 가격이 있었을 당시 피해자의 자세와 두개골의 방향을 알 수 있다면, 범인이 살인 무기를 들고 있었던 각도를 알 수 있을 거라는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
“...... 우리가 피해자의 자세, 두개골의 방향, 무기의 각도 같은 이 모든 것들을 알고 있다면, 범인의 신장에 대해서 추측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
“...... 증인이 이 요소들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것 아닌가요?”
......
“키가 16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피고인이 자기보다 25센티미터나 큰 남자를 상대로 이 범죄를 저지르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 요소들이 보여줄 것이기 때문에 알고 싶지 ......”
“이의 있습니다!”
“......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요?”
---> 할러 변호사의 마지막 말에서 그의 전략을 알 수 있습니다. 작고 연약한 여성이 자신보다 25센티미터나 키 큰 건장한 남성의 뒤통수를 망치로 때려 쓰러뜨리는 게 가능하겠느냐며 상식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과학자든 의사이든 어떤 분야의 전문가이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고 모든 것을 아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설령 자기 분야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실제 그가 아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 대부분은 모르는 것투성이인 게 당연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바로 그 부분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전문가 증인이지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을 수밖에 없는데, 이 증인이 모르거나 대답하지 못할 만한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배심원들로 하여금 증인에 대한 신뢰감을 가질 수 없게 하려는 것이죠.
[428쪽] 점심시간 동안 나는 오후 공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리사 트래멀에게 설명해주었다.
...... 나는 검찰 측 증인신문이 마무리되고 변호인 측 증인신문이 시작되면서 우리가 무릅써야 할 위험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리사는 잔뜩 겁을 먹었지만, 나를 믿는다고 했다. 의뢰인에게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 족했다. 진실? 그건 아니고 믿음? 그거다.
---> 할러 변호사가 또 중요한 말을 하네요. 진실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한 거라고 합니다.
“질문을 취소하겠습니다.”
---> 할러 변호사가 구티에레스 박사를 반대신문하고 있습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우월감 콤플렉스를 자극하기 위한 전략을 쓰기 위해, 미리 증인에 대한 뒷조사까지 하고 나온 모양이군요. 물론 증인에게는 이 사건과 관련해 증인이 경험한 사실에 대해서만 질문해야지, 할러 변호사처럼 이 사건과 관련도 없는 증인의 과거 개인적인 문제까지 거론해서는 안 됩니다. 할러 변호사는 금지된 질문을 던져 놓고는 재빨리 그 질문을 철회해버리는 방법으로 배심원들이 어떠한 예단을 갖게 만드는 꼼수를 동원합니다. 프리먼 검사가 흥분할 만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런 세세한 데까지 신경을 쓰며 배심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자신이 의도한 데로 사고방향을 이끌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배심원들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는 이 지루한 재판을 지켜보면서 과연 이런 세세한 부분에까지 모두 집중하며 할러 변호사가 의도한 상황을 제대로 알아채고는 있을까요? 사람의 집중력이 기껏해야 15분 정도밖에 못 간다고 해서 ‘TED’나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가 있는 거라는데요.
[421-426쪽] “증인은 방금 전 다른 부상들을 보면 ‘피해자는 서 있다가 곧바로 쓰러져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피해자가 뒤에서 공격을 받았을 때 서 있는 상태였다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시죠?”
......
“그러니까 피해자는 치명적인 가격을 당할 당시 서 있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
“증인, 최초의 치명적인 가격이 있었을 당시 피해자의 자세와 두개골의 방향을 알 수 있다면, 범인이 살인 무기를 들고 있었던 각도를 알 수 있을 거라는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
“...... 우리가 피해자의 자세, 두개골의 방향, 무기의 각도 같은 이 모든 것들을 알고 있다면, 범인의 신장에 대해서 추측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
“...... 증인이 이 요소들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것 아닌가요?”
......
“키가 16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피고인이 자기보다 25센티미터나 큰 남자를 상대로 이 범죄를 저지르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 요소들이 보여줄 것이기 때문에 알고 싶지 ......”
“이의 있습니다!”
“......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요?”
---> 할러 변호사의 마지막 말에서 그의 전략을 알 수 있습니다. 작고 연약한 여성이 자신보다 25센티미터나 키 큰 건장한 남성의 뒤통수를 망치로 때려 쓰러뜨리는 게 가능하겠느냐며 상식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과학자든 의사이든 어떤 분야의 전문가이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고 모든 것을 아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설령 자기 분야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실제 그가 아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 대부분은 모르는 것투성이인 게 당연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바로 그 부분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전문가 증인이지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을 수밖에 없는데, 이 증인이 모르거나 대답하지 못할 만한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배심원들로 하여금 증인에 대한 신뢰감을 가질 수 없게 하려는 것이죠.
[428쪽] 점심시간 동안 나는 오후 공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리사 트래멀에게 설명해주었다.
...... 나는 검찰 측 증인신문이 마무리되고 변호인 측 증인신문이 시작되면서 우리가 무릅써야 할 위험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리사는 잔뜩 겁을 먹었지만, 나를 믿는다고 했다. 의뢰인에게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 족했다. 진실? 그건 아니고 믿음? 그거다.
---> 할러 변호사가 또 중요한 말을 하네요. 진실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한 거라고 합니다.
진실이란 건 그게 실제로 진실이어서 진실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게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진실인 것이죠. 우리가 무엇인가를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결국 진실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428쪽] 나는 그녀가 검찰 측 마지막 증인이고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두 가지 사실을 진술할 거라고 추측했다. 회수된 망치에서 발견된 혈흔에 대한 유전자 분석조사 결과 미첼 본듀란트의 유전자와 완벽히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고, 리사 트래멀의 원예용 신발에서 발견된 혈흔도 조사 결과 피해자의 혈흔과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을 그녀가 확인해줄 것 같았다.
---> 드디어 검찰 측 마지막 증인이 등장합니다. 생물학 박사이고 교수이자 LA 지역 범죄과학 연구실 총책임자입니다. 그는 신발과 망치가 이 사건의 결정적 증거라는 점을 증언해줄 전문가입니다.
[428쪽] 나는 그녀가 검찰 측 마지막 증인이고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두 가지 사실을 진술할 거라고 추측했다. 회수된 망치에서 발견된 혈흔에 대한 유전자 분석조사 결과 미첼 본듀란트의 유전자와 완벽히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고, 리사 트래멀의 원예용 신발에서 발견된 혈흔도 조사 결과 피해자의 혈흔과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을 그녀가 확인해줄 것 같았다.
---> 드디어 검찰 측 마지막 증인이 등장합니다. 생물학 박사이고 교수이자 LA 지역 범죄과학 연구실 총책임자입니다. 그는 신발과 망치가 이 사건의 결정적 증거라는 점을 증언해줄 전문가입니다.
[429-432쪽] "재판 시간을 절약하고 배심원단이 DNA 비교 분석에 관한 길고 지루한 설명에 시달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변호인 측은 명기하겠습니다(the defense stipulates)."
......
“판사님, 우리가 자체적으로 실시한 분석검사에서도 일치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 변호인 측은 명기하겠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누군가가 고의로 그 신발에 피해자의 혈흔을 묻혀놨다는 것을 입증해 보일 겁니다. 진실은 거기 있거든요. 그것이 피해자의 혈흔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요. 우리는 그 혈흔이 피해자의 것임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프리먼 검사가 과학전문가 증인의 입을 통해 피고인의 신발과 망치에 묻은 피가 피해자의 것이라는 점을 주장해 나가려고 하는 순간, 할러 변호사가 끼어들어 stipulate하겠다고 합니다.
stipulate는 우리 법으로 말하면 ‘증거동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에 대해 증거로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말 번역서의 ‘명기하다’라는 표현보다 ‘증거동의 하다’ 또는 ‘증거로 하는 데 동의하다’라는 표현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할러 변호사의 증거동의로 인해 피고인의 신발과 망치에 대해 설명하러 나온 증인이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증인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으니, 모두에게 잘 된 일인 걸까요?
[432-434쪽] 나는 검찰 측 주장을 클라이맥스 없이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다. 검찰은 ‘저 여자가 범인이야! 저 여자가 범인이야! 저 여자가 범인이야!’라고 외치는 상징과 드럼과 증거를 가지고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고 돌아가는 대신, 입을 삐죽거리며 돌아갔다. 프리먼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녀는 점차적인 발전에 클라이맥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셰에라자드'를 앞의 10분은 듣고 뒤의 2분은 듣지 않고 꺼버리는 게 말이 되는가.
---> 아, 이 증거동의가 할러 변호사의 꼼수였군요. 검사의 마지막 증인신문을 무산시켜 검사로 하여금 입증전략에 차질을 빚게 하고 맥까지 빠지게 하려는 것이었군요. 프리먼 검사는 할러 변호사의 의도를 뒤늦게 알아채고 이의를 제기하지만, 재판장은 이를 기각합니다.
이 작품에선 검찰 측 마지막 증인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증거동의가 대단히 극적인 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제 생각엔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적 재미를 위해 과장한 것이고 실제 재판에서라면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즉, 변호인이 검사의 증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데 굳이 검사가 증인신문을 할 실익이 크진 않고 검사가 변호인의 증거동의에 반발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증인에게서 이끌어낼 수 있는 사실이란, 단지 DNA의 비교분석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신발과 망치의 DNA가 피해자의 것과 일치한다는 정도의 증언만으로는, 프리먼 검사가 배심원들 앞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기’에는 밋밋합니다. 잔잔한 클래식 반주에 맞춰 랩을 하겠다는 격이죠.
물론 결정적이거나 중요한 증언을 하러 나온 증인에게는 할러 변호사의 전략이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 프리먼 검사가 과학전문가 증인의 입을 통해 피고인의 신발과 망치에 묻은 피가 피해자의 것이라는 점을 주장해 나가려고 하는 순간, 할러 변호사가 끼어들어 stipulate하겠다고 합니다.
stipulate는 우리 법으로 말하면 ‘증거동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에 대해 증거로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말 번역서의 ‘명기하다’라는 표현보다 ‘증거동의 하다’ 또는 ‘증거로 하는 데 동의하다’라는 표현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할러 변호사의 증거동의로 인해 피고인의 신발과 망치에 대해 설명하러 나온 증인이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증인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으니, 모두에게 잘 된 일인 걸까요?
[432-434쪽] 나는 검찰 측 주장을 클라이맥스 없이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다. 검찰은 ‘저 여자가 범인이야! 저 여자가 범인이야! 저 여자가 범인이야!’라고 외치는 상징과 드럼과 증거를 가지고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고 돌아가는 대신, 입을 삐죽거리며 돌아갔다. 프리먼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녀는 점차적인 발전에 클라이맥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셰에라자드'를 앞의 10분은 듣고 뒤의 2분은 듣지 않고 꺼버리는 게 말이 되는가.
---> 아, 이 증거동의가 할러 변호사의 꼼수였군요. 검사의 마지막 증인신문을 무산시켜 검사로 하여금 입증전략에 차질을 빚게 하고 맥까지 빠지게 하려는 것이었군요. 프리먼 검사는 할러 변호사의 의도를 뒤늦게 알아채고 이의를 제기하지만, 재판장은 이를 기각합니다.
이 작품에선 검찰 측 마지막 증인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증거동의가 대단히 극적인 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제 생각엔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적 재미를 위해 과장한 것이고 실제 재판에서라면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즉, 변호인이 검사의 증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데 굳이 검사가 증인신문을 할 실익이 크진 않고 검사가 변호인의 증거동의에 반발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증인에게서 이끌어낼 수 있는 사실이란, 단지 DNA의 비교분석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신발과 망치의 DNA가 피해자의 것과 일치한다는 정도의 증언만으로는, 프리먼 검사가 배심원들 앞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기’에는 밋밋합니다. 잔잔한 클래식 반주에 맞춰 랩을 하겠다는 격이죠.
물론 결정적이거나 중요한 증언을 하러 나온 증인에게는 할러 변호사의 전략이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마지막 제4편에서 계속됩니다.]
2019년 11월 22일 금요일
[독서일기] '다섯 번째 증인' (feat. 미국 형사사법제도) 제2편
댓글 없음
:
작성자:
iMagistrat
시간:
11/22/2019 09:00:00 오후
라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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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바기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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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소송
[제1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101쪽] 그다음 화요일 리사 트래멀은 밴나이스 법정에서 공식적인 기소인부 절차에 부쳐졌다(was formally arraigned).
---> 이제 한 주가 지나고, 우리말로 흔히 ‘기소인부 절차’라고 부르는 arraignment 절차가 시작됩니다. 이는 판사가 피고인에게 혐의사실을 인정하는지 여부를 묻고, 그에 따라 배심재판을 열지 말지를 결정하는 절차입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를 피고인의 답변을 기록하고 검찰의 신속한 재판 요구에 따라 재판일정을 짜는 게 주목적인 통상적인 심리 절차라고 설명하는데, 의뢰인이 구속 상태라면 모를까 보석으로 풀려나 있는 상태이므로 굳이 신속하게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소인부 절차에서 할러 변호사와 그의 의뢰인은 우선 혐의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정식재판을 받겠다는 굳은 의사를 표시합니다.
우리의 경우 기소인부 절차가 별도로 있지 않은 대신, 검사가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01-102쪽] 미첼 본듀란트 살인 사건의 기소인부 절차와 예심(preliminary hearing)은 다리오 모랄레스 고등법원 판사에게 배정되었다. 예심은 혐의에 대한 형식적인 확인 절차였다. 리사가 분명히 답변해야 했다. 그런 다음 주요 행사인 공판(trial)은 다른 판사에게 배정될 것이었다.
---> 할러 변호사의 친절한 설명에서 보듯, 기소인부 절차 다음으로 이어지는 절차는 예심, 그리고 공판이군요.
[114-115쪽] ...... 나는 반짝이는 사무실 마룻바닥에 안드레아 프리먼 검사에게 받은 8백 페이지에 달하는 증거물 서류를 펼쳐놓았다.
서류 대부분은 웨스트랜드 문건이었는데, 그중 상당 부분이 분량을 부풀리기 위해 집어넣은 것들이었다.
---> 앞서서 프리먼 검사는 할러 변호사의 지저분한 작전에 말려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갖고 있는 증거의 일부를 개시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할러 변호사는 이제 검사가 보내온 8백 페이지 분량의 서류더미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를 괘씸히 여긴 프리먼 검사가 서류더미 속에서 고생 좀 해보라는 심정으로 증거가치도 없고 쓸 데도 없는 자료들까지 구분 없이 한꺼번에 다 떠안긴 겁니다.
이 서류들은 모두 피해자가 근무하던 웨스트랜드 은행으로부터 입수한 것들인데, 그 안에서 할러 변호사는 유용한 자료 하나를 찾아냅니다.
[122쪽] 사실 우리가 무엇을 증명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문제 제기만 하고 나머지는 배심원단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면 되었다. 합리적인 의심(reasonable doubt)의 씨앗을 심기만 하면 되었다. 결백의 가설(hypothesis of innocence)을 세우기만 하면 되었다.
---> 할러 변호사가 신참 변호사 애런슨을 포함한 자신의 직원들과 변론전략을 의논하다, 피해자가 그의 사업상 파트너 중 한 사람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자는 전략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시나리오가 근거가 빈약하고 비약도 꽤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애런슨은 그게 가능한 얘기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자 할러 변호사는 그런 의혹은 제대로 입증할 필요 없이 배심원단 앞에서 대충 펼쳐놓기만 하면 된다고 대꾸합니다. 할러 변호사의 이 말이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형사재판에서 검사와 변호인은 원래 그렇게 각자의 역할이 다른 것입니다. 검사는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퍼즐조각들(증거)을 찾아 어떠한 그림(범죄사실)을 어느 정도 뚜렷하게 윤곽이 드러나도록 짜 맞추는 게 임무이고, 반면 변호인은 검사가 기껏 찾아서 짜 맞춰 놓은 퍼즐조각들을 흩트려놓아 이게 무슨 그림인지 알기 어렵게 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짜 맞추는 것과 흩트려놓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짜 맞추는 것은 기술이 필요하지만, 흩트려놓는 것은 딱히 기술이 필요 없는 것이죠. 그래서 입증할 필요 없이 펼쳐놓기만 하면 된다고 할러 변호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할러 변호사가 배심원들에게 그냥 아무 의혹이나 막 던져보자고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건 ‘합리적인’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인’ 의심을 불러일으키려면 그래도 어느 정도의 근거는 갖춘 의혹 제기여야 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제부터 이 의혹의 근거를 찾아내려 할 것입니다.
[133-135쪽] 예심은 재판으로 가는 통상적인 절차이고 전적으로 검사의 독무대이다. 검찰이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고 증거를 제시하면 판사는 배심원 재판으로 끌고 갈 만큼 충분한 증거가 있는지 판단한다. 이것은 합리적인 의심이 등장하는 단계가 아니다. 거기까지 가려면 아직도 멀었다. 예심 단계에서는 혐의를 뒷받침할 증거가 충분히 있는지를 판사가 판단만 해주면 된다. 만일 그렇다고 판단하면, 그 다음 단계부터는 진짜 재판으로 가는 거다.
