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4일 월요일
[독서일기] 레미제라블 3
장발장은 19년 형의 만기출소 후 '보호관찰'의 굴레를 스스로 벗어던지고 몽트뢰이유-쉬르-메르(Montreuil-sur-Mer)라는 곳으로 가, '마들렌느(Madeleine)'라는 이름의 유리구슬 사업가로 변신합니다. 사업이 번창하여 그 지역의 경제까지 덩달아 살린 것은 물론, 신실한 신앙심과 검소하고 자애로운 이타심까지 갖춰 모두의 존경을 받게 되는 바람에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 지역의 시장이 되기까지 합니다.
- 제9조 사법경찰권은 제국법원의 지휘감독 하에 다음 기관들에 의해 행사된다.
농촌보호원과 산림보호원, 경찰서장, 시장과 부시장, 제국검사장과 검사, 평화판사, 군인경찰관, 경찰청장, 예심판사.
(Article 9. La police judiciaire sera exercée sous l'autorité des cours impériales, et suivant les distinctions qui vont être établies :
Par les gardes champêtres et les gardes forestiers,
Par les commissaires de police,
Par les maires et les adjoints de maire,
Par les procureurs impériaux et leurs substituts,
Par les juges de paix,
Par les officiers de gendarmerie,
Par les commissaires-généraux de police,
Et par les juges d'instruction.)
- 제11조 경찰서장, 경찰서장이 없는 지역에서는 시장, 이들이 없는 지역에서는 부시장이 위경죄를 수사한다.
(Article 11. Les commissaires de police, et dans les communes où il n'y en a point, les maires, à leur défaut, les adjoints de maire, rechercheront les contraventions de police, même celles qui sont sous la surveillance spéciale des gardes forestiers et champêtres, à l’égard desquels ils auront concurrence et même prévention.
Ils recevront les rapports, dénonciations et plaintes, qui seront relatifs aux contraventions de police.
Ils consigneront dans les procès-verbaux qu'ils rédigeront à cet effet, la nature et les circonstances des contraventions, le temps et le lieu où elles auront été commises, les preuves ou indices à la charge de ceux qui en seront présumés coupables.)
- 제15조 시장 또는 부시장은 경찰법원의 공소관에게 늦어도 3일 내에 사건과 관련된 기록과 자료를 제공한다.
(Article 15. Les maires ou adjoints de maire remettront à l'officier par qui sera rempli le ministère public près le tribunal de police, toutes les pièces et renseignements, dans les trois jours au plus tard, y compris celui où ils ont reconnu le fait sur lequel ils ont procédé.)
- 제66조 피해자는 고소 또는 후속조치와 같은 공식적인 신고를 하지 않으면 사소당사자로 간주되지 않는다. 피해자가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않는 경우 24시간 내에 이를 포기할 수 있다. 신고를 철회한 경우에는 피의자에게 손해가 발생하지 않는 한 신고를 한 이후의 비용은 청구되지 않는다.
Read More
이때 장발장이 운영하던 유리구슬 공장에는 팡띤(Fantine)이라는 여성이 일하고 있었는데, 미혼모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해고되고 맙니다. 그리고는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나머지, 다른 사람에게 맡겨둔 딸 꼬제뜨(Cosette)를 다시 만날 꿈을 꾸며 머리카락을 팔고 앞니를 팔고 하다 결국 매춘일까지 하게 됩니다. 물론 장발장은 여러 직원 중 하나에 불과한 팡띤의 존재, 해고, 그 이후의 삶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2012년 개봉한 영화 '레미제라블'에는, 매춘부를 찾는 어느 신사와 시비를 벌이다 신사의 얼굴에 상처를 낸 팡띤(Fantine)을 자베르 형사가 체포하려 하고, 장발장은 자베르에게 명령하여 팡띤을 석방하게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동서문화사 판 '레미제라블' 첫째 권 320쪽 이하에도 그런 대목이 있습니다. 세부적인 줄거리는 영화와 약간 다르긴 합니다.
