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6일 수요일
프랑스 법무부의 4가지 사법개혁 방안
자료 수집 차원에서 일단 글 제목만 여기 옮겨봅니다.
한참 전 일이긴 하지만 2022년 2월 2일자 프랑스 정부 홈페이지 "Conseil des ministres du 2 février 2022. Résultats. Les réformes prioritaires du ministère de la justice." 글입니다.
법무부장관이 국무회의에서 발언한 4가지 사법개혁 방안을 소개합니다. 4가지 방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1. Déploiement de la procédure pénale numérique, conjointement avec le ministère de l’intérieur2. Généralisation du système d’information de l’aide juridictionnelle (SIAJ)
3. Développement du travail d’intérêt général (TIG) et de l’insertion professionnelle des personnes placées sous main de justice
4. De nouvelles mesures en faveur d’une justice de la vie quotidienne
2023년 12월 2일 토요일
예심판사? 수사판사? 예심수사판사?
프랑스 법원에는 두 종류의 판사가 일하고 있습니다. 재판절차를 담당하는 판사와 예심절차를 담당하는 판사, 후자가 바로 예심수사판사입니다. 예심절차란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사건이 재판절차에 보낼 만한 것인지, 유죄를 받을 만한 증거는 갖춰져 있는지 여부를 미리 심사한다는 의미인데, 단지 현재 있는 자료만 갖고 그냥 심사만 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증거를 수집하는 활동, 즉 수사를 한다는 게 특이한 점입니다. 예심절차를 담당하기 때문에 예심판사라고 하기도 하고, 수사를 하기 때문에 수사판사라고 하기도 하고, 이도저도 애매하니 한데 합쳐서 예심수사판사라고 하기도 합니다.
예심수사판사는 모든 중죄사건, 그리고 검사가 예심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예심수사를 청구하는 사건을 수사하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판사가 검사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쓴 글에서 프랑스의 juge d'instruction에 대해 설명한 대목입니다. 이 제도는 일찌감치 프랑스 사법제도를 받아들였던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 식민지 시대에도 시행되다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사라진 제도입니다.
2023년 10월 31일 화요일
Justice en direct 팟캐스트 소개
요새 팟캐스트를 이용하는 분은 퍽 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방금 검색해보니 '구글 팟캐스트'는 유튜브에 이용자를 모두 뺏기고 내년에 문을 닫는다고 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프랑스어 공부를 해볼까 하고 검색하다 발견한 프랑스 팟캐스트 하나 소개해드립니다.
<Justice en direct>라는 팟캐스트입니다. 꼭 팟캐스트 아니라도 일반 인터넷 사이트로 접근 가능합니다. 2010년부터 2013년 사이에 있었던 프랑스 경죄법원의 형사재판 장면을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매주 한 에피소드마다 한 개 사건의 재판 장면을 다루는데, 사건관계인의 이름만 안 들리게 할 뿐 법정에서 오고가는 피고인, 재판장, 검사, 변호사의 육성을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프랑스 경죄법원의 형사재판은, 재판장이 수사기록을 넘겨가며 기록의 주요 부분을 요약설명하면서 피고인과 수시로 문답을 하고, 검사와 변호인의 문답과 의견진술 순으로 통상 진행됩니다. 재판장이 거의 80-90% 이상의 발언권을 행사하고, 검사와 변호사, 피고인이 나머지 시간을 간간히 채워갑니다. 전형적인 유럽 대륙식 직권주의 형태의 재판이 바로 이것입니다.
2022년 5월 11일부터 시작된 이 팟캐스트는 현재까지 98개의 에피소드가 올라와 있습니다. 프랑스 형사사건 재판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공부할 수 있는 너무 좋은 컨텐츠네요. 저는 1/2 속도로 해놓고 듣는데, 프랑스어 듣기 공부에도 아주 딱입니다. 공부하기 좋은 컨텐츠야 머 어디든 잔뜩 널려있죠, 저도 이거 얼마나 꾸준히 공부할지는 사실 그다지 자신이......
Day6,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이 노래의 대략적인 가사는,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 그때 참 행복했었네 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회상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가사를 찬찬히 살펴보다 깨닫게 된 게 하나 있어요.