---> 할러 변호사가 기소인부 절차 다음에 진행되는 예심 절차(preliminary hearing)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심 절차는 해당 사건이 과연 정식재판으로 가기에 적합한 증거가 갖추어진 사건인지 여부를 형식적으로 확인하는 절차라는 설명입니다.
1주일 이상의 긴 시간과 배심원 여비 등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정식재판을 아무 사건에서나 다 열 수는 없는 일이기에, 이걸 거르는 예심 절차는 비록 요식행위이긴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절차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형사재판에서는 예심 절차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격이 아주 다르긴 하지만 굳이 비슷한 절차를 든다면, 복잡하거나 중요한 사건에서 정식재판기일 전에 미리 재판장, 검사와 변호인이 법정에 한데 모여 증거의 인정 여부를 확인하고 앞으로의 증거조사 일정을 정하는 ‘변론준비기일’ 절차 정도가 되겠습니다. 변론준비기일 없이 바로 정식재판이 시작되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 이 경우에는 첫 번째 재판기일에 예심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절차가 진행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136쪽] 수사 중에 검경이 저지른 실수를 찾아내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검찰이 시인하게 만드는 것이 변호인이 할 일이었다.
---> 변호인의 제1전략은 사건의 내용적 측면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수사절차의 하자라는 형식적 측면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136쪽] 나는 변호 전술이나 증거물은 그 어느 것도 예심에서 내놓지 않기로 결심했다.
---> 형사재판에서 검사는 공격하는 입장, 피고인과 변호인은 수비하는 입장입니다. 공격하는 사람은 그의 무기를 겉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지만, 수비하는 사람은 공격하는 사람의 무기가 코앞에 닥치기 전까지는 굳이 자신이 사용할 무기를 상대방에게 미리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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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쪽] 그다음 화요일 리사 트래멀은 밴나이스 법정에서 공식적인 기소인부 절차에 부쳐졌다(was formally arraigned).
---> 이제 한 주가 지나고, 우리말로 흔히 ‘기소인부 절차’라고 부르는 arraignment 절차가 시작됩니다. 이는 판사가 피고인에게 혐의사실을 인정하는지 여부를 묻고, 그에 따라 배심재판을 열지 말지를 결정하는 절차입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를 피고인의 답변을 기록하고 검찰의 신속한 재판 요구에 따라 재판일정을 짜는 게 주목적인 통상적인 심리 절차라고 설명하는데, 의뢰인이 구속 상태라면 모를까 보석으로 풀려나 있는 상태이므로 굳이 신속하게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소인부 절차에서 할러 변호사와 그의 의뢰인은 우선 혐의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정식재판을 받겠다는 굳은 의사를 표시합니다.
우리의 경우 기소인부 절차가 별도로 있지 않은 대신, 검사가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01-102쪽] 미첼 본듀란트 살인 사건의 기소인부 절차와 예심(preliminary hearing)은 다리오 모랄레스 고등법원 판사에게 배정되었다. 예심은 혐의에 대한 형식적인 확인 절차였다. 리사가 분명히 답변해야 했다. 그런 다음 주요 행사인 공판(trial)은 다른 판사에게 배정될 것이었다.
---> 할러 변호사의 친절한 설명에서 보듯, 기소인부 절차 다음으로 이어지는 절차는 예심, 그리고 공판이군요.
[114-115쪽] ...... 나는 반짝이는 사무실 마룻바닥에 안드레아 프리먼 검사에게 받은 8백 페이지에 달하는 증거물 서류를 펼쳐놓았다.
서류 대부분은 웨스트랜드 문건이었는데, 그중 상당 부분이 분량을 부풀리기 위해 집어넣은 것들이었다.
---> 앞서서 프리먼 검사는 할러 변호사의 지저분한 작전에 말려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갖고 있는 증거의 일부를 개시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할러 변호사는 이제 검사가 보내온 8백 페이지 분량의 서류더미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를 괘씸히 여긴 프리먼 검사가 서류더미 속에서 고생 좀 해보라는 심정으로 증거가치도 없고 쓸 데도 없는 자료들까지 구분 없이 한꺼번에 다 떠안긴 겁니다.
이 서류들은 모두 피해자가 근무하던 웨스트랜드 은행으로부터 입수한 것들인데, 그 안에서 할러 변호사는 유용한 자료 하나를 찾아냅니다.
[122쪽] 사실 우리가 무엇을 증명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문제 제기만 하고 나머지는 배심원단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면 되었다. 합리적인 의심(reasonable doubt)의 씨앗을 심기만 하면 되었다. 결백의 가설(hypothesis of innocence)을 세우기만 하면 되었다.
---> 할러 변호사가 신참 변호사 애런슨을 포함한 자신의 직원들과 변론전략을 의논하다, 피해자가 그의 사업상 파트너 중 한 사람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자는 전략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시나리오가 근거가 빈약하고 비약도 꽤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애런슨은 그게 가능한 얘기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자 할러 변호사는 그런 의혹은 제대로 입증할 필요 없이 배심원단 앞에서 대충 펼쳐놓기만 하면 된다고 대꾸합니다. 할러 변호사의 이 말이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형사재판에서 검사와 변호인은 원래 그렇게 각자의 역할이 다른 것입니다. 검사는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퍼즐조각들(증거)을 찾아 어떠한 그림(범죄사실)을 어느 정도 뚜렷하게 윤곽이 드러나도록 짜 맞추는 게 임무이고, 반면 변호인은 검사가 기껏 찾아서 짜 맞춰 놓은 퍼즐조각들을 흩트려놓아 이게 무슨 그림인지 알기 어렵게 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짜 맞추는 것과 흩트려놓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짜 맞추는 것은 기술이 필요하지만, 흩트려놓는 것은 딱히 기술이 필요 없는 것이죠. 그래서 입증할 필요 없이 펼쳐놓기만 하면 된다고 할러 변호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할러 변호사가 배심원들에게 그냥 아무 의혹이나 막 던져보자고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건 ‘합리적인’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인’ 의심을 불러일으키려면 그래도 어느 정도의 근거는 갖춘 의혹 제기여야 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제부터 이 의혹의 근거를 찾아내려 할 것입니다.
[133-135쪽] 예심은 재판으로 가는 통상적인 절차이고 전적으로 검사의 독무대이다. 검찰이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고 증거를 제시하면 판사는 배심원 재판으로 끌고 갈 만큼 충분한 증거가 있는지 판단한다. 이것은 합리적인 의심이 등장하는 단계가 아니다. 거기까지 가려면 아직도 멀었다. 예심 단계에서는 혐의를 뒷받침할 증거가 충분히 있는지를 판사가 판단만 해주면 된다. 만일 그렇다고 판단하면, 그 다음 단계부터는 진짜 재판으로 가는 거다.
---> 할러 변호사가 기소인부 절차 다음에 진행되는 예심 절차(preliminary hearing)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심 절차는 해당 사건이 과연 정식재판으로 가기에 적합한 증거가 갖추어진 사건인지 여부를 형식적으로 확인하는 절차라는 설명입니다.
1주일 이상의 긴 시간과 배심원 여비 등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정식재판을 아무 사건에서나 다 열 수는 없는 일이기에, 이걸 거르는 예심 절차는 비록 요식행위이긴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절차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형사재판에서는 예심 절차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격이 아주 다르긴 하지만 굳이 비슷한 절차를 든다면, 복잡하거나 중요한 사건에서 정식재판기일 전에 미리 재판장, 검사와 변호인이 법정에 한데 모여 증거의 인정 여부를 확인하고 앞으로의 증거조사 일정을 정하는 ‘변론준비기일’ 절차 정도가 되겠습니다. 변론준비기일 없이 바로 정식재판이 시작되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 이 경우에는 첫 번째 재판기일에 예심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절차가 진행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136쪽] 수사 중에 검경이 저지른 실수를 찾아내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검찰이 시인하게 만드는 것이 변호인이 할 일이었다.
---> 변호인의 제1전략은 사건의 내용적 측면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수사절차의 하자라는 형식적 측면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136쪽] 나는 변호 전술이나 증거물은 그 어느 것도 예심에서 내놓지 않기로 결심했다.
---> 형사재판에서 검사는 공격하는 입장, 피고인과 변호인은 수비하는 입장입니다. 공격하는 사람은 그의 무기를 겉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지만, 수비하는 사람은 공격하는 사람의 무기가 코앞에 닥치기 전까지는 굳이 자신이 사용할 무기를 상대방에게 미리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무런 무기도 없는 맨손인 것 같은 외양을 보여야, 공격하는 사람의 방심을 유발함으로써 반전을 노리는 수비가 가능한 거겠죠.
[169-170쪽] ...... 프리먼은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유죄인정 합의(a plea agreement)로 이 사건을 끝낼 가능성을 논의할 생각이 있다고 말하는 거였다.
......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검찰 측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다. 증거를 잃어버렸거나 증인이 말을 바꿨거나. ......
---> 자신만만해 보이던 프리먼 검사가 난데없이 먼저 플리바기닝을 제안합니다.
플리바기닝이라는 건 무엇보다, 검사 입장에서 봤을 때 무언가 이익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뭔가 이익이 있어야 검사가 피고인에게 먼저 협상을 제안하든가 피고인의 협상 제안을 받아들이기 마련입니다.
[169-170쪽] ...... 프리먼은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유죄인정 합의(a plea agreement)로 이 사건을 끝낼 가능성을 논의할 생각이 있다고 말하는 거였다.
......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검찰 측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다. 증거를 잃어버렸거나 증인이 말을 바꿨거나. ......
---> 자신만만해 보이던 프리먼 검사가 난데없이 먼저 플리바기닝을 제안합니다.
플리바기닝이라는 건 무엇보다, 검사 입장에서 봤을 때 무언가 이익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뭔가 이익이 있어야 검사가 피고인에게 먼저 협상을 제안하든가 피고인의 협상 제안을 받아들이기 마련입니다.
만약 검사가 유죄를 얻어내기에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냥 원칙대로 재판으로 가서 피고인이 죄에 합당한 벌을 받도록 하면 그만입니다. 그게 검사라는 사람들 입장에서 폼도 나고 뿌듯해 할 일일 겁니다. 굳이 죄를 저지른 사람이 가벼운 형벌을 받도록 허용할 이유가 없고, 형량을 다운시켜서 검사가 딱히 얻을 이익이 없습니다. 더구나 살인 사건인데요. 최소한 피해자와 유족 앞에서 면은 서고 봐야죠.
그런데 이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라는 심증은 충분히 있으나 물증이 부족한 경우라면, 그건 상황이 좀 다릅니다. 물증이 부족한데 그냥 재판으로 가게 되면 결국 재판하느라 힘은 힘대로 쓰고 판결은 무죄로 나서 피고인에게 면죄부만 주게 될 가능성이 많고, 무죄판결이 무서워 피고인을 그냥 풀어주고 사건을 끝내자니 검사의 체면상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을 겁니다. 바로 이럴 때 플리바기닝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순순히 죄를 자백하면 형량을 낮춰주겠다.’ 비록 검사가 당초 가졌던 생각보다 형량은 낮아지지만, 죄를 저지른 사람을 아무런 제재도 없이 놔주는 일은 생기지 않게 되는 이익이 검사에게는 있는 겁니다.
[179-181쪽] "...... 조건을 제시해봐요." ......
"...... 살인에 중간 수준(the mid-level) 징역형 어때요?"
---> 할러 변호사가 프리먼 검사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면서, ‘너, 유죄 받을 자신(증거) 없으니까 재판으로 가지 말고 그냥 협상이나 하자는 거지?’라며 속을 떠봅니다.
플리바기닝에는 이렇게 검사와 변호인 사이에 눈치싸움, 수싸움이 필요한 경우가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할러 변호사의 생각대로 검사가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도 이렇게 재판 없이 가자고 할 리가 없거든요. 재판하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자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죠.
그런데 이런 경우 변호인 입장에서 ‘아무래도 검사 쪽의 증거가 부족해서 검사가 협상하자는 거 같은데, 당장 합의해버리면 나중에 억울할 수도 있으니 일단 증거개시 절차를 통해 검사가 갖고 있는 증거가 뭐가 있나 먼저 보고나서 생각해볼까?’라는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떻게든 손해 보기 싫은 마음에 과감한 베팅보다 안전하게 가려는 생각이겠지만, 이건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직 사건이 일어나고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 수사도 덜 진행되어 지금 당장은 검사 쪽 증거가 부족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서, 그리고 수사가 계속 더 진척이 되면서 새로운 결정적인 증거가 수집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검사는 당연히 협상카드를 도로 집어넣을 것이고, 피고인과 변호인은 법정에서 승산 없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조금 미심쩍기는 하지만, 신속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열차는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검사가 마음을 바꾸면 곤란하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할러 변호사가 의뢰인에게 검사의 제안을 알려주면서 협상에 응할 의사를 묻느라 잠시 지체하는 사이, 검사는 협상 제안을 없던 일로 하고 맙니다.
[186쪽] 내가 예상했던 대로, 리사 트래멀은 최대 7년간 자신을 감옥에서 썩게 만들 유죄인정 합의를 거부했다. 재판에서 유죄 평결을 받으면 징역을 그보다 네 배는 더 살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줬지만 그래도 싫다고 했다. 그녀는 무죄 평결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
---> 리사 트래멀이 완강하게 검사의 협상 제안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할러 변호사는 의뢰인이 정말로 누명을 쓴 억울한 사람이 맞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였을 겁니다. 그래서 무고한 의뢰인을 위해 끝까지 한번 해보자는 결의를 갖게 되는 듯 보입니다.
[200-213쪽] "재판장님, 정말 기가 막히네요. 배심원단 선정 하루 전날에요? 이런 걸 이제 내민다고요? ......"
......
나는 발언 기회를 기다리면서 좌절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연 이것은 판세를 뒤집는 강력한 증거였다. 이것이 나오기 전까지는 전적으로 정황증거에 의존한 사건(a circumstantial case)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피고인과 범죄를 연결시키는 직접증거가 있는 사건(a case involving direct evidence)이 되었다.
---> 자, 이제부터 협상은 없던 일로 돼버리고,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됩니다.
먼저, 배심원단 선정기일을 하루 앞둔 어느 날, 이 사건의 재판을 맡게 된 콜맨 페리 판사의 법정에서 작은 재판이 열립니다. 할러 변호사가 신청한 증인의 채택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는데, 그에 대한 논의가 끝난 후 프리먼 검사가 피해자의 혈흔이 있는 피고인의 신발을 뒤늦게 증거로 제출하겠다고 하면서 할러 변호사의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할러 변호사가 증거개시 절차를 통해 검사로부터 넘겨받은 자료와 자신의 수사관 시스코로부터 은밀하게 입수한 자료를 종합해 보았을 때, 이제까지는 검사가 가진 증거라곤 범행 직전 범행장소 부근에서 리사 트래멀을 보았다는 한 목격자의 진술,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집을 압류당한 일 때문에 채권은행의 압류담당자인 피해자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던 리사 트래멀이 범행 직전 범행장소 부근에서 목격되었으니 피해자를 살해할 만한 사람은 이 여성 외에는 없다는, 일응 그럴싸한 정황논리만이 존재하는 사건이었습니다(여기서 그 목격자의 진술을 정황증거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정황논리에 불과할 뿐, 리사 트래멀이 피해자를 살해하였음을 인정할 직접증거가 없는 한 그러한 정황논리만으로 그녀의 범행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할러 변호사도 재판에 자신만만하게 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직접증거가 등장합니다. 피해자의 피가 묻은 리사 트래멀의 신발, 그녀가 피해자를 살해하였으리라고 볼 수 있는 강력한 증거가 이제 검사의 수중에 있게 된 것이죠. 할러 변호사는 그 증거가 너무 뒤늦게 제출되었음을 들어 저항해보지만, 증거가 늦게 발견된 게 검사의 잘못은 아니니 페리 판사는 이 증거를 채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대한 가치를 갖고 있는 증거를 단지 늦게 발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배심원들이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판사 입장에서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지요.
대신, 페리 판사는 당장 다음날로 예정되어 있던 배심원단 선정을 열흘이나 연기함으로써, 불의타를 맞게 된 할러 변호사가 새로운 재판전략을 준비할 시간을 갖도록 배려해줍니다.
[218쪽] ...... 우리는 이 재앙과도 같은 증거를 반영하여 변호 전략을 짰다. 과학적 증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내 의뢰인이 결백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모함(setup)을 주장하는 고전적인 전략이었다. 오파리지오를 희생양으로 삼는 전략에 음모 이론을 덧붙일 작정이었다.
