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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12일 일요일

[독서일기 ]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댓글 없음 : 작성자: iMagistrat 시간: 7/12/2026 10:26:00 오후 라벨: 검사 , 검찰 , 독서일기 , 사법제도 , 재판 , 프랑스 사법제도




몽테스키외(Montesquieu)의 본명은 Charles-Louis de Secondat 라고 하는데요, '삼권분립' 이론으로 유명한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을 썼습니다. 기억도 안 날 정도로 한참 전에 사놓고는 읽을까 말까만을 반복하던 책을 드디어 읽었습니다. 미루고 미루던 숙제를 간신히 끝낸 기분입니다.  

번역체 때문인지, 너무 오래된 책인 때문인지, 읽기가 쉽지만은 아닌 책이었지만, 역시 고전은 고전, 기억해두었다가 써먹고 싶은 대목들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언젠가 어디선가 써먹을 용도로 여기에 정리해 봅니다. 

제가 산 버전은, 홍신문화사에서 2009년쯤 나온 책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법률용어들은 분명 지금의 그것과 의미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감찰관' 같은 용어는 정확히 어떠한 역할의 직책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용어와는 구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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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면] 법의 집행에 대한 모든 종류의 피신처는 귀족정체를 붕괴시킨다. 그 결과 참주정체가 일어나게 된다. 법은 어떤 경우에나 권리를 남용하는 거만을 제압해야 하므로 잠정적 또는 여욱적으로 귀족을 두렵게 만드는 사법관의 존재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스파르타의 민선 장관이나 베네치아의 종교재판소 판사처럼 어떤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는 사법관이 그런 존재이다. 베네치아에서는 돌의 입이 모든 밀고자를 위해 열려 있는데, 그것은 참주정체의 입이라고 할 수 있다.

귀족정체에서의 그와 같은 참주적 관직은 민주정체에서의 감찰직과 비슷하다. 후자는 그 성질로 볼 때 전자처럼 독립적이다. 사실 감찰관은 직무상 행한 일에 관해 문책을 당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신임을 받아야 하며, 결코 낙담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로마인들은 감탄할 만했다. 로마에서는 모든 집정관에게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었으나, 감찰관만은 예외였다.


[77면] 공화정체에는 감찰관이 필요하다. 그 정체의 원리가 곧 덕성이기 때문이다. 덕성을 파괴하는 것은 범죄뿐만 아니라 태만, 과실, 미지근한 조국애, 나쁜 예, 타락의 싹 등이다. 법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법망을 뚫는 것, 법을 약화시키는 것, 이런 모든 것은 감찰관에 의해 교정되어야 한다. 


[88면] 로마에서는 한 시민이 다른 시민을 탄핵하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 그것은 공화정체의 정신에 따라 정해진 것이다. 즉 공화정체에서는 각 시민이 공익을 위해 무한한 열의를 가져야 하고, 또 각 시민은 조국의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황제 치하에서도 사람들은 공화정체의 격률에 따랐다. 그러자 곧 불길한 인종, 즉 밀고자라는 무리가 나타났다.

뛰어난 간계에 충분한 재능을 가진 자라면, 즉 비천한 영혼과 야망에 불타는 정신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그 처형이 군주의 마음에 들 것 같은 범죄자를 찾아다녔다. 그것이 입신과 부를 얻기 위한 방편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훌륭한 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법을 집행하기 위해 그 지위에 있는 군주는 자신의 이름으로 모든 범죄를 소추하기 위해 각 재판소에 한 사람의 관리를 임명하는 법이다. 이와 같이 하여 밀고자의 일은 우리나라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플라톤은 <법률>에서, 재판관에게 고소하는 것을 게을리하거나, 또는 그들에게 협력하기를 게을리한 자는 처벌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에는 적합하지 않다. 검사가 시민을 대신해서 감시하고, 그 활동에 의해 시민들은 평온을 누리는 것이다. 


----> 이 부분에 대한 제 생각을 잠깐 적어보겠습니다. 

여기서 '탄핵'은 오늘날의 '고소'를, '밀고자'는 '무고를 범하는 자'를, '각 재판소에 한 사람의 관리'는 '검사'를 각각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법의 정신'이 출간된 1748년 당시 이미 프랑스에는 근대적 검사 제도의 초창기 모습이 존재하였습니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검사는 무고를 방지하기 위해 시민을 대신해 고소라는 직무를 행하게 하기 위해 각 법원마다 한 사람씩 둔 정부의 관리입니다. 이 검사 제도는 공화정체에 필요한 제도이고, 공화정체라는 근대적 정치체제를 구성하고 뒷받침하기 위해 탄생한 근대적 사법 제도인 것입니다. 


[90면] 경험에 의하면, 형벌이 가벼운 나라에서는 국민의 마음이 그 가벼운 형벌에 의해 감동을 받는 정도가, 형벌이 엄한 나라에서 엄한 벌에 의해 타격을 받는 것과 같다.

나라에 무슨 불편한 일이 생기면 강권적인 정부는 갑자기 그것을 교정하고자, 낡은 법을 집행하는 대신 즉시 그 해악을 막을 가혹한 형벌을 만든다. 그러나 정부의 동력은 그것에 의해서 소모되고, 국민들은 그 무거운 법에 익숙해져서 예전의 가벼운 형벌 정도로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이 무거운 벌에 대한 공포가 감소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더 무거운 법을 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중략)

인간을 극단적인 수단으로 다루어서는 안 되며,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방법을 적절하게 사용해서 지도해야 한다. 기강이 느슨해지는 원인을 살펴보면, 그것은 범죄를 처벌하지 않은 결과일 뿐 형벌을 경감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연에 따르자. 자연은 인간에게 수치심을 가책으로 주었다. 따라서 형벌의 대부분은 형을 받는다는 수치심을 느끼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120면] 국민의 신탁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패를 은닉하기 위해 국민을 부패시키려고 할 때, 국민은 그와 같은 불행에 빠진다. 그들은 국민이 자기들의 야심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오직 국민의 위대성만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탐욕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국민의 탐욕을 부채질한다. 


[161면] 각 국가에는 세 종류의 권력이 있다. 입법권, 만민법에 속하는 사물의 집행권, 시민법에 속하는 집행권이 그것이다. 

첫째의 권력에 의해 군주나 집정관은 일시적 또는 항구적인 법률을 제정하고, 또 이미 정해진 법률을 수정 또는 폐지한다. 둘째의 권력에 의해 그는 강화 또는 선전을 행하고, 대사를 교환하고, 안전을 보장하고, 침략을 예방한다. 셋째의 권력에 의해서 그는 죄를 처벌하고, 개인의 쟁송을 심판한다. 우리는 마지막 것을 재판권이라 부르고, 다른 하나는 단지 국가의 집행권이라 부른다.

한 시민의 정치적 자유란, 각자가 자기의 안전에 대해 가지는 의견에서 유래되는 그 정신의 안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자유를 갖기 위해서는 한 시민이 다른 시민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정체여야만 한다. 동일한 인간 또는 동일한 집정관 단체의 수중에 입법권과 집행권이 결합되어 있을 때에는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같은 군주 또는 같은 원로원이 폭정적인 법률을 만들고, 그것을 폭정적으로 집행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재판관이 입법권과 집행권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을 때에도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입법권과 결합되어 있다면, 시민의 생명과 자유를 지배하는 권력은 자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재판관이 곧 입법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집행권에 결합되어 있다면 재판권은 압제자의 힘을 가지게 될 것이며, 또한 동일한 인간, 또는 귀족이나 시민 중 주요한 사람의 동일 단체가 이 세 가지 권력, 즉 법률을 제정하는 권력, 공공의 결정을 실행하는 권력, 죄나 개인의 쟁송을 심판하는 권력을 행사한다면 모든 것은 상실되고 말 것이다. 

재판권은 상설적인 원로원에 부여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법률이 정하는 소속에 의해 필요한 기관에 존속하는 법정을 구성해야 하며, 또 그러한 시민단체로부터 선출된 사람들에 의해 행사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하는 재판권은 특정한 신분이나 특정한 직업에 결합되지 않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린다. 사람들의 눈앞에 항상 같은 재판관이 있을 일이 없고, 사람들은 재판관직은 무서워해도 재판관은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 

중대한 공판에서 범죄인은 법과 협력해서 스스로 재판관을 선출해야 한다. 또는 적어도 많은 수의 재판관을 기피할 수 있어서 남은 사람이 그가 선택한 사람으로 간주되어도 좋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다른 두 개의 권력은, 한쪽은 국가의 일반적 의지이고, 다른 쪽은 그 일반적 의지의 실행에 지나지 않아 어떤 개인에 대해 행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오히려 항구적인 기구 또는 집정관에 주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재판소가 고정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판결은 그것이 법의 명문이라고 할 정도로 고정적이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한 재판관의 개인적 견해라고 가정한다면, 사람들은 그 계약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사회생활을 하는 것과 다름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재판관은 피고와 같은 신분의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피고가 자기를 해치려는 사람들의 수중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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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5일 목요일

'공정'에 대한 오해

댓글 없음 : 작성자: iMagistrat 시간: 9/25/2025 10:41:00 오후 라벨: 공정 , 독서일기 , 성경 , 잡담
요즘 사람들이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슈는 ‘공정’입니다. 공정이라는 단어에는 폭넓은 의미가 담겨있지만, 지금의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공정의 개념은 추측건대 ‘내가 남보다 손해를 볼 수는 없다’인 것 같습니다. 여러 사람이 있는 조직인 경우, 내가 남보다 같은 값에 더 많은 일을 하거나 남이 누리는 걸 못 누리는 건 불공정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불만을 쉽게 상사나 직장에 돌리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직장에서의 일이란 각자 비슷한 정도씩의 부담을 지도록 역할분담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그게 완벽히 똑같을 수는 없는가 하면, 누구의 일인지 불분명한 일이 예기치 않게 생겨 누군가는 그걸 떠맡아주어야 하는 상황이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기여한 성과에 따라 차등적으로 부여되어야 하는 혜택들을 본래의 취지에 맞게 부여하는 게 난해한 경우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공정으로 인한 갈등을 만나면 일단 답답하고, 이를 해결하는 게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읽은 <청년복음>이라는 책(조광운 지음, 세움북스, 2025)에서, 이 문제에 대한 의외의 인사이트를 얻었습니다. 복음에 대해 해설하는 기독교 서적인데요, 부제는 <불안의 시대, 복음이 말하는 7가지 청년 설루션>입니다.  
이 책 제7장 "공정과 복음"에서는 마태복음 20장 말씀을 갖고 우리가 흔히 '공정'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를 짚어줍니다(179면 이하). 먼저 마태복음 20장 말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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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2 그 주인은 하루 품삯으로 1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3 오전 9시쯤 돼 그가 나가 보니 시장에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4 그는 그들에게 ‘너희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라고 했다.

5 그래서 그들도 포도원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은 12시와 오후 3시쯤에도 다시 나가 또 그렇게 했다.

6 그리고 오후 5시쯤 다시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며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왜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서 빈둥거리고 있느냐?’ 하고 물었다.

7 그들은 ‘아무도 일자리를 주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주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내 포도원에 와서 일하라.’

8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이 관리인에게 말했다. ‘일꾼들을 불러 품삯을 지불하여라. 맨 나중에 고용된 사람부터 시작해서 맨 처음 고용된 사람까지 그 순서대로 주어라.’

9 오후 5시에 고용된 일꾼들이 와서 각각 1데나리온씩 받았다.

10 맨 처음 고용된 일꾼들이 와서는 자기들이 더 많이 받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각 사람이 똑같이 1데나리온씩 받았다.

11 그들은 품삯을 받고 포도원 주인을 향해 불평했다.

12 ‘나중에 고용된 일꾼들은 고작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고되게 일한 우리와 똑같은 일당을 주시다니요?’

13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일꾼 중 하나에게 대답했다. ‘여보게 친구, 나는 자네에게 잘못한 것이 없네. 자네가 처음에 1데나리온을 받고 일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14 그러니 자네 일당이나 받아 가게. 나중에 온 일꾼에게 자네와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네.

15 내가 내 것을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내가 선한 것이 자네 눈에 거슬리는가?’

16 이처럼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되고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될 것이다.”

(마태복음 20:1~16, 우리말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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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특이한 예화입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딸랑 1시간만 일한 사람이나 모두 동일한 일당을 준다니요. 동일노동에 동일임금 아닌가요. 그야말로 불공정하기 짝이 없는 처사인데, 포도원 주인은 그걸 공정하고 선하다고 우기고나 있고 말이죠. 
<청년복음> 저자는 이 이야기가 불공정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합니다. 불공정하지 않은데 우리가 착각하고 오해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다만, 저자의 의견에 제 생각을 살짝 보태 표현을 다소 달리하였습니다). 

1. 저 상황은 얼핏 보면 불공정해 보일 수 있는 상황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다른 차원의 공정함과 지혜가 담겨있을 수 있으니 우리가 세상의 관점으로 쉽게 불공정하다고 속단하거나 분노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무언지 잘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2. 이 주인은 잘못한 게 없습니다. 사실 자신이 한 약속을 다 지켰기 때문이에요. 더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에게 당초 주기로 한 일당을 다 주었거든요. 근데도 이 먼저 와 일한 사람들은 분노합니다. 왜냐, 당초 자신들이 받기로 한대로 1데나리온의 일당을 다 받긴 했지만 늦게 와서 고작 1시간만 일한 사람도 1데나리온을 받는 걸 보고는 자신들도 1데나리온은 넘게 일당을 받으리라는 기대가 생기게 됐고, 다른 말로 하면 욕심이 생겼거든요. 
즉, 문제의 본질은 자신의 욕심인데, 그걸 남한테 불공정이라는 탓을 하고 화살을 돌리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합니다. 

3. 이렇게 먼저 온 사람들은 불공정한 처사를 당했다고 억울해하지만, 맨 마지막에 온 사람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자신이 이 불공정한 세상에서 피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 나이가 젊거나 신체적 능력이 낫거나 등의 무언가 우월한 조건이 있기 때문에 일찍 고용된 것일 거거든요. 이런 '조건'을 갖췄느냐 아니냐만으로도 출발점이 달라 불공정을 논할 수 있는 것이잖아요. 
우월한 조건이 있어 쉽게 일자리를 얻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이미 받고 있는 혜택에는 눈감은 채, 자신들이 받지 못한 혜택에 대해서만 분노하는 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4. 인간 세상의 공정과 하나님 나라의 공정은 그 원리가 다르다고 합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공정이 성과주의와 능력주의에 기반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공정은 은혜, 자비, 사랑에 기반합니다. 
위 15절에서 "선한 것"이라고 한 부분은 "관대함"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 당시 한 가족이 하루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최저생계비가 1데나리온이었다고 하는데요, 그러니 주인 입장에서는 냉혈한이 아닌 다음에야 비록 딸랑 1시간만 일한 사람이지만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일당을 줄 순 없었던 겁니다. 은혜, 자비, 사랑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죠. 
이런 관대한 조치가 먼저 온 사람들 입장에서야 물론 억울하고 분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은혜, 자비, 사랑이라는 차원에서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최저생계비 정도는 주자는 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작동원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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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19일 토요일

[독서일기] 구글의 아침은 자유가 시작된다

댓글 없음 : 작성자: iMagistrat 시간: 7/19/2025 04:53:00 오후 라벨: 공감 , 구글 , 독서일기 , 인사 , 직장 , IT

[독서일기] 레이블의 글은 정말 오랜만에 써봅니다. 읽은 책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는 게 퍽 귀찮은 일이라 한참동안 손을 놓고 있었는데, 얼마 전 좋은 책을 읽게 돼서 그 좋은 내용들을 까먹지 않기 위해 간단히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2021년 알에이치코리아에서 나온 "구글의 아침은 자유가 시작된다"라는 책입니다. 구글의 People Operation 부서 최고책임자인 라즐로 복 Laszlo Bock이 구글에서 성공적으로 시행했던 조직관리 정책들을 소개합니다. 

저는 지금 조직관리 업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 한때 조직관리 업무를 해본 입장에서 공감가는 내용들이 참 많았습니다. 제가 특히 공감했고 다른 분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은 내용들을 적절히 요약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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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78면] 구글에서는 정기적으로 전체 사내 미팅을 한다는 게 유명하죠. 이 책에 의하면 매주 금요일마다 사내 카페에서 전 직원이 모여 TGIF 미팅을 한다고 합니다. 구글 CEO들이 직원들을 대상으로 지난주에 진행된 일들을 업데이트하고 제품 시연회를 열고 신입직원 환영식을 하기도 하고, 전 직원이 온라인으로도 이 장면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행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모든 직원이 현재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30분간 있는 질의응답 시간이라고 합니다. 무슨 주제로든 질의를 할 수 있구요. 여기서 제기될 질문의 선택은 행아웃온에어 Q&A를 통해 투명하게 진행되는데, 직원들이 여기에 질문을 제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질문들을 놓고 토론을 벌이거나 투표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질문 선정 방식은 직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여러 질문의 순위를 매기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툴을 이용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질문을 선정해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 게 효율적이고 의미있는 행사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9면] 구글은 직원 채용에 긴 시간과 많은 비용을 들인다고 합니다. 회사가 필요로 하는 직원을 충분히 잘 뽑으면 이 직원에게 교육훈련 비용을 그만큼 덜 들여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20면] 입사지원자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자질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함과 성실함이라고 합니다. 


[240-241면] "크게 기대하면 크게 얻는다", 의사 결정은 될 수 있으면 조직 위계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합니다. 간부임에도 자신의 지위를 상징하는 이런저런 장치를 포기하는 행위 자체가 부하직원들의 의견을 소중하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라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에 맞춰 살아가는데, 내가 기대하는 수준이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거기에 맞춰 행동한다고 합니다. 동기 부여에도 영향을 미치구요.


[275-276면] 내재적인 본질적 동기 부여는 한 개인이 성장하는 데 관건이 되는 요소인데, 전통적인 방식의 성과 관리 제도는 이 동기 부여를 파괴한다고 합니다. 

전통적인 도제 방식은 이런 내재적인 동기 부여를 토대로 하는데, 미숙련 노동자는 전문기술을 갖춘 사람이 옆에서 가르쳐주길 바라고 또 이런 조건이 갖춰질 때 최대한 배우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승진이나 연봉 인상 약속과 같은 외재적인 동기 부여가 도입되면 학습 의지와 능력은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389면] 매우 뛰어난 성과를 내는 최고의 인재는 승진 제도나 급여 제도의 벽에 부딛쳐 자신이 창출하는 가치에 걸맞은 보상을 받기 힘듭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선택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자신에 대해 독점적인 지위에 있는 회사 내부시장을 떠나 자유시장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지금까지 몸담았던 회사를 떠나 나의 실제 가치를 바탕으로 협상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회사는 왜 최고의 인재가 떠나게 하는 것이냐 하면, '공정함'이라는 개념을 잘못 해석하기 때문이며 직원들에게 이를 정직하게 말할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보상의 공정함이란, 동일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동일한 보상 또는 약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수준의 보상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합니다.