이 가사의 화자는 그때가 좋았고 또 좋았다고 하면서도, 다시 좋았던 그때로 돌아가고파요,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어요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에요. “지난날로 남겨야지” 하는 마지막 부분 가사처럼 지난날은 단지 지난날일 뿐이고 그냥 그때가 좋았었다 라고 딱 거기까지만 쿨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한 사람과 꽤 오래 연애를 해서 연애를 할 만큼 했고 후회도 안 남을 정도로 행복하게 잘 연애했기 때문이에요. 오래 연애를 했으니 이젠 헤어질 시점도 됐고 이쯤에서 이 정도로 연애가 끝난 건 잘된 일이고 그래서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이거지, 지금 그녀를 못 봐서 마음이 아프니 그녀와 다시 시작하고 싶다 하는 바람은 안 들어있는 가사입니다.
2023년 9월 16일 토요일
우리 형사절차 구조에서의 수사기록과 조서의 의의
9월 15일에 한국형사소송법학회 추계 학술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창온 교수님의 「직권주의와 당사자주의 형사절차와 증거법의 구조적 분석과 한국 형사소송법의 비판적 검토」라는 제목의 발표에 대해 토론을 하였는데, 제 토론문을 살짝 고쳐 여기에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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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자는 우리 형사증거법이 형사절차의 구조와 부정합상태에 놓여있는 문제점을 지적하셨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우리 ‘형사증거법’이 그러하다기보다는 형사증거법에 대한 우리 대법원과 주류 학계의 ‘해석론’이 그러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를테면, 조서의 증거능력과 연동시켜 조사자 증언의 증거능력도 패키지로 부정해온 2007년 이전의 해석론, 특신상태 요건을 폭넓게 활용함으로써 2007년 모처럼 입법된 조사자 증언의 증거능력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으려는 해석론, 증거자유 원칙과 배치되는 듯한 수사기관 영상녹화물의 증거능력 부정론, 제312조 명문규정과는 배치되는 듯한 공범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 부정론 등처럼, 대법원은 ‘재판절차에서의 수사기록 규제’라는 목적을 위해 논리적인 논리보다는 발표자도 지적하셨듯이 규범적 선언의 차원에서 증거법을 해석해온 경향이 있습니다. 위와 같은 해석론들은 증거법 규정의 문리적 해석만으로도 현행법 하에서 얼마든지 정반대의 결론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1. 발표문 내용처럼 우리는 대륙법계 직권주의 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직권적 수사절차를 갖고 있습니다. 이 수사절차라는 건 곧 예심절차입니다. 예심절차는 프랑스에서는 예심판사가, 예심판사 제도를 폐지한 대륙법계 국가들에서는 검사가 주재하는 절차로서, 사법관이 사건관계인들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고, 그것으로 부족하면 압수수색을 하기도 하고 계좌거래내역을 보기도 하고 통화내역을 보기도 하는 등으로 재판에 준하는 심리를 하면서 재판에 보낼 사건을 판단하고 추리는 절차이고, (이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증거가 모이고) 이게 곧 수사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심절차라는 건 피의자를 재판에 보낼지 여부를 판단(공소권 행사)하기 위해 이런저런 필요한 사실관계를 확인(수사)하는 절차입니다(그래서 공소권 행사와 수사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겁니다).
예심판사나 검사는 그가 모든 사건의 심리를 다 할 여력은 안 되니 사법경찰에게 조사를 위임하는 방법(우리나라에선 이걸 수사지휘라고 부릅니다)으로 예심을 진행하고, 재판을 준비하기 위한 절차이니 재판하는 판사가 보게 할 목적으로 예심절차 과정에서 확인한 사실관계들을 꼼꼼하고 자세하게 기록해 놓는데 이게 바로 수사기록입니다. 모든 수사기록에는 빠짐없이 조서가 들어있고 간혹 영상녹화물 같은 게 들어있기도 합니다. 재판을 하는 판사는 이미 같은 신분을 가진 사법관인 예심판사나 검사가 열심히 심리를 하여 그 결과를 자세히 기록해놓은 예심기록이 있으니, 정작 재판은 전문법칙 같은 복잡한 규칙 없이 비교적 간이한 방법으로 진행합니다. 미국은 플리바게닝 제도를 이용해 정식재판으로 가는 사건을 대폭 줄이는 방식으로 제도의 효율적 운용을 도모하고, 대륙법계 국가에서는 이렇게 예심절차를 이용해 사건을 효율적으로 처리합니다.
우리도 비슷합니다. 비록 우리 사법경찰이나 검사가 만드는 조서에 대해서는 오랜 기간 수많은 문제 제기와 거부감이 있어왔지만, 수사절차는 재판을 준비하기 위한 예심절차이기에 지금도 여전히 기록이 만들어지고 조서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판례에 따라 조사자 증언이나 영상녹화물은 재판에 등장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수사절차에서 확인한 사실관계들을 기록할 수단으로는 사실상 조서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과학기술 발전으로 녹음이나 녹화 등 새로운 기록수단은 늘어가지만, 현 제도상 조서의 대체물도 마땅히 없습니다.