---> 흔히 과학수사, 과학수사, 많이들 얘기합니다. 과학수사 하나면 모든 사건이 의문 없이 깔끔하게 해결되니, 이제는 사람 불러 놓고 자백만 강요하는 수사는 하면 안 된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과연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게 선과 악이 명쾌하게 분간되고, 정의와 적폐의 경계선이 뚜렷하게 줄 그어져 있는 것일까요. 당연히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든 일은 양면성이라는 게 있는 것이죠.
피고인의 신발에서 발견된 혈흔의 DNA와 피해자의 DNA가 서로 일치한다는 과학수사의 결론은, 분명 진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길을 비춰주는 강력한 등대 불빛인 건 맞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는 아직 진실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앞에 큰 길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아직은 소로길도 여러 개 놓여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혈흔이라는 강력한 직접증거를 공격하기 위한 할러 변호사의 구상은, 자신의 의뢰인이 모함을 당한 것이라 주장하겠다는 것입니다. 리사 트래멀의 신발에 피해자의 혈흔이 있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 사실이 ‘리사 트래멀이 그 신발을 신고 피해자를 살해하였다’라는 걸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를 살해한 진범이 리사 트래멀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그녀의 신발에 피해자의 피를 묻혀둔 것이다, 라는 주장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스토리가 이런 류의 영화, 소설,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죠. 그런 스토리가 흔해서 우리가 자꾸 음모론에 쉽게 빠지게 되는 걸까요?
[218쪽] 프리먼이 던진 또 하나의 패스트볼이 내 머리를 향해 날아온 것은 배심원단 선정이 시작된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선정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검찰과 변호인 양측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배심원단의 구성에 만족스러워하고 있던 보기 드문 한때였다.
---> 페리 판사가 허락한 열흘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배심원단 선정이 시작됩니다. 무작위로 연락을 받은 지역 주민들이 단체로 법정에 호출되어 오고, 그 중에서 검사와 변호인이 각자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배심원들을 12명 선정합니다. 이 자리에서 선정된 배심원들은 이제 몇 날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재판을 위해 직장도 못 나가고 하염없이 법정으로만 출퇴근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미국의 배심재판을 본떠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이름의 제도를 2008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넘게 실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미국 제도를 단지 모양새만 가져와서 흉내만 내고 있다는 점이죠. 10년 넘게 아직까지 시범실시만 하고 있고, 그 제도에 담긴 본래의 취지와 장점은 제대로 구현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예를 하나 들어보면, 우리의 국민참여재판은 대부분 하루짜리 재판입니다. 길어야 2일 내지 3일짜리이지만, 흔하지는 않습니다. 미국식 재판을 그저 최소한의 구색만 갖춰 우리식대로 빨리빨리 진행해서 그런 면도 있지만, 딱 하루만 재판하기 적당한 사건만 주로 대상으로 삼기에 그런 면도 있습니다. 딱 하루 만에 재판을 해치우려니, 하루를 있는 대로 꽉 채우고도 모자라 자정을 훌쩍 넘겨 재판이 끝나기도 합니다. 하루 종일 답답한 공간에서 긴 시간을 보내게 되니, 판검사와 피고인은 물론 가장 중요한 구성원인 배심원들의 집중력은 처참한 수준입니다. 딱 하루 하는 재판이니, 배심원단 선정은 반드시 오전 중에는 마쳐야 해서 신중한 배심원 선정도 곤란하고 그야말로 흉내만 냅니다.
리사 트래멀의 재판은 배심원단 선정에만 4일, 재판 자체도 8일이나 진행되었습니다. 공판중심주의의 취지에 잘 맞추어 재판을 꼼꼼히 제대로 진행한 결과, 살인 사건 1건에 대해 법정에서만 총 12일이 소요된 것입니다. 재판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되었고, 배심원들은 다행히 오후 5시면 귀가해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사건을 분명히 하루 이틀 내에 모두 재판하였을 것이고, 배심원들은 밤늦게까지 법정 안에 갇혀 극심한 피로에 파김치가 되어가고 있었을 겁니다. 신중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여건이 안 되는 것이죠.
[219-221쪽] 나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서 책상 앞에서 벗어났다.
"아, 나, 정말." 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
나는 법전들을 향해 돌아서서 깊이 심호흡을 했다. 여기서 뭔가 얻어내야 했다. 판사가 내게 뭔가를 빚지게 만들어놓고 이 방에서 나가야 했다.
---> 배심원단 선정 나흘째, 그리고 다음날은 드디어 첫 재판기일입니다. 그런데 할러 변호사가 무슨 일 때문인지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날 프리먼 검사가 새로운 증거를 또 갖고 왔습니다. 피해자의 뒤통수를 강타하는 데 쓰였던 망치가 범행현장 부근 어느 주택의 덤불 속에서 뒤늦게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망치는 리사 트래멀의 집 차고에 있던 망치입니다. 피해자의 피가 묻은 리사 트래멀의 신발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리사 트래멀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매우 유력하게 보여주는 직접증거입니다.
프리먼 검사는 너무 늦은 증거제출이라는 할러 변호사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 망치를 증거로 제출하려 합니다. 망치가 이제서야 발견되었다는데 검사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페리 판사는 역시 이 망치를 증거로 채택합니다. 대신 다음날인 금요일 시작하려던 첫 재판기일을 다음 주 월요일로 연기하여, 할러 변호사의 재판준비 시간을 약간 배려합니다.
할러 변호사의 독백 중 마지막 대목, “판사가 내게 뭔가를 빚지게 만들어놓고 이 방에서 나가야 했다”라는 부분은 로버티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상호성의 법칙(Law of reciprocality)을 의미하는 것이죠. 항상 상대방을 이기려고만 하지 말고 상대방이 나에게 뭔가 빚을 진 듯한 생각을 갖게 하는 게, 내가 ‘갑’이 될 수 있는 방법입니다.
[224쪽] 피고인이 계략에 빠졌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변호를 한다고 해도 수확 체감의 법칙(a law of diminishing returns)이라는 것이 있다. 신발에 떨어진 혈흔은 뭐 어떻게든 해명을 한다고 치자. 살인 무기를 의뢰인이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렇게 쉽게 해명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증거물이 하나씩 발견될 때마다 음모 이론의 성공 가능성은 급격히 떨어졌다.
---> 아무튼 리사 트래멀의 신발과 망치, 결정적 증거가 속속 발견되면서 할러 변호사는 당초 계획했던 변론전략이 무위로 돌아가 점점 불리한 상황에 빠집니다.
[230-231쪽] "...... 재판은 국가의 증거 대 트래멀 사건이거든. 다른 누가 그 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그게 누구냐를 다투는 문제가 아니라고. 다른 가능성은 중요하지 않아. 물론 오파리지오를 트래멀의 주택 압류와 전국을 휩쓰는 압류 열풍에 관한 전문가로 증인석에 앉힐 수는 있어. 하지만 트래멀을 대체하는 용의자로 그에게 접근할 수는 없을 거야. 관련성(relevance)을 입증하지 못하면 판사가 허락하지 않을 거거든. ......"
---> 할러 변호사와 애런슨 변호사가 새로운 전략을 위해 함께 머리를 쥐어짜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의 기본전략은, 피해자와 사업상 갈등관계에 있던 압류대행업자인 루이스 오파리지오가 이 사건의 진범이 아닐까라는 의혹을 배심원들에게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혹을 제기하려면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리사 트래멀이 범인이 맞냐 아니냐 하는 재판을 하고 있는데,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진범이니 리사 트래멀은 무죄라고 주장하려면 당연히 이걸 말로만 주장해서는 곤란합니다. 말 말고 뭔가 더 있어야 합니다. 이걸 할러 변호사는 ‘관련성(relevance) 입증’이라고 설명합니다.
피해자의 피가 묻은 신발과 망치, 검사 쪽 증거는 점점 탄탄해지는데, 아직까지 할러 변호사는 이렇다 할 무기를 손에 넣지 못하고 있습니다.
[243-244쪽] 프리먼이 먼저 모두진술을 했고, 나는 늘 그랬듯이 검사가 말하는 동안 배심원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이의를 제기할 준비를 하고서 검사의 진술을 귀 기울여 들었지만 단 한 번도 그녀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배심원들이 어떤 눈으로 프리먼을 보고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들에 대한 내 예상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 드디어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첫 재판날이 되었습니다. 재판은 먼저 모두진술, 즉 검사와 변호인이 배심원들에게 사건의 개요와 앞으로의 입증방법 또는 방어방법을 설명하는 절차로 시작됩니다.
할러 변호사의 눈은 시종 배심원들의 얼굴을 좇습니다. 배심원들이 검사의 말에 호감을 보이느냐, 아니면 자신의 말에 호감을 보이느냐를 알고 싶어서 말입니다.
[244쪽] 프리먼은 분명하고도 능숙하게 말했다. 과장되지도 않고 말이 너무 빠르지도 않았다. 정해진 목표만 보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스타일이었다.
......
"피고인 측은 엄청난 음모와 극적인 사연을 주장하면서 여러분을 속이려고 애쓸 겁니다. 이 살인 사건은 엄청난 사건이긴 하지만 사연은 단순합니다. 변호인의 주장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자세히 보시고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오늘 여기서 나온 말이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증거로 뒷받침되는지를 확인하십시오. 진짜 증거로 말입니다."
---> 프리먼 검사가 먼저 모두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하다’, ‘능숙하다’, ‘과장하지 않는다’, ‘적당한 속도로 말한다’, ‘당당하다’, 하나같이 다 검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꼭 갖추어야 할 자세들이네요.
그런데 “피고인 측은 ...... 여러분을 속이려고 애쓸 겁니다”라거나 “변호인의 주장에 현혹되지 마십시오”라는 프리먼 검사의 말은, 우리 정서에는 좀 과한 표현 같기도 합니다. 변호인이 배심원들을 상대로 사기를 칠 거라고 검사가 이렇게 변호인 면전에서 대놓고 말하다니, 미국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얘기해 놓고도 서로 싸움 안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다들 점잖은 척하는 우리 법정에서는 흔히 보기는 힘든 풍경입니다.
[253-254쪽] 공판 최초의 증인은 리키 산체스라는 이름의 은행 안내직원이었다. 주차장에서 피해자의 시신을 발견한 목격자였다. 그녀는 사망시각 추정을 돕고 배심원석에 앉은 일반인들에게 살인 사건의 충격과 공포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 재판의 꽃은 증인신문입니다. 증거에는 인적 증거(사람의 증언)와 물적 증거(물건의 존재 자체)가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과학수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진술보다 객관적 증거인 물적 증거가 유무죄 판단에 더 중요한 것이니 이제 자백을 강요하는 등 사람의 진술을 끌어내는 수사를 하지 말고 물적 증거 수집에 집중하는 수사를 해야 한다고 흔히 말들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물건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범인이 범인이 맞다고 확실하게 지목을 해주지 못합니다. 물건만 갖고는 우리가 기껏 ‘추정’이라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지요. 이 범인이 범인이 맞다고 확실하게 지목을 해주는 사람의 말, 즉 인적 증거가 결국에는 가장 중요한 증거인 것입니다. 아주 쉽게 얘기해서, 물건만 등장하고 증인은 하나도 없는 재판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증인신문은 검찰 측 증인들이 먼저 등장하고, 그 절차가 모두 끝나면 피고인 측 증인들이 나서게 됩니다. 검찰 측 증인은 덜 중요한 증인부터 시작해서 점점 중요도 높은 증인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 대목에서 프리먼 검사가 이른바 ‘검찰 측 바람잡이 증인들’과 함께 법정에 들어왔다고 묘사합니다. 그가 말하는 ‘검찰 측 바람잡이 증인들’은, 피해자의 시신을 발견한 피해자의 동료직원, 그 직원으로부터 신고전화를 받은 911 상담원, 그 상담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 등등, 사건발생과 관련한 기본적인 스토리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증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들의 증언은 피고인의 유무죄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지만, 검찰 측 주장의 토대가 되는 역할, 나중에 나올 결정적 증거의 무대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원문에서는 《 the prosecution’s scene-setter witnesses 》, 직역하면 ‘검찰 측 배경설정 증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살인범행 그 자체를 입증하는 것과는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증인들은 아니지만, 사건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배심원들로 하여금 사건발생 초기부터 하나하나 사건의 스토리를 잘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이런 증인들까지 동원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의 단점은, 이런 증인들까지 하나하나 다 불러서 증언을 듣다보면 당연히 재판은 한없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겠죠. 우리나라 재판에서는 피고인이 문제를 삼고 다투는 내용과 관련된 증인만 불러 신문하기 때문에, 아마 이런 ‘검찰 측 바람잡이 증인들’을 실제로 법정에서 만나는 일은 드물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이런 부분을 다투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러 변호사도, 이런 사람들이 허위증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신문을 간단히 하고 맙니다.
[255-256쪽] 다음 증인은 그날 아침 8시 52분 산체스로부터 신고 전화를 받은 911 상담원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르숀다 게인즈였고 주로 산체스로부터 걸려온 신고 전화의 녹음된 통화내용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통화내용 녹음테이프를 트는 것은 지나치게 극적이고 불필요한 일이었지만 공판 전에 내가 이의 제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판사는 통화내용 공개를 허락했다.
---> 역시 목격자로부터 신고전화를 받은 911 상담원이 허위증언을 할 리는 없겠죠. 할러 변호사도 반대신문은 생략합니다.
다만,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증인이 소개한 통화녹음 내용입니다. 이 통화녹음 내용은 ‘피해자가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직접증거이므로, 검사는 당연히 이를 증거로 제출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물건이 증거로 사용되려면 배심원들이 법정에서 그 물건을 직접 눈 또는 귀 또는 다른 오감을 사용해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이를 ‘협의의 증거조사’라고 합니다. 물건을 직접 확인하면서, ‘아, 이게 피고인의 행위와 이렇게 저렇게 연결되는 것이고, 그래서 피고인은 유죄이구나 또는 무죄이구나’ 하는 심증을 배심원들이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물건에 대한 ‘협의의 증거조사'를 따로 시간을 내어 하는 게 아니라, 그 물건과 관련된 증인이 있는 경우 그 증인의 증인신문 때 함께 진행하는군요. 당시 목격자가 당황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수화기 저 너머로 들었다는 상담원의 증언내용에 더하여, 목격자의 그런 목소리가 실제로 법정에서 울려퍼진다면, 배심원들로서는 당시의 심각한 상황을 어느 정도 실감하면서 피고인을 안 좋은 눈초리로 바라볼 수 있겠죠.
처음 나온 리키 산체스 증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재판에서는 이런 증인이나 녹음테이프를 법정에서 만나는 일이 흔치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이런 성격의 증거에 대해서는 '증거동의'(검사가 제출한 유죄의 증거에 대해 피고인이 이의 제기 없이 인정하겠다고 하는 의사표시)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차를 생략하게 되니 재판은 후닥닥 빨리 진행되나 생동감은 전혀 느낄 수 없겠지요.
[256-259쪽] ...... 나는 그녀가 사건 현장에 처음 출동한 경찰관을 다음 증인으로 부를 거라고 예상했었다. 현장에 도착해 사건 현장을 확보한 경위를 설명하게 하고, 현장을 찍은 사진들을 배심원들에게 보여줄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프리먼은 경찰관 대신 사건 현장 근처에서 리사 트래멀을 보았다고 주장한 목격자 마고 섀퍼를 증인으로 불렀다. 나는 프리먼의 전략을 금방 알아차렸다. 배심원들이 사고 현장의 모습을 떠올리며 점심 먹으러 가게 하는 대신, '아하, 그랬구나'라고 생각하며 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
...... 나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마고 섀퍼에게 반대신문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누구를 증인으로 부르고 무슨 증언을 들을 것인지는 증거개시의 대상이 아닙니다. 정식재판이 열리기 전에 검사와 변호인은 일단 많은 수의 사람들을 증인신청 목록에 넣어 미리 재판부에 제출하긴 하는데, 실제로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일부만 증인으로 올리게 되고, 실제 누구를 증인으로 내세울지는 상대방이 미리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물론 사건 내용에 비추어 각자 상대방이 내세울 증인이 누구인지 대략은 예상할 수 있겠죠.
할러 변호사도 검찰 측에서 어떤 증인이 나올지 대략은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의 당초 예상대로, 최초 발견자, 그로부터 신고전화를 받은 911 상담원이 증인으로 나왔으니, 스토리 순서상 이제 등장할 세 번째 검찰 측 증인은 당연히 911 상담원의 연락을 받고 현장에 최초로 출동한 경찰관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점심시간을 바로 앞두고 검사는 중요도가 꽤 큰 증인을 퍽 일찍 불러냅니다. 중량급 증인의 증언을 통해 배심원들이 강한 인상, 즉 피고인에 대한 나쁜 인상을 점심시간 내내 갖게 하겠다는 것이죠. 이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방어방법은, 반대신문을 짧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이 점심시간 전에 반대신문을 마쳐서 검사의 증인에게 흠집을 내놓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재판이라도, 마고 섀퍼 정도면 검사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증인이고 분명히 피고인이 그의 증언 내용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므로, 반드시 증인으로 법정에 나올 필요가 있겠습니다.