즉, 공정성은 개인이 기여한 몫과 개인이 받는 보상 수준이 적절하게 일치할 때를 말하는데, 이는 개인별로 당연히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406-408면] 구글은 어떠한 성과에 대해 보상하는 방식을 금전적인 차원에서 경험적인 차원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현금 보상은 그 액수를 현재 자신의 봉급과 비교하거나 이 돈으로 무엇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식으로 평가되고, 대개는 흥청망청 소비되기보다는 생필품을 사는 데 쓰입니다. 반면, 현금이 아닌 보상, 즉 상품은 정서적인 반응을 일으키는데, 상품을 받은 그 사람은 가치를 계산한다기보다는 자신이 누리게 될 특별한 경험에 초점을 맞춘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상품보다는 현금을 선호한다는 답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당장 자신에게 필요없는 상품을 받는 것보다는, 현금을 받아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데 쓸 수 있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재미있는 건, 구글이 실험을 해보니 사람들은 분명 상품보다는 현금을 선호한다고 했음에도, 상품을 받은 사람들이 더 재미있고 더 기억에 남고 회사가 더 사려 깊다고 생각했다는 응답을 하더라는 겁니다. 특별한 경험을 상으로 받은 사람들이 현금을 받은 사람들에 비해 한층 더 오랜 기간 행복한 상태에 젖어있었다고 하구요. 돈이 가져다주는 기쁨은 금방 사라지지만 기억은 영원히 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427-429면] 구글은 직원이 회사 내에서 효율적으로 일하기를 바라고 개인 생활에서도 효율적이기를 바랍니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집에 돌아가 끝없는 집안일에 또 시달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직원들의 이런 고충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생활을 한층 편리하게 해주는 현장 서비스를 회사에 도입했다고 합니다. 이를 테면, 현금자동입출금, 세탁이나 드라이클리닝, 세차 및 엔진오일 교환, 자전거 수리, 신선한 유기농산물과 육류 배달, 휴일 장터, 이동 미용실, 이동 도서관 등의 서비스입니다.

그런데 이런 서비스를 위해 구글이 따로 지불하는 돈은 없고, 구글은 단지 업자들이 이런 서비스를 회사 안에서 제공하기를 원할 경우 허락만 하면 될 뿐입니다. 필요한 직원들이 직접 나서서 이런 업자들을 유치하기도 하고, 회사가 비용을 일부 지불하는 서비스도 있지만 큰 돈이 들어가진 않거나 구글의 전체 지출 규모에 비해 큰 부담이 아니라고 합니다. 비용은 적게 들면서도 이런 서비스들이 직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구요.


[437-439면] 구글에는 층마다 마이크로키친이 있다고 합니다. 커피나 과일, 과자 따위를 꺼내 먹으며 잠시 느긋하게 쉴 공간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직장들로 치면 탕비실 같은 것인가 봅니다. 창업자 세르게이는 "어떤 사람도 음식에서 60미터 넘게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고 하네요.

이런 공간을 둔 목적은 스타벅스 창업자 하워드 슐츠가 시도했듯, 사람들에게는 집과 사무실 이외의 '제3의 장소', 즉 느긋하게 쉬면서 다른 사람과 어울릴 공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공간을 대개 서로 다른 사업부나 팀이 접하는 경계선에 마련해 서로 다른 부서에 속한 직원들이 한자리에서 어울릴 수 있게 하고, 그럼으로써 자기 부서 안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발상을 떠올릴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한 부서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대개 비슷한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창의성은 떨어져가기 때문입니다. 


[468면] 이 책에서도 '넛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넛지는 "사람의 행동을, 어떤 선택권을 금지하거나 경제적 동기 부여를 크게 바꾸지 않은 채, 예측 가능한 어떤 방식으로 수정하는 선택 구조의 한 측면이다. ...... 단순한 넛지가 되려면 개입은 반드시 손쉽고 비용이 적게 들어야 한다. 넛지는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다. 예컨대 과일을 눈에 잘 띄는 것에 두는 것은 넛지지만, 정크푸드를 금지하는 것은 넛지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즉, 넛지는 선택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하지, 선택 자체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522-525면] 구글의 한 직원이 경영진의 사내 식사 제공에 관한 어떠한 방침을 비난한 일이 있었고, 또 어떤 직원들은 회사의 시설을 부당하게 이용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새롭게 제공되는 것에 대해 시간이 지나면 고맙고 신나고 멋진 것이라기보다는 당연한 것으로, 특권이나 마땅히 받아야 할 혜택으로 여기고, 기대수준은 점점 높아지고 만족도는 떨어지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회사가 사내 복지 개념으로 도입한 제도들을 고맙게 여기기보다는, 자신의 특권이라 여기고 쉽게 불평불만을 표출한 일이 생겼던 것입니다. 

경영자 입장에서는 전체 직원들에게 이러한 사례들을 공지하고 이 제도의 도입취지나 방침을 다시 환기시키는 식의 대처가 필요할 상황일 것입니다. 구글에서는 이런 일도 TGIF 미팅 시간을 활용해 전 직원들에게 알렸고, 이러한 사례들을 알지 못했던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등 여론을 주도하였고, 이런 과정을 통해 직원들의 도덕관이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는 유익이 이런 데 있겠군요.

특권적인 혜택에 익숙해지려는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애초에 어떤 제도를 시행하면서 설정했던 목적의 유효성이 소멸했을 때는 이 프로그램을 과감하게 폐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551-552면] "일에 의미를 부여하라". 직장에서의 일은 우리 인생에서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것 같은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이 있는데요, 저자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로 혜택을 입을 사람과 아주 조금만 연결되어 있어도 된다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내가 하는 일은 누군가에게 중요한 편익을 제공하는 일이고, 이런 사실을 앎으로써 일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일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고 합니다.


[552-553면] "사람을 믿어라". 직원이 사장처럼 행동하는 게 우리가 직원들에게 바라는 것의 핵심인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은,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권위 중 일정 부분을 직원에게 나눠주고 직원이 그 권위 혹은 권한을 통해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합니다.   


[554면]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을 채용하라".


[555면] "역량 개발과 성과 관리를 혼동하지 마라".


[557면] "최고의 직원과 최악의 직원에게 집중하라".


[558면] "인색하면서도 동시에 관대하라".


[560면] "차동하게 보상하라".


[563면] "점점 커지는 기대를 관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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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1일 일요일

[독서일기] 르네상스의 갈림길 - 배심재판과 조서재판

댓글 없음 : 작성자: iMagistrat 시간: 8/21/2022 05:26:00 오후 라벨: 검사 , 독서일기 , 미국 , 배심재판 , 배심제 , 사법제도 , 조서 , 프랑스 사법제도 , 형사소송

『르네상스의 갈림길 - 배심재판과 조서재판』, John H. Langbein 저 / 김희균 역, 한국형사정책연구원, 2012.

이미 절판된 책이지만 '국가정책연구포털' 사이트(https://www.nkis.re.kr:4445)에서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의 번역자이자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계신 김희균 교수님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프랑스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형사법을 공부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십니다. 형사법에 대해 엄청난 내공을 갖고 계시면서 글을 참 알기 쉽고 재밌게 쓰시는, 대단하고 존경스런 분입니다. 교수님이 쓰신 여러 학술논문들 중 특히 "CCTV를 본 증인의 진술의 증거능력"(서울법학 제20권 제1호, 서울시립대학교, 2012)이라는 논문은, 그 어려운 전문증거의 개념을 쉽고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주는 불후의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 『르네상스의 갈림길 - 배심재판과 조서재판』은 16세기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 각각 벌어진 형사법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원 제목은 『Prosecuting Crimes in the Renaissance』. 한참 전에 있었던 남의 나라 얘기, 사실 많이 지루하고 재미도 없습니다. 책 자체보다는 김 교수님이 쓰신 '역자 서문'이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교수님 유학생활의 애환도 들을 수 있고, 무엇보다 전문법칙과 크로포드 판결이 뭔지 쉽게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역자 서문만 읽어도 본전 뽑는 거라 생각합니다. 너무 좋은 글이기에 이 블로그에 찬찬히 정리해놓고 싶어 오랜만에 독서일기를 적어봅니다. 

마지막 약간의 인사말 부분만 빼고 다소 길지만 역자 서문의 대부분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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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Crawford v. Washington 이라는 판례에 각주로 소개된 책이다. 보통 외국 판례를 읽을 때 각주까지 부릅뜨고 읽을 일이 거의 없지만 아주 개인적인 이유로 나는 그런 무모한 짓을 하고 말았다. 


2004년 여름 박사학위 논문을 다 마치고, 귀국해서 무얼 할까 궁리하고 있었다. 미국에 가서는 절대 전공하지 말라는 전문법칙으로 논문을 거의 다 쓴 터라 그 다음 일이 걱정이었다. 그러던 차에 A 대학 공채에 서류를 냈고 총장 면접까지 무사히 올라갔으며, 나름대로 잘 치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니, 9월이었다. 학위논문 완성본만 있으면 얼른 고국으로 돌아가야지, 그런 생각에 적잖이 들떠 있었다. 마지막 구두심사를 하는 날 제일 비싼 커피를 열 잔씩이나 갖다 놓고 교수님들을 기다렸다. 전문법칙과 그 예외이론은 건드리기만 해도 다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Ohio v. Roberts 라는 1980년 판결에 대해서는 여러 층으로 분석을 끝낸 상태였다. 그런데 그날 심사에 들어오신 미국 교수 3명은 Roberts에 대해서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Crawford만 물어 봤다. 그런 판결이 금년 봄에 나왔다는 것쯤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뭐? 그게 어쨌다고? 그게 Roberts를 엎기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아니, 24년 동안 멀쩡하던 판결이 왜 하필 지금 뒤집혀? 나는 열심히 대답했지만 교수들은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끝자리에 앉아 있던 지도교수는 별다른 도움은 주지 않고 창문만 힐끔힐끔 쳐다봤다. 나만큼이나 곤란해 보였다. 나는 얼굴이 점점 노래져 갔다. 심사가 끝나고 지도교수가 아주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고치는 데 1년까지 걸리지는 않을 거야.” 

서울 갈 짐을 싸고 있는 아내한테 뭐라고 말해야 하지... 

지도교수 말을 듣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2004년 3월에 나온 Crawford는 1980년 Roberts를 뒤집었다. Roberts를 근거로 썼던 책들은 다시 써야 할 처지가 됐다. 도대체 Crawford가 뭐길래 24년 간 요지부동이던 Roberts를 엎은 것일까. A 대학 교수로 가는 길이 막혀 버린 나는 그해 가을 눈을 부릅뜨고 Crawford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재판에는 원래 증인이 나와야 한다. 증인은 안 나오고 증인이 한 말을 들어서 다른 사람이 전하는(이걸 ‘전문’이라고 한다) 경우, 그 전하는 사람의 진술을 전문증거라고 한다. 전문증거는 증거능력이 없다. 왜? 반대신문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신문을 해야 약점을 노출시켜서 신용성을 높일 수 있는데, 그걸 못하니까 증거능력이 없다. 이게 전문법칙이다. 그렇다면 굳이 반대신문 하지 않아도 충분히 믿을 만한 진술은 어떻게 하나? 가령 증인이 재판 전에 죽어가면서 한 진술, “이제 죽으면서 하는 말이지만, 그 피고인이 스미스 부인을 죽이는 걸 내가 봤어” 이런 진술, 이런 건 반대신문을 하지 않아도 증거능력이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왜? 충분히 믿을 만하니까 말이다. 이런 진술을 우리는 전문법칙의 예외라고 한다. 반대신문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믿을 만한 불출석 증인의 진술은 예외적으로 증거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자. 범행 현장에서 피고인의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 그 머리카락에서 DNA를 추출한 결과 피고인 것이다, 라는 사실을 알아낸 사람이 과학수사담당관이자 증인인 W다. W는 그런 취지로 감정서를 썼다. 감정서에는 “현장에서 발견한 머리카락은 피고인의 것이다” 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그 감정서를 썼다는 W는 이미 퇴직해서 이민을 갔고, 그가 쓴 감정서만 증거로 제출됐다. 그러면 감정서는 전문증거가 된다. W가 직접 말하는 게 아니라 서류에 담겨서 법정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증거능력이 있는가? 있다. 왜? 전문법칙의 예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감정서 같은 공신력 있는 분석기관의 문서는 증거능력이 있다는 예외가 우리 법 제314조에도 있고, 미국연방증거규칙 제803조(8)에도 있다. 이런 조항들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DNA 분석 결과를 낼 때 직접 쓴 사람을 대기시켜야 한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쉬운 일은 절대로 아니다. 

전문법칙의 예외 이론은 수사기관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다. 증인을 직접 내지 않고도 증인의 진술을 제3자나 서면을 통해서, 혹은 비디오테이프를 통해서, 녹음테이프를 통해서 법정에 내고 그걸로 유죄판결을 받을 수 있는 유용한 장치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전부 증거법이고, 헌법 상 문제가 남아 있다. 미연방헌법 수정 제6조는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자를 피고인이 대면할 수 있는 권리, 즉, 대면권(right of confrontation)을 규정하고 있다. 우리 예로 바꿔 설명하면 피고인이 W를 대면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게 보장되지 않으면 헌법 위반이라고 한다. 만약 이 대면권 조항을 곧이곧대로 적용하면 모든 전문법칙의 예외 조항은 다 위헌이 된다. 왜? 대면을 시켜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내 앞에 데리고 와라. 내 앞에서 말하게 하라. 그러면 내가 기꺼이 죽겠다”는 1603년 영국의 장군 Walter Raleigh의 외침이 있었고, 그게 대면권이 되었으며, 미국 헌법 수정 제6조에 등기되어 있다. 

미국은 200년 동안 이 문제를 두고 골머리를 앓았다. 전문증거를 쓰기는 써야겠는데, 그러자면 헌법 위반이 된다. 대면이 옳은 것은 안다. 대면? 좋다. 하지만 어떻게 일일이 증인을 다 법정에 데려오는가 말이다. 이런 논쟁이 200년 동안 계속되다가 1980년 Roberts에서 매듭을 짓는다. “신용성이 있어서 예외적으로 증거능력이 인정되는 경우, 헌법 상 대면권도 보장한 것이 된다” 라고 연방대법원이 설시한 것이다. 즉, 피고인에게 증인의 얼굴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증인의 진술이 일단 신용성 심사를 받았고, 그걸 통과했으면 별 문제가 안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DNA 분석결과보고서와 같은 중요한 증거가 법정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당연히 나도 이 판결을 기초로 전문법칙을 썼고, 그 예외 이론을 썼고, 그간의 논의를 썼고, 결론을 내렸다. 전문법칙의 예외 규정을 맞추면 대면권도 보장된 걸로 친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Crawford가 이를 뒤집은 것이다. 어떻게 뒤집었겠는가. 짐작하시는 그대로다. 

“전문법칙이고 예외고 우리는 그런 거 모른다. 불리한 증인은 얼굴을 보여 줘라.” 라고 말이다. 

이로써 내가 쓴 논문은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1999년 여름 크로포드는 Lee라는 자가 자기 부인을 강간하려고 했다는 얘기를 듣고 펄쩍 뛰었다. 여러 바를 전전하면서 ‘Lee, 어디 있어? 알아?’ 라고 수소문을 하고 다녔다. 크로포드 부인은 보다 못해 크로포드를 Lee의 아파트로 안내했다. 그런데 주소를 잘못 알아서 다른 집을 눌렀는데도 Lee가 우연히 자기 집 문을 열었다. 크로포드와 부인은 Lee의 집으로 들어갔고, 크로포드와 Lee 사이에 말다툼이 있었으며, 크로포드가 Lee를 칼로 찔러 상해를 입혔다. 이게 사건의 전말이다. 

크로포드와 부인은 수차례 경찰 조사를 받았다. 두 사람이 말하는 바가 대부분 일치했다. 그런데 한 군데서 진술이 달랐다. 논점은, ‘크로포드가 칼을 들고 달려들 당시에 Lee가 칼을 들고 있었느냐?’로 모아졌다. 크로포드는 이 대목에서 그렇다, 고 대답했다. 즉, 상해한 것은 맞지만 정당방위라는 것이다. 반면에 부인의 진술은 약간 달랐다. 남편이 칼로 찌를 때 Lee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는데, 나중에 손을 꺼낼 때 보니까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부인의 진술에 따르면 크로포드는 정당방위를 한 게 아니라, 무기도 없는 자를 찌른 게 된다. 경찰이 부인의 진술을 그대로 녹음했고, 크로포드에게는 위험한 한 방(?)이 될 수 있는 증거였다. 

크로포드는 재판에서 ‘부부 간 증언거부권’을 행사한다. 즉, 부부는 다른 일방의 형사사건에서 진술할 수 없다, 는 워싱턴 주법 조항을 원용한 것이다. 그래서 부인은 법정에 나올 수 없었고, 대신 녹음테이프만 나왔다. 전문증거만 나온 것이다. 피고인 측 변호사는 바로 손을 들었다. 

“전문증거라서 증거능력이 없습니다.”

그러자 검사가 반박했다. 

“전문증거인 것은 맞지만, 이 테이프는 예외에 해당해서 증거능력이 있습니다.” 

“무슨 예외?” 

“증인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로서 전문법칙의 예외에 속합니다.” 

크로포드 사건에서 가장 신비로운 인물이 바로 부인이다. 부인은 자기 남편에게 무슨 애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편 성질을 뻔히 알면서도 남편을 Lee의 아파트로 인도한 것이다. 번지수는 약간 틀렸지만, 그래도 마침 Lee가 기어 나오는 바람에 사단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부인은 나중에라도 남편 편을 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심지어 잘 못 봤더라도 ‘저를 강간하려 했던 그 Lee라는 자가 손에 칼을 들고 있었어요. 그래서 남편이 별 수 없이 칼로 찔렀어요, 우리 남편이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닌데, 흑흑.’ 이렇게 흘러갔어야 맞다. 그런데 반대로 진실을 말해 버렸다. ‘저쪽은 칼도 들고 있지 않았는데, 남편이 칼로 찔렀어요’ 라고 말이다. 과연 이 진술은 믿을 만한가. 

크로포드 부인이 이상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 진술은 전문법칙의 예외 이론에 의하면 믿을 만하다. 왜? 크로포드 부인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미연방증거규칙 제804조(b)(3)에 나오는 얘기다. 부인의 진술대로라면 부인 자신도 상해죄의 공범이 된다. 정범인 남편을 Lee에게 안내한 사람이 바로 부인이기 때문이다. 부인은 상해죄의 방조범이다. 그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피해자 손에 칼이 없었다고 진술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믿을 만하다고 보아야 한다. 이게 제804조(b)(3)의 취지다. 

다시 공판으로 돌아와 보자. 

검사가 대답한다. 

“증인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로서 전문법칙의 예외에 속합니다.” 

판사는 검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부인은 못 나왔지만 자기 자신한테 불리한 내용인데도 경찰한테 말한 걸로 봐서 부인의 진술은 믿을 만하지. 증거로 받아도 되겠어.’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결과 크로포드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크로포드의 변호사는 이 대목에서 큰 판을 벌이기로 작심한다. 부인의 얼굴을 보여주지도 않고, 부인의 진술을 증거로 쓰는 것은 헌법 위반이잖아, 워싱턴으로 가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크로포드 사건은 연방대법원으로 갔고, 다음과 같은 판결을 얻어 냈다. 

“전문법칙이 중요한 게 아니라 헌법이 중요하다. 헌법 상 크로포드에게는 불리한 증인에 대한 대면권이 있다. 그런데 부인을 대면시켜 주지 않았으므로, 부인의 진술은 증거로 쓸 수 없다.” 

크로포드는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되었다. 


사실 연방대법원은 크로포드를 구제해 주는 게 아니었다. 왜? 크로포드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 아니다. 지금 이 사건에서 경찰이 부인을 증인으로 못 나오게 한 게 아니다. 불리한 증인인 부인을 경찰이 어디로 빼돌린 게 아니다. 크로포드 본인이 못 나오게 했다. 그래 놓고서는 ‘내 부인을 데려와라!!! 내 앞에 와서 얘기하게 해라!!!’ 이렇게 말하는 건 생떼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방대법원은 크로포드의 손을 들어줬다. 왜 그랬을까? 

연방대법원은 그만큼 진실 발견의 장으로서 법정을 중시한다. 진실은 법정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판사는 난데, 왜 경찰인 당신이 진술을 받아?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니, 판사님, 제가 증인을 못 나오게 한 게 아닌데요, 피고인이 못 나오게 한 건데요?’ 

‘그건 그거고. 어쨌든 증인이 못 나왔잖아? 그런데 왜 증인 진술이 증거로 나와? 당신들이 녹음한 거 아냐? 그런 거 하지 말란 말이야. 당신이 판사야, 내가 판사지? 뭐든 내 앞에서, 피고인 보는 앞에서 얘기하란 말이야. 왜 자꾸 테이프니 문서니 이딴 데 적어서 증거로 내밀어? 그건 우리 재판이 아니야. 우리가 무슨 대륙법이야?’ 