어느 신사가 추운 겨울 밤거리를 배회하던 팡띤을 놀리고 모욕을 주기 위해 그녀의 등 뒤로 몰래 다가가 옷 안에 눈덩이를 집어넣는 행동을 합니다. 이에 놀란 팡띤이 그 신사의 얼굴을 할퀴고 욕설을 퍼붓지요. 마침 순찰을 돌다 그 광경을 본 자베르는 바로 팡띤을 체포한 다음, 팡띤에게 6개월의 형을 살리려 합니다. 그런데 또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장발장은 여기 끼어들어 자베르에게 팡띤의 석방을 명령합니다.
자베르는 장발장의 석방명령에 거세게 항의합니다.
자신이 직접 범행을 목격하고 힘들게 현행범을 잡아왔는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시장이 난데없이 범인을 석방하라고 하다니요. 당시의 직업의식과 윤리의식에 엄격하고 투철한 경찰관 상으로 소설에 그려지는 자베르의 입장에서는, 팡띤이 신사에게 해를 가한 행위는 무려 6개월은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심각한 범죄인데 이런 범죄자를 아무런 벌도 안 주고 용서한다는 건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비록 그 신사가 먼저 팡띤을 괴롭히며 이 사건의 원인 제공을 하긴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자베르에게는 팡띤을 석방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자베르로서는 혹시 시장이 이 매춘부와 무슨 특별한 관계라도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했을법 합니다.
더구나 이 자리에 장발장이 나타나자 그를 알아본 팡띤은 장발장에게 욕을 하고 침을 뱉는 행동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장발장의 공장에서 해고되는 바람에 자신이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인데, 오랜만에 장발장을 맞닥뜨리게 되니 그때의 일이 생각나 순간적으로 감정이 욱 했던 겁니다.
그런데 자베르 입장에서는 여기서 팡띤의 추가범행을 목격하게 되는 거죠. 팡띤이 장발장에게 욕하고 침을 뱉었으니, 범죄 하나가 더 추가된 겁니다. 팡띤의 석방을 허용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이기도 하죠.
그래서 자베르는 팡띤의 석방을 명령하는 장발장에게, 앞의 저 신사에 대한 첫 범행도 묵과할 수 없지만, 방금 벌어진 시장에 대한 모욕 범행도 시장 개인이 아닌 법에 대한 모욕이므로 설령 시장이 이를 괜찮다고 하더라도 그냥 용서할 수는 없다고 대답합니다.
좀처럼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는 자베르에게, 결국 장발장은 단호하게 못을 박습니다.
"당신이 문제삼고 있는 이 사건은 시내 경찰에 관한 사항이오. 형사소송법 제9조, 제15조와 66조의 조문에 의하면, 내가 이 일의 판결자요. 나는 이 여자를 석방할 것을 명령하겠소."
(애플 아이북스 버전의 원문 : Le fait dont vous parlez est un fait de police municipale. Aux termes des articles neuf, onze, quinze et soixante-six du code d'instruction criminelle, j'en suis juge. J'ordonne que cette femme soit mise en liberté.)
번역문에는 형사소송법이라고 했지만, 이건 지난번 레미제라블 독서일기 첫 편에서 말씀드린 1808년 제정된 범죄수사법(le code d'instruction criminelle, 1808)을 말합니다. 그리고 번역문에는 빠져있지만 원문에는 법조문이 하나 더 쓰여 있네요. 제11조입니다.
그런데 경찰관이 잡은 범인을 왜 시장이 석방해라 마라 하는 걸까요. 장발장이 말하는 걸 보니 범죄수사법에는 시장이 경찰관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되어 있는 모양인데요. 장발장이 자신의 권한에 대한 근거규정이라고 말한 범죄수사법 제9조, 제11조, 제15조, 제66조가 무슨 내용인지 한번 보겠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동서문화사 판 '레미제라블' 첫째 권 320쪽 이하에도 그런 대목이 있습니다. 세부적인 줄거리는 영화와 약간 다르긴 합니다.