즉, 우리 수사절차는 직권주의 형사절차의 예심절차에 해당하는 것으로, 수사기록과 조서에 대한 증거법적 평가도 그러한 형사절차 구조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재판절차를 당사자주의 구조라고 먼저 단정을 해두고서 수사기록이 재판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수사절차도 당사자주의 구조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인데, 그러면 미국처럼 플리바게닝 제도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제도의 도입도 매우 요원한 우리나라에서 전체 형사절차의 효율적 운용은 어떤 방법으로 달성할 것인지, 그에 관한 대책은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2. 사법적 통제를 받지 않고 독립적인 수사를 하는 우리 경찰이 만드는 수사기록, 그리고 객관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늘 의심받는 우리 검사가 만드는 수사기록을, 사법관 내지 준사법관이 만드는 대륙법계 국가의 예심기록과 어찌 동급으로 비교할 수 있느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검사가 이런 자리에 나오니 역시나 또 조서 타령이냐 하는 피로감과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최근 대구지방검찰청에서 전수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22. 10.~2023. 3. 6개월 간 대구지방법원에서 선고된 1심 재판 사건 중 재판과정에서 피고인이 혐의를 부인한 사건(일부 부인 포함)의 비율은 23.6%였습니다. 대략 4건 중 3건 이상이 자백사건인 셈인데, 이런 정식재판 사건보다 수도 많고 자백사건도 훨씬 더 많은 약식명령 사건들까지 감안하면 부인사건 대비 자백사건의 비중은 더 높아집니다. 자백사건의 수사기록에는 거의 예외 없이 사법경찰의 조서가 들어있을 것이고 일부 사건에는 검사의 조서도 있을 것인데, 이 조서들은 증거동의나 진정성립 인정에 따라 모두 증거능력이 인정되었을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 절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백사건에서는 조서가 아무런 문제없이 널리 잘 활용되고 있고 절차가 효율적으로 운용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피고인이 재판과정에서 혐의를 부인하는 사건에서는 대부분 피고인의 내용부인 한 마디에 따라 조서가 증거능력이 바로 부정되고 아무런 역할도 못합니다. 자백사건 재판에서는 멀쩡하게 제 역할을 잘하던 조서를 부인사건 재판에서는 문제 있다고 아예 빼버립니다. 자백사건의 조서와 부인사건의 조서 사이에 딱히 증거가치에 차이가 있을 것도 아닌데, 같은 조서를 놓고 피고인이 혐의를 자백하느냐 부인하느냐에 따라 그 대우를 달리한다는 게 논리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조서 제도를 평가할 때 자백사건이냐 부인사건이냐에 휘둘릴 게 아니라, 피고인의 입장과 연동되지는 않는, 모든 종류의 사건에 공통되고 일관되는 해석론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즉, 비록 경찰이 사법적 통제를 받지 않은 채 독립적인 수사를 하고 검사의 객관성과 정치적 중립성은 의심받곤 하지만, 이들이 만드는 수사기록과 조서는 전체 사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백사건의 재판에서 광범위하게 증거로 쓰이고 있습니다. 자백사건보다 훨씬 적은 부인사건에 등장하는 조서만 유독 악마화하는 건 퍽 이상한 풍경입니다.
3. 우리 증거법을 대법원과 주류 학계 입장과 같이 ‘해석’하다 보면, 즉 증거능력 판단에 집착하여 수사기록의 증거능력 배제에 몰두하다 보면, 당사자주의와 직권주의 절차와 비교할 때 지나치게 빈약한 콘텐츠만 있는, 실체 확인과는 거리가 있는 재판을 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수사과정에서 자백했던 피고인이 재판과정에 이르러 이를 번복하는 경우에 피고인의 종전 자백진술의 증거능력이 어떻게 되느냐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미국에서라면 진작 자백했으니 사실 플리바게닝 등을 통해 재판이 아예 열리지도 않을 상황이겠고, 재판이 열리더라도 이 종전 진술은 전문법칙 적용대상이 아니니 당연히 증거로 쓰일 겁니다. 프랑스에서도 전문법칙이 없으니 당연히 종전 진술이 증거로 인정될 텐데, 우리는 종전 진술을 증거로 쓸 방법이 없습니다. 종전 진술이 조서가 아니라 영상녹화물이나 음성녹음물에 담겨 있는 경우라면, 이 역시 미국이나 프랑스에선 당연히 증거로 쓰이겠으나 우리는 증거능력을 인정받기 힘듭니다. 미국이나 프랑스에서는 당연히 증거로 쓰일 중요한 증거가 우리 재판에는 아예 나오지 못하니, 그 나머지 얼마 안 되는 빈약한 증거만 갖고 사건의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유무죄를 판단해야 합니다.