그렇다. 중요한 건 여기다. 연방대법원이 무슨 말을 길게 하든, 무슨 이유를 덕지 덕지 붙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연방대법원 판사들 속에 있는 확신이다. 무엇일까? 바로 미국법은 대륙법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사실 크로포드 판결의 나머지 구절들은 전부 그야말로 사족이다. 모두 들러리다. 연방대법원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단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대면권을 강조하는 이유는) 대륙법에서처럼 증인을 신문해서 공판 전에 진술을 받아내고 그걸 법정에 증거로 내는 일을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preventing the government from using hearsay statements at trial if the statements were obtained through a method that resembles a civil-law mode of interrogation)(Crawford, 541 U.S. at 51-52) 

연방대법원이 대면권을 강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륙법 방식으로 하지 말라는 얘기다. 경찰이 뭘 적었다가 증거로 내는 것? 그게 대륙법이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 식이 있다. 그게 바로 증인을 데려오는 것이다. 이게 연방대법원이 하고 싶은 말이다. 


이에 대해 누군가 반론을 제기한다. 

‘잠깐만요, 판사님. 우리도 예전에 공판 전에 진술을 받아서 증거로 낸 적이 있습니다.’ 

‘뭐?’ 

‘판사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대륙법적인 예심절차를 도입한 적이 있다고요. 르네상스 시댄데요, 왜 그때는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 전부 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뭐? 우리가 조서재판을 했다고?’ 

연방대법원은 깜짝 놀란다. 그래서 부랴부랴 르네상스 시대 법제사 책을 뒤진다. ‘우리가 대륙식으로 조서재판을 했다니!’ 혀를 끌끌 차면서 연구원들을 동원해서 사료를 뒤진 것이다. 그 결과 발견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비로소 연방대법원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거 봐. 아니잖아. 우리가 한 건 조서재판과는 차원이 다르대잖아.’ 

연방대법원은 의기양양했다. 그래서 아예 각주로 달아 세상에 공표하는 것이다. 


‘이상은 J.H. Langbein, 『Prosecuting Crimes in the Renaissance』 참조’ 라고 말이다. 

나는 그 각주에 나온 책을 대출해서 읽어 보았다. 

그게 이 책을 번역한 계기다. 


그런데 연방대법원이 한 가지 틀린 점이 있다. 

이 책은 앞부분에서 

“영국에서도 한 때 문서로 공판 전에 증인의 진술을 적었지만 그걸 그대로 증거로 쓰지는 않았고, 오히려 공판정에 증인을 불러서 구두로 진술하게 하는 방식을 썼다” 

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건 맞다. 연방대법원이 읽고 싶어하는 바 그대로다. 하지만 문제는 연방대법원 혹은 그 소속 연구원들은 여기까지만 읽고 덮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면, 그 다음에는 더 엄청난 사실이 나오는데, 그게 더 중요하다. 저자는 연방대법원이 이름만 듣고도 몸서리쳐 하는 그 고약한 대륙법이 사실은 나쁜 법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적과 선을 긋다가 엉뚱하게 적을 추켜세우기에 이르는 것이다. 

독자들도 들어 봤을 것이다. 캐롤리나라고. 캐롤리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알 5세가 만들어 반포한 16세기 형법 및 형사소송법이다. 

보통 교과서에는 그게 악법으로 나온다. 규문절차의 금자탑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다. 고문과 자백을 중시하는 법은 맞지만 악법은 아니란다. 합리적인 법이고, 개혁법이란다. 19세기까지 독일 법학자들의 사랑을 받던 법이고, 자랑스러워 하던 법이란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연방대법원이 경멸해 마지않던 그 대륙식이라는 것이 사실은 미개하고 잔인한 제도가 아닐 수 있다. 아니,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 대륙에서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재판을 했다.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다. 미연방대법원 판사들이 짐작하는 것처럼 르네상스의 갈림길에서 영국은 천국으로 가고 독일이나 프랑스는 지옥으로 간 게 아니다. 

나는 책을 덮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게 내가 이 책을 번역하고자 마음먹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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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균 교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미국 유학 시절 전문법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준비하다 크로포드 판결 때문에 국내 취업이 좌절되고 유학생활이 연장되는 곤혹스런 상황을 맞이합니다. 크로포드 판결은 미국법이 대륙법과 다르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획기적인 판결이라고 소개합니다. 미국법과 대륙법이 뭐가 그렇게 다르기에 연방대법원은 이런 판결을 만들어낸 걸까요? 

영미법의 사법제도는 배심원에 의한 재판을 전제로 한 제도이고, 대륙법의 사법제도는 관료(직업법관)에 의한 재판을 전제로 한 제도입니다. 그로 인해 영미법은 수사기록이 없는 재판이, 대륙법은 수사기록 위주의 재판이 이루어집니다.  

영미법에서는, 법을 모르는 배심원들에게 복잡하고 알아듣기 힘든 전문용어들이 잔뜩 쓰여있는 수사기록을 재판하는 데 참고하라고 주는 건 의미없는 일입니다. 간혹 글을 못 읽는 배심원이 있을 수도 있구요. 그래서 재판에 수사기록이 나오지 않고, 증인들이 우르르 나옵니다. 재판이 이렇게 진행되니 수사기관도 굳이 수사기록을 만들지 않습... 아니, 안 만드는 건 아닙니다. 수사기록을 만들긴 만들고 그 중 일부가 재판에 나오긴 합니다만(크로포드 사건에서도 경찰이 크로포드 부인을 조사하면서 음성녹음물을 작성하였고 이게 재판에 증거로 등장했죠), 이는 어디까지나 단지 수사 자체를 위한 목적으로, 즉 수사진행 상황을 그때그때 기록해두는 게 주된 목적(혹시나 수사담당자가 변경될 수 있고, 미제 사건으로 남을 경우 언젠가 재개될 수사를 위해서도 수사기록 작성이 필요합니다)이지 재판에서 증거로 쓰려는 게 주된 목적은 아닙니다. 

이렇게 영미법 재판에서는 수사기록이 없는 대신 증인들이 직접 법정에 나와 증언하고 배심원들은 이 말들을 듣고 재판을 합니다. 다만, 필요한 증인이 재판에 다 못 나오는 경우가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때는 크로포드 부인의 음성녹음물처럼 증인 대신 수사기록이 증거로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수사기록은 간혹 신용성이 없어 증거가치가 극히 적은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증거를 배심원에게 바로 주면 법을 모르는 배심원들이 그 증거가치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속아서 엉뚱한 판단을 할 수 있기에, 이를 막고자 전문법칙이란 걸 만들어 증거가치가 적은 수사기록들을 걸러내고 배심원들에겐 소수의 양질의 증거만 제공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심재판에는 시간과 자원이 과도하게 소요되기 때문에 모든 사건의 재판을 배심재판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 미국에선 95% 이상의 형사사건이 플리바게닝 등 정식재판이 아닌 간이한 방법으로 종결되고, 극히 일부의 사건만 배심재판이나 직업법관의 재판으로 진행됩니다. 직업법관이 하는 재판의 경우에도 기본적인 재판모델이 배심재판이기 때문에 배심재판에서의 원리가 대부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에 비해 대륙법에서는, 일찌감치 예심제도가 발달하였습니다. 법률전문가인 직업법관이 재판을 하지만, 직업법관이 아주 많지 않은 다음에야 모든 사건을 다 꼼꼼히 재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재판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재판절차 이전에 예심절차를 둡니다. 예심절차를 담당하는 예심판사 또는 (예심판사 제도가 없는 경우) 검사가 재판에 준하는 심리를 미리 해보고 재판을 할 만한 사건만 골라서 재판에 보냅니다. 예심판사나 검사도 자신이 모든 사건의 심리를 다 할 여력은 안 되어 경찰에게 조사를 위임하는 방법으로 예심을 진행합니다. 예심은 재판을 준비하는 절차이기 때문에 예심판사나 검사는 자신이 확인한 내용을 기록으로 만들어(경찰의 수사기록도 포함) 재판에 보냅니다. 이 기록은 재판에서 바로 증거로 쓰이기도 하고, 예심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심리를 하고 제대로 판단을 했는지를 재판법원 판사나 상급기관에게 알리고 심의를 받는 목적도 있기 때문에 비교적 꼼꼼한 내용과 방대한 분량으로 만들어집니다. 이 예심기록이 사실상의 수사기록인 거죠. 

재판을 하는 판사는 이렇게 꼼꼼하고 방대하게 만들어진 수사기록이 있으니 정작 재판은 간이한 방법으로 진행합니다. 이미 같은 사법관인 예심판사나 검사가 열심히 사건을 들여다보고 필요한 사실을 확인하고 재판에 보낸 것이기 때문에 재판을 하는 판사가 필요한 증인을 죄다 다시 재판에 부를 필요가 없는 겁니다. 즉, 수사기록은 각 서류들을 증거와 증거 아닌 것으로 분류할 필요도 없이 기록 통째로 증거로 활용되고, 이런 구조에서는 전문법칙도 필요가 없는 겁니다(다만, 대륙법에도 가급적이면 재판에서 너무 수사기록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말라는 원칙이 있고, 이를 '직접주의' 내지 '직접심리주의'라고 부릅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 영미법보다는 많은 사건이 정식재판에서 처리될 수 있습니다. 물론 프랑스와 독일에도 미국의 플리바게닝을 본딴 제도들이 존재하지만, 이를 통해 처리되는 사건은 미국 플리바게닝 사건에 비하면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편입니다. 

한편, 대륙법에도 배심재판과 닮은 참심재판 제도가 있습니다. 직업법관이 사실판단 과정에서 배제되어 있는 배심재판과 달리, 참심재판에는 직업법관도 일반인 참심원들과 함께 재판부를 구성해서 사실판단을 할 권한이 있습니다. 또, 직업법관은 수사기록도 미리 볼 수 있기 때문에 참심원들에게 직업법관이 갖고 있는 사건 관련 지식과 심증이 그대로 전달되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직업법관이 결론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더구나 만장일치로 평결을 하여야 하는 미국 배심재판과 달리, 대륙의 참심재판은 대개 다수결 평결 제도이기 때문에 직업법관의 판단과 크게 다른 결론이 나기 힘든 구조이기도 합니다. 

영미법이나 대륙법이나 각자의 나라에서 나름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역자 서문의 마지막 말처럼, 영미법과 대륙법 중 무엇이 더 낫고 무엇이 못하다 라는 우열관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대륙법을 그렇게 너무 무시하거나 미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륙법도 나름의 역사와 이유가 있어 지금의 제도를 갖고 있는 것이거든요. 16세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구요. 결국 각 나라마다 특유의 전통과 관습이 현재의 제도에 영향을 미친 것이고, 각 제도마다 각기 장단점을 다 갖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만 지고지선이라고 맹종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크로포드 판결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영미법 입장에서는 대륙법처럼 전문법칙도 없고 수사기록을 그대로 재판에 활용하는 제도는 참 미개하고 수준 낮은 제도라고 봅니다. 어떻게 판사가 사건관계인 진술도 안 들어보고 재판을 하느냐는 거죠. 그래서 전문법칙의 예외 영역이 자꾸 넓어지면서 점차 대륙법을 닮아가는 재판실무가 마음에 안 들어 헌법상의 대면권 규정을 들어 이러한 시류에 제동을 걸게 된 겁니다. 

그러면 크로포드 이후의 미국 전문법칙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까요? 김희균 교수님의 다른 논문 "형사증거법의 재조명II: 크로포드 이후 전문법칙의 미래"(형사법연구 제25권 제1호, 한국형사법학회, 2013)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요. 크로포드 판결에서 지적한 것처럼 모든 증인을 죄다 법정에 불러 피고인의 대면권을 보장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고 제도 운영상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결론입니다. 연방대법원은 이에 대한 우회방법으로, 크로포드 판결의 적용범위를 제한하는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즉, 피고인의 대면권을 보장하여야 하는 진술은 '증언으로서 가치를 가지는(testimonial) 진술”(증언적 진술)에 제한되고, 그렇지 않은 진술(비증언적 진술)에 대해서는 피고인 앞에 증인을 부르지 않아도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증언으로서 가치를 가지는 진술'의 의미에 대해 연방대법원은, 사건관계인이 장차 재판에서 진술할 것을 염두에 두고 국가기관 앞에서 행한 진술을 주로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크로포드 이후의 판례들은 이러한 진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2006년 Davis v. Washington 사건에서는 범행 당시 피해자의 911 신고전화 진술은 위급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 것이지 장차 증언으로 쓰일 것을 염두에 두고 한 진술이 아니므로 비증언적 진술이라고 보았고, 2006년 Hammond v. Indiana 사건에서는 가정폭력 사건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격리한 후 피해자로부터 작성받은 진술서는 피해자가 이미 위험한 상태에서 벗어난 이후의 진술이어서 장차 증언으로 쓰일 것을 예상한 진술이므로 증언적 진술이라고 보았습니다. 2009년 Melendez-Diaz v. Massachusetts 사건에서는 마약 딜러로부터 압수한 물건이 코카인이라는 감정서의 내용은 증언적 진술이므로 감정인이 법정에 나와야 증거능력이 있고, 2011년 Bryant v. Michigan 사건에서는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자신에 대한 총격 직후 경찰에게 말한 피해진술은 피해자를 기준으로 한다면 이미 범행 후의 진술이기는 하지만 아직 다른 사람들에 대한 총격의 위험은 남아 있는 상황이어서 이 역시 위급상황에서의 진술로 볼 수 있으므로 비증언적 진술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2012년 Williams v. Illinois 사건에서는 피해자의 질에서 채취한 정액의 DNA와 피고인의 DNA를 비교한 감정서 내용이 비증언적 진술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아직 진범이 특정되기 전에 범행현장에서 채취한 DNA와 여러 사람의 DNA를 비교한 결과에 불과할 뿐 특정인을 처벌할 목적으로 만들어 낸 증거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 책의 주제와 비슷한 내용으로 법제사에 관심이 있는 분에게는 김희균 교수님의 다른 번역서 『대륙법 전통 - 비교를 통해 알아보는 대륙법과 영미법』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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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6일 목요일

책 소개 : "Les voies de la Justice en Corée du Sud"

댓글 없음 : 작성자: iMagistrat 시간: 8/26/2021 11:57:00 오후 라벨: 독서일기 , 사법제도 , 프랑스
'Village de la Justice' 사이트에서 발견한 책 한 권을 소개합니다. 프랑스인이 쓴 한국에 관한 책입니다. 


저자 Christophe Duvert는 2007년부터 우리나라 숭실대 국제법무과에 재직 중인 프랑스인 교수입니다. 금년 3월에 "Les voies de la Justice en Corée du Sud"라는 제목의 책을 냈었네요. 제목을 직역하면 "한국에서의 정의의 길" 정도가 되겠습니다.

소개 글에 의하면, 저자는 한국의 법 제도와 정의 관념은 일본, 독일, 프랑스, 미국의 제도, 그리고 공자 사상의 결합물이라고 보면서(특히 서구 근대 제도보다 공자 사상 내지 유교 윤리에 더 기초를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네요) 이를 철학적, 역사적, 법적, 문화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서양의 학자가 우리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공자 사상', '유교 윤리'에 주목한다는 게 흥미롭군요. 

프랑스 L’atelier Des Cahiers 출판사에서 출간하였고, 가격은 32유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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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25일 수요일

[독서일기] 파기환송 (feat. 플리바기닝)

댓글 없음 : 작성자: iMagistrat 시간: 12/25/2019 12:15:00 오전 라벨: 검사 , 독서일기 , 마이클 코넬리 , 미국 , 미키 할러 , 법정소설 , 변호사 , 사법제도 , 수사 , 위선떨지 말자 , 플리바기닝 , 형사소송
이번에 소개하는 책은 마이클 코넬리의 미키 할러 변호사 시리즈 중 세 번째 작품, ‘파기환송(The Reversal)'입니다.



현재까지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된 미키 할러 변호사 시리즈는 모두 4권입니다. 저작 순서로는,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탄환의 심판', '파기환송', '다섯 번째 증인', 이렇게 됩니다. 마지막 작품인 'The Gods of Guilt'도 조만간 번역되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흥미로운 시리즈를 죽 읽어가면서, 저는 미국의 형사사법제도 중 특히 한 가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로 '플리바기닝(plea bargaining)'이라는 제도입니다.
앞서 '다섯 번째 증인' 편에서도 소개하였듯이, 우리말로는 유죄인정 합의, 유죄답변 거래, 유죄답변 협상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는 플리바기닝 절차는, 피의자나 피고인이 현재 자신이 받고 있는 혐의보다 가벼운 내용의 혐의를 인정하고 그 가벼운 혐의에 해당하는 처벌만 받기로 하고 정식재판 없이 사건을 종결시키는 검사와 피의자 또는 피고인 사이의 공적 계약을 말합니다.
미국에서 플리바기닝 제도를 도입한 취지는, 형사사건을 효율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사법자원을 절약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플리바기닝은 재판이 끝나기 전이라면 기소 전이든 재판 중이든 언제든 가능합니다. 다만, 수사 초기에 협상이 이루어진다면 검사 입장에선 수사와 재판에 들이는 수고를 대폭 절약할 수 있어 유리합니다. 만약 피고인이 끝까지 자신에게 죄가 없음을 주장해서 결국 정식재판인 배심재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면, 배심원 선정부터 시작해서 여러 날이 걸리는 이 재판절차를 위해 사법기관은 막대한 노력과 자원을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이죠.
같은 취지로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도 미국과 비슷하거나 다소 변형된 형태의 플리바기닝 제도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미키 할러 변호사 시리즈에는 플리바기닝이 아주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형사사건의 시작은 바로 플리바기닝을 할지 말지 여부에 대한 검사와 변호인의 머리싸움입니다. 보통은 전세가 불리한 편에서 먼저 플리바기닝을 시도합니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건에서 플리바기닝이 검토되고 있고, 실제로도 미국에서는 이 절차를 통해 90퍼센트 이상의 형사사건이 정식재판 없이 종결된다고 하는데, 이처럼 플리바기닝은 미국 형사사법절차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제도입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실체적 진실 발견과 정의 구현이 최고이념인 형사사법절차에서 죄와 벌을 놓고 '협상'이니 '거래'니 하는 단어를 입에 담는 것 자체에 대한 극심한 알레르기 반응이 존재합니다. 즉, '국민정서법'상 용납되기 매우 힘든 제도입니다. 단언컨대, 100년 안에는 우리나라에 이 제도가 도입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왜 이 제도가 그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이 작품을 통해 해답을 한번 찾아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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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03쪽]  형사재판소 건물 13층, 제124호 법정 옆에 있는 유치장에는 내 의뢰인 카시우스 클레이 몽고메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
......
"...... 그리고 우린 지금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잖아. 오늘 심리는 잠깐이면 끝날 거야. 그것도 아주 기분 좋게. 재판 날짜만 정하면 그걸로 끝이니까. 그렇지만 우리의 검사 헬먼 씨는 자기가 제안한 협상안이 오늘까지만 유효하다고 말한다는 거지. 만약 우리가 샴페인 판사에게 재판에 임할 준비가 됐다고 오늘 말한다면, 그 거래는 없던 일이 되고, 우리는 재판으로 가는 거야. 어때,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겠어?"