어느 신사가 추운 겨울 밤거리를 배회하던 팡띤을 놀리고 모욕을 주기 위해 그녀의 등 뒤로 몰래 다가가 옷 안에 눈덩이를 집어넣는 행동을 합니다. 이에 놀란 팡띤이 그 신사의 얼굴을 할퀴고 욕설을 퍼붓지요. 마침 순찰을 돌다 그 광경을 본 자베르는 바로 팡띤을 체포한 다음, 팡띤에게 6개월의 형을 살리려 합니다. 그런데 또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장발장은 여기 끼어들어 자베르에게 팡띤의 석방을 명령합니다.
자베르는 장발장의 석방명령에 거세게 항의합니다.
자신이 직접 범행을 목격하고 힘들게 현행범을 잡아왔는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시장이 난데없이 범인을 석방하라고 하다니요. 당시의 직업의식과 윤리의식에 엄격하고 투철한 경찰관 상으로 소설에 그려지는 자베르의 입장에서는, 팡띤이 신사에게 해를 가한 행위는 무려 6개월은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심각한 범죄인데 이런 범죄자를 아무런 벌도 안 주고 용서한다는 건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비록 그 신사가 먼저 팡띤을 괴롭히며 이 사건의 원인 제공을 하긴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자베르에게는 팡띤을 석방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자베르로서는 혹시 시장이 이 매춘부와 무슨 특별한 관계라도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했을법 합니다.
더구나 이 자리에 장발장이 나타나자 그를 알아본 팡띤은 장발장에게 욕을 하고 침을 뱉는 행동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장발장의 공장에서 해고되는 바람에 자신이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인데, 오랜만에 장발장을 맞닥뜨리게 되니 그때의 일이 생각나 순간적으로 감정이 욱 했던 겁니다.
그런데 자베르 입장에서는 여기서 팡띤의 추가범행을 목격하게 되는 거죠. 팡띤이 장발장에게 욕하고 침을 뱉었으니, 범죄 하나가 더 추가된 겁니다. 팡띤의 석방을 허용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이기도 하죠.
그래서 자베르는 팡띤의 석방을 명령하는 장발장에게, 앞의 저 신사에 대한 첫 범행도 묵과할 수 없지만, 방금 벌어진 시장에 대한 모욕 범행도 시장 개인이 아닌 법에 대한 모욕이므로 설령 시장이 이를 괜찮다고 하더라도 그냥 용서할 수는 없다고 대답합니다.
좀처럼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는 자베르에게, 결국 장발장은 단호하게 못을 박습니다.
"당신이 문제삼고 있는 이 사건은 시내 경찰에 관한 사항이오. 형사소송법 제9조, 제15조와 66조의 조문에 의하면, 내가 이 일의 판결자요. 나는 이 여자를 석방할 것을 명령하겠소."
(애플 아이북스 버전의 원문 : Le fait dont vous parlez est un fait de police municipale. Aux termes des articles neuf, onze, quinze et soixante-six du code d'instruction criminelle, j'en suis juge. J'ordonne que cette femme soit mise en liberté.)
번역문에는 형사소송법이라고 했지만, 이건 지난번 레미제라블 독서일기 첫 편에서 말씀드린 1808년 제정된 범죄수사법(le code d'instruction criminelle, 1808)을 말합니다. 그리고 번역문에는 빠져있지만 원문에는 법조문이 하나 더 쓰여 있네요. 제11조입니다.
그런데 경찰관이 잡은 범인을 왜 시장이 석방해라 마라 하는 걸까요. 장발장이 말하는 걸 보니 범죄수사법에는 시장이 경찰관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되어 있는 모양인데요. 장발장이 자신의 권한에 대한 근거규정이라고 말한 범죄수사법 제9조, 제11조, 제15조, 제66조가 무슨 내용인지 한번 보겠습니다.
- 제9조 사법경찰권은 제국법원의 지휘감독 하에 다음 기관들에 의해 행사된다.
농촌보호원과 산림보호원, 경찰서장, 시장과 부시장, 제국검사장과 검사, 평화판사, 군인경찰관, 경찰청장, 예심판사.