[256-257쪽] 프리먼은 섀퍼와 배심원단 사이에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해 개인적인 질문을 몇 가지 더 던진 후 신문의 핵심으로 들어가 증인에게 살인 사건이 일어나던 날 아침에 대해서 물었다.
---> 프리먼 검사는 섀퍼 증인에 대한 주신문에서 우선, 증인이 육아휴직을 마치고 4년 전 복직한 은행 창구 직원이고, 출세욕은 없는 사람이며, 자기 일에 따르는 책임과 시민들과의 교류를 즐기고 있다는 진술을 이끌어냅니다.
‘메시지’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메신저’입니다. 사람들은 호감이 가는 메신저의 메시지만 접수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메시지보다 메신저’입니다.
재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증인일수록 배심원들에게 더 호감 가는 인상으로 비쳐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프리먼 검사는 본격적인 증언에 앞서, 육아, 직장맘, 은행, 출세욕 제로, 책임감, 시민의식 등등 증인으로부터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먼저 뽑아내려 합니다.
[261-262쪽] 나는 리걸패드(legal pad)에 뭔가를 끄적거렸다. 사실 아무 의미 없는 거였지만 배심원들 눈에는 내가 득점 상황을 기록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276-277쪽] 나는 리걸패드에 메모를 했다. 사실은 배심원들 보라고 하는 제스처였지 다른 의미는 없었다.
---> 할러 변호사가 검찰 측 증인을 상대로 반대신문을 하고 있습니다.
반대신문 중간 중간에, 특히 배심원들이 주의 깊게 보아주었으면 하는 중요한 대목마다 할러 변호사는 쇼를 하고, 연기를 합니다. 이를테면, 잠시 신문을 멈추고 고요한 상황을 만드는 거죠. 갑자기 정적이 흐르면 대개 사람들은 졸거나 딴생각을 하다가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이제까지 없던 주의를 새삼스레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고요한 정적을 만드는 데 그럴듯한 방법이 바로 ‘메모하는 척’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할러 변호사가 들고 있는 ‘리걸패드’는 아이패드 같은 태블릿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사실 저는 처음에 태블릿 같은 건 줄 알았습니다). 서양의 법률가들이 많이 애용한다는, 줄이 그어진 노란색 노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로 요런 거, 많이 보셨죠?
[264-266쪽]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내가 바라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섀퍼가 처음으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고 확답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배심원들은 그녀를 공정한 증인이 아니라 검찰 측 주장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하는 증인으로 보기 시작할 것이다.
......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완벽한 대답이었다. 나에게 완벽한 대답.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증인은 언제나 피고인에게 이로웠다.
--->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마쳐야 하기 때문에 할러 변호사는 열심히 반대신문을 합니다.
[308쪽] 프리먼은 형사팀의 증언을 따로 떼어놓는 영리한 전술을 구사했다. 지금 내가 컬렌 형사만 신문해서는 사건에 대해 응집력 있는 공격을 감행할 수 없을 것이다. 컬렌은 지금, 그의 파트너 롱스트레치 형사는 훨씬 나중에 신문하게 생겼다. 소송전략전술이 프리먼의 강점들 중 하나였는데 지금 그 경쟁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었다.
---> 앞에서 중요한 증인을 더 나중에 등장시킨다고 말씀드렸는데요, 할러 변호사의 설명에 의하면 프리먼 검사는 좀 다른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컬렌 형사가 수사의 총책임자이고 가장 중요한 증인임에도 그를 먼저 증인으로 내세우고, 컬렌 형사의 하급자인 롱스트레치 형사를 나중에 세우려고 합니다. 롱스트레치 형사가 400미터 계주의 마지막 주자로서 더 적합한 뭔가가 있는 거겠죠.
[309-370쪽] 나는 별 황당한 이야기를 다 들어본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사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컬렌이 처음으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바라던 게 그거였다. 그에게 창피를 줄 때 그가 오만한 모습을 보인다면 훨씬 더 좋을 텐데.
......
“그렇게 모아서 만든 큰 그림이 증인을 성급한 판단으로 이끌고 간 거로군요, 그렇죠?”
프리먼이 벌떡 일어나서 이의를 제기했고 판사가 이의 제기를 받아들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컬렌의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 질문을 모든 배심원들의 마음에 심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 컬렌 형사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반대신문 장면입니다. 이 부분의 내용을 길게 인용할 수 없어 몇 구절만 가져왔기에 느낌 전달이 쉽지 않지만, 이 부분에서는 증인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할러 변호사와 프리먼 검사 사이의 수싸움과 공방이 대단합니다.
처음부터 수사방향을 잘못 잡아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고는 나중에는 방향을 제대로 틀지 못해 잘못된 길인 걸 알면서도 그 길을 계속 고집하고 있다며 증인을 약 올리고 증인의 흥분상태를 유발하여 배심원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주게 하려는 변호인, 그런 변호인 때문에 자칫 흠집이 날까 걱정돼 잦은 이의 제기를 통해 증인을 보호하는 한편 탄력받은 변호인의 리듬을 깨보려는 검사.
이런 대목에서 보이는 양쪽의 심리 묘사와 공방 장면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 프리먼 검사의 이의제기를 인정한 재판장이 할러 변호사를 훈계하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가 컬렌 형사에 대한 반대신문 때 재판장도 검사도 알지 못하던 어떤 편지를 근거로 컬렌 형사를 공격했거든요.
이 편지는 전날 익명의 누군가가 할러 변호사에게 보낸 것이었고, 조금 전 시스코를 통해 그 편지에 관한 중요한 사실의 확인작업을 막 마쳤습니다. 사실 할러 변호사 입장에서도 재판장이나 검사에게 미리 이 증거를 개시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던 것이죠.
어느 누구든 불의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재판에서는 양 당사자는 물론 재판장도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공격과 방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재판장과 검사 모두 할러 변호사를 비난하고 있지만, 이 편지를 입수한 날이 전날인지 아닌지 밝혀낼 도리가 없는 이상 미리 알릴 시간이 없었다는데 더 뭐라고 하지 못하고, 할러 변호사는 일단 위기를 벗어납니다.
[371쪽] 프리먼은 컬렌을 15분 더 증인석에 앉혀놓고 재직접신문(redirect)을 하면서 그가 수사하면서 취한 모든 조치를 범죄에 맞서 싸운 용감한 노력으로 치장하느라 바빴다. 그녀가 신문을 마친 후 나는 재반대신문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컬렌 건에 있어서는 내가 검사보다 우위에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컬렌의 수사가 좁은 시야에 갇혀 한 곳만 보고 나아간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고, 성공했다고 믿었다.
---> 역시 컬렌 형사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공격전략은, 컬렌 형사의 수사방향이 처음부터 잘못되었고 성급했다는 의혹을 배심원들에게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라는 심증은 충분히 있으나 물증이 부족한 경우라면, 그건 상황이 좀 다릅니다. 물증이 부족한데 그냥 재판으로 가게 되면 결국 재판하느라 힘은 힘대로 쓰고 판결은 무죄로 나서 피고인에게 면죄부만 주게 될 가능성이 많고, 무죄판결이 무서워 피고인을 그냥 풀어주고 사건을 끝내자니 검사의 체면상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을 겁니다. 바로 이럴 때 플리바기닝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순순히 죄를 자백하면 형량을 낮춰주겠다.’ 비록 검사가 당초 가졌던 생각보다 형량은 낮아지지만, 죄를 저지른 사람을 아무런 제재도 없이 놔주는 일은 생기지 않게 되는 이익이 검사에게는 있는 겁니다.
[179-181쪽] "...... 조건을 제시해봐요." ......
"...... 살인에 중간 수준(the mid-level) 징역형 어때요?"
......
"좋은 제안이군요." 내가 말했다.
"그렇고말고요. 잠복했다가 저지른 계획적 살인을 버리는 건데."
"고의적인 살인(voluntary manslaughter)으로 가자는 거죠?"
"변호사님도 과실치사(a case for involuntary)를 주장하기는 힘들 거예요. 피고인이 우연히 그 주차장에 있게 되었다고 하긴 어렵지 않을까요? ......"
......
"...... 고의적인 살인에 낮은 정도의 징역형. 5년에서 최대 7년. 어때요? ......"
---> 할러 변호사가 프리먼 검사의 플리바기닝 제안에 흥미를 보이면서 조건을 제시해보라고 합니다. 이에 프리먼 검사는 죄명은 voluntary manslaughter, 그리고 중간 정도의 형량을 제안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죄명은 그대로, 다만 형량을 5년에서 7년 사이 정도로 더 낮춰 달라고 다시 요구하구요.
미국의 살인죄에는 크게 ‘murder’와 ‘manslaughter’가 있습니다. 전자는 계획적으로 저지른 살인, 후자는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을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흔히 각각 ‘모살(謀殺)’과 ‘고살(故殺)’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manslaughter’는 다시 ‘voluntary manslaughter’와 ‘involuntary manslaughter’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우발적이긴 하지만 음주나 마약을 복용한 상태 또는 기타 부주의한 상황에서 저지른 고의성이 많은 살인을 말하고, 후자는 중과실에 가까운 고의성이 덜한 살인을 말합니다.
당초 프리먼 검사는 리사 트래멀을 murder로 기소하였는데, 리사 트래멀이 순순히 자백을 하고 정식재판을 포기한다면 voluntary manslaughter로 단계를 낮춰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죠. 프리먼 검사의 말대로 피고인이 미리 주차장에서 피해자를 기다리고 있다가 살인에 이른 것이라면 이를 두고 ‘중과실에 가까운 고의성이 덜한 살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involuntary manslaughter는 탈락입니다.
물론 정말로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라면 5년 내지 7년의 형벌도 전혀 수긍할 수 없는 제안일 겁니다. 끝까지 재판으로 가서 무죄를 받겠다고 하기 마련이겠죠. 재판이란 반드시 진실이 밝혀진다는 보장이 없는 위험한 절차이므로 재판으로 갔다가 자칫 잘못돼서 생사람을 잡게 될 수도 있습니다만, 정말로 억울한 피고인이라면 자신은 죄가 없으니 당연히 재판에서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굳게 믿는 게 보통 아닐까요. 즉, 확증편향,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죠.
그래서 저는 조심스레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나라에 플리바기닝 제도가 생긴다면, 죄명을 바꿔주거나 형량을 낮춰주겠다는 검사의 제안을 넙죽 받을 피고인은, 아마도 현재 혐의를 딱 잡아떼고는 있지만 사실은 죄를 지은 게 맞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180-181쪽] "...... 전에도 이런 적이 있어서 잘 아는데, 보통 이 정도로 좋은 거래는 조건이 너무 좋아서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죠. 제안을 받아들이고 나서 나중에 알고 보면 검찰 측 주요 증인이 떨어져 나갈 상황이었거나, 피고인의 무죄를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해서 그런 제안을 했던 거더라고요. 조금만 더 버텼으면 증거개시 절차를 통해 알 수 있었을 그런 증거요."
"좋은 제안이군요." 내가 말했다.
"그렇고말고요. 잠복했다가 저지른 계획적 살인을 버리는 건데."
"고의적인 살인(voluntary manslaughter)으로 가자는 거죠?"
"변호사님도 과실치사(a case for involuntary)를 주장하기는 힘들 거예요. 피고인이 우연히 그 주차장에 있게 되었다고 하긴 어렵지 않을까요? ......"
......
"...... 고의적인 살인에 낮은 정도의 징역형. 5년에서 최대 7년. 어때요? ......"
---> 할러 변호사가 프리먼 검사의 플리바기닝 제안에 흥미를 보이면서 조건을 제시해보라고 합니다. 이에 프리먼 검사는 죄명은 voluntary manslaughter, 그리고 중간 정도의 형량을 제안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죄명은 그대로, 다만 형량을 5년에서 7년 사이 정도로 더 낮춰 달라고 다시 요구하구요.
미국의 살인죄에는 크게 ‘murder’와 ‘manslaughter’가 있습니다. 전자는 계획적으로 저지른 살인, 후자는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을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흔히 각각 ‘모살(謀殺)’과 ‘고살(故殺)’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manslaughter’는 다시 ‘voluntary manslaughter’와 ‘involuntary manslaughter’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우발적이긴 하지만 음주나 마약을 복용한 상태 또는 기타 부주의한 상황에서 저지른 고의성이 많은 살인을 말하고, 후자는 중과실에 가까운 고의성이 덜한 살인을 말합니다.
당초 프리먼 검사는 리사 트래멀을 murder로 기소하였는데, 리사 트래멀이 순순히 자백을 하고 정식재판을 포기한다면 voluntary manslaughter로 단계를 낮춰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죠. 프리먼 검사의 말대로 피고인이 미리 주차장에서 피해자를 기다리고 있다가 살인에 이른 것이라면 이를 두고 ‘중과실에 가까운 고의성이 덜한 살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involuntary manslaughter는 탈락입니다.
물론 정말로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라면 5년 내지 7년의 형벌도 전혀 수긍할 수 없는 제안일 겁니다. 끝까지 재판으로 가서 무죄를 받겠다고 하기 마련이겠죠. 재판이란 반드시 진실이 밝혀진다는 보장이 없는 위험한 절차이므로 재판으로 갔다가 자칫 잘못돼서 생사람을 잡게 될 수도 있습니다만, 정말로 억울한 피고인이라면 자신은 죄가 없으니 당연히 재판에서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굳게 믿는 게 보통 아닐까요. 즉, 확증편향,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죠.
그래서 저는 조심스레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나라에 플리바기닝 제도가 생긴다면, 죄명을 바꿔주거나 형량을 낮춰주겠다는 검사의 제안을 넙죽 받을 피고인은, 아마도 현재 혐의를 딱 잡아떼고는 있지만 사실은 죄를 지은 게 맞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180-181쪽] "...... 전에도 이런 적이 있어서 잘 아는데, 보통 이 정도로 좋은 거래는 조건이 너무 좋아서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죠. 제안을 받아들이고 나서 나중에 알고 보면 검찰 측 주요 증인이 떨어져 나갈 상황이었거나, 피고인의 무죄를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해서 그런 제안을 했던 거더라고요. 조금만 더 버텼으면 증거개시 절차를 통해 알 수 있었을 그런 증거요."
---> 할러 변호사가 프리먼 검사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면서, ‘너, 유죄 받을 자신(증거) 없으니까 재판으로 가지 말고 그냥 협상이나 하자는 거지?’라며 속을 떠봅니다.
플리바기닝에는 이렇게 검사와 변호인 사이에 눈치싸움, 수싸움이 필요한 경우가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할러 변호사의 생각대로 검사가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도 이렇게 재판 없이 가자고 할 리가 없거든요. 재판하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자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죠.
그런데 이런 경우 변호인 입장에서 ‘아무래도 검사 쪽의 증거가 부족해서 검사가 협상하자는 거 같은데, 당장 합의해버리면 나중에 억울할 수도 있으니 일단 증거개시 절차를 통해 검사가 갖고 있는 증거가 뭐가 있나 먼저 보고나서 생각해볼까?’라는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떻게든 손해 보기 싫은 마음에 과감한 베팅보다 안전하게 가려는 생각이겠지만, 이건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직 사건이 일어나고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 수사도 덜 진행되어 지금 당장은 검사 쪽 증거가 부족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서, 그리고 수사가 계속 더 진척이 되면서 새로운 결정적인 증거가 수집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검사는 당연히 협상카드를 도로 집어넣을 것이고, 피고인과 변호인은 법정에서 승산 없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조금 미심쩍기는 하지만, 신속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열차는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검사가 마음을 바꾸면 곤란하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할러 변호사가 의뢰인에게 검사의 제안을 알려주면서 협상에 응할 의사를 묻느라 잠시 지체하는 사이, 검사는 협상 제안을 없던 일로 하고 맙니다.
[186쪽] 내가 예상했던 대로, 리사 트래멀은 최대 7년간 자신을 감옥에서 썩게 만들 유죄인정 합의를 거부했다. 재판에서 유죄 평결을 받으면 징역을 그보다 네 배는 더 살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줬지만 그래도 싫다고 했다. 그녀는 무죄 평결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
---> 리사 트래멀이 완강하게 검사의 협상 제안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할러 변호사는 의뢰인이 정말로 누명을 쓴 억울한 사람이 맞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였을 겁니다. 그래서 무고한 의뢰인을 위해 끝까지 한번 해보자는 결의를 갖게 되는 듯 보입니다.
[200-213쪽] "재판장님, 정말 기가 막히네요. 배심원단 선정 하루 전날에요? 이런 걸 이제 내민다고요? ......"
......
나는 발언 기회를 기다리면서 좌절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연 이것은 판세를 뒤집는 강력한 증거였다. 이것이 나오기 전까지는 전적으로 정황증거에 의존한 사건(a circumstantial case)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피고인과 범죄를 연결시키는 직접증거가 있는 사건(a case involving direct evidence)이 되었다.