---> 할러 변호사가 법원에 가서 구속되어 있는 의뢰인을 만나고 있습니다. 검사가 제안한 플리바기닝 안에 대해 의뢰인의 의사를 물어보고 있네요. 좀 있다 바로 법정에 나가 판사 앞에 서야 하는데, 법정에 나가기 전에 검사가 제안한 안을 받아들이고 절차를 여기서 끝낼지 아니면 검사의 제안을 거부하고 판사에게 정식재판을 위한 날짜를 잡아달라고 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103-104쪽]  몽고메리가 철창 사이에 고개를 기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47살이고 살아오면서 이미 9년이라는 세월을 감방 안에서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무장 강도죄와 신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 폭행죄로 기소되어 나락으로 추락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몽고메리는 로디아 가든스 빈민 주택단지 내에 있는,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물건을 구할 수 있는 마약 시장을 찾아가 구매자 행세를 했다. 그렇지만 돈을 지불하는 대신 총을 빼들어 마약상이 가진 약과 현찰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러자 마약상이 그의 총을 빼앗으려 하다가 총이 발사되고 만 것이다. 갱단의 일원이기도 한 다넬 힉스라는 그 마약상은 현재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으며, 앞으로 남은 평생 동안 그 위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 의뢰인 몽고메리의 혐의는 마약을 빼앗기 위해 마약상을 총으로 쏘고 불구자로 만든 것이로군요. 마약은 해야겠는데, 돈이 없어서 총을 가지고 갔던 모양입니다.
경찰의 수사결과에 의하면, 의뢰인이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일부러 총을 쏜 건 아니고 총으로 피해자를 협박만 하고 있었는데 이 총을 빼앗으려는 피해자와 실랑이를 벌이다 우발적으로 총이 발사된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일부러 쏜 건 아니라도, 총으로 피해자를 위협함으로써 먼저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니 단순한 과실범은 아니고 그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겠습니다.


[104쪽]  빈민 주택단지가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그곳 주민들은 아무도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심지어 피해자조차도 자신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갱단 동료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해주리라 믿었기에 침묵 쪽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 됐건 경찰은 수사를 진행했다. 주택단지 입구에 설치된 비디오카메라를 판독해 내 의뢰인의 차량을 확인해서 숨겨둔 차량을 찾아냈고, 차량 문짝에서 피해자의 혈흔을 발견했다. 

---> 그럼 그와 같은 혐의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경찰과 검사가 현재까지 확보한 증거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증거는 피해자의 진술이 될 텐데, 피해자는 당시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당시 상황이 잘 기억나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스스로 마약을 판매한 범죄를 자인하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는 갱단의 일원입니다. 자칫 곧이곧대로 진술했다가 자신의 갱단에까지 피해를 입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입은 피해는 갱단 동료들이 보복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해줄 것이기 때문에 굳이 국가에서 제공하는 형사사법 서비스에 기댈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부류들에겐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깝고 편리한 것이죠. 혹시 피해자가 나중에 마음을 바꿔먹어 사실 그대로 말을 하게 되더라도, 이미 '진술의 일관성'에 흠이 생겨버린 상태여서 진실한 진술도 신빙성 없는 진술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무튼 피해자가 이 모양이니,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가 수사기관의 손에는 없는 겁니다.
다음으로, 범행이 발생할 무렵 범행장소 부근을 지나가는 몽고메리의 차가 촬영된 비디오카메라 영상, 그리고 몽고메리의 차에서 발견된 피해자의 혈흔이라는 두 개의 증거가 확보되어 있습니다. 몽고메리가 죄를 저질렀음을 추정할 수 있는 좋은 증거이지만, 이것만 가지고 몽고메리가 피해자를 총으로 쐈다는 사실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피해자가 제대로 말을 하지 않으면, 이를 틈타 몽고메리가 둘러댈 수 있는 변명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말을 하지 않으니, 그 사이를 연결할 뭔가 다른 증거가 더 필요합니다.


[104쪽]  그다지 강력한 증거는 아니었지만, 우리 쪽에서 검찰의 협상을 끌어내기에는 충분했다. 만약 몽고메리가 검찰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3년 형을 선고받고 대략 2년 6개월 정도 복역하면 풀려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도박하기로 결정해서 재판 마지막에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면, 최소한 15년은 꼼짝없이 감방에서 썩게 될 터였다. GBI(신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 폭행죄)와 강도행위 중에 무기를 사용했다는 혐의가 합해졌으니 거의 구원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나는 주디스 샴페인 판사가 총기 범죄에 전혀 관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증거가 뭔가 좀 더 있을 줄 알았더니, 그게 전부로군요. 현재까지의 증거만으로는 유죄판결을 받기에 부족합니다. 몽고메리 차에 묻은 피해자의 혈흔과 몽고메리가 피해자를 쏜 사실을 바로 연결할 연결고리가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겨우 이 상태에서 재판으로 가려면 검사의 입장에선 피해자의 입을 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피해자의 입을 열지 않으면 유죄판결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피해자가 계속해서 입을 닫고 있겠다면 큰 문제입니다. 사람의 입을, 그것도 피해자의 입을 강제로 열게 할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학수사'나 '물적 증거'와 같이 '사람'이 배제된 수사가 능사는 아닙니다. 반드시 형사재판에는 '인적 증거', 즉 '사람의 진술'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수사기관은 사람으로부터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증거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검사가 먼저 할러 변호사에게 플리바기닝을 제안한 것입니다. 원래는 최소 15년의 형을 받아야 할 사건을 3년 형으로 줄여 준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총을 쏜 행위를 고의범이 아닌 과실범으로 의율해 주겠다는 제안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변호인은 유리한 입장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변호인의 입장에서도 검사가 가진 증거가 저게 다라고 해서 무죄판결을 장담할 수만은 없습니다. 총의 발사경위에 대해 몽고메리가 할 수 있는 변명이 아무리 많더라도, 배심원들을 자기 편으로 확 끌어올 만한 그럴듯한 변명이 과연 얼마나 되겠어요. 몽고메리가 마약상을 만나러 가는데 왜 총을 가지고 간 것이며, 왜 하필 그의 차에 피해자의 혈흔이 묻게 된 것이며 등등, 깔끔한 설명이 곤란한 부분이 많습니다. 게다가 그는 전과도 많습니다. 배심원들에게 신뢰를 주기 힘든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배심원들은 확실한 증거가 없더라도 이런저런 정황만으로 몽고메리가 유죄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위험부담이 있으니, 할러 변호사도 15년과 3년 사이에서 고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렇게 검사도 변호인도 자신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팽팽한 상황이니, 협상과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냥 그쪽으로 가서 유죄를 받든 무죄를 받든 하면 그만인 거죠. 플리바기닝이 그렇게 많이 이용된다는 것은, 그만큼 이렇게 팽팽한 상황에 있는 사건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사건이란 게 생각만큼 그렇게 쉽게 수사가 이루어지고 쉽게 증거가 수집되고 쉽게 유죄를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형사소송의 대원칙인 '엄격한 증명의 원칙'과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 등의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105쪽]  나는 의뢰인에게 검찰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권유했다. 내게는 쉬운 결정이었지만, 사실 형을 살게 될 사람은 내가 아니지 않은가. 몽고메리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
......
"자네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군." 내가 말했다. "우리에겐 상당히 좋은 제안이야. 검사가 이 건을 재판까지 끌고 가고 싶어하지 않아. 법정에 서고 싶어하지 않는 피해자를 굳이 거기다 끌어다 놓고 싶지 않은 거야. 그랬다가는 도움이 아니라 오히려 해를 입히는 꼴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최대한 선심을 베풀어서 가장 짧은 형기를 제시하는 거라고. 하지만 모든 건 자네에게 달렸어. 자네가 결정해야 해. 앞으로 2주 정도 시간이 있고, 그 이후로는 끝이야. 어쨌든 몇 분만 있으면 법정에 나가야 해."

---> 할러 변호사가 검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나은 전략이라고 의뢰인을 설득합니다. 결정은 의뢰인이 하는 것이지만, 변호인 자신의 의견도 의뢰인에게 솔직하게 전달합니다.
할러 변호사의 말대로 검사는 피해자를 법정에 증인으로 세우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피해자가 제대로 진술을 하려 하지 않는 건 둘째치더라도, 갱단에 몸담고 있는 데서 연상할 수 있는 피해자의 우락부락한 인상이라든가 몸 여기저기에 문신들이 또아리 틀고 있는 이미지라든가, 배심원들에게 점수 딸만한 꺼리가 하나도 없어서이겠죠. '메시지보다 메신저'를 고려해볼 때 유리할 게 없는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105-106쪽]  "...... 자네가 선택해. 3년을 받든가, 아니면 재판으로 가는 거야. 그리고 전에도 말했듯이 재판으로 가도 뭔가 방법이 있기는 할 거야. 검찰 측에서 무기를 찾아내지도 못했고, 피해자는 진술을 거부하고 있잖아. 하지만 여전히 자네 차에 묻어있는 혈흔이 문제야. 그리고 검사 측은 총격 직후에 자네가 차를 운전해서 로디아를 빠져나가는 비디오 영상도 가지고 있잖아. 물론 자네가 얘기했던 대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고 배심원을 설득할 수도 있겠지. 정당방위였다고. 거기에 약을 사러 갔었는데, 그가 자네 돈뭉치를 보고는 그걸 빼앗으려다가 그렇게 됐다고 말이지. 어쩌면 배심원단도 그 말을 믿을지 몰라. 특히 피해자가 증언을 안 하려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설사 그가 증언을 하더라도 자네 말을 더 믿을지도 모르지. 일단 변론을 시작하면 난 그가 수도 없이 묵비권을 행사하도록 만들 작정이거든. 그럼 배심원들은 그가 증언대에 올라서기도 전에 그를 마치 알 카포네라도 되는 듯이 생각하게 될 거라고."

---> 이제 보니, 범행에 사용된 총도 몽고메리가 이미 어딘가에 버려버린 모양이군요. 총도 없으니 정확한 발사경위를 확인하기도 더 어려워, 몽고메리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이겠습니다.
그리고 몽고메리는 정당방위를 주장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일응 해볼 수는 있는 변명 같기는 합니다만, 그 변명이 그럴듯해 보이려면 그 당시 피해자가 탐낼 만한 돈뭉치를 몽고메리가 갖고 있었음을 몽고메리가 입증하여야 할 텐데요. 돈도 전혀 없어서 총으로 협박해 마약을 빼앗으려던 사람이 과연 자신에게 돈뭉치가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을까요? 
아무튼 할러 변호사의 탁월한 변론실력을 감안한다면, 정식재판으로 가도 해볼만한 싸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만......


[106쪽]  "검사가 지금 자네에게 제안하는 형량과 만약 우리가 재판에서 졌을 때 선고받게 될 형량 사이에 틈이 너무 벌어져 있다고. 최소한 12년 정도는 예상하고 있어야 해, 캐시. 그 기간을 도박에 걸기에는 너무 길잖아."

---> 아무래도 실패했을 경우의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피고인의 위험부담 뿐만 아니라, 실패했을 경우 변호인이 입게될 데미지도 어마어마할 겁니다.
게다가 빨리 결정을 못하고 어정쩡하게 정식재판으로 가기로 했다가, 그 사이에 어디선가 몽고메리의 총이라도 발견되어 그에게 불리한 상황이 초래될 위험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빨리 결정을 내리는 게 유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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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파기환송'에서 플리바기닝이 활약하는 장면 소개는 요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위 사건의 결말은 정확히 소개되지 않은 채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지만, 할러 변호사가 검사의 제안을 1년형으로 더 깎으면서 플리바기닝에 성공하는 듯한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작품에서 미키 할러 변호사는 총기 상해범죄 피고인을 위한 플리바기닝을 시도하였고, 다음 작품 '다섯 번째 증인'에서는 살인범죄 피고인을 위한 플리바기닝을 시도하였습니다. 이런 사건은 피해자가 존재하는 강력 사건인데요, 우리나라라면 이런 류의 사건에서 플리바기닝을 한다는 것은 최소한 검사 입장에선 쉽지 않아 보입니다. 범인임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가해자가 수사기관에 잡혀있기까지 한 상황인데, 증거가 좀 부족하다고 해서, 무죄판결 가능성이 좀 있다고 해서 가벼운 죄로만 살짝 처벌하고 만다는 것은 누구도 수긍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중범죄인을 봐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수사기관은 어떻게 해서든 중범죄인일수록 법정에 세우려고 기를 쓰게 마련입니다. 수사기관이라도 그렇게 안 하면 불쌍한 피해자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요?
게다가 이런 류의 강력 사건은, 수사가 아주 어렵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잘하면 범인을 잡아낼 가능성이 꽤 있습니다. 왜냐하면 강력 사건은 눈에 보이는 범행현장이 있고, 확실한 피해자가 있고, 세상이 좋아져서 지문 감식이나 DNA 감정과 같은 과학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동네 여기저기에 설치되어 있는 CCTV에 범인의 단서가 포착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긴 세월 오리무중이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도 결국에는 범인이 잡히고야 말지 않습니까?

이런 류의 강력 사건 말고, 정작 플리바기닝이 필요하거나 적절한 사건은 따로 있습니다.
우선은, 범죄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자가 없는 사건이 좋겠습니다. 피해자의 피해감정을 해하면서까지 국가가 범인에게 혜택을 부여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론, 수사가 정말로 쉽지 않은 성격의 사건입니다. 예를 들어, 화이트칼라 사건, 기업 비리 사건, 금융경제 사건, 뇌물 사건, 조직범죄 사건, 마약 사건, 테러 사건, 보이스피싱 사건 같은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사건의 특징은, 가담자들이 다수인데 범죄가 은밀히 이루어지는데다 직접적인 피해자가 없고 범죄자나 그 관련자 모두 서로 win-win 하는 성격의 사건이어서 적발이 쉽지 않고, 어쩌다 잡힌 가담자가 나는 잘 모르는 일이라며 입을 닫아버리면 증거수집도 쉽지 않고 더 이상 윗선으로 올라갈 수 없어 주동자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된다는 점입니다.
즉, 이런 사건은 적발과 증거수집을 위해서는 내부자의 제보나 협조가 필수적입니다. 내부자의 제보나 협조 없이는 그런 범죄를 제대로 잡아내거나 예방하기는 힘듭니다. 내부자의 제보나 협조를 기대하기 힘든 경우에는, 통신감청이나 잠입수사, 함정수사와 같은 극단적인 형태의 수사기법이라도 동원하여야 하나, 이런 수사기법은 우리 법상 인정되지 않거나 매우 제한적으로만 쓸 수 있고, 설령 가능한 경우라도 인권이나 사생활 침해의 위험이 큰 만큼 함부로 휘두를 수도 없습니다. 이런 사건은 직접적인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아 당장은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법질서를 망가뜨리고 사회와 국가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범죄이기 때문에 국가가 반드시 적발하고 처벌해야 하는 사건입니다. 

수년 전 우리나라 법무부와 검찰에서 플리바기닝 제도의 도입을 시도하였다가 무산된 적이 있습니다. 법무부나 검찰에서 플리바기닝 제도에 대해 얘기할 때 흔히 있을 수 있는 비판이, 수사의 효율성만을 강조하여 물증 확보에 노력하지 않고 쉽게 피의자의 자백만 받아내려는 수사편의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형사절차 실무는, 검사에게 범죄의 성립요건에 대해 엄격한 입증책임을 부담시키고 정밀한 입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극히 간단한 수사만 진행한 채 곧바로 재판절차로 직행하여 대부분의 입증활동이 재판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미국의 형사사법제도와 달리, 우리의 형사사법제도는 수사기관이 충분한 수사를 통해 혐의 입증까지 성공한 다음에야 비로소 재판절차로 넘어가게 되고 재판절차는 수사 과정에서 입증된 사실을 재확인하는 정도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검사는 재판으로 가기 전에 미리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을 위해 물증을 확보하고 피의자나 참고인들을 조사하여 진술증거를 충분히 확보하려고 노력합니다. 물증이라는 게 말처럼 쉽게 수집되는 게 아니지만, 설령 아무리 많은 물증이 확보되어 있더라도 물증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범죄가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진술을 통해 물증과 범죄와의 연관성까지 밝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앞에서 말한 플리바기닝에 적합한 성격의 사건들은, 범죄를 적발하고 처벌하기 위해서 내부자들의 진술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사기관이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을 위한 수사에 주력하다보니 부작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혹시라도 무죄판결을 받는 불상사를 방지하고 어떻게든 증거 하나라도 더 수집해서 확실하게 유죄판결을 받기 위해, 압수수색을 과도하게 한다거나, 예컨대 휴대폰이나 카카오톡 같은 지극히 사적인 물건을 그야말로 탈탈탈 턴다거나, 자백을 받기 위해 피의자를 강압적 또는 반복적으로 조사한다거나 하는 인권 침해나 사생활 침해 등의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수사기관이 단지 법과 절차를 잘 지켜 수사를 하는 것만으로는 이런 부작용 예방에 부족할 수 있습니다. 수사기관의 선의에만 기대지 않고 이런 부작용을 근본적으로 예방하려면, 수사기관이 수사라는 걸 좀 적당히 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만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런 부담을 좀 덜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사법자원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국가재정상 사법자원은 물적으로나 인적으로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 한계 내에서 효율적으로 배분되어야 한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수사기관이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활동에 나설 수 있는 사건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이런 식의 반론이 가능할 겁니다. 국가의 수사기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범죄자들을 잡아들이고, 다른 한편으론 억울한 사람이 누명을 쓰는 일이 없도록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활동을 다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죠.
네, 당연히 지당하고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은 바로 보려 하지 않고 애써 눈을 감은 채, 마치 공자님인 양 맹자님인 양 늘 점잖은 목소리로 지당하고 옳은 말을 하는 데만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저는 2019년 하반기 대한민국을 온통 휘어잡은 소동들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인사이트를 얻었습니다. 바로, '이제 제발 위선 떨지 말자'라는 생각입니다. 사실은 진심도 아니면서 그저 남 듣기 좋으라고 아름답고 번드르르한 말만 늘어놓는 이중성과 위선, 우린 그걸 올해 새삼스레 많이도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이젠 우리도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점잖게 지당하고 옳은 말만 하기에 앞서, 과연 그게 실현은 가능한 얘기인지, 과연 우리 앞에 놓인 실상과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똑바로 보고 제대로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제 우리는 수사기관이 전지전능하지 않은 존재라는 현실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수사기관이 행사하는 수사권이 뭔가 대단한 권한이라고 생각하고, 이 요술방망이 같은 권한으로 해결 못하는 일이 없고 못 밝히는 진실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형사법 만능주의 국가가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회적 논쟁과 문제점은 죄다 형사절차 안에 집합시켜 놓고 형사법에 따른 해결을 기다립니다. 사회적 논쟁과 문제점의 직접당사자들은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해결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그 일의 당사자도 아니고 문외한에 불과한 판검사의 손에 해결을 맡겨버리고는 그 처분만 하염없이 기다리곤 합니다. 그러고도 정작 그 결과에는 승복하지 않고 각 진영별로 아전인수격 주장만 일삼습니다.
그러나 "조사하면 다 나와", 이런 말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조사한다고 속 시원하게 알고 싶은 게 다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몇 사람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어떤 사건을 제3자인 수사기관이 증거라는 형식으로 완벽하게 재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즉, 수사기관은 제아무리 애를 써도 누구나 수긍하는 진실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수사기관의 능력이 모자라서이기도 하고, 수사라는 행위만으로는 진실을 밝히는 데 턱없이 부족해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언제나 진실을 발견하는 게 가능함을 전제로, 수사기관의 도리와 의무를 말해서는 곤란합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범죄를 빠짐없이 적발하겠다고 모든 장소에 빠짐없이 CCTV를 설치하자거나 모든 사람들의 휴대폰과 카카오톡을 수사기관이 마음껏 보게 하자는 게 전혀 말이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더구나 갈수록 수사환경은 열악해지고 있습니다. 범죄는 고도로 지능적이고 은밀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수사기관이 범죄의 단서조차 찾기 쉽지 않고, 범죄자들은 묵비권을 행사하며 입을 닫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고, 참고인들은 괜한 불이익이라도 당할까 싶어 남의 사건에 개입하기 꺼려합니다. 범죄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자가 있는 사건의 경우에는 피해자의 진술이라도 확보하여 어찌어찌 수사를 진행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건은 사람의 진술을 확보하기 힘들어 수사 진행 자체가 곤란한 경우도 많습니다.
사법선진국 수사기관의 최신 수사기법과 제도를 우리나라에도 수입하려면 온갖 반대론에 맞닥뜨리게 되어, 아직까지 우리나라 수사기관은 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하던 구식 무기로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당연한 현실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수사기관의 권한을 늘리고 힘을 키워주자는 주장이 아닙니다. 그런 해결책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수사기관의 과욕에 따른 부작용을 조장하는 위험한 주장일 수 있습니다. 단지, 수사기관이 모든 범죄를 엄격하고 정밀하게 입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수사기관의 엄격하고 정밀한 입증이 가능하고, 수사기관이 언제나 진실을 발견하는 게 가능하더라도, 그 때문에 야기될 수 있는 인권 침해 등의 부작용을 예방한다는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서, 이제 수사기관의 도리와 의무에 대해 현실과는 유리된, 그저 지당하고 옳아 보이기만 한 말은 더 이상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이미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있고, 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바로 플리바기닝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플리바기닝 제도의 취지는 수사기관의 한계를 인정하고 수사기관의 수사를 줄이자는 것으로, 바로 수사기관의 입증이 부족할 수밖에 없어 생기는 빈 틈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 빈 틈을 그냥 방치해두지만 말고 어떻게든 뭐라도 메워놓자는 게 그 취지라고 생각합니다. 플리바기닝 제도는 수사편의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 맞습니다. 사회적으로 필요성이 있으면 수사편의주의적 발상도 할 수 있는 것이고, 수사편의주의를 위해 플리바기닝을 하자는데 이를 수사편의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동어반복에 불과하고 적절한 비난이 아닙니다.
일본의 경우 미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변형된 형태의 플리바기닝 제도를 2016년에 도입하였습니다. 그 도입 이유가 재미있는데, 갈수록 진술증거의 수집이 곤란해지고 있는 수사환경을 고려하여 조사의 비중을 줄이고 사건 관련자들로부터 자발적인 진술을 이끌어내기 위한 새로운 수사방법으로서 이 플리바기닝 제도를 도입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역시 수사기관의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을 수긍하는 데서 이끌어낸 적절한 대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도 2004년부터 변형된 형태의 플리바기닝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나라인데, 최근인 2019년 9월부터는 종전의 배심재판 대상사건을 축소해서 시민배심원들의 사법절차 참여를 점차 줄여가고 있습니다. 이는 배심재판으로 야기될 수 있는 형사사법절차의 지연을 방지하여 신속한 재판 진행과 사법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대책인데, '시민의 사법참여'니 '사법의 민주화' 같은 지고지순한 말만 앞세워 배심재판 제도를 숭배대상으로 삼으려 하지 않고, 위선 떨지 않으면서 그리고 실상을 인정하면서 과감하게 문제점을 고쳐나가겠다는 프랑스 국민들의 실용적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사례입니다. 