(Article 9. La police judiciaire sera exercée sous l'autorité des cours impériales, et suivant les distinctions qui vont être établies :
Par les gardes champêtres et les gardes forestiers,
Par les commissaires de police,
Par les maires et les adjoints de maire,
Par les procureurs impériaux et leurs substituts,
Par les juges de paix,
Par les officiers de gendarmerie,
Par les commissaires-généraux de police,
Et par les juges d'instruction.)
- 제11조 경찰서장, 경찰서장이 없는 지역에서는 시장, 이들이 없는 지역에서는 부시장이 위경죄를 수사한다.
(Article 11. Les commissaires de police, et dans les communes où il n'y en a point, les maires, à leur défaut, les adjoints de maire, rechercheront les contraventions de police, même celles qui sont sous la surveillance spéciale des gardes forestiers et champêtres, à l’égard desquels ils auront concurrence et même prévention.
Ils recevront les rapports, dénonciations et plaintes, qui seront relatifs aux contraventions de police.
Ils consigneront dans les procès-verbaux qu'ils rédigeront à cet effet, la nature et les circonstances des contraventions, le temps et le lieu où elles auront été commises, les preuves ou indices à la charge de ceux qui en seront présumés coupables.)
- 제15조 시장 또는 부시장은 경찰법원의 공소관에게 늦어도 3일 내에 사건과 관련된 기록과 자료를 제공한다.
(Article 15. Les maires ou adjoints de maire remettront à l'officier par qui sera rempli le ministère public près le tribunal de police, toutes les pièces et renseignements, dans les trois jours au plus tard, y compris celui où ils ont reconnu le fait sur lequel ils ont procédé.)
- 제66조 피해자는 고소 또는 후속조치와 같은 공식적인 신고를 하지 않으면 사소당사자로 간주되지 않는다. 피해자가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않는 경우 24시간 내에 이를 포기할 수 있다. 신고를 철회한 경우에는 피의자에게 손해가 발생하지 않는 한 신고를 한 이후의 비용은 청구되지 않는다.
(Article 66. Les plaignants ne seront réputés partie civile s'ils ne le déclarent formellement, soit par la plainte, soit par acte subséquent ; ou s'ils ne prennent, par l'un ou par l'autre des conclusions en dommages-intérêts, ils pourront se départir dans les vingt-quatre heures ; en cas de désistement, ils ne sont pas tenus des frais depuis qu'il aura été signifié, sans préjudice néanmoins des dommages-intérêts des prévenus, s'il y a lieu.)
제9조에 따르면 경찰서장이나 시장 모두 사법경찰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찰서장과 시장이 모두 배치되어 있는 지역이라면, 이 둘의 사법경찰권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죠. 그래서 이런 경우를 제11조가 대비하고 있습니다.
제11조에 따르면 경찰서장이 배치되어 있는 지역은 경찰서장이 사법경찰권을 갖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는 시장이 사법경찰권을 갖고 위경죄(길거리 범죄나 교통 범죄와 같은 경미한 범죄)를 수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제66조는 장발장이 팡띤으로 인한 개인적 피해에 대한 신고나 배상을 포기함으로써 더이상의 사법절차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근거규정이네요.
아무튼, 제9조와 제11조는 규모가 작은 지역에까지 모두 경찰서장을 배치할 수는 없으므로, 경찰서장이 없는 지역은 시장에게 경찰권을 맡긴다는 내용입니다. 아마도 장발장이 시장으로 있었던 몽트뢰이유-쉬르-메르에는 경찰서장이 배치되어 있지 않아 시장이 사법경찰권을 갖고 있으면서 그 지역에 배치된 경찰관들을 지휘감독하는 구조인 것으로 보입니다.