더구나 국민참여재판에서라면, 재판 진행자인 직업법관이 증거능력 판단 단계에서 사실상의 사실인정권자인 배심원이 볼 증거를 광범위하게 배제해버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국민참여재판은 배심원들 눈앞에 제시되는 증거가 일반재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배심원들에게 친절하지 않은 재판입니다. 위법한 자료가 아닌 한 배심원들이 가급적 풍부한 자료의 바탕 위에서 제대로 결론을 낼 수 있도록 도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민참여재판이 겉으로는 배심재판이라고 하지만 증거능력 단계에서 법관이 사실상 재판을 다 끝내버리는 셈이어서 실제로는 ‘배심’재판이 아니라 ‘법관’재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당사자주의 절차도 직권주의 절차도 아닌 제3의 마이웨이를 고집하기엔, 우리 절차가 지나치게 증거능력 판단에만 집착하면서 제대로 된 재판을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고,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아무리 융합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과연 당사자주의나 직권주의 절차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결코 조서 옹호론을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우리 법이 예정하고 있는 우리 형사절차 구조에 맞게 증거법 해석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런 시각에서 수사기록과 조서를 바라봐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오랜 세월 ‘재판절차에서의 수사기록 규제’를 위해 차곡차곡 빌드업 되어 온 대법원과 주류 학계의 해석론은 당위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었을 뿐 사실 논리적으로는 많은 의문이 드는 해석론이었습니다. 발표자의 견해처럼 이제는 우리 형사절차의 구조에 맞게 우리 증거법을 다시 해석하려는 고민이 필요하겠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브르따뉴 지역을 홍보하는 AI 여인, Anne Kerdi
2023년 9월 10일자 '20minutes'지에 재미있는 기사가 올라왔네요.
2023년 7월 10일 월요일
프랑스의 새로운 검찰총장 임명 소식
이 블로그의 2018년 12월 9일자 "프랑스 파리 지방검찰청 검사장 취임식 소식"에서 소개한 인물에 대한 후속 소식입니다. AFP 통신 기사를 인용한 2023년 7월 2일자 르몽드의 "Rémy Heitz succède à François Molins au poste éminemment politique de procureur général près la Cour de cassation" 기사는 프랑스의 새로운 검찰총장 임명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제목을 직역하면 "Rémy Heitz가 François Molins의 뒤를 이어 매우 정치적인 자리인 검찰총장 자리를 잇는다"입니다.
1963년 10월 26일에 태어난 Nancy 출신의 Rémy Heitz는 올해 59세의 사법관으로, 1999년부터 2001년까지 Saint-Malo 지방법원 검사로 첫 근무를 시작하여 유명한 Godard 사건(범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 아내와 두 자녀를 살해한 의사 사건)을 처리했습니다.
파리 지방법원 부장검사로 승진한 후 2002년 Jean-Pierre Raffarin 총리실에 법무담당 기술고문으로 합류했고, 2008년 메츠 지방검찰청 검사장과 2011년부터 2015년까지 프랑스 제2의 법원인 보비니 지방법원장을 지낸 뒤 콜마르 고등법원장을 거쳐 2017년 8월 법무부 형사국장으로 임명됐습니다. 그리고 2018년 11월 파리 지방검찰청 검사장, 2021년 9월 파리 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재직해왔습니다.
2023년 6월 17일 토요일
프랑스 증거법에는 왜 전문법칙이 없을까?
근데 미국이야 전문법칙이란 게 있어서 우리 것과 적절히 비교설명이 가능한데, 프랑스는 전문법칙이 없으니 웬만한 증거가 그냥 다 증거가 돼서 우리 전문법칙 설명에는 별 도움이 안 되더라구요. 도움은커녕 학생들이 프랑스는 왜 증거법이 그 모양이냐, 후진적이냐, 인권침해적이냐, 당신 제대로 아는 거 맞냐 하는 의문을 갖겠더라구요. 그래서 그런 의문에 대해 뇌피셜을 동원해서 다음과 같은 답을 마련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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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법의 사법제도는 배심원에 의한 재판을 전제로 한 제도이고, 대륙법의 사법제도는 관료(직업법관)에 의한 재판을 전제로 한 제도입니다. 그로 인해 영미법은 수사기록이 없는 재판이, 대륙법은 수사기록 위주의 재판이 이루어집니다.