결론을 정리하면, 우리나라에도 플리바기닝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저는 우리 국민정서법상 100년 안에는 우리나라에 이 제도가 도입되는 일이 절대 없을 거라 예상합니다.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제 우리 솔직해지고 제발 위선 떨지 말자는 것입니다. 모자라고 부족한 현실은 현실 그대로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나갈 수 있습니다. 실상은 외면한 채, 하나마나 한, 그럴듯하기만 한, 그저 번드르르하기만 한 말만 해서는 아무런 해결책도 마련할 수 없습니다.
왜 미국이 스스로도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자인하면서도 플리바기닝 제도를 그렇게 오랜 세월 운영하고 있는지, 왜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은 지극히 미국스러운 제도인 플리바기닝 제도를 굳이 자국에 도입한 것인지, 우리는 그 이유를 솔직하게 들여다보면서 우리의 문제점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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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일 일요일

[독서일기] 퇴사하겠습니다

댓글 없음 : 작성자: iMagistrat 시간: 12/01/2019 01:38:00 오전 라벨: 독서일기 , 직장 , 퇴사
저자 이나가키 에미코는 전직 일본인 기자입니다. 1987년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하여 2016년에 퇴사하였는데, 이 책은 퇴사 직후에 쓴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40세에 처음 퇴사할 마음을 먹게된 계기와 그 쉽지 않은 결심을 결국 50세에 실행에 옮기기까지의 과정을 가벼운 문체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퇴사하겠습니다'라는 제목이 시선을 확 잡아끕니다. 얼추 30대부터 50대 사이에 걸쳐있는 어마어마한 인구의 직장인들은 죄다 이 제목을 예사롭지 않게 볼 듯합니다. 
저는 '퇴사'라는 단어에서 이런 단어들이 연상됩니다. 곤경, 당혹, 불안, 막연, 궁핍 등 부정적인 말들이 먼저 떠오르는 듯 하더니, 반대로 설렘, 희망, 자유, 해방 등과 같은 긍정적인 말들도 함께 떠오릅니다. 저는 아직 직장에 몸담고 있긴 하지만 이제 막 50대에 접어든 처지여서인지, 극단의 이미지를 한데 품고 있는 묘한 단어로 보이는군요.  

책은 분량이 여백 많은 200쪽에 불과하지만, 나름 다양한 에피소드와 생각거리들이 담겨 있습니다. 다만, 아마도 독자마다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공감을 느낄 부분은 각양각색일 것 같습니다. 제가 공감한 부분은 딱 한 군데입니다. 그 부분만 여기 옮겨보겠습니다. 



당시 나는 오사카 본사 데스크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직접 기사를 쓰는 게 아니라 남이 쓴 기사를 수정하거나 줄이거나 해서 '완성품'으로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중간관리직, 직장인도 마흔 가까이 되면 이런 일을 하게 됩니다. 
요컨대 출세경쟁 비슷한 것의 입구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그때까지는 선배와 상사들이 나름대로 신경 써주었고, 나는 기회를 얻어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면서 무럭무럭 자라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복한 무명 시절은 슬슬 종말을 고하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나는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인간인가 아닌가 하는 '판별'이 시작되는 나이대에 접어들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인생의 반환점'에서 내가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한 세대 전인 고도 성장기라면 또 모를까, 지금 시대에 그런 출세경쟁을 벅찬 마음으로 맞이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야, 마지막까지 '이기는' 사람이 되면 좋긴 하겠지요. 하지만 마지막까지 이긴다는 게, 요약하자면 사장이 된다는 겁니다. 사장이란 사람은 사내보나 주간지 사진으로 말고는 직접 본 적도 없습니다. 그만큼 멀고 먼 존재입니다. 그 외 모두는 어딘가에서 반드시 '지게' 되어 있습니다. 
회사원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리고 회사원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사람의 욕망이란 것에는 정말 무서운 구석이 있습니다. 나는 그걸 회사원이 되고 나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만족한다’는 것이 의외로 어려운 일입니다. 
평범한 시선으로 보면, 뭐 사장까지 안되더라도 과장이나 부장쯤이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겠느냐 싶겠지요. 그 말이 백번 옳습니다. 나 역시 늘 그렇게 생각했고요. 그러나 실제 회사속에 있다보면 그게 말이 쉽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부장이 되지 못했을 때(실제로 대다수 사람들이 부장이 되지 못합니다), 당연히 자기 이외의 누군가가, 그것도 동기나 후배 중에서 누군가가 부장이 됩니다. 그건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줍니다. 
입사하고 나서 내내 그렇게 상처 입고 주눅 들고 투지를 잃어가며, 불만과 불우한 감정에 터져버릴 것 같은 심경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선배들을 정말로 많이 봐왔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임원만 되어도 그야말로 엄청난 출세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사장이 되지 못한 것을 끊임없이 한스럽게 생각하는 전무도 있다니까요, 그 회사라는 곳에는!
정말 어쩌면 그렇게 출세주의자들의 집합체인지!
원래는 모두 '신문기자'가 되고 싶어서 입사한 거 아니에요? 평생 '기자' 해도 좋잖아요!
......라고 그렇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나는. 그런데 뜻밖에도, 나 역시 어느덧 인사이동이 발표될 때마다 일희일비하게 되더란 말이죠.

29쪽부터 31쪽까지에 나오는 내용으로, 저자가 인생의 반환점으로 생각하는 40세에 처음으로 퇴사를 머릿속에 떠올렸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제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든 딱 한 구절이 바로 "그 외 모두는 어딘가에서 반드시 '지게' 되어 있습니다"라는 부분입니다. 피라미드의 정점인 사장이 되지 않는 한, 그 사장 한 사람만 빼고는 회사에 있는 사람 누구나 '지는 상황'이 반드시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한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그 앞뒤 부분을 길게 인용하였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중간관리자가 되면 이제 엄격하고 냉정한 '판별'의 단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냥 있다보면 당장의 위기는 어찌어찌 모면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반드시 지게 되어' 있기도 합니다. 사실 모두들 정답도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는 다 마지막엔 지게 되는 길을 향해 오늘도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고, 받아들여야 할 현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그런 당연한 정답보다 저자가 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겁니다. 즉, '퇴사'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미리 준비하느냐 안 하느냐 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저자 자신은 무려 10년이나 퇴사를 준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0세에 이르렀을 때, 앞으로 10년 후인 50세가 되면 퇴사해야지 라는 다짐을 하며 10년 동안 퇴사를 준비하였답니다. 퇴사를 미리 준비한다는 게 물론 퇴사라는 목표를 위해 현재의 일은 대충대충 하며 시간을 때우겠다는 의미는 분명히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이 하루하루를 허투루 살지 않으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로, 퇴사를 준비하는 사람이야말로 지금의 일에 더 애정을 갖고 최선을 다하게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서 말하는 '퇴사 준비'라는 게, 퇴사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준비한다는 의미 외에 현재부터 퇴사 직전까지의 지금 직장에서의 생활과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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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6일 화요일

[독서일기] '다섯 번째 증인' (feat. 미국 형사사법제도) 제4편

댓글 없음 : 작성자: iMagistrat 시간: 11/26/2019 09:30:00 오후 라벨: 독서일기 , 마이클 코넬리 , 미국 , 미키 할러 , 배심제 , 법정소설 , 변호사 , 사법제도 , 플리바기닝 , 형사소송
[제3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439-445쪽]  “변호인 측은 피고인 리사 트래멀을 증인으로 부르겠습니다.”
......
피고인이 증인으로 불려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워서 법정 안 곳곳에서 속삭임과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첫 번째 증인으로 불려 나왔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일반적으로 변호인들은 의뢰인을 증인으로 세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 전술은 위험 대비 보상률이 상당히 낮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의뢰인이 한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의뢰인이 무슨 말을 할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증인선서를 하고 나서, 자신의 유무죄를 결정지을 열두 명의 배심원들 앞에서 하나라도 거짓말을 하다가 들키면 그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
변호인 측 첫 증인으로 피고인 리사 트래멀을 부른 목적은 세 가지였다. 첫째, 그녀의 부인하는 말과 설명이 기록되기를 바랐다. 둘째, 증인석에 앉은 그녀의 모습이 배심원들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살인 사건에 인간의 얼굴을 입히기를 바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작고 연약해 보이는 여성이 몰래 숨어서 기다렸다가 남자의 머리를 망치로 강력하게 그것도 세 번이나 가격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배심원들의 마음속에 싹트기를 바랐다.

---> 검찰 측 증인들에 대한 신문절차가 모두 끝나고, 이제부터는 피고인과 변호인 측 증인들에 대한 신문절차가 시작됩니다. 이제 할러 변호사가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서는 시간이죠.
할러 변호사는 첫 번째 증인으로 피고인 본인을 내세우는데요, 여기서 우리 제도와 미국 제도의 차이점 한 가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제도에서는 피고인은 증인으로서의 자격이 없기 때문에 증인신문의 대상이 아닙니다. 대신 ‘피고인신문’이라는 절차가 별도로 있어서 양쪽 당사자의 증인신문이 모두 끝나면 피고인신문 절차에서 피고인이 신문을 받게 됩니다. 증인신문의 대상인 경우는 허위진술을 하면 위증죄의 처벌을 받을 수 있지만, 피고인신문의 대상인 경우는 허위진술을 하더라도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에 피고인 입장에선 증인신문보다 부담이 적습니다. 게다가 실제 재판에서 피고인신문은 사건에 따라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합니다.
미국은 피고인도 증인신문의 대상이 될 뿐이고, 우리와 같은 피고인신문이라는 절차 자체가 없습니다. 과거에는 미국에도 피고인신문 절차가 있었으나, 피고인이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는 일이 일반화되면서 피고인신문의 실익이 없어져 아예 이 절차가 사라지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피고인신문 대신 피고인을 증인신문의 대상이 될 수 있게 한 것인데, 피고인이 증인신문에 나오는 경우에는 다른 증인들과 마찬가지로 진술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어서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여야 하고 그러다 허위진술을 하면 위증죄로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피고인이 증인신문에 나오는 것은 피고인에게 불리한 측면도 있으므로, 할러 변호사의 설명대로 실제 재판에서 피고인이 증인신문에 나서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러 변호사가 굳이 피고인을 첫 번째 증인으로 내세운 이유는, 그도 그녀가 결백하다고 믿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결백한 그녀가 배심원들에게 충분히 우호적인 인상을 주고 배심원들의 마음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결백한 피고인만큼 우월한 증거는 더 없을 테니까요.
아무튼 저는 형사재판에서는 피고인신문이든 증인신문이든 어떤 형태로든 피고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기회가 가장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피고인으로부터 자백이든 변명이든 일단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사건 내용을 가장 잘 아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피고인이기 때문입니다. 사건 내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가만히 놔두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만 모여서 이게 맞네 저게 맞네 떠들고 있는 건 매우 우스꽝스런 일이기 때문입니다.


[446-447쪽]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증인. 미첼 본듀란트를 살해했습니까?”
“아뇨, 죽이지 않았습니다.”
“망치를 갖고 가서 은행 주차장에서 망치로 그를 가격했습니까?”
“아뇨, 전 거기에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증인의 차고에서 사라진 망치가 본듀란트 씨를 살해하는 데 사용되었을까요?”
“모르겠어요.”
“본듀란트 씨의 혈흔이 어떻게 증인의 신발에서 발견됐을까요?”
“모르겠어요!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저한테 누명을 씌운 거예요!”
나는 잠깐 숨을 고르고 목소리를 차분히 한 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증인. 증인은 키가 몇입니까?”
......
“160센티미터요.”

---> 할러 변호사가 증인 자격으로 나온 리사 트래멀을 상대로 주신문을 하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가 사건의 쟁점을 적절히 정리해서 던지는 질문 내용들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마지막 질문을 리사 트래멀의 키가 얼마인지로 마무리하는 장면도 배심원들에게 상당히 극적인 효과와 긴 여운을 남길 것으로 보입니다. 할러 변호사는 배심원들에게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지 잘 좀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작은 여자가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큰 남자를 혼자서 살해할 수 있느냐고요!”


[447-448쪽]  ...... 프리먼은 적어도 하나의 카드를 몰래 숨겨놓았다가 결국에는 꺼내서 사용했다.
“아까 할러 변호사가 증인에게 이 범죄를 저질렀느냐고 물었을 때, 증인은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직업이 교사이고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라고요. 기억나세요?”
“네, 사실입니다.”
“하지만 4년 전 학생을 3면으로 이루어진 자로 때려서 강제로 전근을 가게 되었고, 분노조절 장애 치료를 받아야 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나는 재빨리 일어서서 이의를 제기했고 재판부 협의를 요청했다. 판사가 우리에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재판장님.” 페리 판사가 묻기도 전에 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개시된 증거에는 3면으로 이루어진 자는 없었는데요. 갑자기 어디서 툭 튀어나온 겁니까?”
......
판사는 배심원들에게 검사의 질문을 무시하라고 지시했고 프리먼에게는 다른 질문을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배심원들이 이미 다 알아버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 질문을 기록에서는 삭제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배심원들의 기억 속에서는 삭제할 수 없을 것이었다.

---> 이번에는 리사 트래멀에 대한 프리먼 검사의 반대신문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프리먼 검사는 할러 변호사가 주신문에서 만들어놓은 리사 트래멀의 무고하고 억울한 사람 이미지를 흔들어놓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검사는 남을 살해하기까지 한 사람이니 평소에도 어느 정도의 폭력적 성향이 있었으리라는 점을 부각시키려 합니다. 그러다 리사 트래멀의 과거 폭력 전력이라는, 미리 상대방에게 오픈하지 않은 자료를 갖고 꼼수를 쓰게 됩니다. 할러 변호사가 미처 손을 쓸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죠. 앞서 할러 변호사가 검찰 측 증인 구티에레스 박사에게 과거의 잘못된 증언 전력에 관한 불의타를 날리는 꼼수를 쓴 데 대한 보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 장군 멍군입니다.
서로 이렇게 꼼수를 쓰더라도 재판장이 할 수 있는 제재수단이라곤, 경고를 날리고 기록에서 삭제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모양입니다.


[449쪽]  검사는 반대신문을 5시까지 끌고 가서, 밤사이 뭔가를 마련해서 다음날 아침 리사 트래멀을 재공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판사는 그날 재판의 휴회를 선언했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

---> 프리먼 검사가 오후 몇 시부터 리사 트래멀에 대한 반대신문을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재판을 마칠 오후 5시까지 반대신문을 계속 진행합니다. 퇴근시간이 되어 반대신문은 중지되고 다음날로 넘어가게 됩니다.
검사 입장에선 반대신문 중간에 이렇게 긴 간격이 생기는 게 유리한 일일 것 같습니다. 저녁식사를 하거나 잠자리에 들 때 문득 피고인을 공격할 새로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죠.


[459-465쪽]  금요일 아침, 안드레아 프리먼 검사가 전날에 이어 리사 트래멀을 반대신문한 지 20분 만에 전날 내가 세운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졌다.
......
“페이스북도 하고 있고요, 그렇죠?”
“네.”
...... 
“...... 그리고 증인은 페이스북에 가입한 이후 담벼락에 정기적으로 글을 올려왔고요, 그렇죠?”
“네, 꽤 정기적으로 올린 편이죠.”
“사실 이 재판에 관해서도 업데이트를 했고요, 그렇죠?”
“네,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제 견해를 올렸습니다.”
나는 혈압이 확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입고 있는 정장이 비닐로 만들어진 땀복처럼, 체온을 그대로 가둬놓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싶었지만 혹시 배심원이 그 동작을 본다면 변호인이 너무 초조해한다는 인상을 줄 것 같았다.

---> 아하, 그동안 리사 트래멀이 페이스북을 통해 그녀의 지지자들에게 재판상황을 열심히 실시간 중계하고 있었군요. 그녀가 쓴 글 수도 어마어마합니다. 1,200건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많은 글 중 이제까지 할러 변호사가 변론해온 내용과 모순되거나 그녀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도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매사 남에게 들이대는 잣대나 자신에게 들이대는 잣대나 대동소이한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만, 말로든 글로든 사람이 흔적을 많이 남겨놓으면 그것이 나중에 자신에게 덫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리사 트래멀이 헤비 페북러인 줄 까맣게 모르고 있던 할러 변호사로선 초강력 불의타지만, 검사가 바로 전날 밤에 리사 트래멀의 페북 계정을 발견했다는데야 증거개시절차 위반이든 뭐든 어찌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역시 프리먼 검사가 어제 재판 끝날 때까지 반대신문을 길게 끌어 하룻밤이라는 작전타임을 가진 게 주효하였네요.
할러 변호사는 갑자기 오른 혈압을 진정시키기 위해 넥타이를 좀 풀고 싶지만, 참습니다. 무대 위에 오른 사람은 극히 사소한 동작만으로도 관객들에게 별의별 상상과 억측의 여지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우는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에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합니다. 아무리 근엄하게 무게잡는 재판이라도, 결국은 ‘쇼’라는 성격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네요.