'레미제라블' 제1권 279쪽에는 프랑스 국왕이 지사의 추천에 따라 장발장을 시장으로 임명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중앙에서 시장을 직접 임명했다는 것을 보면, 몽트뢰이유-쉬르-메르가 지방자치단체라기보다는 중앙정부의 하부기관인 지방관청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초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던 자베르는 몽트뢰이유-쉬르-메르로 발령받아 근무하다 다시 파리로 발령받는데요, 이렇게 전국적으로 인사이동을 하는 것을 보면 자베르는 국가경찰(전국 단위의 중앙집권적 경찰조직)의 구성원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제 해석이 정확한지는 자신 없습니다만, 아마도 이 당시 경찰서장이 없는 지역의 경우 시장과 경찰 간의 관계는, 지방관청이 사법경찰권의 주체이고 그 지역에 배치된 국가경찰이 이를 보조하는 형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레미제라블' 당시 시장과 경찰 간의 이러한 관계는, 오늘날 프랑스에서 시행하고 있는 자치경찰 제도와 흡사해 보입니다. 자치경찰 제도란, 중앙정부가 아닌 각 지방자치단체가 경찰권을 보유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자치경찰 제도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았습니다. 제가 참고한 문헌은 이러합니다.
- 오승규, "프랑스 자치경찰제도와 시사점", 법과 정책연구 제18집 제2호, 2018.
- 이승민, 프랑스 경찰행정, 경인문화사, 2014.
현재 프랑스의 경찰조직은, 그 운영주체를 기준으로 할 때 국가경찰과 자치경찰이 공존하고 있고, 자치경찰(police municipale)은 각 기초자치단체장(maire)에게 소속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레미제라블' 제1권 344쪽 이하에는 자베르가 장발장을 범죄인으로 오해하여 고발장을 제출했던 자신의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장발장에게 자신을 파면해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장발장이 자칫 그의 숨겨진 과거를 눈치빠른 자베르에게 발각당할 뻔 했으나, 장발장과 나이와 고향이 같고 인상착의마저 비슷한 '샹마띠외'라는 사람이 장발장으로 오인되어 잡히는 바람에 장발장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상황이었죠.
그런데 장발장은 그런 자베르를 용서하며, 경찰권의 주체로서 이런 임무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자베르, 당신은 지금 곧 쌩 쏠브 거리 모퉁이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뷔조삐에 아주머니를 찾아가 짐마차꾼 삐에르 세늘롱을 고발하도록 일러주시오. 이 사나이는 여간 난폭한 놈이 아니어서 그 아주머니와 아이를 하마터면 치어죽일 뻔했소.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되오.
다음에는 몽트르 드 샹삐니 거리의 샤르셀레 씨에게 가 주시오. 옆집 홈통에서 빗물이 떨어져 자기 집 토방을 썩게 만들었다는 호소가 들어왔으니까.
그런 다음 기부르 거리의 도리스 미망인과 가로 불랑 거리의 르네 르 보쎄 부인을 찾아가, 신고 들어온 바와 같은 경찰법 위반 사항이 있는지 어떤지 확인하고 조서를 꾸며 주시오."
프랑스 자치경찰 제도에 관한 부실한 공부는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제9조에 따르면 경찰서장이나 시장 모두 사법경찰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찰서장과 시장이 모두 배치되어 있는 지역이라면, 이 둘의 사법경찰권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죠. 그래서 이런 경우를 제11조가 대비하고 있습니다.
제11조에 따르면 경찰서장이 배치되어 있는 지역은 경찰서장이 사법경찰권을 갖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는 시장이 사법경찰권을 갖고 위경죄(길거리 범죄나 교통 범죄와 같은 경미한 범죄)를 수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제66조는 장발장이 팡띤으로 인한 개인적 피해에 대한 신고나 배상을 포기함으로써 더이상의 사법절차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근거규정이네요.
아무튼, 제9조와 제11조는 규모가 작은 지역에까지 모두 경찰서장을 배치할 수는 없으므로, 경찰서장이 없는 지역은 시장에게 경찰권을 맡긴다는 내용입니다. 아마도 장발장이 시장으로 있었던 몽트뢰이유-쉬르-메르에는 경찰서장이 배치되어 있지 않아 시장이 사법경찰권을 갖고 있으면서 그 지역에 배치된 경찰관들을 지휘감독하는 구조인 것으로 보입니다.