---> 자, 이제부터 협상은 없던 일로 돼버리고,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됩니다.
먼저, 배심원단 선정기일을 하루 앞둔 어느 날, 이 사건의 재판을 맡게 된 콜맨 페리 판사의 법정에서 작은 재판이 열립니다. 할러 변호사가 신청한 증인의 채택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는데, 그에 대한 논의가 끝난 후 프리먼 검사가 피해자의 혈흔이 있는 피고인의 신발을 뒤늦게 증거로 제출하겠다고 하면서 할러 변호사의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할러 변호사가 증거개시 절차를 통해 검사로부터 넘겨받은 자료와 자신의 수사관 시스코로부터 은밀하게 입수한 자료를 종합해 보았을 때, 이제까지는 검사가 가진 증거라곤 범행 직전 범행장소 부근에서 리사 트래멀을 보았다는 한 목격자의 진술,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집을 압류당한 일 때문에 채권은행의 압류담당자인 피해자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던 리사 트래멀이 범행 직전 범행장소 부근에서 목격되었으니 피해자를 살해할 만한 사람은 이 여성 외에는 없다는, 일응 그럴싸한 정황논리만이 존재하는 사건이었습니다(여기서 그 목격자의 진술을 정황증거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정황논리에 불과할 뿐, 리사 트래멀이 피해자를 살해하였음을 인정할 직접증거가 없는 한 그러한 정황논리만으로 그녀의 범행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할러 변호사도 재판에 자신만만하게 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직접증거가 등장합니다. 피해자의 피가 묻은 리사 트래멀의 신발, 그녀가 피해자를 살해하였으리라고 볼 수 있는 강력한 증거가 이제 검사의 수중에 있게 된 것이죠. 할러 변호사는 그 증거가 너무 뒤늦게 제출되었음을 들어 저항해보지만, 증거가 늦게 발견된 게 검사의 잘못은 아니니 페리 판사는 이 증거를 채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대한 가치를 갖고 있는 증거를 단지 늦게 발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배심원들이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판사 입장에서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지요.
대신, 페리 판사는 당장 다음날로 예정되어 있던 배심원단 선정을 열흘이나 연기함으로써, 불의타를 맞게 된 할러 변호사가 새로운 재판전략을 준비할 시간을 갖도록 배려해줍니다.
[218쪽] ...... 우리는 이 재앙과도 같은 증거를 반영하여 변호 전략을 짰다. 과학적 증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내 의뢰인이 결백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모함(setup)을 주장하는 고전적인 전략이었다. 오파리지오를 희생양으로 삼는 전략에 음모 이론을 덧붙일 작정이었다.
---> 흔히 과학수사, 과학수사, 많이들 얘기합니다. 과학수사 하나면 모든 사건이 의문 없이 깔끔하게 해결되니, 이제는 사람 불러 놓고 자백만 강요하는 수사는 하면 안 된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과연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게 선과 악이 명쾌하게 분간되고, 정의와 적폐의 경계선이 뚜렷하게 줄 그어져 있는 것일까요. 당연히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든 일은 양면성이라는 게 있는 것이죠.
피고인의 신발에서 발견된 혈흔의 DNA와 피해자의 DNA가 서로 일치한다는 과학수사의 결론은, 분명 진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길을 비춰주는 강력한 등대 불빛인 건 맞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는 아직 진실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앞에 큰 길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아직은 소로길도 여러 개 놓여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혈흔이라는 강력한 직접증거를 공격하기 위한 할러 변호사의 구상은, 자신의 의뢰인이 모함을 당한 것이라 주장하겠다는 것입니다. 리사 트래멀의 신발에 피해자의 혈흔이 있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 사실이 ‘리사 트래멀이 그 신발을 신고 피해자를 살해하였다’라는 걸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를 살해한 진범이 리사 트래멀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그녀의 신발에 피해자의 피를 묻혀둔 것이다, 라는 주장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스토리가 이런 류의 영화, 소설,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죠. 그런 스토리가 흔해서 우리가 자꾸 음모론에 쉽게 빠지게 되는 걸까요?
[218쪽] 프리먼이 던진 또 하나의 패스트볼이 내 머리를 향해 날아온 것은 배심원단 선정이 시작된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선정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검찰과 변호인 양측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배심원단의 구성에 만족스러워하고 있던 보기 드문 한때였다.
---> 페리 판사가 허락한 열흘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배심원단 선정이 시작됩니다. 무작위로 연락을 받은 지역 주민들이 단체로 법정에 호출되어 오고, 그 중에서 검사와 변호인이 각자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배심원들을 12명 선정합니다. 이 자리에서 선정된 배심원들은 이제 몇 날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재판을 위해 직장도 못 나가고 하염없이 법정으로만 출퇴근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미국의 배심재판을 본떠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이름의 제도를 2008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넘게 실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미국 제도를 단지 모양새만 가져와서 흉내만 내고 있다는 점이죠. 10년 넘게 아직까지 시범실시만 하고 있고, 그 제도에 담긴 본래의 취지와 장점은 제대로 구현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예를 하나 들어보면, 우리의 국민참여재판은 대부분 하루짜리 재판입니다. 길어야 2일 내지 3일짜리이지만, 흔하지는 않습니다. 미국식 재판을 그저 최소한의 구색만 갖춰 우리식대로 빨리빨리 진행해서 그런 면도 있지만, 딱 하루만 재판하기 적당한 사건만 주로 대상으로 삼기에 그런 면도 있습니다. 딱 하루 만에 재판을 해치우려니, 하루를 있는 대로 꽉 채우고도 모자라 자정을 훌쩍 넘겨 재판이 끝나기도 합니다. 하루 종일 답답한 공간에서 긴 시간을 보내게 되니, 판검사와 피고인은 물론 가장 중요한 구성원인 배심원들의 집중력은 처참한 수준입니다. 딱 하루 하는 재판이니, 배심원단 선정은 반드시 오전 중에는 마쳐야 해서 신중한 배심원 선정도 곤란하고 그야말로 흉내만 냅니다.
리사 트래멀의 재판은 배심원단 선정에만 4일, 재판 자체도 8일이나 진행되었습니다. 공판중심주의의 취지에 잘 맞추어 재판을 꼼꼼히 제대로 진행한 결과, 살인 사건 1건에 대해 법정에서만 총 12일이 소요된 것입니다. 재판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되었고, 배심원들은 다행히 오후 5시면 귀가해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사건을 분명히 하루 이틀 내에 모두 재판하였을 것이고, 배심원들은 밤늦게까지 법정 안에 갇혀 극심한 피로에 파김치가 되어가고 있었을 겁니다. 신중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여건이 안 되는 것이죠.
[219-221쪽] 나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서 책상 앞에서 벗어났다.
"아, 나, 정말." 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
나는 법전들을 향해 돌아서서 깊이 심호흡을 했다. 여기서 뭔가 얻어내야 했다. 판사가 내게 뭔가를 빚지게 만들어놓고 이 방에서 나가야 했다.
---> 배심원단 선정 나흘째, 그리고 다음날은 드디어 첫 재판기일입니다. 그런데 할러 변호사가 무슨 일 때문인지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날 프리먼 검사가 새로운 증거를 또 갖고 왔습니다. 피해자의 뒤통수를 강타하는 데 쓰였던 망치가 범행현장 부근 어느 주택의 덤불 속에서 뒤늦게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망치는 리사 트래멀의 집 차고에 있던 망치입니다. 피해자의 피가 묻은 리사 트래멀의 신발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리사 트래멀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매우 유력하게 보여주는 직접증거입니다.
프리먼 검사는 너무 늦은 증거제출이라는 할러 변호사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 망치를 증거로 제출하려 합니다. 망치가 이제서야 발견되었다는데 검사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페리 판사는 역시 이 망치를 증거로 채택합니다. 대신 다음날인 금요일 시작하려던 첫 재판기일을 다음 주 월요일로 연기하여, 할러 변호사의 재판준비 시간을 약간 배려합니다.
할러 변호사의 독백 중 마지막 대목, “판사가 내게 뭔가를 빚지게 만들어놓고 이 방에서 나가야 했다”라는 부분은 로버티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상호성의 법칙(Law of reciprocality)을 의미하는 것이죠. 항상 상대방을 이기려고만 하지 말고 상대방이 나에게 뭔가 빚을 진 듯한 생각을 갖게 하는 게, 내가 ‘갑’이 될 수 있는 방법입니다.
[224쪽] 피고인이 계략에 빠졌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변호를 한다고 해도 수확 체감의 법칙(a law of diminishing returns)이라는 것이 있다. 신발에 떨어진 혈흔은 뭐 어떻게든 해명을 한다고 치자. 살인 무기를 의뢰인이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렇게 쉽게 해명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증거물이 하나씩 발견될 때마다 음모 이론의 성공 가능성은 급격히 떨어졌다.
---> 아무튼 리사 트래멀의 신발과 망치, 결정적 증거가 속속 발견되면서 할러 변호사는 당초 계획했던 변론전략이 무위로 돌아가 점점 불리한 상황에 빠집니다.
[230-231쪽] "...... 재판은 국가의 증거 대 트래멀 사건이거든. 다른 누가 그 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그게 누구냐를 다투는 문제가 아니라고. 다른 가능성은 중요하지 않아. 물론 오파리지오를 트래멀의 주택 압류와 전국을 휩쓰는 압류 열풍에 관한 전문가로 증인석에 앉힐 수는 있어. 하지만 트래멀을 대체하는 용의자로 그에게 접근할 수는 없을 거야. 관련성(relevance)을 입증하지 못하면 판사가 허락하지 않을 거거든. ......"
---> 할러 변호사와 애런슨 변호사가 새로운 전략을 위해 함께 머리를 쥐어짜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의 기본전략은, 피해자와 사업상 갈등관계에 있던 압류대행업자인 루이스 오파리지오가 이 사건의 진범이 아닐까라는 의혹을 배심원들에게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혹을 제기하려면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리사 트래멀이 범인이 맞냐 아니냐 하는 재판을 하고 있는데,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진범이니 리사 트래멀은 무죄라고 주장하려면 당연히 이걸 말로만 주장해서는 곤란합니다. 말 말고 뭔가 더 있어야 합니다. 이걸 할러 변호사는 ‘관련성(relevance) 입증’이라고 설명합니다.
피해자의 피가 묻은 신발과 망치, 검사 쪽 증거는 점점 탄탄해지는데, 아직까지 할러 변호사는 이렇다 할 무기를 손에 넣지 못하고 있습니다.
[243-244쪽] 프리먼이 먼저 모두진술을 했고, 나는 늘 그랬듯이 검사가 말하는 동안 배심원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이의를 제기할 준비를 하고서 검사의 진술을 귀 기울여 들었지만 단 한 번도 그녀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배심원들이 어떤 눈으로 프리먼을 보고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들에 대한 내 예상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 드디어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첫 재판날이 되었습니다. 재판은 먼저 모두진술, 즉 검사와 변호인이 배심원들에게 사건의 개요와 앞으로의 입증방법 또는 방어방법을 설명하는 절차로 시작됩니다.
할러 변호사의 눈은 시종 배심원들의 얼굴을 좇습니다. 배심원들이 검사의 말에 호감을 보이느냐, 아니면 자신의 말에 호감을 보이느냐를 알고 싶어서 말입니다.
[244쪽] 프리먼은 분명하고도 능숙하게 말했다. 과장되지도 않고 말이 너무 빠르지도 않았다. 정해진 목표만 보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스타일이었다.
......
"피고인 측은 엄청난 음모와 극적인 사연을 주장하면서 여러분을 속이려고 애쓸 겁니다. 이 살인 사건은 엄청난 사건이긴 하지만 사연은 단순합니다. 변호인의 주장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자세히 보시고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오늘 여기서 나온 말이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증거로 뒷받침되는지를 확인하십시오. 진짜 증거로 말입니다."
---> 프리먼 검사가 먼저 모두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하다’, ‘능숙하다’, ‘과장하지 않는다’, ‘적당한 속도로 말한다’, ‘당당하다’, 하나같이 다 검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꼭 갖추어야 할 자세들이네요.
그런데 “피고인 측은 ...... 여러분을 속이려고 애쓸 겁니다”라거나 “변호인의 주장에 현혹되지 마십시오”라는 프리먼 검사의 말은, 우리 정서에는 좀 과한 표현 같기도 합니다. 변호인이 배심원들을 상대로 사기를 칠 거라고 검사가 이렇게 변호인 면전에서 대놓고 말하다니, 미국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얘기해 놓고도 서로 싸움 안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다들 점잖은 척하는 우리 법정에서는 흔히 보기는 힘든 풍경입니다.
[253-254쪽] 공판 최초의 증인은 리키 산체스라는 이름의 은행 안내직원이었다. 주차장에서 피해자의 시신을 발견한 목격자였다. 그녀는 사망시각 추정을 돕고 배심원석에 앉은 일반인들에게 살인 사건의 충격과 공포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 재판의 꽃은 증인신문입니다. 증거에는 인적 증거(사람의 증언)와 물적 증거(물건의 존재 자체)가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과학수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진술보다 객관적 증거인 물적 증거가 유무죄 판단에 더 중요한 것이니 이제 자백을 강요하는 등 사람의 진술을 끌어내는 수사를 하지 말고 물적 증거 수집에 집중하는 수사를 해야 한다고 흔히 말들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물건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범인이 범인이 맞다고 확실하게 지목을 해주지 못합니다. 물건만 갖고는 우리가 기껏 ‘추정’이라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지요. 이 범인이 범인이 맞다고 확실하게 지목을 해주는 사람의 말, 즉 인적 증거가 결국에는 가장 중요한 증거인 것입니다. 아주 쉽게 얘기해서, 물건만 등장하고 증인은 하나도 없는 재판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증인신문은 검찰 측 증인들이 먼저 등장하고, 그 절차가 모두 끝나면 피고인 측 증인들이 나서게 됩니다. 검찰 측 증인은 덜 중요한 증인부터 시작해서 점점 중요도 높은 증인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 대목에서 프리먼 검사가 이른바 ‘검찰 측 바람잡이 증인들’과 함께 법정에 들어왔다고 묘사합니다. 그가 말하는 ‘검찰 측 바람잡이 증인들’은, 피해자의 시신을 발견한 피해자의 동료직원, 그 직원으로부터 신고전화를 받은 911 상담원, 그 상담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 등등, 사건발생과 관련한 기본적인 스토리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증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들의 증언은 피고인의 유무죄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지만, 검찰 측 주장의 토대가 되는 역할, 나중에 나올 결정적 증거의 무대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원문에서는 《 the prosecution’s scene-setter witnesses 》, 직역하면 ‘검찰 측 배경설정 증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살인범행 그 자체를 입증하는 것과는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증인들은 아니지만, 사건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배심원들로 하여금 사건발생 초기부터 하나하나 사건의 스토리를 잘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이런 증인들까지 동원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의 단점은, 이런 증인들까지 하나하나 다 불러서 증언을 듣다보면 당연히 재판은 한없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겠죠. 우리나라 재판에서는 피고인이 문제를 삼고 다투는 내용과 관련된 증인만 불러 신문하기 때문에, 아마 이런 ‘검찰 측 바람잡이 증인들’을 실제로 법정에서 만나는 일은 드물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이런 부분을 다투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러 변호사도, 이런 사람들이 허위증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신문을 간단히 하고 맙니다.
[255-256쪽] 다음 증인은 그날 아침 8시 52분 산체스로부터 신고 전화를 받은 911 상담원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르숀다 게인즈였고 주로 산체스로부터 걸려온 신고 전화의 녹음된 통화내용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통화내용 녹음테이프를 트는 것은 지나치게 극적이고 불필요한 일이었지만 공판 전에 내가 이의 제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판사는 통화내용 공개를 허락했다.
---> 역시 목격자로부터 신고전화를 받은 911 상담원이 허위증언을 할 리는 없겠죠. 할러 변호사도 반대신문은 생략합니다.
다만,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증인이 소개한 통화녹음 내용입니다. 이 통화녹음 내용은 ‘피해자가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직접증거이므로, 검사는 당연히 이를 증거로 제출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물건이 증거로 사용되려면 배심원들이 법정에서 그 물건을 직접 눈 또는 귀 또는 다른 오감을 사용해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이를 ‘협의의 증거조사’라고 합니다. 물건을 직접 확인하면서, ‘아, 이게 피고인의 행위와 이렇게 저렇게 연결되는 것이고, 그래서 피고인은 유죄이구나 또는 무죄이구나’ 하는 심증을 배심원들이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물건에 대한 ‘협의의 증거조사'를 따로 시간을 내어 하는 게 아니라, 그 물건과 관련된 증인이 있는 경우 그 증인의 증인신문 때 함께 진행하는군요. 당시 목격자가 당황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수화기 저 너머로 들었다는 상담원의 증언내용에 더하여, 목격자의 그런 목소리가 실제로 법정에서 울려퍼진다면, 배심원들로서는 당시의 심각한 상황을 어느 정도 실감하면서 피고인을 안 좋은 눈초리로 바라볼 수 있겠죠.