영미법에서는, 법을 모르는 배심원들에게 복잡하고 알아듣기 힘든 전문용어들이 잔뜩 쓰여있는 수사기록을 재판하는 데 참고하라고 주는 건 의미없는 일입니다. 간혹 글을 못 읽는 배심원이 있을 수도 있구요. 그래서 재판에 수사기록이 나오지 않고, 증인들이 우르르 나옵니다. 재판이 이렇게 진행되니 수사기관도 굳이 수사기록을 만들지 않습... 아니, 안 만드는 건 아닙니다. 수사기록을 만들긴 만들고 그 중 일부가 재판에 나오긴 합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단지 수사 자체를 위한 목적으로, 즉 수사진행 상황을 그때그때 기록해두는 게 주된 목적이지 재판에서 증거로 쓰려는 게 주된 목적은 아닙니다.
이렇게 영미법 재판에서는 수사기록이 없는 대신 증인들이 직접 법정에 나와 증언하고 배심원들은 이 말들을 듣고 재판을 합니다. 다만, 필요한 증인이 재판에 다 못 나오는 경우가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때는 증인 대신 수사기록이 증거로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수사기록은 간혹 신용성이 없어 증거가치가 극히 적은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증거를 배심원에게 바로 주면 법을 모르는 배심원들이 그 증거가치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속아서 엉뚱한 판단을 할 수 있기에, 이를 막고자 전문법칙이란 걸 만들어 증거가치가 적은 수사기록들을 걸러내고 배심원들에겐 양질의 증거만 제공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심재판에는 시간과 자원이 과도하게 소요되기 때문에 모든 사건의 재판을 배심재판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 미국에선 95% 이상의 형사사건이 플리바게닝 등 정식재판이 아닌 간이한 방법으로 종결되고, 극히 일부의 사건만 배심재판이나 직업법관의 재판으로 진행됩니다. 직업법관이 하는 재판의 경우에도 기본적인 재판모델이 배심재판이므로 배심재판에서의 원리가 대부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에 비해 대륙법에서는, 일찌감치 예심 제도가 발달하였습니다. 법률전문가인 직업법관이 재판을 하지만, 직업법관이 아주 많지 않은 다음에야 모든 사건을 다 꼼꼼히 재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재판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재판절차 이전에 예심절차를 둡니다. 예심절차를 담당하는 예심판사 또는 (예심판사 제도가 없는 경우) 검사가 재판에 준하는 심리를 미리 해보고 재판을 할 만한 사건만 골라서 재판에 보냅니다. 예심판사나 검사도 자신이 모든 사건의 심리를 다 할 여력은 안 되어 경찰에게 조사를 위임하는 방법으로 예심을 진행합니다. 예심은 재판을 준비하는 절차이기 때문에 예심판사나 검사는 자신이 확인한 내용을 기록으로 만들어(경찰의 수사기록도 포함) 재판에 보냅니다.
이 예심기록이 사실상의 수사기록입니다. 즉, 예심이라는 건 재판에 보낼지(공소권 행사)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이런저런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절차이고(이게 사실상 ‘수사’인 거예요. 그래서 수사와 공소권 행사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확인결과를 적어놓은 게 바로 수사기록인 거죠. 이 기록은 예심 과정에서 예심판사나 검사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심리를 하고 제대로 판단을 했는지를 재판법원 판사나 상급기관에게 보이고 심사를 받는 목적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비교적 꼼꼼한 내용과 방대한 분량으로 만들어집니다.
재판을 하는 판사는 이렇게 꼼꼼하고 방대하게 만들어진 수사기록이 있으니 정작 재판은 간이한 방법으로 진행합니다. 이미 같은 사법관인 예심판사나 검사가 열심히 사건을 들여다보고 필요한 사실을 확인하고 잘 기록해서 재판에 보낸 것이기에, 재판을 하는 판사가 필요한 증인을 죄다 다시 재판에 부를 필요가 없는 겁니다. 즉, 수사기록은 각 서류들을 증거와 증거 아닌 것으로 분류할 필요도 없이 기록 통째로 증거로 활용되고, 이런 구조에서는 전문법칙도 필요가 없는 겁니다(다만, 대륙법에도 가급적이면 재판에서 너무 수사기록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말라는 원칙이 있고, 이를 ‘직접주의’ 내지 ‘직접심리주의’라고 부릅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 영미법보다는 많은 사건이 정식재판에서 처리될 수 있습니다. 물론 프랑스와 독일에도 미국의 플리바게닝을 본뜬 제도들이 존재하지만, 이를 통해 처리되는 사건은 미국 플리바게닝 사건에 비하면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편입니다.