'레미제라블' 제1권 279쪽에는 프랑스 국왕이 지사의 추천에 따라 장발장을 시장으로 임명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중앙에서 시장을 직접 임명했다는 것을 보면, 몽트뢰이유-쉬르-메르가 지방자치단체라기보다는 중앙정부의 하부기관인 지방관청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초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던 자베르는 몽트뢰이유-쉬르-메르로 발령받아 근무하다 다시 파리로 발령받는데요, 이렇게 전국적으로 인사이동을 하는 것을 보면 자베르는 국가경찰(전국 단위의 중앙집권적 경찰조직)의 구성원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제 해석이 정확한지는 자신 없습니다만, 아마도 이 당시 경찰서장이 없는 지역의 경우 시장과 경찰 간의 관계는, 지방관청이 사법경찰권의 주체이고 그 지역에 배치된 국가경찰이 이를 보조하는 형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레미제라블' 당시 시장과 경찰 간의 이러한 관계는, 오늘날 프랑스에서 시행하고 있는 자치경찰 제도와 흡사해 보입니다. 자치경찰 제도란, 중앙정부가 아닌 각 지방자치단체가 경찰권을 보유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자치경찰 제도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았습니다. 제가 참고한 문헌은 이러합니다.
- 오승규, "프랑스 자치경찰제도와 시사점", 법과 정책연구 제18집 제2호, 2018.
- 이승민, 프랑스 경찰행정, 경인문화사, 2014.
현재 프랑스의 경찰조직은, 그 운영주체를 기준으로 할 때 국가경찰과 자치경찰이 공존하고 있고, 자치경찰(police municipale)은 각 기초자치단체장(maire)에게 소속되어 있습니다.
자치경찰 제도는 중세 이래로 향촌사회의 자치 제도로 기능해 왔습니다. 당초에는 주민들이 관습 등에 따라 자체적으로 각 지역의 치안질서 내지 사적 재판을 담당하였으나, 점차 각 지역의 권력자인 수도원, 봉건영주, 귀족 등이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였습니다. 아직 중앙집권체제에 이르지 않아 중앙정부가 지방 곳곳까지 영향력을 미칠 정도의 힘은 없었던 시절에는, 당연히 각 지역별로 그 지역의 유력집단이 경찰권을 행사하며 질서를 유지하였던 것입니다.
점차 중앙집권체제가 마련되어 가면서, 경찰권은 중앙정부가 보유하면서도 여전히 치안업무의 상당 부분은 중앙정부로부터 위임받은 각 지방관청이 담당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중앙정부를 경찰권의 주된 책임주체로 보면서도 지방자치단체에게 일정 부분 경찰권을 부여하기 시작합니다. 이젠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된 상태이지만, 여전히 과거의 지역자치 전통이 살아남은 겁니다.
현재 프랑스 자치경찰관청은 각 기초자치단체인 꼬뮌(commune)의 장인 시장(maire)이고, 자치경찰관(agent de police municipale)은 기초자치단체장에게 소속된 지방공무원입니다. 2016년 기준으로, 프랑스 전체 경찰인원 269,616명 중 자치경찰은 8%(21,637명), 국가경찰은 92%(247,979명)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그런데 장발장은 그런 자베르를 용서하며, 경찰권의 주체로서 이런 임무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자베르, 당신은 지금 곧 쌩 쏠브 거리 모퉁이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뷔조삐에 아주머니를 찾아가 짐마차꾼 삐에르 세늘롱을 고발하도록 일러주시오. 이 사나이는 여간 난폭한 놈이 아니어서 그 아주머니와 아이를 하마터면 치어죽일 뻔했소.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되오.
다음에는 몽트르 드 샹삐니 거리의 샤르셀레 씨에게 가 주시오. 옆집 홈통에서 빗물이 떨어져 자기 집 토방을 썩게 만들었다는 호소가 들어왔으니까.