처음 나온 리키 산체스 증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재판에서는 이런 증인이나 녹음테이프를 법정에서 만나는 일이 흔치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이런 성격의 증거에 대해서는 '증거동의'(검사가 제출한 유죄의 증거에 대해 피고인이 이의 제기 없이 인정하겠다고 하는 의사표시)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차를 생략하게 되니 재판은 후닥닥 빨리 진행되나 생동감은 전혀 느낄 수 없겠지요.
[256-259쪽] ...... 나는 그녀가 사건 현장에 처음 출동한 경찰관을 다음 증인으로 부를 거라고 예상했었다. 현장에 도착해 사건 현장을 확보한 경위를 설명하게 하고, 현장을 찍은 사진들을 배심원들에게 보여줄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프리먼은 경찰관 대신 사건 현장 근처에서 리사 트래멀을 보았다고 주장한 목격자 마고 섀퍼를 증인으로 불렀다. 나는 프리먼의 전략을 금방 알아차렸다. 배심원들이 사고 현장의 모습을 떠올리며 점심 먹으러 가게 하는 대신, '아하, 그랬구나'라고 생각하며 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
...... 나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마고 섀퍼에게 반대신문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누구를 증인으로 부르고 무슨 증언을 들을 것인지는 증거개시의 대상이 아닙니다. 정식재판이 열리기 전에 검사와 변호인은 일단 많은 수의 사람들을 증인신청 목록에 넣어 미리 재판부에 제출하긴 하는데, 실제로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일부만 증인으로 올리게 되고, 실제 누구를 증인으로 내세울지는 상대방이 미리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물론 사건 내용에 비추어 각자 상대방이 내세울 증인이 누구인지 대략은 예상할 수 있겠죠.
할러 변호사도 검찰 측에서 어떤 증인이 나올지 대략은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의 당초 예상대로, 최초 발견자, 그로부터 신고전화를 받은 911 상담원이 증인으로 나왔으니, 스토리 순서상 이제 등장할 세 번째 검찰 측 증인은 당연히 911 상담원의 연락을 받고 현장에 최초로 출동한 경찰관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점심시간을 바로 앞두고 검사는 중요도가 꽤 큰 증인을 퍽 일찍 불러냅니다. 중량급 증인의 증언을 통해 배심원들이 강한 인상, 즉 피고인에 대한 나쁜 인상을 점심시간 내내 갖게 하겠다는 것이죠. 이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방어방법은, 반대신문을 짧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이 점심시간 전에 반대신문을 마쳐서 검사의 증인에게 흠집을 내놓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재판이라도, 마고 섀퍼 정도면 검사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증인이고 분명히 피고인이 그의 증언 내용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므로, 반드시 증인으로 법정에 나올 필요가 있겠습니다.
[256-257쪽] 프리먼은 섀퍼와 배심원단 사이에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해 개인적인 질문을 몇 가지 더 던진 후 신문의 핵심으로 들어가 증인에게 살인 사건이 일어나던 날 아침에 대해서 물었다.
---> 프리먼 검사는 섀퍼 증인에 대한 주신문에서 우선, 증인이 육아휴직을 마치고 4년 전 복직한 은행 창구 직원이고, 출세욕은 없는 사람이며, 자기 일에 따르는 책임과 시민들과의 교류를 즐기고 있다는 진술을 이끌어냅니다.
‘메시지’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메신저’입니다. 사람들은 호감이 가는 메신저의 메시지만 접수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메시지보다 메신저’입니다.
재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증인일수록 배심원들에게 더 호감 가는 인상으로 비쳐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프리먼 검사는 본격적인 증언에 앞서, 육아, 직장맘, 은행, 출세욕 제로, 책임감, 시민의식 등등 증인으로부터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먼저 뽑아내려 합니다.
[261-262쪽] 나는 리걸패드(legal pad)에 뭔가를 끄적거렸다. 사실 아무 의미 없는 거였지만 배심원들 눈에는 내가 득점 상황을 기록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276-277쪽] 나는 리걸패드에 메모를 했다. 사실은 배심원들 보라고 하는 제스처였지 다른 의미는 없었다.
---> 할러 변호사가 검찰 측 증인을 상대로 반대신문을 하고 있습니다.
반대신문 중간 중간에, 특히 배심원들이 주의 깊게 보아주었으면 하는 중요한 대목마다 할러 변호사는 쇼를 하고, 연기를 합니다. 이를테면, 잠시 신문을 멈추고 고요한 상황을 만드는 거죠. 갑자기 정적이 흐르면 대개 사람들은 졸거나 딴생각을 하다가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이제까지 없던 주의를 새삼스레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고요한 정적을 만드는 데 그럴듯한 방법이 바로 ‘메모하는 척’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할러 변호사가 들고 있는 ‘리걸패드’는 아이패드 같은 태블릿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사실 저는 처음에 태블릿 같은 건 줄 알았습니다). 서양의 법률가들이 많이 애용한다는, 줄이 그어진 노란색 노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로 요런 거, 많이 보셨죠?
[264-266쪽]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내가 바라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섀퍼가 처음으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고 확답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배심원들은 그녀를 공정한 증인이 아니라 검찰 측 주장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하는 증인으로 보기 시작할 것이다.
......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완벽한 대답이었다. 나에게 완벽한 대답.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증인은 언제나 피고인에게 이로웠다.
--->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마쳐야 하기 때문에 할러 변호사는 열심히 반대신문을 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 보이는 사소한 사항 또는 증인이 평소 주의를 기울여 보거나 생각하지 않았던 사항이라 증인도 잘 모를 법한 질문을 일부러 던져, 증인이 답변을 명쾌하게 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것 같습니다. 증인이 답변을 시원시원하게 못하면, 왠지 사람이 미심쩍게 보이기 마련이죠. 할러 변호사는 그렇게 증인을 흠집 내고 있습니다.
[265쪽] "그럼 이 사진 속 모든 유료 주차공간에 차들이 세워져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대니스에 온 손님들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까요?"
프리먼은 증인이 이 질문에 대답할 자격조건을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며 다시 한 번 이의를 제기했다.
---> 우리나라 형사소송규칙 제74조 제2항에는 증인신문을 할 때 이런 행위를 금지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위협적이거나 모욕적인 신문, 전의 신문과 중복되는 신문, 의견을 묻거나 의논에 해당하는 신문, 증인이 직접 경험하지 아니한 사항에 해당하는 신문 등입니다. 미국법에도 당연히 이와 동일한 취지의 규정이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는 마고 섀퍼 증인이 리사 트래멀을 목격하였을 당시 두 사람 사이에는 대니스 식당 앞에 주차된 차들로 인해 시야가 막혀있었는데 증인이 어떻게 피고인을 똑똑히 볼 수 있었느냐고 추궁하고 있습니다. 추궁을 하다 증인과 피고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차들이 모두 대니스 식당 손님들의 것인지를 증인에게 묻습니다. 물론 이는 증인이 직접 경험하거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검사는 바로 할러 변호사의 반대신문이 부당하다며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구요.
[273쪽] 점심시간이 끝난 후 프리먼 검사는 내 반대신문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마고 섀퍼를 다시 증인석에 앉히지 않음으로써 나를 놀라게 했다. 섀퍼의 증언을 살려낼 무언가를 나중에 내놓기로 계획한 것 같았다.
---> 아무튼 할러 변호사는 마고 섀퍼 증인에게 흠집을 내는 데 성공하고 즐거운 점심시간을 맞습니다.
[265쪽] "그럼 이 사진 속 모든 유료 주차공간에 차들이 세워져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대니스에 온 손님들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까요?"
프리먼은 증인이 이 질문에 대답할 자격조건을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며 다시 한 번 이의를 제기했다.
---> 우리나라 형사소송규칙 제74조 제2항에는 증인신문을 할 때 이런 행위를 금지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위협적이거나 모욕적인 신문, 전의 신문과 중복되는 신문, 의견을 묻거나 의논에 해당하는 신문, 증인이 직접 경험하지 아니한 사항에 해당하는 신문 등입니다. 미국법에도 당연히 이와 동일한 취지의 규정이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는 마고 섀퍼 증인이 리사 트래멀을 목격하였을 당시 두 사람 사이에는 대니스 식당 앞에 주차된 차들로 인해 시야가 막혀있었는데 증인이 어떻게 피고인을 똑똑히 볼 수 있었느냐고 추궁하고 있습니다. 추궁을 하다 증인과 피고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차들이 모두 대니스 식당 손님들의 것인지를 증인에게 묻습니다. 물론 이는 증인이 직접 경험하거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검사는 바로 할러 변호사의 반대신문이 부당하다며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구요.
[273쪽] 점심시간이 끝난 후 프리먼 검사는 내 반대신문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마고 섀퍼를 다시 증인석에 앉히지 않음으로써 나를 놀라게 했다. 섀퍼의 증언을 살려낼 무언가를 나중에 내놓기로 계획한 것 같았다.
---> 아무튼 할러 변호사는 마고 섀퍼 증인에게 흠집을 내는 데 성공하고 즐거운 점심시간을 맞습니다.
변호인의 반대신문 후 검사는 오후에 다시 같은 증인을 상대로 ‘재주신문’이라는 이름으로 더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끌어내 할러 변호사가 만든 흠집을 땜질할 수도 있을 텐데, 검사는 그냥 포기해 버립니다.
좀 뒤에 보면 프리먼 검사는 글래디스 피켓이라는 증인을 내세우는데, 바로 이 증인의 존재로 인해 마고 섀퍼를 또다시 불러 신문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273-274쪽] 커빙턴을 통해서 범죄현장 사진이 소개되었고, 두 대의 프로젝터 스크린에 핏자국이 선연한 현장이 공개되었다. 커빙턴의 어떤 증언보다도 이 사진들이 이 사건이 살인 사건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이런 확신이야말로 유죄 평결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였다.
좀 뒤에 보면 프리먼 검사는 글래디스 피켓이라는 증인을 내세우는데, 바로 이 증인의 존재로 인해 마고 섀퍼를 또다시 불러 신문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273-274쪽] 커빙턴을 통해서 범죄현장 사진이 소개되었고, 두 대의 프로젝터 스크린에 핏자국이 선연한 현장이 공개되었다. 커빙턴의 어떤 증언보다도 이 사진들이 이 사건이 살인 사건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이런 확신이야말로 유죄 평결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였다.
......
그런 사진들은 내 의뢰인에 대한 편견을 심어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살인 사건 피해자를 찍은 사진은 항상 충격적이고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살인범을 엄벌에 처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사진은 아주 쉽게,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배심원단이 피고인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들 수 있다. ......
---> 살짝 순서가 엉키긴 했지만 다시 본래의 순서로 돌아와 프리먼 검사는 신고전화를 받고 최초로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 데이비드 커빙턴을 증인으로 세웁니다.
이번에도 프리먼 검사는 증인신문을 하면서 증거물을 효과적으로 활용합니다. 피해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처참한 사진을 배심원들에게 직접 보여주며 배심원들이 피고인에게 한껏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장 출동 경찰관의 진술이나 현장 사진 역시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증거동의' 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런 증거 역시 우리 법정에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구요, 그에 따라 당연히 재판진행은 빨리빨리, 재판상황은 지루지루......
[274-276쪽] 커빙턴에 대한 반대신문에서 나는 사진 한 장에 집중해서 배심원단이 망자를 위한 복수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배심원들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대답은 내놓지 않는다면 내 할 일은 다 한 것이다.
---> 할러 변호사가 이번엔 커빙턴 증인을 상대로 반대신문을 벌입니다.
사건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보면 쓰러진 피해자 옆에 피해자의 서류가방이 입구가 열린 채 나뒹굴고 있는데, 할러 변호사는 이를 두고 서류가방 속에 있는 물건을 노린 강도의 소행으로 이 사건을 몰아보려고 합니다. 강도의 소행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배심원들 마음속에 심어두려 합니다.
미키 할러 변호사 시리즈의 주인공은 공정이나 정의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교활하고 야비하고 돈만 밝히는 나쁜 사나이 캐릭터입니다. 다만, 시리즈 뒤로 갈수록 점점 바른 사나이 쪽으로 변신 중이고, 급기야 다음 작품에서는 무려 검사로서 활약할 마음을 먹고 LA 지역의 ‘검사장’ 선거에 출마하기까지 합니다.
아무튼 아직까지는 나쁜 사나이 캐릭터인 할러 변호사는 계속 꼼수를 노립니다. 계속 의혹을 던지자, 던지다 보면 하나 정도는 배심원들에게 가 닿는 것도 있겠지 하면서요.
[277쪽] 다음 증인은 피해자의 형인 네이선 본듀란트였다. 그는 유죄 평결을 위한 또 하나의 필수조건인 피해자의 신원 확인을 위해 불려 나왔다. 프리먼은 범죄현장 사진을 이용해 배심원들의 감정을 자극했던 것처럼 피해자의 형을 이용해 배심원들의 감성에 호소했다. 그는 형사들을 따라 법의관실에 가서 동생의 시신을 확인한 일을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했다. ......
---> 이제 검찰 측 증인으로는 다섯 번째 증인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이 ‘다섯 번째 증인'인 걸까요? 물론 당연히 아니겠죠. 책 제목을 좌우할 정도로 비중을 가진 증인은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할러 변호사는 피해자의 신원이 어떠한가가 유죄 선고를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살해된 사람의 존재'가 살인 사건의 핵심 요소이니 살해된 사람의 신원은 어떠한지도 빼놓을 수 없는 요건이라는 설명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재판이라면 이는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합니다. 피해자의 신원은 그의 신분증과 주민등록조회서와 같은 객관적 자료로 입증이 충분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해자의 유족이 신원확인을 위해 증인으로 나올 필요는 전혀 없고, 다만 피해자의 유족으로서 갖고 있는 ‘재판절차 진술권'을 행사하기 위해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가해자를 엄벌에 처해 달라는 등의 주장을 하는 경우는 흔히 있습니다.
[279-281쪽] 프리먼은 글래디스 피켓이라는 여자의 증언을 마지막으로 마이너 선수들에 대한 증인신문을 마무리했다. 증인석에 앉은 피켓은 셔먼오크스에 있는 웨스트랜드 내셔널 본점의 창구 직원 책임자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
"그러면 본듀란트 씨가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마고 섀퍼가 리사 트래멀을 봤다고 이야기를 지어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거네요?"
"그렇죠. 본듀란트 씨 살해 소식이 은행에 알려지기 전에 섀퍼가 먼저 리사 트래멀을 봤다고 보고했거든요."
---> 프리먼 검사가 여섯 번째 증인을 신문하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날 오전 재판에서 마고 섀퍼가 자신의 눈으로 보지도 않은 걸 보았다고 주장하며 허위증언을 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그녀를 몰아붙였었습니다. 그런데 피켓이라는 이 새로운 증인이 그런 할러 변호사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피해자가 살해된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기 이전에 이미 마고 섀퍼는 동료들에게 자신이 지금 막 요 앞에서 리사 트래멀을 보았다는 얘기를 하였다는 것이고, 그 사실로 인해 마고 섀퍼가 보지도 않은 것을 보았다며 허위증언하였을 가능성은 확 낮아진 것이죠.
그런 증인에게 승산이 없다는 걸 직감한 할러 변호사는 반대신문도 포기하고 깨끗하게 퇴각합니다.
우리나라 재판이라도, 이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글래디스 피켓은 마고 섀퍼라는 중요한 증인의 신빙성을 보강해줄 수 있는 증인이므로 당연히 검찰 측 증인으로 법정에 나올 필요가 있겠습니다.
[284-287쪽] 휴식시간이 끝난 후 프리먼 검사는 이른바 '검찰 측 증인신문의 사냥과 채집 단계'로 넘어갔다. 그녀는 범죄현장 전문가들을 증인으로 불렀다.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나중에는 수사책임자인 하워드 컬렌 형사를 부를 것이 틀림없었다.
---> 페리 판사의 법정은 하루가 이런 식으로 갑니다. 오전 9시 재판 시작, 오전 중간에 휴식 한 번, 점심시간에 쉬었다가 오후 1시 반부터 다시 재판 시작, 오후 중간에 또 한 번 휴식, 그리고 오후 5시 마감. 하루짜리 재판이 아니기에 가능한, 배심원들의 집중력 유지와 현명한 판단을 위한 인간적인 진행입니다.
오후 중간의 휴식시간이 끝난 후, 이제부터 보다 더 중요한 검찰의 증인들이 등장합니다. 범죄현장 전문가들이라는데, 그 첫 번째는 범죄현장에 출동해 시신을 검안하고 부검이 실시될 법의관실로 이송한 법의관실 조사관이고, 그 다음 증인은 범죄현장을 조사하고 증거물을 수집해서 과학수사대로 인계한 LA 경찰국 범죄현장 조사반의 선임 범죄학자입니다.