한편, 대륙법에도 미국 배심재판과 닮은 참심재판 제도가 있습니다. 직업법관이 사실판단 과정에서 배제되어 있는 배심재판과 달리, 참심재판에는 직업법관도 일반인 참심원들과 함께 재판부를 구성해서 사실판단을 할 권한이 있습니다. 또, 직업법관은 수사기록도 미리 볼 수 있기 때문에 참심원들에게 직업법관이 갖고 있는 사건 관련 지식과 심증이 그대로 전달되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직업법관이 결론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더구나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평결을 하여야 하는 미국 배심재판과 달리, 대륙의 참심재판은 대개 다수결 평결 제도이므로 직업법관의 판단과 크게 다른 결론이 나기 힘든 구조이기도 합니다. 미국 배심재판과는 위상이 다르고, 어디까지나 직업법관 중심으로 재판이 진행된다는 얘깁니다.
영미법이나 대륙법이나 각자의 나라에서 나름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영미법과 대륙법 중 무엇이 더 낫고 무엇이 못하다 라는 우열관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대륙법도 나름의 역사와 이유가 있어 지금의 제도를 갖고 있는 것이거든요. 엄격한 증거법제를 운영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 관점에서 보면 프랑스 증거법이 매우 허술하고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각 나라마다 특유의 전통과 관습이 현재의 제도에 영향을 미친 것이고, 각 제도마다 각기 장단점을 다 갖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만 지고지선이라고 맹종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1990년대 이후 프랑스 검찰 관련 이슈
신종범죄 출현과 중대범죄 급증에 대처하기 위한 국가적 노력은 범죄현장의 최일선에 자리한 사법경찰의 역할과 권한 확대라는 효과와도 직결됩니다. 사법경찰의 역할과 권한 확대는 이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과 함께 전반적인 수사과정을 지휘감독할 검사의 수사주재자로서의 역할 또한 종전보다 더욱 강조되는 결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검찰의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법무부와 검찰 사이의 거리두기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프랑스 검찰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행정부에 소속되어 법무부장관을 정점으로 한 위계조직 속에 놓여 있는 관계로, 수시로 정치적 중립성과 관련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정치적 중립성 측면에서 취약한 검사가 사법관임을 근거로 강제처분권을 행사하거나 판결의 성질을 갖는 처분을 행하는 게 적정한지에 대해 종종 의문이 제기되고 유럽법원이나 국내법원에 의해 제동이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검사 인사와 징계에 관한 법무부장관의 권한을 제한하는 방안도 꾸준히 시도되고 있습니다. 고등사법위원회(Conseil Supérieur de la Magistrature)의 의장과 부의장 자리에서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을 제외시키고 그 위원들의 구성을 다양화한 데 이어(2008년), 판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검사 인사와 징계에 관한 고등사법위원회의 의견에 구속력을 인정하는 방안이 올랑드 정부에 이어 현 마크롱 정부에서도 추진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199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의 검찰과 관련한 논의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테러범죄, 조직범죄, 금융범죄 등 국경을 넘나들며 프랑스 국내에 빈발하는 중대범죄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 검찰에 힘을 주자>이고, 다른 하나는 <검찰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중립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법무부장관의 검찰 지휘권을 줄이고 검사 인사권과 징계권도 줄이자>입니다. 얼핏 보면 둘 다 검찰에게만 유리하고 좋은 일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취지는 이겁니다. 지금 현실적으로 검찰이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중요한 상황에 있는데 이에 상응하여 검찰의 권한이 커질수록 그런 권한을 이용하려고 정치권력이 부당하게 검찰권 행사에 관여할 위험도 커진다, 그러니 검찰이 정치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자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의 검찰과 관련한 대표적인 논의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어서 폐해가 크니, 그 권한을 줄이는 방향으로 개혁을 해야 한다>입니다. 이번 정부 들어 검찰에 한때 사라졌던 조직과 권한이 다시 생기면서 ‘검찰공화국’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고는 있지만, 이는 그간의 꾸준한 정치적 흐름에 비춰 보았을 때 퍽 이례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검찰이 처해있는 위치가 워낙 정치바람을 많이 타는 터라 사실 이게 또 얼마나 갈지 알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아무튼 프랑스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가는 듯 보입니다. 우리가 잘 하는 걸까요, 프랑스가 잘 하는 걸까요?