그런 다음 기부르 거리의 도리스 미망인과 가로 불랑 거리의 르네 르 보쎄 부인을 찾아가, 신고 들어온 바와 같은 경찰법 위반 사항이 있는지 어떤지 확인하고 조서를 꾸며 주시오."
프랑스 자치경찰 제도에 관한 부실한 공부는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독서일기] 레미제라블 2
독서일기 레미제라블 두 번째 글입니다.
레미제라블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는 대목이, 장발장이 받았던 무거워도 너무 무거운 형벌에 대한 비난입니다. 극도로 가난해 굶주린 사람이 배고픔을 견딜 수 없던 나머지 결국 빵 하나를 훔쳤는데, 딸랑 빵 하나 훔쳤다고 십 몇 년씩이나 사람을 징역 살리는 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 법에는 인정도 없느냐, 유전무죄 무전유죄 아니냐는 등의 비난이 그것이죠.
제가 읽고 있는 동서문화사 판 '레미제라블' 첫째 권 150쪽 이하 부분을 보면, 장발장이 총 19년의 징역형을 받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밤에 빵가게 창을 깨고 손을 집어넣어 빵 한 개를 훔쳐서 5년, 교도소 생활 중 4년을 마칠 무렵 첫 탈옥을 시도하다 3년, 6년째에 다시 탈옥을 시도하던 중 간수를 폭행하여 5년, 10년째에 세 번째 탈옥을 시도하다 3년, 13년째에 마지막 탈옥을 시도하다 다시 3년.
장발장은 이 19년을 꽉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 아닌 자유의 몸이 됩니다. 석방되고 나서도 가는 곳마다 노란색 통행증을 제시해야 하는, 즉 지금으로 치면 보호관찰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되지요.
장발장이 빵을 훔치기 전에는 딱히 다른 전과가 있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주림을 참지 못해 우발적으로 빵을 한 개 훔친 행위에 대한 벌 치고는 5년의 징역형이란 대단히 무거워 보이긴 합니다.
장발장이 빵을 훔친 게 1795년이라고 하니, 1791년에 제정된 형법(CODE PÉNAL Du 25 septembre – 6 octobre 1791)이 적용될 것 같은데요, 제2장 개인에 대한 중죄(TITRE II - CRIMES CONTRE LES PARTICULIERS) 중 제2절 재산에 대한 중죄와 경죄(SECTION II - CRIMES ET DÉLITS CONTRE LES PROPRIÉTÉS) 항목의 제3조와 제4조를 찾아보니, 밤에 남의 집에 침입해 물건을 훔친 죄의 징역형이 최고 22년에 이르는군요. 어마어마하긴 한데, 물론 법정형이 그렇다는 것이고 각 사건에서의 개개 사정에 따라 22년의 범위 내에서 형벌의 높낮이가 상당한 진폭으로 왔다갔다 하겠지요.
우리 형법에 의하더라도 특수절도죄(야간에 문을 손괴하고 타인의 건조물에 침입하여 재물을 절취)는 벌금형도 없이 징역형만 정해져 있는 중한 범죄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나라 기준에 의한다면, 초범에, 우발적 범행에, 피해가 크지 않은 점 등을 참작받아 기소유예 정도, 더 무거워봤자 집행유예 정도의, 형벌이라기보다는 사실상의 선처를 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348쪽 이하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합니다. '샹마띠외(Champmathieu)'라는 사나이가 남의 집 사과를 훔치다가 잡혔는데, 하필 장발장과 나이와 고향이 같은 데다 다른 사람들이 그가 장발장이라는 잘못된 증언을 하는 바람에 장발장으로 누명을 쓰고 중벌에 처해질 상황에 이르게 되는데요. 이 사람의 범행에 대해 자베르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담을 넘고 들어가 가지를 꺾고 사과를 훔친 것쯤은 어린아이라면 장난에 지나지 않고 어른이라 해도 경범죄에 불과하지만, 전과자라면 큰 범죄입니다. 가택 침입에 절도가 겹치는 것입니다. 이미 경범죄 재판의 문제가 아니고 중죄 재판입니다. 며칠 동안의 구류가 아니라, 종신 징역입니다.