[290-292쪽] "...... 주택 압류를 놓고 은행과 분쟁을 벌였고 은행 밖에서 시위를 벌인 경력이 있어서요. 결국 은행 변호사들이 그녀에 대해 일시적인 접근금지 명령을 받아냈죠. 그녀의 그런 행동들이 위협으로 간주되었던 건데 결국 우리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이의를 제기했다. 머데스토의 진술 중 맨 마지막 말은 선동적이고 배심원단에게 선입견을 줄 수 있는 발언이므로 기록에서 삭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
---> 다음 증인은 피해자가 일하던 웨스트랜드 내셔널 은행의 경비실장입니다. 이 사건 이전에 그 은행 앞에서 시위를 벌이곤 했던 피고인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리사 트래멀은 평소 웨스트랜드 내셔널 은행의 블랙리스트에 등재되어 있는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은행까지 와서 시위를 벌이는 등 위세를 과시하는 방법으로 은행을 비방하고 있었던 과격한 채무자였기 때문이죠.
할러 변호사가 리사 트래멀을 살인범으로 단정하는 증인의 말을 가로막습니다. 그녀가 살인범이라는 판단은 배심원들만이 할 수 있는 권한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295-297쪽] "검찰은 하워드 컬렌 형사를 증인 신청합니다."
...... 그는 법정 출입문으로 들어와 증인석을 향해 걸어왔다. 편안해 보였다. 이런 일은 그에겐 일상인 것이다.
......
컬렌은 감색 정장을 맵시 있게 차려입고 밝은 주황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형사들은 증인 출석을 할 때 항상 가장 좋은 옷으로 차려입고 나온다.
......
컬렌은 증인석에 편안히 앉아서 솔직하게 대답했고, 증언하는 모습이 소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찰 측 증인이 매력적인 것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때를 기다려야 했다. ......
---> 컬렌 형사는 이 사건의 수사책임자입니다. 수사책임자인 경찰관이 검찰 측의 가장 중요한 증인입니다. 수사를 직접 담당하면서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범인 다음으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입을 통해 그동안의 수사 과정을 배심원들이 상세히 알게 되어 사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결국 피고인석에 있는 사람이 범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명쾌하게 설명될 것입니다.
할러 변호사는 경찰관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오는 것이 ‘일상’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는데, 이렇게 미국 법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빈번하게 등장하는 증인인 경찰관이 우리나라 법정에서는 어떤 지위를 갖고 있을까요?
우리는 재판 중인 사건의 수사를 직접 담당한 경찰관이 법정에 나와 그동안의 수사 과정과 피고인이 범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습니다. 단지 피고인을 직접 조사한 경찰관이 법정에 나와 피고인의 진술내용에 대해서만 증언하는 ‘조사자 증인 제도’가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2008년에야 뒤늦게 도입되었는데, 그나마 경찰관이 증인으로 나와 조사자로서 증언하는 경우도 극히 드뭅니다.
제도가 마련되어 있는데도 경찰관을 증인으로 만나기 힘든 이유는, 경찰관은 피고인의 반대편에 있는 일방 당사자에 불과한 객관적이지 못한 지위에 있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증인으로 나와 일방적으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 경찰관의 말은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증거로서의 가치도 없다는 식의 알레르기 반응을 법원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증거가 법정 안에서 생생하게 공개되고 이에 대한 치열한 공격방어를 통해 진실을 가리자는 의미의 ‘공판중심주의’가 이 시대의 절대진리라고 주장되는 오늘날의 우리 법정에서, 정작 사건의 처음과 끝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증인으로 나설 수가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이러고도 ‘공판중심주의’라니, 앙꼬도 안 들어간 빵을 찐빵이라고 우기는 격입니다.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이 증인으로 나오는 경우가 흔치 않다 보니, 배심원들은 이 사건 수사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정확히 알기 힘듭니다. 물론 검사가 배심원들에게 수사 과정과 피고인이 범인인 이유에 대한 설명을 하긴 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사실 전달에 불과하여 수사담당자가 직접 증언하는 것만큼 생생하거나 재미있지도 않습니다. 어쨌든 생생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재판이 빨리빨리는 진행됩니다. 형사재판에 있어서 신속성이라는 요소도 물론 매우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러려면 우리는 공판중심주의를 이야기할 때 각자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공판중심주의 하지도 못할 거면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자는 거죠.
한편, 할러 변호사는 컬렌 형사의 옷차림과 태도에 대해 언급하며 ‘메시지보다 메신저’를 되뇌이고 있네요.
[302-303쪽] "변호인이 입회하지 않은 자리에서는 형사의 조사에 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 헌법상의 권리를 먼저 피고인에게 고지하셨습니까?"
"그땐 안 했죠. 그땐 용의자(suspect)가 아니었거든요.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른 관심 인물이었을 뿐이니까요. 피의자로 전환할 때까지는 미란다 원칙을 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피의자로 전환할 수준에 가까이 가지도 않았고요. 트래멀의 진술과 목격자의 진술이 꽤 차이가 있더군요. 한 사람을 피의자(suspect)로 만들기 전에 우선 그 간극부터 줄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프리먼이 이번에도 한발 앞섰다. 내가 그 틈을 더 넓히기 전에 메우고 붙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맥이 빠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 컬렌 증인에 대한 프리먼 검사의 주신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컬렌 형사는 사건 당일 리사 트래멀의 집을 방문해서 그녀를 상대로 간단한 인터뷰를 한 뒤 경찰서로 데려가 다시 조사하고 체포하였습니다. 할러 변호사는 컬렌 형사가 리사 트래멀에게 미란다 원칙을 미리 고지하지 않고 그녀를 조사한 데 대해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점을 주장해서 경찰이 수집한 증거를 무력화하려는 계획이었지만, 프리먼 검사가 먼저 선수를 쳐서 할러 변호사가 할 말을 가로채고 있습니다. 공격은 먼저 하는 게 유리할 때가 많은 법이죠.
검사는 컬렌 형사가 리사 트래멀을 상대로 진행한 절차는 interrogation이 아니라 interview이므로 미란다 원칙을 고지할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경찰 수사에 하자가 없다는 점을 배심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303-304쪽] 프리먼은 아주 능숙하게 컬렌을 밴나이스 경찰서로, 그가 내 의뢰인과 마주 앉아 신문을 한 조사실로 데려왔다. 그의 입을 통해 그 조사 내용을 녹화한 비디오를 소개했다. 그 비디오는 배심원단을 위해 두 대의 프로젝터 스크린으로 재생되었다. ......
---> 컬렌 형사에 대한 증인신문 기회에, 프리먼 검사는 리사 트래멀의 조사장면이 녹화된 영상을 상영합니다. 이 영상은 역시 검사에 의해 증거로 제출될 것입니다.
반면, 우리나라 법에서는 이렇게 조사장면을 촬영한 영상은 검사가 증거로 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법이 그렇게 되어 있다기보다는, 법원의 해석이 그렇습니다. 이걸 증거로 허용하면 법정이 ‘극장’이 된다는 이유도 듭니다. 법정에서 여러 증거들을 살펴보는 도중에 조사장면 영상을 한번 튼다고 극장이 된다는 논리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법정이 극장이 되는 게 무슨 큰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범인을 기소하기 전에 수사기관에 의해 충분한 수사가 이루어져 범인의 혐의가 거의 ‘증명’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는 우리의 형사사법절차와 달리, 미국에서는 수사기관이 아주 기초적인 수사만을 진행하여 범인의 혐의가 ‘소명’되는 정도에만 이르면 범인을 재판에 넘기고 법정에서 실질적인 ‘증명’ 활동이 이루어지는 차이가 있다고 흔히 이야기되곤 합니다.
물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 사건만 보더라도, 체포된 범인은 곧바로 내지 24시간 이내에 법원에 인계되어야 하므로 그 사이에 수사기관이 수사를 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미국의 수사기관도 분명히 용의자를 앞에 앉혀놓고 조사를 하는 등 어느 정도 우리와 비슷한 형태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사 결과는 수사책임자의 증언, 그리고 조사장면을 촬영한 동영상 등의 형태로 남아 증거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구요.
그런데 우리의 경우, 제가 계속 지적해오고 있는 것처럼 경찰관의 조사자로서의 증언은 법으로는 인정되면서도 실제 재판현장에서는 거의 인정되지 않고 있고, 조사장면을 촬영한 동영상은 법상으로도 아예 증거로 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 증거로 쓰이는 이 두 가지를 우리는 증거로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우리는 뭘 갖고 재판을 하는 걸까요?
[304쪽] 조사 동영상은 머리 위 높이의 스크린에서 방영되었다. 스크린 속의 하워드 컬렌은 덩치가 큰 남자이고 리사 트래멀은 왜소한 여자였기 때문에 피고인 측은 작은 점수를 땄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리사의 맞은편에 앉은 컬렌이 그녀를 압도하고, 궁지로 몰고, 심지어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건 우리에게 이로웠다. 반대신문을 통해 배심원들의 마음속에 심으려고 했던 이미지가 바로 이런 거였다.
---> 우리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그 하려고 하는 것의 실제 내용보다, 그것이 ‘보여지는’ 외양이 더 중요하다고들 얘기합니다(‘보여지는’은 이중피동이라 맞춤법상 안 맞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이 안 맞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 그냥 쓰겠습니다).
할러 변호사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네요. 조사 내용에 먼저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조사의 외관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배심원들도 사람인지라, 역시 느끼는 건 마찬가지일 거라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수사기관이 영상녹화조사를 할 때 나중에 진술의 임의성이나 특신상태가 다퉈질 경우를 고려해서 카메라 각도에 대해서도 신경 써야겠다는 점입니다.
[306-307쪽] "미첼 본듀란트를 공격했습니까?"
......
"미, 미첼 본듀란트가 공격을 당했어요? 괜찮아요?"
"아뇨, 실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당신에게 헌법상의 권리를 알려줘야 할 것 같군요."
컬렌은 트래멀에게 미란다의 원칙을 고지했고 트래멀은 마법의 말을, 이제까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 중 가장 현명한 두 마디를 말했다.
"변호사를 불러주세요."
그것으로 조사는 끝났고 컬렌이 트래멀을 살인 혐의로 체포하는 것으로 동영상도 끝났다. ......
---> 리사 트래멀의 조사장면이 촬영된 동영상이 법정에서 상영되고 있습니다.
컬렌 형사는 당초 단순한 참고인 신분이었던 리사 트래멀이 조사 도중에 종전 진술과 모순되는 진술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를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하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인용하지 않은 다른 부분에서 리사 트래멀의 진술내용을 읽어보면, 그녀가 딱히 모순된 진술을 한다거나 더 나아가 자백진술을 하였다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습니다. 컬렌 형사가 그녀에 대해 이미 마음속으로 혐의점을 두고 문답을 주고받다 보니 그만 의욕만 앞서서, 그녀가 거짓말을 하거나 자백을 한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비록 검사가 이 동영상을 증거로 제출하기는 했지만, 자백진술이나 모순진술이 들어있지도 않은 이상 이 동영상은 딱히 증거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이 영상은 이런 가치는 분명히 있을 겁니다. 범행이 있었던 바로 당일의, 피고인의 생생한 표정과 말투 등을 배심원들이 직접 바라보면서, 점점 이 재판에 깊이 빠져들고 관심을 가질 수 있겠다는 것이죠.
그런 사진들은 내 의뢰인에 대한 편견을 심어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살인 사건 피해자를 찍은 사진은 항상 충격적이고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살인범을 엄벌에 처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사진은 아주 쉽게,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배심원단이 피고인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들 수 있다. ......
---> 살짝 순서가 엉키긴 했지만 다시 본래의 순서로 돌아와 프리먼 검사는 신고전화를 받고 최초로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 데이비드 커빙턴을 증인으로 세웁니다.
이번에도 프리먼 검사는 증인신문을 하면서 증거물을 효과적으로 활용합니다. 피해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처참한 사진을 배심원들에게 직접 보여주며 배심원들이 피고인에게 한껏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장 출동 경찰관의 진술이나 현장 사진 역시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증거동의' 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런 증거 역시 우리 법정에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구요, 그에 따라 당연히 재판진행은 빨리빨리, 재판상황은 지루지루......
[274-276쪽] 커빙턴에 대한 반대신문에서 나는 사진 한 장에 집중해서 배심원단이 망자를 위한 복수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배심원들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대답은 내놓지 않는다면 내 할 일은 다 한 것이다.
---> 할러 변호사가 이번엔 커빙턴 증인을 상대로 반대신문을 벌입니다.
사건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보면 쓰러진 피해자 옆에 피해자의 서류가방이 입구가 열린 채 나뒹굴고 있는데, 할러 변호사는 이를 두고 서류가방 속에 있는 물건을 노린 강도의 소행으로 이 사건을 몰아보려고 합니다. 강도의 소행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배심원들 마음속에 심어두려 합니다.
미키 할러 변호사 시리즈의 주인공은 공정이나 정의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교활하고 야비하고 돈만 밝히는 나쁜 사나이 캐릭터입니다. 다만, 시리즈 뒤로 갈수록 점점 바른 사나이 쪽으로 변신 중이고, 급기야 다음 작품에서는 무려 검사로서 활약할 마음을 먹고 LA 지역의 ‘검사장’ 선거에 출마하기까지 합니다.
아무튼 아직까지는 나쁜 사나이 캐릭터인 할러 변호사는 계속 꼼수를 노립니다. 계속 의혹을 던지자, 던지다 보면 하나 정도는 배심원들에게 가 닿는 것도 있겠지 하면서요.
[277쪽] 다음 증인은 피해자의 형인 네이선 본듀란트였다. 그는 유죄 평결을 위한 또 하나의 필수조건인 피해자의 신원 확인을 위해 불려 나왔다. 프리먼은 범죄현장 사진을 이용해 배심원들의 감정을 자극했던 것처럼 피해자의 형을 이용해 배심원들의 감성에 호소했다. 그는 형사들을 따라 법의관실에 가서 동생의 시신을 확인한 일을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했다. ......
---> 이제 검찰 측 증인으로는 다섯 번째 증인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이 ‘다섯 번째 증인'인 걸까요? 물론 당연히 아니겠죠. 책 제목을 좌우할 정도로 비중을 가진 증인은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할러 변호사는 피해자의 신원이 어떠한가가 유죄 선고를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살해된 사람의 존재'가 살인 사건의 핵심 요소이니 살해된 사람의 신원은 어떠한지도 빼놓을 수 없는 요건이라는 설명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재판이라면 이는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합니다. 피해자의 신원은 그의 신분증과 주민등록조회서와 같은 객관적 자료로 입증이 충분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해자의 유족이 신원확인을 위해 증인으로 나올 필요는 전혀 없고, 다만 피해자의 유족으로서 갖고 있는 ‘재판절차 진술권'을 행사하기 위해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가해자를 엄벌에 처해 달라는 등의 주장을 하는 경우는 흔히 있습니다.
[279-281쪽] 프리먼은 글래디스 피켓이라는 여자의 증언을 마지막으로 마이너 선수들에 대한 증인신문을 마무리했다. 증인석에 앉은 피켓은 셔먼오크스에 있는 웨스트랜드 내셔널 본점의 창구 직원 책임자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
"그러면 본듀란트 씨가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마고 섀퍼가 리사 트래멀을 봤다고 이야기를 지어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거네요?"
"그렇죠. 본듀란트 씨 살해 소식이 은행에 알려지기 전에 섀퍼가 먼저 리사 트래멀을 봤다고 보고했거든요."
---> 프리먼 검사가 여섯 번째 증인을 신문하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날 오전 재판에서 마고 섀퍼가 자신의 눈으로 보지도 않은 걸 보았다고 주장하며 허위증언을 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그녀를 몰아붙였었습니다. 그런데 피켓이라는 이 새로운 증인이 그런 할러 변호사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피해자가 살해된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기 이전에 이미 마고 섀퍼는 동료들에게 자신이 지금 막 요 앞에서 리사 트래멀을 보았다는 얘기를 하였다는 것이고, 그 사실로 인해 마고 섀퍼가 보지도 않은 것을 보았다며 허위증언하였을 가능성은 확 낮아진 것이죠.
그런 증인에게 승산이 없다는 걸 직감한 할러 변호사는 반대신문도 포기하고 깨끗하게 퇴각합니다.
우리나라 재판이라도, 이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글래디스 피켓은 마고 섀퍼라는 중요한 증인의 신빙성을 보강해줄 수 있는 증인이므로 당연히 검찰 측 증인으로 법정에 나올 필요가 있겠습니다.
[284-287쪽] 휴식시간이 끝난 후 프리먼 검사는 이른바 '검찰 측 증인신문의 사냥과 채집 단계'로 넘어갔다. 그녀는 범죄현장 전문가들을 증인으로 불렀다.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나중에는 수사책임자인 하워드 컬렌 형사를 부를 것이 틀림없었다.