[465-467쪽]  “살인 사건이 발생한 날 아침, 증인은 그 주차장에 다시 가서 미첼 본듀란트를 기다렸습니까?”
“아뇨, 안 갔어요! 저는 거기에 가지 않았습니다.”
“증인은 커피숍에서 미첼 본듀란트를 보고 분노했고 그가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증인은 주차장으로 가서 그를 기다렸고 ......”
“이의 있습니다.” 내가 소리쳤다.
“...... 망치로 때려서 그를 살해했습니다, 그렇죠?”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리사 트래멀이 외쳤다. “안 그랬다고요!”
그녀는 궁지에 몰린 동물처럼 큰 소리로 헉헉거리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 프리먼 검사는 리사 트래멀에게 페이스북 글 인쇄자료를 건네주고는 몇 군데를 낭독하도록 하는데, 리사 트래멀이 페이스북에 쓴 그 많은 글 중 딱 두 편의 글이 그녀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 사건 이전인 작년 9월에 그녀가 피해자의 직장 주차장과 주차 위치를 알아내 그곳에서 피해자를 기다린 일이 있었다는 내용의 글입니다. 피해자의 주차 위치를 알고 있을 정도이니 그곳에서의 계획적인 살인범행이 가능하였으리라는 추론도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승기를 잡자마자 검사는 가차 없이 몰아쳐 피고인으로부터 극적인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이제까지 할러 변호사가 만들어놓은 피고인의 선량하고 평범한 소시민의 인상을, 이제까지 봐온 것과는 뭔가 좀 다른 구석도 있어 보이는, 뭔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인물의 인상으로 바꿔버립니다.


[473-478쪽]  “재판장님, 이 문서를 증인에게 보여줘도 되겠습니까? 증인의 페이스북 친구들 명단을 인쇄한 것입니다.”
......
“증인의 페이스북 친구인 도널드 드리스콜이라는 사람이 ALOFT 직원이었다고 한다면 무슨 생각이 드실 것 같습니까?”
“ALOFT에서 제 게시글들을 보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생각이요.”
“그럼 이 드리스콜이라는 사람은 증인이 어디 갔다 왔는지 어디 갈 건지 다 알았을 거란 말이죠,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증인이 은행 건물에서 본듀란트 씨의 주차 자리를 찾았고 그를 기다릴 거라고 썼던 지난 9월의 게시글에 드리스콜이 접근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죠?”
“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증인. 더 이상 질문 없습니다.”

---> 할러 변호사의 순발력이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프리먼 검사의 뜻밖의 공격으로 의뢰인과 마찬가지로 혼이 나가있을 법도 한데, 재판장에게 이른 휴식시간을 요청한 후 그 짧은 시간 동안 동료들과 함께 리사 트래멀에 대한 재주신문을 급히 준비합니다.
휴식시간 동안 재빠르게 리사 트래멀의 페이스북 친구 명단에서 돈 드리스콜이라는 사람을 찾아내는데, 마침 그는 할러 변호사가 이 사건의 진범으로 몰고 있는 오파리지오의 회사인 ALOFT의 직원입니다. 이 작은 끈을 어떻게든 활용해서 다시 음모론을 제기하여 이 위기를 벗어나야 합니다.
다행히 재주신문에서 리사 트래멀은 할러 변호사의 의도대로 드리스콜이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을 감시해왔다는 생각이 든다고 진술하며 음모론을 적절히 뒷받침해 줍니다.
또 다행히, 프리먼 검사가 좀 전에 페이스북이라는 불의타를 날린 데 대한 보상격으로, 재판장은 할러 변호사에게 드리스콜을 증인으로 부를 기회를 허락합니다.
이제 할러 변호사는 오파리지오가 드리스콜이라는 자신의 직원을 통해 평소 페이스북으로 리사 트래멀을 감시하다 이번에 그녀를 피해자의 살인범으로 몬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진행시켜 나가기로 합니다. 프리먼 검사의 페이스북 공격 속에서 드리스콜을 찾아내 순식간에 자신의 음모론을 공고히 해버리는 솜씨가 정말 대단합니다. 소설이라 그런 걸까요?


[479-483쪽]  ...... 그녀는 하버드와 MIT, 존제이 칼리지에서 학위를 받았고, 현재 존제이의 연구원이었다. 외모가 출중하고 상냥한 여성이었다. 게다가 증인석에서는 한 마디 한 마디 성실하게 진실만을 말해서 스스로 빛이 났다. 형사소송 변호사들에겐 그야말로 꿈의 증인이었다. ......
......
아슬래니안은 망치를 갖고 증인석을 떠나 배심원들 앞에 서서 시연을 시작했다.
“제가 가졌던 의문은 피고인의 키를 가진 여성이, 저와 마찬가지로 160센티미터인 여성이 구두를 신고 키가 185센티미터가 넘는 남성의 정수리를 가격해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
......
“...... 피해자의 자세에 대해서 이틀을 고민했습니다. ......”
......
“...... 그렇다면 이 자세만 남게 되죠.”
아슬래니안은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혀 얼굴이 천장을 향해 있는 마네킹의 머리를 가리켰다. ......

---> 또다시 돋보이는 매력의 ‘메신저’가 할러 변호사의 증인으로 등장하는데, 그 메신저는 심지어 ‘메시지’도 훌륭히 전달합니다.
이번 증인은 샤미람 아슬래니안이라는 이름의 법과학 전문가입니다. 피해자와 같은 키인 187센티미터의 마네킹을 법정에 데려와 160센티미터 키의 여성이 이 키 큰 남성을 공격하는 것은 도대체 가능하지가 않다는 논리를 시각적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단, 이 한 가지 경우에는, 이 작은 여성이 키 큰 남성을 공격하는 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남성이 얼굴이 천장을 향하도록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힌 상태로 서 있는 경우 말이죠. 만약 피해자가 그런 자세로 서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리사 트래멀도 유력한 용의자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사람이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주차하고 막 내리자마자 그런 자세로 서 있을 일이 있을까요? 그런데 이 소설의 맨 마지막 결론을 보면, 바로 이 부분이 이 사건의 핵심 포인트가 됩니다.


[485쪽]  ...... 4시가 가까워지자 페리 판사는 주말 동안의 휴회를 선언했다. 이틀 동안의 휴가에 들어가는 내 마음은 우리가 우세하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우리는 검찰이 제시하는 증거의 상당 부분에 대해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검찰의 주장을 약화시켰고, 리사 트래멀이 범행을 부인하고 자신은 누명을 썼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법과학 전문가가 증인으로 나서서 피고인이 그 범죄를 저지르기가 신체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추정하면서 한 주를 마감했다. 피해자가 고개를 번쩍 들고 주차장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치명적인 가격을 가하지 않은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 금요일의 재판은 재판장의 개인적 사정으로 4시가 되기 전에 일찍 마감합니다. 이제 이 법정에 있던 사람들 모두 주말이라는 휴식이 기다립니다.
할러 변호사는 프리먼 검사의 반격으로 잠시 궁지에 몰린 듯했지만 일단 위기에서는 벗어났고, 그 역시 과학을 이용해 배심원들의 마음에 합리적 의심을 심어놓는 데 성공했다고 자신하며 주말을 맞이합니다.


[502쪽]  배심원단이 법정에 들어와 착석하고 애런슨이 증인석에 앉자 나는 직접신문(direct examination)을 시작했다. 우선 애런슨이 리사 트래멀의 자택 압류에 관한 변호인 측 전문가가 된 경위부터 물었다.

---> 이 소설은 첫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그 무대가 거의 법정 안을 떠나지 않습니다. 전작인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서는 법정 밖에서 다양한 에피소드가 벌어지고, 할러 변호사의 수사관이 의문의 죽음을 맞고 할러 자신까지 총을 맞기도 하는 등 변화무쌍한 스토리 덕에 영화화도 가능했을 것 같지만, 이 『다섯 번째 증인』은 도통 법정을 떠나지 않고 미첼 본듀란트 외엔 죽는 사람도 없으니 영화로 만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제 재판 둘째 주를 맞는 월요일 아침, 할러 변호사의 두 번째 증인은 그가 고용한 신참 변호사 애런슨입니다. 애런슨 변호사는 할러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주택압류 민사사건을 주로 담당하였기에, 이날 증인으로 나와서는 리사 트래멀의 집이 피해자의 회사로부터 압류를 당한 과정과 그 압류에 절차적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이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나라 제도와의 큰 차이를 또 한 가지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형사재판에서는 모름지기 증인이라는 자격으로 재판에 나올 수 있는 사람으로는, 양쪽 당사자(즉, 검사와 피고인)의 그 누구와도 가깝지 않은, 그 중간에 위치한, 전적으로 제3자적 입장에 있는 사람을 우선 떠올리게 됩니다. 가장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예가, 길을 가다 우연히 어떤 범죄장면을 본 목격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미국이나 우리나 최적의 증인입니다. 물론 양쪽 당사자 중 어느 한 쪽과 가까운, 사실상 그 어느 한 쪽의 부탁으로 법정에 나와 전적으로 그쪽에 유리한 증언을 하는 증인들도 있긴 합니다만, 그럴 경우 그 진술의 신빙성은 확 떨어지기 때문에 사실 그다지 영양가 있는 증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런 증인은 사건과 크게 관련도 없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경우 재판부에서 증인으로 서게 해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애런슨 변호사는 할러 변호사에게 고용되어 할러 변호사의 지시에 따라 이 사건 재판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즉 전적으로 피고인과 같은 편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 애런슨 변호사도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 증인으로 나와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재판 같으면 십중팔구 증인으로 나오기도 힘들었을 사람이 말이죠.
자, 여기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 애런슨 증인의 증언이 신빙성 있느냐 없느냐는 실제 그 증언을 들어본 다음에 판단하여야 할 나중 일입니다. 어떤 사건에 대해 알고 있거나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단 법정에 나와 그가 경험한 사실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배심원들은 법정에서 가급적 많은 증거들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배심원들이 법정에 펼쳐지는 풍부한 증거들을 직접 보고 들어야 유죄냐 무죄냐의 판단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이른바 ‘공판중심주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배심원들이 만나야 할 증거를, 이런저런 제약을 걸어(특히 증거능력을 이유로) 아주 조금밖에 허용하지 않는 재판은 곤란한 것이고 공판중심주의에 반하는 재판입니다.


[513-517쪽]  나는 도널드 드리스콜을 증인으로 불렀다.
......
“네, 그녀가 페이스북 계정을 갖고 있고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한다고, 그녀의 FLAG 활동과 계획을 감시하기에 좋을 것 같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상관이 뭐라던가요?”
“페이스북을 감시하고 그 결과를 요약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이메일로 보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했고요.”
......
“그럼 증인이 매주 리사 트래멀의 활동에 관해 요약한 보고서 중에 그녀가 웨스트랜드 내셔널 주차장에 가서 미첼 본듀란트를 기다리고 있다고 올린 게시글 내용을 포함한 보고서도 있었나요?”
“네, 있었습니다. ......”

---> 할러 변호사의 네 번째 증인은 페이스북을 통해 리사 트래멀의 동향을 감시하였다는 도널드 드리스콜입니다.
이 증인신문을 통해 할러 변호사는 피해자를 살해하고 리사 트래멀에게 누명을 씌운 진범은 평소 드리스콜을 통해 리사 트래멀의 동향을 감시해온 오파리지오라는 의혹 쪽으로 배심원들을 몰고 갑니다.


[520-522쪽]  이제 프리먼 검사가 믿어마지 않는 서류철을 들고 독서대로 와서 자리를 잡고 서류철을 펼쳤다.
......
“ALOFT에서 갑자기 해고된 것은 증인이 회사 자산을 체계적으로 훔치다가 발각됐기 때문이 아닌가요?”
......
“회사 명의로 고가의 소프트웨어를 주문하고, 보안번호를 해킹해 들어간 후, 소프트웨어를 불법 복제해 해적판으로 인터넷에 팔지 않았습니까?”
......
“검찰 측 증거물 9호입니다, 재판장님.”
...... ALOFT의 내부감사 보고서 사본이었다.

---> 확실한 반대신문 전략은 증인의 신뢰성을 공격하는 것이고,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증인이 주장하는 내용 자체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중 문제입니다. 증인이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걸 부각시켜 결국 그의 말만 믿고 판단하여서는 안 된다는 인상을 배심원들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프리먼 검사가 드리스콜에 대한 반대신문에서 바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드리스콜의 과거 지저분한 잘못들, 특히 그의 정직하지 못했던 과거 행적을 공개합니다. 그가 오파리지오의 회사인 ALOFT에서 해고된 것은 회사에 배임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공개됨으로써, 이 일로 오파리지오와 적대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그의 증언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 돼버리고 맙니다.
드리스콜은 결국 프리먼 검사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무너져버리고, 할러 변호사를 또다시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534쪽]  화요일 아침 루이스 오파리지오가 증인석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 그는 내가 부른 증인이었지만 우린 서로를 증오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재판 초기부터 나는 내 의뢰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오파리지오를 지목해왔는데, 이제 그가 내 앞에 앉았다. ......

---> 드디어 할러 변호사가 심혈을 기울여 소환한 다섯 번째 증인이 등장합니다. 여태 이 증인을 위해 법정에서 여러 의혹의 실타래들을 풀어놓았었습니다. 이제 이 실타래들을 한데 끌어 모아서 작품을 만들어 보여야 합니다. 할러 변호사가 제기한 의혹대로, 이 증인은 뭔가 어둠의 세계에서 서식하는 인물, 리사 트래멀보다는 누군가를 살해하는 데 훨씬 더 적합해 보이는 인물로 비쳐져야 합니다.
할러 변호사와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긴장감이 최고조로 달하는 장면입니다. 이런 클라이맥스에 등장한 증인이어서 이 작품의 제목이 ‘다섯 번째 증인’인 걸까요?


[539-546쪽]  “...... 이 비공개 논의가 실은 증인의 회사 ALOFT를 어느 상장기업에 매각하기 위한 협상이었습니다, 맞습니까?”
......
...... 프리먼이 힘을 준 낮은 목소리로 이의를 제기했다.
“이게 이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변호인이 우리를 월스트리트로 끌고 가는 것 같은데요, 재판장님. 이 내용은 리사 트래멀과, 이 사건 증거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재판장님, 이것도 제삼자 범인설과 관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디지털 영업일지의 한 페이지인데 증거개시절차를 통해 변호인 측에 전달되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으면 배심원들은 이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저 증인을 은근히 갈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살인의 동기입니다.”
......
“...... 본듀란트는 저 남자에게서 6천1백만 달러를 빼앗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건 너무나 자명한 일이고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죠. 그게 살인의 동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
“동기는 증거가 아니잖아요.” 프리먼이 말했다. “그건 증거가 아니고 변호인은 아무런 증거도 갖고 있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변호인의 주장은 오로지 말뿐입니다. 증거가 없죠. ......”

--->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오파리지오와 피해자 간의 갈등을 부각시켜보려 하지만 할러 변호사의 질문은 자꾸 변죽만 울리면서 핵심에는 다가가지 못하고, 이게 뭐하는 작전인가 싶은 의심을 잔뜩 품은 프리먼 검사와 페리 판사로부터 잇달아 제지를 받게 됩니다. 아직까지 오파리지오와 이 사건 사이의 관련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령 할러 변호사의 주장대로 사업상 있었던 문제로 평소 피해자가 오파리지오를 협박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래서 궁지에 몰려있는 오파리지오의 입장에선 피해자가 없어져주면 좋을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런 오파리지오의 피해자에 대한 적개심만 가지고 그가 피해자를 살해한 진범이라는 의심을 배심원들이 갖게 하는 데 충분한 걸까요? 여기까지만 읽어서는 프리먼 검사와 페리 판사의 불만처럼 할러 변호사의 전략이 여러모로 허황되게 보입니다.


[551-557쪽]  “뉴욕 주가 보유하고 있는 기업 기록에 따르면, AA 베스트의 최대 주주가 도미닉 카펠리라는 사람이던데, 그를 잘 아십니까?”
“아뇨.”
......
나는 ...... 오파리지오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거였다. 당장 항복해, 안 그러면 당신 비밀이 온 세상에 알려질 거야. 르무어가 알게 될 거야. 당신 주주들이 알게 될 거고. 모두가 알게 될 거야.
......
나는 메모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이 기회였다. 오파리지오를 생포하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오파리지오 씨, 당신이 모른다고 주장하는 파트너인 도미닉 카펠리가 뉴욕......”
“재판장님?”
오파리지오였다. 그가 내 말을 끊었다.
“제 변호인의 충고와, 미합중국 헌법과 캘리포니아 주 법이 보장하는 진술을 거부할 권리(Fifth Amendment right)에 따라, 이 질문과 앞으로 나올 추가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하기를 정중히 거절하는 바입니다.”
나왔다.
나는 깜짝 놀란 듯 멍하니 서 있었지만, 연기였다. ......
그때 프리먼 검사가 날카롭고 높은 목소리로 이의를 제기했고, 재판부 협의를 요청했다.

---> 할러 변호사가 불만에 가득 찬 프리먼 검사와 페리 판사의 따가운 시선을 간신히 이겨 내가며 오파리지오 증인을 몰아붙입니다. 오파리지오의 사업 파트너들을 잔뜩 언급해가더니, 마침내는 그가 지분을 갖고 있던 윙 넛츠라는 택배 회사의 다른 지분권자인 도미닉 카펠리를 알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가는데, 여기서 갑자기 증인이 진술거부권을 행사합니다.
여기서 오파리지오가 언급한 ‘진술거부권’은, 원문상 ‘Fifth Amendment right’입니다. Fifth가 대문자로 시작하는 게 특이합니다. 이는 직역하면 ‘수정헌법 제5조의 권리’라는 의미입니다. 미국 수정헌법 제5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No person shall be held to answer for any capital, or otherwise infamous crime, unless on a presentment or indictment of a Grand Jury, except in cases arising in the land or naval forces, or in the Militia, when in actual service in time of War or public danger; nor shall any person be subject for the same offence to be twice put in jeopardy of life or limb; nor shall be compelled in any criminal case to be a witness against himself, nor be deprived of life, liberty, or property, without due process of law; nor shall private property be taken for public use, without just compensation.
누구라도, 대배심에 의한 고발 또는 기소가 있지 아니하는 한, 사형에 해당하는 죄 또는 파렴치죄에 관하여 심리를 받지 아니한다. 다만, 육군이나 해군에서 또는 전시나 사변시에 복무중에 있는 민병대에서 발생한 사건에 관하여서는 예외로 한다. 누구라도 동일한 범행으로 생명이나 신체에 대한 위협을 재차 받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사사건에 있어서도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당하지 아니하며, 누구라도 정당한 법의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또 정당한 보상 없이, 사유재산을 공공용(公共用)으로 수용당하지 아니한다.
[출처 : 세계법제정보센터, http://world.moleg.go.kr/web/tl/themaLgslReadPage.do?A=A&code=700201&searchType=all&searchPageRowCnt=10&CTS_SEQ=28071&AST_SEQ=1061&ETC=]

수정헌법 제5조에 규정된 여러 권리들 중 ‘어떠한 형사사건에 있어서도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를 '자기부죄금지 특권(the privilege against compelled self-incrimination)'이라고 하는데, 이로부터 유래되는 권리가 바로 진술거부권 또는 묵비권입니다.


[559-562쪽]  “재판장님, 저는 이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변호인이 이 법정과 사법부를 모독해왔다고 생각합니다. ...... 이제 그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오파리지오는 묵비권 증인(a Fifth witness)이었습니다. 배심원단 앞에 허수아비처럼 내세웠다가 묵비권을 행사하면 바로 꺼내서 던져버릴 수 있는 증인 말입니다. 그게 변호인의 계획이었습니다. ......”
......
“이건 너무나 부당한 일입니다, 재판장님. 할러 변호사가 세운 계획이 틀림없고요. 직접신문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진술을 이끌어내고는 오파리지오를 몰아세워 묵비권을 행사하게 해서 검찰은 반대신문도 못 하고 어떤 식으로도 시정할 수가 없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이게 과연 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재판장님?”
......
“오파리지오의 진술 전체를 삭제하겠습니다.” 페리 판사가 선포했다. “배심원들에게 그 진술은 고려하지 말라고 할 거고요.”
......
판사가 배심원들에게 오파리지오가 말한 것을 모두 고려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있었지만 너무 늦었다. 메시지는 이미 전달되었고 모두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의도했던 대로.