2023년 5월 3일 수요일
인왕재색도를 보고 와서
오늘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이건희 컬렉션 전시회를 보고 왔습니다. 가기 전에 이번 전시회의 주인공격인 겸재 정선의 ‘인왕재색도’에 대해 살짝 야트막하게 공부를 해봤습니다. 잠깐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이런저런 글을 찾아보니 겸재 정선은 그냥 화가가 아니더군요.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인데,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다 전국적으로는 물론 저 멀리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친 조선 후기 최고 인기 화가라고 합니다. 유명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왕이 되기 직전의 어린 영조에게 그림을 가르치기까지 했고 집권세력인 노론의 정치인들과도 각별한 친분을 쌓아, 나중에는 작은 고을의 수령도 해보고 중앙에서 중요한 관직을 맡기도 하는 등 승승장구하였다고 하네요.
일흔이 넘어 그의 인생 말년에 그린 대작이 바로 ‘인왕재색도’인데요, 한양 인왕산에 막 비가 그치면서 운무가 피어오르는 광경을 웅장하게 묘사한 그림입니다. ‘齋色’의 ‘齋’는 ‘비 그칠 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왕재색’은 인왕산에 비가 그쳐 본래의 색(모습)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되구요.
그냥 가만히 있는 산 풍경을 그린 게 아니라 이제 막 비가 그쳐 땅에서부터 안개가 피어오르는 바로 그 순간을 그린 거라서, 정적이지 않고 동적인 느낌을 줍니다. 비 내린 직후에 산 골짜기 여기저기서 물줄기를 뱉어내는 작은 폭포들도 그려놓아선지 더욱 힘차고 생동감 넘쳐 보이네요.
그저 시원스런 풍경이고 다 좋은데, 이상한 장면도 하나 들어있어요. 오른쪽 밑에 있는 집, 지붕이 좀 괴이합니다. 찌그러진 건지 잘못 그린 건지, 3차원적으로 말이 안 되는 지붕 모양이 퍽 어색합니다. 지붕을 왜 이렇게 그린 건지 딱부러지게 설명한 글은 못 찾겠네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작년에 재밌게 본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마지막 회에선가 인왕산 아랫동네에 막 이사 온 편의점 사장님이 동네 지리를 익히느라 이 그림을 꼼꼼히 살펴보던 장면도 떠오르네요.
정선이 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단지 인왕산 풍경이 좋아서만은 아닌 거 같구요, 학설이 분분하네요. 정선도 인왕산 아랫동네 주민이었다는데 혹자는 같은 동네 사는 절친의 쾌유를 기원하며 그린 그림(비가 개듯이 건강 회복을 기원한다는 취지)이라고 하고, 혹자는 사도세자 문제로 영조와 갈등을 겪고 있던 노론 집권세력의 정치적 견해가 은밀하게 담긴 그림(비가 개듯이 왕과의 관계 회복을 바란다는 취지)이라고도 합니다.
인왕산은 참 멋있는 산이고, 인왕산 아랫동네는 경복궁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촌’이라 불리며 경복궁 너머에 있는 ‘북촌’과 더불어 수년 전부터 외국인이나 관광객들을 무지하게 끌어들이고 있는 핫한 동네입니다. 조선 왕조가 들어서고 한양으로 도읍을 정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해서 동쪽을 바라보게 궁궐을 짓자고 하고 정도전은 북악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궁궐이 들어서야 한다고 다투다, 결국 정도전이 이긴 거라고 하죠.
인왕산은 밑에서 보는 것보다 정상에 올라서 서울 사대문 안의 전경, 특히 산등성이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져 나가는 한양도성 성곽을 바라보는 뷰가 아주 일품입니다.
최근에 국립대구미술관에서도 이건희 컬렉션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요새 이건희 컬렉션 붐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무려 2만 점이 넘는 이건희 컬렉션 작품들은 수도권에 있는 한두 박물관에만 기증된 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에 나누어 기증되었다고 해요. 워낙 기증된 작품 수가 많아서 전국의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내년 2024년까지 전시일정이 죽 잡혀있고, 전국에서 전시회가 열리니 전국적으로 사람들 관심을 끌고 붐이 생긴 것이죠.