---> 페리 판사의 법정은 하루가 이런 식으로 갑니다. 오전 9시 재판 시작, 오전 중간에 휴식 한 번, 점심시간에 쉬었다가 오후 1시 반부터 다시 재판 시작, 오후 중간에 또 한 번 휴식, 그리고 오후 5시 마감. 하루짜리 재판이 아니기에 가능한, 배심원들의 집중력 유지와 현명한 판단을 위한 인간적인 진행입니다.
오후 중간의 휴식시간이 끝난 후, 이제부터 보다 더 중요한 검찰의 증인들이 등장합니다. 범죄현장 전문가들이라는데, 그 첫 번째는 범죄현장에 출동해 시신을 검안하고 부검이 실시될 법의관실로 이송한 법의관실 조사관이고, 그 다음 증인은 범죄현장을 조사하고 증거물을 수집해서 과학수사대로 인계한 LA 경찰국 범죄현장 조사반의 선임 범죄학자입니다.
[290-292쪽] "...... 주택 압류를 놓고 은행과 분쟁을 벌였고 은행 밖에서 시위를 벌인 경력이 있어서요. 결국 은행 변호사들이 그녀에 대해 일시적인 접근금지 명령을 받아냈죠. 그녀의 그런 행동들이 위협으로 간주되었던 건데 결국 우리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이의를 제기했다. 머데스토의 진술 중 맨 마지막 말은 선동적이고 배심원단에게 선입견을 줄 수 있는 발언이므로 기록에서 삭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
---> 다음 증인은 피해자가 일하던 웨스트랜드 내셔널 은행의 경비실장입니다. 이 사건 이전에 그 은행 앞에서 시위를 벌이곤 했던 피고인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리사 트래멀은 평소 웨스트랜드 내셔널 은행의 블랙리스트에 등재되어 있는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은행까지 와서 시위를 벌이는 등 위세를 과시하는 방법으로 은행을 비방하고 있었던 과격한 채무자였기 때문이죠.
할러 변호사가 리사 트래멀을 살인범으로 단정하는 증인의 말을 가로막습니다. 그녀가 살인범이라는 판단은 배심원들만이 할 수 있는 권한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295-297쪽] "검찰은 하워드 컬렌 형사를 증인 신청합니다."
...... 그는 법정 출입문으로 들어와 증인석을 향해 걸어왔다. 편안해 보였다. 이런 일은 그에겐 일상인 것이다.
......
컬렌은 감색 정장을 맵시 있게 차려입고 밝은 주황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형사들은 증인 출석을 할 때 항상 가장 좋은 옷으로 차려입고 나온다.
......
컬렌은 증인석에 편안히 앉아서 솔직하게 대답했고, 증언하는 모습이 소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찰 측 증인이 매력적인 것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때를 기다려야 했다. ......
---> 컬렌 형사는 이 사건의 수사책임자입니다. 수사책임자인 경찰관이 검찰 측의 가장 중요한 증인입니다. 수사를 직접 담당하면서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범인 다음으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입을 통해 그동안의 수사 과정을 배심원들이 상세히 알게 되어 사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결국 피고인석에 있는 사람이 범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명쾌하게 설명될 것입니다.
할러 변호사는 경찰관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오는 것이 ‘일상’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는데, 이렇게 미국 법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빈번하게 등장하는 증인인 경찰관이 우리나라 법정에서는 어떤 지위를 갖고 있을까요?
우리는 재판 중인 사건의 수사를 직접 담당한 경찰관이 법정에 나와 그동안의 수사 과정과 피고인이 범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습니다. 단지 피고인을 직접 조사한 경찰관이 법정에 나와 피고인의 진술내용에 대해서만 증언하는 ‘조사자 증인 제도’가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2008년에야 뒤늦게 도입되었는데, 그나마 경찰관이 증인으로 나와 조사자로서 증언하는 경우도 극히 드뭅니다.
제도가 마련되어 있는데도 경찰관을 증인으로 만나기 힘든 이유는, 경찰관은 피고인의 반대편에 있는 일방 당사자에 불과한 객관적이지 못한 지위에 있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증인으로 나와 일방적으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 경찰관의 말은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증거로서의 가치도 없다는 식의 알레르기 반응을 법원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증거가 법정 안에서 생생하게 공개되고 이에 대한 치열한 공격방어를 통해 진실을 가리자는 의미의 ‘공판중심주의’가 이 시대의 절대진리라고 주장되는 오늘날의 우리 법정에서, 정작 사건의 처음과 끝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증인으로 나설 수가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이러고도 ‘공판중심주의’라니, 앙꼬도 안 들어간 빵을 찐빵이라고 우기는 격입니다.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이 증인으로 나오는 경우가 흔치 않다 보니, 배심원들은 이 사건 수사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정확히 알기 힘듭니다. 물론 검사가 배심원들에게 수사 과정과 피고인이 범인인 이유에 대한 설명을 하긴 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사실 전달에 불과하여 수사담당자가 직접 증언하는 것만큼 생생하거나 재미있지도 않습니다. 어쨌든 생생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재판이 빨리빨리는 진행됩니다. 형사재판에 있어서 신속성이라는 요소도 물론 매우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러려면 우리는 공판중심주의를 이야기할 때 각자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공판중심주의 하지도 못할 거면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자는 거죠.
한편, 할러 변호사는 컬렌 형사의 옷차림과 태도에 대해 언급하며 ‘메시지보다 메신저’를 되뇌이고 있네요.
[302-303쪽] "변호인이 입회하지 않은 자리에서는 형사의 조사에 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 헌법상의 권리를 먼저 피고인에게 고지하셨습니까?"
"그땐 안 했죠. 그땐 용의자(suspect)가 아니었거든요.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른 관심 인물이었을 뿐이니까요. 피의자로 전환할 때까지는 미란다 원칙을 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피의자로 전환할 수준에 가까이 가지도 않았고요. 트래멀의 진술과 목격자의 진술이 꽤 차이가 있더군요. 한 사람을 피의자(suspect)로 만들기 전에 우선 그 간극부터 줄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프리먼이 이번에도 한발 앞섰다. 내가 그 틈을 더 넓히기 전에 메우고 붙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맥이 빠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 컬렌 증인에 대한 프리먼 검사의 주신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컬렌 형사는 사건 당일 리사 트래멀의 집을 방문해서 그녀를 상대로 간단한 인터뷰를 한 뒤 경찰서로 데려가 다시 조사하고 체포하였습니다. 할러 변호사는 컬렌 형사가 리사 트래멀에게 미란다 원칙을 미리 고지하지 않고 그녀를 조사한 데 대해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점을 주장해서 경찰이 수집한 증거를 무력화하려는 계획이었지만, 프리먼 검사가 먼저 선수를 쳐서 할러 변호사가 할 말을 가로채고 있습니다. 공격은 먼저 하는 게 유리할 때가 많은 법이죠.
검사는 컬렌 형사가 리사 트래멀을 상대로 진행한 절차는 interrogation이 아니라 interview이므로 미란다 원칙을 고지할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경찰 수사에 하자가 없다는 점을 배심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303-304쪽] 프리먼은 아주 능숙하게 컬렌을 밴나이스 경찰서로, 그가 내 의뢰인과 마주 앉아 신문을 한 조사실로 데려왔다. 그의 입을 통해 그 조사 내용을 녹화한 비디오를 소개했다. 그 비디오는 배심원단을 위해 두 대의 프로젝터 스크린으로 재생되었다. ......
---> 컬렌 형사에 대한 증인신문 기회에, 프리먼 검사는 리사 트래멀의 조사장면이 녹화된 영상을 상영합니다. 이 영상은 역시 검사에 의해 증거로 제출될 것입니다.
반면, 우리나라 법에서는 이렇게 조사장면을 촬영한 영상은 검사가 증거로 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법이 그렇게 되어 있다기보다는, 법원의 해석이 그렇습니다. 이걸 증거로 허용하면 법정이 ‘극장’이 된다는 이유도 듭니다. 법정에서 여러 증거들을 살펴보는 도중에 조사장면 영상을 한번 튼다고 극장이 된다는 논리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법정이 극장이 되는 게 무슨 큰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범인을 기소하기 전에 수사기관에 의해 충분한 수사가 이루어져 범인의 혐의가 거의 ‘증명’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는 우리의 형사사법절차와 달리, 미국에서는 수사기관이 아주 기초적인 수사만을 진행하여 범인의 혐의가 ‘소명’되는 정도에만 이르면 범인을 재판에 넘기고 법정에서 실질적인 ‘증명’ 활동이 이루어지는 차이가 있다고 흔히 이야기되곤 합니다.
물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 사건만 보더라도, 체포된 범인은 곧바로 내지 24시간 이내에 법원에 인계되어야 하므로 그 사이에 수사기관이 수사를 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미국의 수사기관도 분명히 용의자를 앞에 앉혀놓고 조사를 하는 등 어느 정도 우리와 비슷한 형태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사 결과는 수사책임자의 증언, 그리고 조사장면을 촬영한 동영상 등의 형태로 남아 증거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구요.
그런데 우리의 경우, 제가 계속 지적해오고 있는 것처럼 경찰관의 조사자로서의 증언은 법으로는 인정되면서도 실제 재판현장에서는 거의 인정되지 않고 있고, 조사장면을 촬영한 동영상은 법상으로도 아예 증거로 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 증거로 쓰이는 이 두 가지를 우리는 증거로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우리는 뭘 갖고 재판을 하는 걸까요?
[304쪽] 조사 동영상은 머리 위 높이의 스크린에서 방영되었다. 스크린 속의 하워드 컬렌은 덩치가 큰 남자이고 리사 트래멀은 왜소한 여자였기 때문에 피고인 측은 작은 점수를 땄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리사의 맞은편에 앉은 컬렌이 그녀를 압도하고, 궁지로 몰고, 심지어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건 우리에게 이로웠다. 반대신문을 통해 배심원들의 마음속에 심으려고 했던 이미지가 바로 이런 거였다.
---> 우리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그 하려고 하는 것의 실제 내용보다, 그것이 ‘보여지는’ 외양이 더 중요하다고들 얘기합니다(‘보여지는’은 이중피동이라 맞춤법상 안 맞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이 안 맞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 그냥 쓰겠습니다).
할러 변호사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네요. 조사 내용에 먼저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조사의 외관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배심원들도 사람인지라, 역시 느끼는 건 마찬가지일 거라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수사기관이 영상녹화조사를 할 때 나중에 진술의 임의성이나 특신상태가 다퉈질 경우를 고려해서 카메라 각도에 대해서도 신경 써야겠다는 점입니다.
[306-307쪽] "미첼 본듀란트를 공격했습니까?"
......
"미, 미첼 본듀란트가 공격을 당했어요? 괜찮아요?"
"아뇨, 실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당신에게 헌법상의 권리를 알려줘야 할 것 같군요."
컬렌은 트래멀에게 미란다의 원칙을 고지했고 트래멀은 마법의 말을, 이제까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 중 가장 현명한 두 마디를 말했다.
"변호사를 불러주세요."
그것으로 조사는 끝났고 컬렌이 트래멀을 살인 혐의로 체포하는 것으로 동영상도 끝났다. ......
---> 리사 트래멀의 조사장면이 촬영된 동영상이 법정에서 상영되고 있습니다.
컬렌 형사는 당초 단순한 참고인 신분이었던 리사 트래멀이 조사 도중에 종전 진술과 모순되는 진술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를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하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인용하지 않은 다른 부분에서 리사 트래멀의 진술내용을 읽어보면, 그녀가 딱히 모순된 진술을 한다거나 더 나아가 자백진술을 하였다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습니다. 컬렌 형사가 그녀에 대해 이미 마음속으로 혐의점을 두고 문답을 주고받다 보니 그만 의욕만 앞서서, 그녀가 거짓말을 하거나 자백을 한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비록 검사가 이 동영상을 증거로 제출하기는 했지만, 자백진술이나 모순진술이 들어있지도 않은 이상 이 동영상은 딱히 증거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이 영상은 이런 가치는 분명히 있을 겁니다. 범행이 있었던 바로 당일의, 피고인의 생생한 표정과 말투 등을 배심원들이 직접 바라보면서, 점점 이 재판에 깊이 빠져들고 관심을 가질 수 있겠다는 것이죠.
[308쪽] 프리먼은 형사팀의 증언을 따로 떼어놓는 영리한 전술을 구사했다. 지금 내가 컬렌 형사만 신문해서는 사건에 대해 응집력 있는 공격을 감행할 수 없을 것이다. 컬렌은 지금, 그의 파트너 롱스트레치 형사는 훨씬 나중에 신문하게 생겼다. 소송전략전술이 프리먼의 강점들 중 하나였는데 지금 그 경쟁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었다.
---> 앞에서 중요한 증인을 더 나중에 등장시킨다고 말씀드렸는데요, 할러 변호사의 설명에 의하면 프리먼 검사는 좀 다른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컬렌 형사가 수사의 총책임자이고 가장 중요한 증인임에도 그를 먼저 증인으로 내세우고, 컬렌 형사의 하급자인 롱스트레치 형사를 나중에 세우려고 합니다. 롱스트레치 형사가 400미터 계주의 마지막 주자로서 더 적합한 뭔가가 있는 거겠죠.
[309-370쪽] 나는 별 황당한 이야기를 다 들어본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사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컬렌이 처음으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바라던 게 그거였다. 그에게 창피를 줄 때 그가 오만한 모습을 보인다면 훨씬 더 좋을 텐데.
......
“그렇게 모아서 만든 큰 그림이 증인을 성급한 판단으로 이끌고 간 거로군요, 그렇죠?”
프리먼이 벌떡 일어나서 이의를 제기했고 판사가 이의 제기를 받아들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컬렌의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 질문을 모든 배심원들의 마음에 심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 컬렌 형사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반대신문 장면입니다. 이 부분의 내용을 길게 인용할 수 없어 몇 구절만 가져왔기에 느낌 전달이 쉽지 않지만, 이 부분에서는 증인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할러 변호사와 프리먼 검사 사이의 수싸움과 공방이 대단합니다.
처음부터 수사방향을 잘못 잡아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고는 나중에는 방향을 제대로 틀지 못해 잘못된 길인 걸 알면서도 그 길을 계속 고집하고 있다며 증인을 약 올리고 증인의 흥분상태를 유발하여 배심원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주게 하려는 변호인, 그런 변호인 때문에 자칫 흠집이 날까 걱정돼 잦은 이의 제기를 통해 증인을 보호하는 한편 탄력받은 변호인의 리듬을 깨보려는 검사.
이런 대목에서 보이는 양쪽의 심리 묘사와 공방 장면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332쪽] “...... 하지만 그 편지를 반대신문에서 소개한 것은 대단히 옳지 못한 처사였습니다, 할러 변호사. 오늘 아침에는 재판부에 알렸어야죠. 우편으로 뭔가를 받았는데 지금 확인 중에 있고 진짜로 확인이 되면 법정에서 소개할 계획이라고 말이죠. 변호인이 판사와 검찰을 기습 공격한 겁니다.”
---> 프리먼 검사의 이의제기를 인정한 재판장이 할러 변호사를 훈계하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가 컬렌 형사에 대한 반대신문 때 재판장도 검사도 알지 못하던 어떤 편지를 근거로 컬렌 형사를 공격했거든요.
이 편지는 전날 익명의 누군가가 할러 변호사에게 보낸 것이었고, 조금 전 시스코를 통해 그 편지에 관한 중요한 사실의 확인작업을 막 마쳤습니다. 사실 할러 변호사 입장에서도 재판장이나 검사에게 미리 이 증거를 개시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던 것이죠.
어느 누구든 불의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재판에서는 양 당사자는 물론 재판장도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공격과 방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재판장과 검사 모두 할러 변호사를 비난하고 있지만, 이 편지를 입수한 날이 전날인지 아닌지 밝혀낼 도리가 없는 이상 미리 알릴 시간이 없었다는데 더 뭐라고 하지 못하고, 할러 변호사는 일단 위기를 벗어납니다.
[371쪽] 프리먼은 컬렌을 15분 더 증인석에 앉혀놓고 재직접신문(redirect)을 하면서 그가 수사하면서 취한 모든 조치를 범죄에 맞서 싸운 용감한 노력으로 치장하느라 바빴다. 그녀가 신문을 마친 후 나는 재반대신문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컬렌 건에 있어서는 내가 검사보다 우위에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컬렌의 수사가 좁은 시야에 갇혀 한 곳만 보고 나아간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고, 성공했다고 믿었다.
---> 역시 컬렌 형사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공격전략은, 컬렌 형사의 수사방향이 처음부터 잘못되었고 성급했다는 의혹을 배심원들에게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프리먼 검사는 우리 제도로 치면 ‘재주신문'을 통해 할러 변호사가 만들어놓은 흠집을 되돌려 놓으려 애썼고, 그녀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컬렌 형사의 동료 형사인 롱스트레치라는 훌륭한 증인이 아직 뒤에 대기하고 있으니까요.
[제3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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