---> 프리먼 검사가 할러 변호사에 대한 격한 분노의 감정을 재판장에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재판장 역시 할러 변호사에게 대단히 서운한 감정을 표시합니다.
원문의 ‘take the Fifth’를 번역자는 ‘묵비권을 행사하다’로 옮겼습니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take the Fifth (Amendment)’라는 표현이 있는데, 역시 ‘묵비권을 행사하다’라는 의미네요.
결국 이 소설의 원제목 ‘The Fifth Witness’의 한글 제목은 ‘묵비권을 행사하는 증인’ 정도가 옳고, ‘다섯 번째 증인’은 적절하지 않은 제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번역자도 위 대목을 정확히 번역하였듯이 분명히 대문자로 시작하는 ‘Fifth’가 ‘다섯 번째’가 아니라 ‘수정헌법 제5조’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는데, 왜 제목은 ‘다섯 번째 증인’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출판사 측에서 더 쉬운 제목을 원했던 것일까요.
아무튼, 할러 변호사는 오파리지오를 신문하면서 그가 마피아와 관련을 맺고 있는 등 뭔가 어두운 뒷배경이나 있는 듯이 거세게 몰아붙입니다. 그런 신문 과정에서 자칫 자신에게 제기되는 어두운 의혹으로 인해 주주의 불신이나 주가 하락 등 사업상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오파리지오로 하여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도중에 묵비권을 행사하도록 유도합니다.
할러 변호사가 이 증인을 이용해서 배심원들에게 의혹이나 잔뜩 심어주고 검사의 반대신문은 막아버린 것이라는 계략을 알아챈 프리먼 검사는 거칠게 항의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습니다. 이미 오파리지오가 먼저 할러 변호사의 계략에 말려들었고, 다음으로 배심원들도 그 계략에 말려들어버린 후입니다.
뒷부분에서 할러 변호사는 애런슨 변호사에게 이 당시의 자신의 속내를 다음과 같이 직접 밝힙니다.

[585쪽]  “마피아와 관련 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밝혀질 거라는 게 분명해지면, 그걸 막아보려고 애쓸 거라고 생각했어. 그럼 어떻게 하겠어? 묵비권밖에 없지.”

이런 꼼수의 달인 할러 변호사를 얄미워해야 할지, 기발하다고 해야 할지, 참......


[564쪽]  “...... 증인은 나를 위해 수사를 맡아서 해주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데니스?”
“네, 그게 내 직업이죠.”
“미첼 본듀란트 살인 사건 피고인의 변호를 위해서 광범위하게 수사를 했고요, 그렇죠?”

---> 이제 할러 변호사의 수사관 시스코가 마지막 증인으로 나섭니다. 오파리지오 묵비권 유도작전이 성공했으니, 이제 자신의 수사관을 이용해 쐐기를 박아버리려 하겠죠.
여기서도 앞서 애런슨 변호사가 증인으로 나왔을 때의 문제 제기를 똑같이 할 수 있겠습니다. 시스코 수사관 역시 중립적 입장에 선 제3자가 아니라 일방 당사자 편에 일방적으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다면 일단 증인으로 나올 자격이 있는 것이고, 그 증언이 신빙성 있냐 없냐는 별개의 문제에 불과합니다. 그게 ‘공판중심주의’입니다.
우리 형사법정 같으면, 이런 사람이 증인으로 채택될 가능성은 많지 않습니다. 중립적인 제3자가 아니니, 굳이 증언을 들어볼 필요가 있겠느냐는 이유로 말이죠. 같은 이유로, 검사 입장에서 중요한 증인인 수사담당 경찰관도 거의 증인으로 서지 못합니다. 피고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진술만 할 거라는 일방적인 의심 덕분이죠. 그런데도 우리 법정은 ‘공판중심주의’를 추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65-568쪽]  “...... 웨스트랜드 내셔널 주차장의 출입구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컬렌 형사와 롱스트레치 형사가 카메라 녹화분을 살펴보면서 주차장이 문을 연 시각인 오전 7시부터 본듀란트 씨가 이미 사망했다고 확인된 시각인 오전 9시까지 그 주차장에 들어온 모든 차량의 번호를 적어놨더군요. ......”
......
“...... ALOFT가 웨스트랜드 내셔널에 정기적으로 문서를 전달할 때 윙 넛츠 택배를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목한 것은 왜 그 차량이 8시 5분에 주차장에 들어와서 은행 영업 시작 시각인 9시도 되기 전에 떠났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나는 시스코를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필요한 것은 전부 얻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뼈에 살이 붙어 있어도 접시를 물려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때로는 배심원들에게 의문만 제기하고 끝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질문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 시스코 증인이 미리 할러 변호사와 짠 대로 그들의 작전에 척척 맞는 증언을 해나갑니다. 할러 변호사와 시스코는 범행시점 무렵 범행장소인 주차장에 다녀간 택배회사 차량이 오파리지오와 어떻게든 몇 단계를 거쳐 연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군요. 그 사실을 피해자가 오파리지오에게 보낸 협박편지와 또 연결시켜 오파리지오 음모론을 만들어낸 것이구요.
아무튼 할러 변호사와 시스코는 오파리지오의 택배회사 차량이 이날 주차장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마치 대단히 특이하고 중요한 일인 것처럼 한껏 부각시킵니다. 아니, 평소 배달 일로 그곳을 오가던 택배 차량이 아침 일찍 다녀간 게 뭐가 이상한가요, 그 택배 차량이 다른 때도 그 시간대에 거길 다녀갔다는 사실만 밝혀진다면 이건 아무 의미도 없는 얘기인데, 결국 공연히 의혹이나 던져보겠다는 부적절한 증언이지 않은가요?
한편, 여기서 할러 변호사의 작은 변론기술 내지 연기 한 가지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시스코를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이 기대한 중요한 장면이 나왔을 때, 잠시 정적을 만들면서 배심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죠. “자, 여기 좀 봐봐” 하는 것이죠.


[568쪽]  내 직접신문은 범위가 매우 정확해서 차량번호판에 관한 진술만을 포함했다. 덕분에 프리먼이 반대신문에서 다툴 거리가 거의 없었다. ......
......
30분 후, 프리먼이 패배를 인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 프리먼 검사 입장에선 시스코 증인의 택배 차량 운운은 전혀 예상 못한 내용의 증언이었을 겁니다. 이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어 이 반대신문 때 제대로 대처하기는 곤란하였을 것이구요.
일단 오늘은 여기서 물러서고, 재판이 끝난 다음 택배 차량과 관련된 기록을 확인해서 내일 재판 때 반격을 시도해야겠습니다.


[568쪽]  그러자 판사가 내게 더 부를 증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습니다, 재판장님.” 내가 말했다. “변호인 측은 이것으로 모든 증인신문을 마치겠습니다.”
판사는 배심원단을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다음 날 아침 9시에 회의실로 다시 모이라고 지시했다. 배심원들이 나가자 판사는 재판을 마무리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양측에 반박 증인(rebuttal witness)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프리먼은 반박 증인을 부를 권리를 내일 아침까지 유보하고 싶다고 말했다.

---> 드디어 피고인과 변호인 측의 증인신문이 모두 끝납니다. 
이제 프리먼 검사 입장에서, 오늘 새로 나온 증언들에 대한 반박자료를 준비해서 내일 들이밀 일이 남았습니다.


[570쪽]  다음 날 아침 안드레아 프리먼은 나를 놀라게 하지 않음으로써 나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판사 앞에 서서 반박 증인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검찰 측의 증인신문을 모두 끝내겠다고 말했다.
......
프리먼은 혈흔으로 밀고 나가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셰에라자드의 클라이맥스를 빼앗았든 빼앗지 않았든 상관없이 그녀는 이 재판에서 반박의 여지가 없는 딱 하나의 증거인 혈흔으로 승부를 보려는 거였다.

---> 마지막 재판날이 되었습니다.
프리먼 검사가 적어도 택배 차량 문제 등 몇 가지 반박자료를 준비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냥 다 포기하고 맙니다. 전날 할러 변호사의 꼼수에 모든 기가 빠져나가 전의를 상실하였거나, 아니면 가장 확실한 혈흔 증거가 건재한 이상 할러 변호사가 잔뜩 제기한 의혹들은 결국 아무 쓸모도 없는 거라고 자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571쪽]  프리먼 검사는 전형적인 검찰의 논고 방식을 따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먼저 사실들로 집을 짓고 그다음에는 감성적으로 호소하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리사 트래멀이 범인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재판이 시작된 이후로 법정에 제시된 증거물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언급한 것 같았다. 논고는 무미건조했지만 축적되면서 설득력이 더 커졌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고 혈흔 증거로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망치, 신발, 논란의 여지가 없는 DNA 검사 결과들.
“이 재판이 시작됐을 때 제가 여러분께 혈흔이 진실을 말해줄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프리먼 검사가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것은 다 무시할 수 있지만 혈흔 증거는 그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혈흔 증거 하나만 가지고도 제가 주장한 바와 같이 유죄 평결을 내리시게 될 것입니다. ......”

---> 오후 1시부터 최종의견 진술 절차가 시작됩니다. 할러 변호사의 설명에 의하면, 검사가 ‘최종논고(closing arguments)’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처음과 나중에 하고 변호인이 그 중간에 ‘최종변론(closing arguments)’을 한다고 합니다.
번역자는 closing arguments라는 하나의 용어를 검사의 경우엔 ‘최종논고’로, 변호인의 경우엔 ‘최종변론’으로 각각 달리 번역하였네요. 우리 법의 용어로는 보통 ‘최종의견 진술’이라고 하고, 그 순서는 검사 먼저, 피고인과 변호인이 나중이 됩니다. 나중에 의견을 진술할수록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더 이롭다는 장점이 있어,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유리한 순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LA에서는 이렇게 검사가 두 번이나 유리한 순서를 잡을 수 있는 모양이군요.
아무튼 프리먼 검사는 혈흔 증거가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초지일관인 프리먼 검사를 위해서라도 배심원들이 할러 변호사가 꼼수와 쇼의 제왕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 주어야 할 텐데요.


[571-575쪽]  그때부터 나는 우리가 내놓은 증거들과 검찰 측의 반박 내용과 검찰 측 주장의 결함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러고는 대답이 나오지 않은 질문들을 던졌다. 서류가방은 왜 열려 있었을까? 망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은 채로 있었을까? 리사 트래멀의 차고는 왜 잠겨있지 않았을까? 자택의 압류를 막아낼 수 있었을 사람이 왜 본듀란트를 죽였을까?
그러고는 마침내 내 최종변론의 핵심인 마네킹 이야기로 넘어갔다.
“아슬래니안 박사의 증언만 가지고도 검찰의 주장이 거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변호인 측 주장의 다른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매니(아슬래니안 박사의 증인신문 때 등장했던 마네킹) 하나만 보더라도 여러분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
......
“이 재판은 물리적 증거(the physical evidence)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황적 증거(the circumstantial evidence)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The case doesn’t bear scrutiny in the light of day. 결국 이 재판의 결과를 결정하게 될 것은 합리적인 의심(reasonable doubt)입니다. 상식(common sense)이 여러분을 인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감(instinct)이 여러분을 인도할 것입니다. ......”

---> 할러 변호사가 최종의견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의 주장을 듣고 보면, 그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작정 의혹들을 던지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충분히 제기해볼 수 있는 의혹들입니다. 설득력이 상당히 있는 주장입니다.
특히 저는, 피고인이 아무리 자신의 집을 압류한 피해자에게 불만이나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굳이 그를 살해까지 할 정도로 미워했을까, 더구나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피고인은 피해자를 제대로 한 번 만나본 적도 없다는데 한 번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을 굳이 살해까지 할 마음이 어떻게 생길 수 있을까, 살해할 마음을 먹을 만큼 피해자와의 사이에 무슨 특별한 계기나 사건도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들만 갖고는 아무래도 범행 동기가 약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도 배심원이라면 할러 변호사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저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데 대해 ‘합리적 의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원서를 보니 “The case doesn’t bear scrutiny in the light of day”라는 한 문장이 번역서의 중간에 빠져있길래 추가해 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577-580쪽]  페리 판사는 곧바로 배심원들에게 내리는 최종 지시사항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숙의(deliberations)를 할 때의 일반적인 규칙들뿐만 아니라 이 사건 재판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사항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특히 루이스 오파리지오의 증인신문에 대해 주의를 주면서 숙의를 하는 동안 그의 진술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말라고 다시 한 번 경고했다.
판사가 배심원들에게 주는 지시사항을 읽는 데 걸린 시간이 내가 최종변론을 하는 데 걸린 시간에 맞먹었지만, 마침내, 3시 직후에, 판사는 열두 명의 배심원이 임무를 시작하도록 숙의실로 돌려보냈다.
......
“벌써 평결이 나왔대. 5분 만에.”

---> 양측의 증거 공방이 끝나면 이제 배심원들의 시간이 됩니다. 배심원들끼리 별도의 방에서 사건의 결론에 대해 토론하고 정하는 deliberations를 하게 됩니다. 우리 법의 용어로는 ‘평의’라고 하고, 흔히 ‘숙의’ 또는 ‘합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평의를 앞두고 재판장은 배심원들에게 그들이 고려하여야 할 사항이나 주의사항 등을 자세히 설명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평의는 배심원 12명의 만장일치로 결론을 정하여야 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립니다. 1명이라도 반대하는 경우 몇날 며칠이 소요되었더라도 재판은 무효가 됩니다. 새로 재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만장일치에 이르기 위해 토론, 토론, 또 토론을 계속 이어가게 됩니다.
우리 국민참여재판도 법상 만장일치가 원칙이나, 만장일치에 이르지 못한 경우 다수결도 허용하고 있습니다. 다수결도 가능하기 때문에 사실 토론, 토론, 또 토론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좀 토론을 하다 말고 그냥 투표로 결정하자고 할 수 있습니다. 다수결로는 제대로 된 평의도 없이 성급한 책임회피성 결론만 내고 말 수도 있습니다. 결국 배심재판 흉내만 내는 것이죠.
자, 그런데 이 사건은 이례적으로 5분 만에 배심원들의 평의 결론, 즉 평결이 이루어집니다. 예상했던 대로 만장일치로 무죄평결입니다. 할러 변호사의 ‘승리’입니다.


[583-584쪽]  그들은 남부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떼로 몰려왔다. 다들 리사 트래멀이 페이스북에 올린 유혹의 공지 글을 보고 달려온 것이다. 리사는 평결이 내려진 다음 날 오전에 파티를 공지했고, 지금 토요일 오후에 손님들이 캐시 바에 10줄로 서 있었다.
......
부당한 기소라는 가마솥에 던져져 고통받다가 멀쩡하게 살아나온 리사 트래멀은 이제 활동가에서 우상으로 도약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
내 직원들과 나는 뒷마당의 파라솔을 단 피크닉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
“우와, 이 사람들 좀 봐.” 로나가 말했다. “다들 무죄 평결(a not-guilty verdict)이 곧 결백하다(innocent)는 뜻은 아니라는 걸 모르나 봐?”

---> 할러 변호사와 그의 동료들이 리사 트래멀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초대받습니다.
할러 변호사의 동료인 로나 테일러의 마지막 말은 매우 당연한 얘기입니다. 무죄판결의 의미는, 단지 유죄판결을 하기에는 증거가 다소 부족하다는 의미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죄가 없다거나 진실이 발견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사건의 무죄판결은 ‘할러 변호사와 피고인’의 승리이지, ‘진실’의 승리나 ‘정의’의 승리는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도 무죄판결을 받은 사람,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이 당연한 말을 애써 외면하려 합니다. 진실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합니다. 아마도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기가 두려워서이겠죠.

끝으로,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의미 있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다음 작품에서 할러 변호사는 검사장 선거에 도전한다고 하는데요, 혹시 이 사건에서의 안 좋은 경험이 그 계기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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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4일 일요일

[독서일기] '다섯 번째 증인' (feat. 미국 형사사법제도) 제3편

댓글 없음 : 작성자: iMagistrat 시간: 11/24/2019 11:30:00 오후 라벨: 독서일기 , 마이클 코넬리 , 미국 , 미키 할러 , 배심제 , 법정소설 , 변호사 , 사법제도 , 플리바기닝 , 형사소송
[제2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371쪽]  프리먼은 연방 수사 대상 통지서(federal target letter) 문제를 다뤄야 할 급박한 필요를 느낀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부른 다음 증인은 비밀경호국의 찰스 바스케즈 요원이었다.

---> 앞서 할러 변호사는 컬렌 형사에 대한 반대신문에서 '연방 수사 대상 통지서'라는 자료를 갖고 컬렌 형사를 공격하였습니다. 오파리지오가 연방 수사기관의 조사대상이 됨으로써 이 사건의 피해자 본듀란트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그렇다면 그런 동기로 인해 오파리지오가 피해자를 살해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프리먼 검사는 그 연방 수사 대상 통지서를 작성한 사람을 증인으로 불러 할러 변호사가 제기한 의혹을 해소하려고 노력합니다.


[375쪽]  나는 정원사가 망치를 발견하기 전에도 그 생울타리 주변에서 적어도 열두 번은 더 작업을 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배심원단을 위해 심은 작은 씨앗이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누군가가 거기에 망치를 갖다 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의 씨앗이었다.

---> 프리먼 검사는 다음 증인으로, 살인 사건 현장에서 한 블록 반 떨어진 곳에 있는 주택의 생울타리 안에서 망치를 발견한 정원사를 증언대에 올렸습니다. 검사가 범행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망치를 증거로 제출했으니, 그 망치를 발견해 수사기관에 넘긴 사람도 그 입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법정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재판은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석 달 정도가 지나 비로소 열리게 되었습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석 달이나 지난 시점에 범행도구가 발견되었으니, 할러 변호사 입장에선 당연히 그 발견경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작전을 씁니다.


[375-376쪽]  나는 굳이 반대신문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관리의 연속성이나 망치가 범행도구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 망치가 미첼 본듀란트를 죽게 한 무기였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것이 리사 트래멀의 것이었다는 사실까지 인정할 계획이었다.
예상치 못한 조치가 될 터이지만 모함이라는 변호인 측 주장과 잘 어울리는 유일한 조치였다.


---> 이번 검찰 측 증인은, 망치가 발견된 집의 소유자와 망치를 과학수사대 실험실에 인계한 경찰관들입니다.
비록 석 달이나 지나 발견되긴 했지만, 이 망치에는 피해자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그리고 리사 트래멀의 집 차고에 보관되어 있던 공구세트에 구비된 연장들 중에서, 사건 발생 무렵부터 지금까지 이 망치만 유일하게 행방이 묘연해 왔구요. 따라서 이 망치가 범행도구이고 피고인의 소유라는 걸 부인하긴 힘든 상황입니다.
때문에 할러 변호사는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하고서, 누군가 리사 트래멀을 모함하려 꾸민 짓이라고 주장하는 작전을 계속 고수하기로 합니다.


[378쪽]  “...... 하지만 산은 갈수록 험해지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검사가 아직 과학을 끌어들이지 않았는데, 배심원들은 과학을 사랑해요. 과학이 그들에게 탈출구를, 군말 없이 남의 의견에 따르는 길을 보여주거든요. 사람들은 배심원이 되고 싶어 하죠. 직장도 빠지고 흥미로운 사건을 재판하는 법정의 맨 앞줄에 앉아서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실제 삶의 드라마를 구경하는 거잖아요. 집에서 TV로 보는 게 아니라. 하지만 조만간 배심원실로 돌아가서 서로를 쳐다보며 평결을 내려야 하는 때가 오죠.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아요. 근데 과학이 있으면 결정이 쉬워지는 거예요. ‘아, DNA가 일치하면 틀릴 수가 없잖아. 혐의대로 유죄.' 알겠어요? 이게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에요, 리사. 그리고 난 그 미래에 대해 당신이 오해나 착각을 하고 있지 않기를 바라요.”