그 덕분에, 남들 다 가본다고 하니 저처럼 평소 미술에 아무 관심 없던 사람도 여기 대구에서 인왕재색도가 뭔지 공부를 하고 이걸 직접 보려고 박물관이란 델 가볼 생각을 하는 것이겠구요. 이 기증이 우리 사회와 문화에 큰 기여를 한 셈입니다.
이번 전시회는 7월까지 계속되지만, 이 인왕재색도는 안전한 보존을 위해 전시한 지 딱 한 달이 되는 5월 7일까지만 여기 있다 다른 작품으로 교체된다고 합니다. 타이밍 잘 맞춰 잘 보고 왔습니다.
2023년 5월 2일 화요일
전문증거에 관한 쟁점 한 가지
전문증거의 의미와 관련하여, 평소 갖고 있던 생각 한 가지를 메모합니다.
수사과정에서 피의자의 진술을 기록한 피의자신문조서는 전문증거입니다. 재판에서 증거로 제출되는 경우 형사소송법 제312조에 따라 증거능력 여부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수사과정에서 혐의사실을 자백해서 재판을 받던 피고인이 종전의 진술을 번복해서 공소사실을 부인하는 경우, 대개 그의 자백진술이 기록된 피의자신문조서는 증거능력이 부정되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피고인의 수사과정에서의 자백진술은 온데간데 없이 증거로 쓸 길이 없어지게 됩니다. 현재의 판례에 따르면요.
그런데 만약 피고인이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수사과정에서 자백진술을 한 일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한다면, 피고인의 법정진술 중 그의 수사과정에서의 자백진술 부분은 전문증거가 아니라 본래증거이므로 증거능력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우리 형사소송법상 전문증거의 개념은 제310조의2(“제311조 내지 제316조에 규정한 것 이외에는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서의 진술에 대신하여 진술을 기재한 ①서류나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 외에서의 타인의 진술을 내용으로 하는 ②진술은 이를 증거로 할 수 없다”)로부터 도출되는데, 이 규정에 대한 정확한 해석에 의할 때 피고인의 법정진술 중 그의 수사과정에서의 자백진술 부분은 전문증거의 개념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위 규정에서 ‘①서류’는 법정 외에서 작성된 것으로서 법정 외에서의 ‘진술’이 담겨있는 것이고 ‘②진술’은 법정에서의 진술로서 법정 외에서의 ‘타인의 진술’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①서류’는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누구의 진술이라도 전달하는 것이면 되나, ‘②진술’은 타인의 진술만을 전달하는 것이 전문증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정에 나온 증인이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이 공판 외에서 했던 진술 내용에 관해 증언한다면 이 증언은 전문증거이지만, 법정에 나온 증인이 자기 자신이 공판 외에서 했던 진술 내용에 관해 증언한다면 이 증언은 전문증거가 아닙니다. 법정진술에 관한 형사소송법 제316조 제1항과 제2항의 내용을 봐도 그렇게 해석됩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전문법칙의 취지상 당연한 이치이기도 합니다. 전문법칙이라는 건 본래 요증사실에 관해 증언을 해야 할 어떤 사람이 법정에 나올 수 없을 때, 그의 증언 대신 다른 대체물을 증거로 인정하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증언을 해야 할 사람이 이미 법정에 나와 있다면, 궁금한 걸(그 사람의 법정 외 진술) 바로 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지 굳이 전문법칙을 따지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이치로, 피고인이 수사과정에서는 혐의사실을 자백하였다가 공판과정에서 이를 번복하여 공소사실을 부인하는 사안에서, 만약 피고인이 법정에서 ‘수사과정에서 혐의사실을 자백하였다’라고 진술한다면 이는 ‘타인의 진술’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러한 피고인의 법정진술은 전문증거가 아닙니다. 이는 본래증거이므로, 곧바로 증거능력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즉, 피고인이 법정에서 수사과정에서의 자백진술을 번복하는 경우, 피의자신문조서야 전문증거여서 피고인의 내용부인을 사유로 증거능력이 부정되는 건 당연하다 치더라도, 현재 법정에 나와 있는 피고인의 진술에 의해 그 내용이 인정된 수사과정에서의 자백진술은 본래증거이므로 당연히 증거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는 판례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형사소송법 제310조의2 문언상 명백한 논리임에도, 피고인의 '내용부인'이라는 한 마디로 수사과정에서의 피의자의 진술이 온데간데 없어져야 한다는 이런 이상한 법해석은 하루 속히 바로잡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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