---> 지금까지 진행된 재판상황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던 의뢰인에게 할러 변호사는 미리 김칫국물 마시면 안 된다고 초를 칩니다. 지금 상황이 꼭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만은 아니고 재판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자중자애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핵심을 찌르는 말을 하네요. 누구나 고통스런 선택의 순간이 닥치면 손쉬운 탈출구를 찾기 마련이고, 그런 자신의 선택에 대해 자기합리화를 시도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럴 때 바로 과학이 손쉬운 탈출구가 되고 자기합리화를 위한 훌륭한 근거가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렵디 어려운 결정과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 도처에 널려있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과학을 쉽게 맹신하는 이유 중 하나를 알 수 있는데요, 그래서 과학에 대한 지나친 맹신은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과학은 단지 우릴 도울 뿐이고, 우리가 과학으로 도피하거나 과학을 핑계거리 삼을 순 없는 것이며, 결국 결정과 선택은 인간 자신이 하는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인간이 져야 하는 것입니다. 


[385쪽]  공판이 재개되자 검찰은 신시아 롱스트레치 형사를 증인으로 불렀다. ...... 영리한 계획이었다. 의문을 제기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을 내미는 거다. 컬렌과 롱스트레치를 통해 수사의 전반적인 경과를 설명하고, 법과학 전문가를 증인으로 내세워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종합한다. 그러고는 법의관을 불러 DNA 증거를 내놓으면서 증인신문을 마무리할 것이다. 치밀하고 깔끔한 계획이었다.

---> 프리먼 검사는 이 사건 수사에 참여한 롱스트레치 형사를 증인으로 불러 전반적인 수사 과정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과학수사의 결과물들을 내세워 이들의 사건 설명이 옳음을 증명할 것입니다.
밑줄 부분이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되지 않아 원문을 찾아봤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검사는 컬렌과 롱스트레치의 증언을 통해 수사 과정을 설명하고 이를 과학수사(the forensics)로 종합한다. 그녀는 법의학 전문가(medical examiner)와 DNA 증거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할 것이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386쪽]  “우선 압수수색 영장 신청서(request)를 작성해야 합니다. 대상 건물을 수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게 만든 여러 사실과 증거를 열거해서 영장 신청의 상당한 이유를 진술(a probable cause statement)해야 하죠. 저는 은행 근처에서 용의자를 보았다고 한 목격자의 진술과 앞뒤가 맞지 않았던 용의자의 진술을 인용해서 수색 영장 신청 사유를 작성했습니다. ......”

---> 프리먼 검사는 롱스트레치 증인을 통해 주로 리사 트래멀의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 과정과 그때 발견된 증거물에 대한 설명을 이끌어내려고 합니다. 먼저, 증인에게 압수수색영장(a search warrant)을 발부받는 절차에 대해 묻자, 증인은 위와 같이 대답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을 때 필요한 요건은 범죄혐의, 필요성, 관련성이고, 이 요건들이 압수수색영장 신청서에 잘 설명되어 있어야 합니다. 즉, 대상자의 범죄혐의가 어느 정도는 인정될 가능성이 있어야 하고, 대상자의 범죄혐의를 밝히는 데 이 수색과 압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어야 하며, 이 수색을 통해 압수하려는 물건이 이 사건 및 이 피의자와 관련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롱스트레치 형사도 비슷한 취지로 압수수색영장의 신청절차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386-387쪽]  “우리는 수색 중에 찾아낼 증거물을 잘 확보하고 처리하기 위해서 비디오 촬영기사와 범죄현장 감식반을 불러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수색의 전 과정이 비디오로 촬영되었나요?”
......
90분짜리 비디오가 배심원단 앞에서 재생되었고 간간히 롱스트레치의 설명이 곁들여졌다.


---> LA 경찰은 수색을 하러 나갈 때 경찰관들만 가는 게 아니라 비디오 촬영기사와 범죄현장 감식반을 대동하는군요. 특히 비디오 촬영까지 한다는 것은 그만큼 신중하게 수색과 압수 업무를 행한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신중하게 일을 한다는 것은 LA 경찰이 원래 법을 잘 지켜서 일을 꼼꼼하고 정확하게 처리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피고인과 변호인으로부터 수시로 경찰 수사에 절차적 하자가 있다는 어필을 받아 시달려온 때문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수색 과정에 참여한 경찰관의 증인신문 기회에, 이 수색 과정을 촬영한 동영상도 함께 배심원들에게 소개되는군요. 무려 90분짜리 동영상이라는데, 우리나라 법정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미국에서는 법정이 이렇게 ‘극장’이 되어도 괜찮은 모양입니다.


[389-390쪽]  “어떤 종류의 망치였죠?”
“장도리였습니다.”
......
프리먼은 망치를 가지고 롱스트레치에게로 걸어가 망치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롱스트레치 형사, 지금 증인이 들고 있는 망치가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프리먼은 롱스트레치에게서 망치를 돌려받은 후 검찰 측 증거물로 제출한다고 말했다.


---> 최근 범행현장 부근 덤불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범행도구인 망치도 롱스트레치 증인의 설명과 함께 배심원들에게 보여지는 기회를 얻습니다. 


[391-392쪽]  “망치 손잡이에서 혈흔을 발견했습니다.”
“몇 주 동안이나 관목 속에 있다가 발견됐는데도요?”
내가 벌떡 일어서서 망치가 관목 속에 있었던 기간에 대해서는 어떤 증언이나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재판장님, 망치는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몇 주가 지나서야 발견됐습니다. 그 기간 동안 망치가 관목 속에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리먼이 대응했다.
......
판사가 고함을 질렀다. “변호인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입니다. 프리먼 검사, 질문할 때 증거로 제출되지 않은 사실을 추정하지 않도록 잘 생각해서 하세요.”


---> 프리먼 검사가 롱스트레치 형사를 상대로 주신문을 하던 중, 할러 변호사가 끼어들어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 망치는 누군가가 피고인을 모함하기 위해 최근에 그 덤불 속에 놓아둔 것이라고 몰고 가려는 할러 변호사 앞에서, 프리먼 검사는 범인이 범행 직후 그곳에 버린 것이라는 ‘주장성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사자 쌍방의 공방이 치열하면, 중간에 있는 진행자 입장에선 규칙을 더 깐깐하고 엄격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범죄사실을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도록 입증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검사로서는,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주장은 함부로 하여서는 안 됩니다. 추정만 갖고 어떠한 주장을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때문에 재판장은 할러 변호사의 손을 들어줍니다.


[392쪽]  프리먼이 여기서 말을 멈추고 망치에 관한 DNA 분석결과 보고서(the forensic report)를 검찰 측 증거물(a prosecution exhibit)로 채택해줄 것을 판사에게 요청했다.

---> 이 망치에서는 혈흔이 발견되었고, 그 DNA와 피해자의 DNA가 서로 일치한다는 분석결과가 있었습니다. 이 분석결과 보고서 역시 망치와 별도로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됩니다.


[394쪽]  “...... 근데 그 신발은 집 안이 아니라 차고에 있었습니다. 판지 상자에 들어 있었는데 상자에는 흙이 많이 묻어 있었어요. 아마도 정원에서 나온 흙인 듯했습니다. 그런데 신발은 아주 깨끗하더라고요. 그 점이 우리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
“그러니까 신발은 아주 깨끗한데 더러운 상자에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 의심을 샀다고 말씀하시는 거죠?(So you are saying that 
......?)”
나는 검사가 증인을 이끌고 있다(she was leading the witness)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의 제기는 받아들여졌지만 검사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배심원단에 전달되었다.

---> 롱스트레치 형사에 대한 프리먼 검사의 주신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증인을 신청한 당사자가 자신의 증인에 대해 먼저 신문하는 것을 주신문이라 하고, 그 반대편 당사자가 상대편 증인에 대해 증언의 신빙성 등을 문제 삼기 위해 공격적으로 신문하는 것을 반대신문이라고 합니다. 둘 간의 차이점 중 중요한 것은, 주신문에서는 유도신문이 금지된다는 것입니다. 주신문에서는 증인이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자연스럽게’ 법정에 내놓아야 합니다.
실제 신문에서 유도신문은 대개 “~~~라는 거죠?”라는 형태의 질문으로 나타납니다. “~~~라는 거죠?”는 어떤 특정한 방향의 대답을 끌어내려는 뉘앙스의 질문이어서, 신문하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묻게 되면 증인은 자기도 모르게 그에 이끌려서 “네, 그렇습니다”라는 식으로, 신문하는 사람이 원하는 방향의 대답을 하게 되기 쉽습니다. 원래 자기가 하려던 대답 방향을 잠시 잊고서 말이죠.
그래서 유도신문이 금지되는 것인데, 유도신문과 그렇지 않은 신문을 구별하는 게 실제로는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프리먼 검사의 질문도, 그게 증인으로부터 특정한 말을 유도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단지 증인이 한 말의 취지를 한 문장으로 명확하게 정리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증인의 말을 쉽게 이해하게 하려는 선량한 의도의 질문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396-397쪽]  프리먼이 왜 증언 순서를 정할 때 컬렌과 롱스트레치 사이를 떨어뜨려 놨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롱스트레치는 증언을 매우 잘했고 어쩌면 자신의 베테랑 파트너보다도 더 잘하는 것 같았다. 

---> 이 대목에선, 증인이 여럿 있는 경우 이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하느냐도 중요한 재판전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네요.


[401쪽]  “가정하는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증인. 증인은 살인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사람이 혈흔이 묻은 신발을 잠그지 않은 차고에 놔둘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특히 시간을 들여서 살인 무기는 갖다버리고 나서요?”
프리먼이 일어서더니 질문이 복잡하고, 증거로 제시되지 않은 사실들을 추정하고 있다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질문은 롱스트레치에게 던진 것이 아니었다. 배심원단을 향해 던진 것이었다.
“재판장님, 질문을 철회합니다.” 내가 선언했다. “그리고 이 증인에 대한 반대신문을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 롱스트레치 형사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반대신문 장면입니다.
프리먼 검사의 이의 제기 내용을 보니,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만 하여야 하는 거군요. 그리고 추정적 질문이나 가정적 질문도 하여서는 안 되는 거구요.
한편, 검사나 변호인이나 이렇게 증인을 신문하는 기회를 이용해서 배심원들에게 자기 자신의 논리와 주장을 전달하는 방법도 있을 수는 있겠군요.
그리고 할러 변호사는 배심원들에게 자신의 논리와 주장을 전달하는 중요한 말을 던진 다음, 그 순간 더 이상의 말 없이 신문을 종료함으로써 마지막 말의 여운이 배심원단의 마음속에 한동안 머물게 하는 변론기술도 쓰고 있습니다.


[412쪽]  목요일은 검찰의 모든 관현악적 요소들이 하나로 합쳐져 절정에 달하기로 되어 있는 날이었다. ...... 목요일은 과학의 날이었다. 모든 증거와 증언이 과학적 사실이라는 끊을 수 없는 끈으로 단단히 묶이는 날이 될 것이었다.

---> 재판은 월요일에 시작해서 이제 목요일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검찰 측 증인들에 대한 신문이 진행되고 있는데, 오늘 목요일에는 그동안 프리먼 검사가 아끼고 아껴둔 과학수사의 결과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럼 할러 변호사의 말대로 오늘 배심원들은 손쉬운 탈출구를 발견하고 스스로 자기합리화를 하며 안심들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413쪽]  목요일 아침 프리먼이 부른 첫 번째 증인은 미첼 본듀란트의 시신을 부검한 법의관보 요아킴 구티에레스 박사였다. 그 의사는 끔찍한 슬라이드 영상을 배심원들에게 보여주면서 모든 타박상, 찰과상, 부러진 이 등을 분류해서 설명했다. 나는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슬라이드 영상 사용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기각되었다. ......

---> 지금은 프리젠테이션의 시대, 사진이나 영상은 말이나 글을 필요 없게 만드는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부작용을 생각할 때 물론 남용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런 시대에 없어서는 절대 안 되는 필수품입니다. 더구나 기나긴 재판에 지치고 지친 배심원들의 주의를 그나마 이런 방법으로라도 그때그때 적절히 환기시켜주어야 합니다.


[417-419쪽]  우월감 콤플렉스를 자극하라. ‘나는 의사다. 나는 틀리지 않는다’라는 자부심을 자극하라.
“예전에 법정에서 증언하셨을 때 잘못된 판단에 근거하여 잘못된 진술을 하신 적이 있죠?”
“누구나 실수를 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랬고요.”
“스톤리지 사건은 어떻습니까?”
내가 예상했던 대로 프리먼이 재빨리 이의를 제기했다. ...... 
나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배심원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낸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배심원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별말 없이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과거에 구티에레스가 거짓 증언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내가 원한 건 그것뿐이었다.
......
“질문을 취소하겠습니다.”


---> 할러 변호사가 구티에레스 박사를 반대신문하고 있습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우월감 콤플렉스를 자극하기 위한 전략을 쓰기 위해, 미리 증인에 대한 뒷조사까지 하고 나온 모양이군요. 물론 증인에게는 이 사건과 관련해 증인이 경험한 사실에 대해서만 질문해야지, 할러 변호사처럼 이 사건과 관련도 없는 증인의 과거 개인적인 문제까지 거론해서는 안 됩니다. 할러 변호사는 금지된 질문을 던져 놓고는 재빨리 그 질문을 철회해버리는 방법으로 배심원들이 어떠한 예단을 갖게 만드는 꼼수를 동원합니다. 프리먼 검사가 흥분할 만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런 세세한 데까지 신경을 쓰며 배심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자신이 의도한 데로 사고방향을 이끌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배심원들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는 이 지루한 재판을 지켜보면서 과연 이런 세세한 부분에까지 모두 집중하며 할러 변호사가 의도한 상황을 제대로 알아채고는 있을까요? 사람의 집중력이 기껏해야 15분 정도밖에 못 간다고 해서 ‘TED’나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가 있는 거라는데요.


[421-426쪽]  “증인은 방금 전 다른 부상들을 보면 ‘피해자는 서 있다가 곧바로 쓰러져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피해자가 뒤에서 공격을 받았을 때 서 있는 상태였다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시죠?”
......
“그러니까 피해자는 치명적인 가격을 당할 당시 서 있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
“증인, 최초의 치명적인 가격이 있었을 당시 피해자의 자세와 두개골의 방향을 알 수 있다면, 범인이 살인 무기를 들고 있었던 각도를 알 수 있을 거라는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
“...... 우리가 피해자의 자세, 두개골의 방향, 무기의 각도 같은 이 모든 것들을 알고 있다면, 범인의 신장에 대해서 추측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
“...... 증인이 이 요소들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것 아닌가요?”
......
“키가 16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피고인이 자기보다 25센티미터나 큰 남자를 상대로 이 범죄를 저지르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 요소들이 보여줄 것이기 때문에 알고 싶지 ......”
“이의 있습니다!”
“......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요?”


---> 할러 변호사의 마지막 말에서 그의 전략을 알 수 있습니다. 작고 연약한 여성이 자신보다 25센티미터나 키 큰 건장한 남성의 뒤통수를 망치로 때려 쓰러뜨리는 게 가능하겠느냐며 상식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과학자든 의사이든 어떤 분야의 전문가이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고 모든 것을 아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설령 자기 분야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실제 그가 아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 대부분은 모르는 것투성이인 게 당연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바로 그 부분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전문가 증인이지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을 수밖에 없는데, 이 증인이 모르거나 대답하지 못할 만한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배심원들로 하여금 증인에 대한 신뢰감을 가질 수 없게 하려는 것이죠.


[428쪽]  점심시간 동안 나는 오후 공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리사 트래멀에게 설명해주었다. 
...... 나는 검찰 측 증인신문이 마무리되고 변호인 측 증인신문이 시작되면서 우리가 무릅써야 할 위험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리사는 잔뜩 겁을 먹었지만, 나를 믿는다고 했다. 의뢰인에게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 족했다. 진실? 그건 아니고 믿음? 그거다.

---> 할러 변호사가 또 중요한 말을 하네요. 진실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한 거라고 합니다. 
진실이란 건 그게 실제로 진실이어서 진실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게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진실인 것이죠. 우리가 무엇인가를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결국 진실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428쪽]  나는 그녀가 검찰 측 마지막 증인이고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두 가지 사실을 진술할 거라고 추측했다. 회수된 망치에서 발견된 혈흔에 대한 유전자 분석조사 결과 미첼 본듀란트의 유전자와 완벽히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고, 리사 트래멀의 원예용 신발에서 발견된 혈흔도 조사 결과 피해자의 혈흔과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을 그녀가 확인해줄 것 같았다.

---> 드디어 검찰 측 마지막 증인이 등장합니다. 생물학 박사이고 교수이자 LA 지역 범죄과학 연구실 총책임자입니다. 그는 신발과 망치가 이 사건의 결정적 증거라는 점을 증언해줄 전문가입니다.


[429-432쪽]  "재판 시간을 절약하고 배심원단이 DNA 비교 분석에 관한 길고 지루한 설명에 시달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변호인 측은 명기하겠습니다(the defense stipulates)."
......
“판사님, 우리가 자체적으로 실시한 분석검사에서도 일치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 변호인 측은 명기하겠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누군가가 고의로 그 신발에 피해자의 혈흔을 묻혀놨다는 것을 입증해 보일 겁니다. 진실은 거기 있거든요. 그것이 피해자의 혈흔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요. 우리는 그 혈흔이 피해자의 것임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프리먼 검사가 과학전문가 증인의 입을 통해 피고인의 신발과 망치에 묻은 피가 피해자의 것이라는 점을 주장해 나가려고 하는 순간, 할러 변호사가 끼어들어 stipulate하겠다고 합니다.
stipulate는 우리 법으로 말하면 ‘증거동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에 대해 증거로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말 번역서의 ‘명기하다’라는 표현보다 ‘증거동의 하다’ 또는 ‘증거로 하는 데 동의하다’라는 표현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할러 변호사의 증거동의로 인해 피고인의 신발과 망치에 대해 설명하러 나온 증인이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증인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으니, 모두에게 잘 된 일인 걸까요?


[432-434쪽]  나는 검찰 측 주장을 클라이맥스 없이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다. 검찰은 ‘저 여자가 범인이야! 저 여자가 범인이야! 저 여자가 범인이야!’라고 외치는 상징과 드럼과 증거를 가지고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고 돌아가는 대신, 입을 삐죽거리며 돌아갔다. 프리먼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녀는 점차적인 발전에 클라이맥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셰에라자드'를 앞의 10분은 듣고 뒤의 2분은 듣지 않고 꺼버리는 게 말이 되는가.

---> 아, 이 증거동의가 할러 변호사의 꼼수였군요. 검사의 마지막 증인신문을 무산시켜 검사로 하여금 입증전략에 차질을 빚게 하고 맥까지 빠지게 하려는 것이었군요. 프리먼 검사는 할러 변호사의 의도를 뒤늦게 알아채고 이의를 제기하지만, 재판장은 이를 기각합니다.
이 작품에선 검찰 측 마지막 증인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증거동의가 대단히 극적인 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제 생각엔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적 재미를 위해 과장한 것이고 실제 재판에서라면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즉, 변호인이 검사의 증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데 굳이 검사가 증인신문을 할 실익이 크진 않고 검사가 변호인의 증거동의에 반발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증인에게서 이끌어낼 수 있는 사실이란, 단지 DNA의 비교분석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신발과 망치의 DNA가 피해자의 것과 일치한다는 정도의 증언만으로는, 프리먼 검사가 배심원들 앞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기’에는 밋밋합니다. 잔잔한 클래식 반주에 맞춰 랩을 하겠다는 격이죠.
물론 결정적이거나 중요한 증언을 하러 나온 증인에게는 할러 변호사의 전략이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마지막 제4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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