자베르는 남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가 사과를 훔쳐도 전과만 없다면 단지 '경범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빵집 창을 깨고 손을 안으로 집어넣어 빵을 훔친 것이나, 남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가 나뭇가지를 꺾고 사과를 훔친 것이나, 서로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행위 자체도 비슷하고 피해 정도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왜 장발장은 징역 5년, 샹마띠외는 단지 경범죄인 걸까요. 장발장이 빵을 훔친 1795년과 샹마띠외가 사과를 훔친 1823년 사이에 법이 바뀌어 절도죄의 형벌이 가벼워진 걸까요. 절도죄를 바라보는 법의 시선이 불과 30년 사이에 그렇게 관대해졌을 것 같진 않은데요.
'레미제라블'의 원문을 한번 찾아봤습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애플 아이북스 버전입니다.
Si c'est Jean Valjean, il y a récidive. Enjamber un mur, casser une branche, chiper des pommes, pour un enfant, c'est une polissonnerie; pour un homme, c'est un délit; pour un forçat, c'est un crime. Escalade et vol, tout y est. Ce n'est plus la police correctionnelle, c'est la cour d'assises. Ce n'est plus quelques jours de prison, ce sont les galères à perpétuité.
재범이 아니라면 어른이 남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가 나뭇가지를 꺾어 사과를 훔친 행위는 'délit'이고, 재범이라면 'crime'이라는 설명이 나오네요. 프랑스 형법에서는 법정형의 경중에 따라 범죄를 중죄(crime), 경죄(délit), 위경죄(contravention) 등 3가지로 구분하여, 각각의 수사절차와 재판절차를 달리 규정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중죄와 경죄가 법정형 징역 10년을 기준으로 구분되는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당시에는 징역 5년을 기준으로 구분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경죄'는 이름만 가벼운 범죄로 보일 뿐, 법정형의 상한이 징역 5년에까지 이르는, 결코 가볍지 않은 범죄를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위 동서문화사 판의 '경범죄'라는 번역은 정확하지 않은 것이고, 중죄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범죄라는 의미로 그러한 표현을 쓴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일을 평가할 때는 지금의 기준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따져봐야겠지요. 물질풍요의 시대와 그렇지 않은 시대 사이에 빵 하나의 가치는 현격히 다를 것이고, 치안과 사회질서가 안정되어 있는 시대와 그렇지 않은 시대 사이에 법과 경찰활동의 역할은 매우 다를 것입니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장발장의 형벌을 바라봐야겠지요.
아무튼 장발장이 받은 과중한 형벌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타까운 연민을 보내는 한편으로, 그런 약자에게 인정사정 없는 무자비한 공권력을 비난하곤 합니다. 빅토르 위고 역시 마찬가지구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장발장의 19년 징역형에 대해서는 대부분 비판을 가하면서도, 지금 우리 일상에서는 '엄벌'이나 '처벌 강화' 같은 말을 너무나 쉽게 입에 올리곤 합니다. 어떠한 큰 사건이나 사고만 났다 하면 그에 대한 충분한 원인 분석이나 깊은 고민도 없이 즉각적으로 쉽게 나오는 대책이, 바로 엄벌, 처벌 강화입니다. 최근에 발생한 음주운전, 응급실 폭력 등의 불행한 사건, 사고들에 대해서도 언론과 정부는 매번 엄벌주의라는 익숙한 주문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엄벌주의로 그러한 사건, 사고를 미리 예방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전통적으로 매우 논란이 많은 문제입니다. 엄벌주의가 정답이라고 단정해 말하기 곤란합니다. 엄벌주의는 희생양을 만들어 온갖 비난을 집중시킴으로써 사건, 사고의 근원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엄벌주의를 구호로 만들어진 법은 자칫 약자에게 인정사정 없는 무자비한 공권력을 양산할 위험마저 있습니다.
빠르고 쉬운 길로만 가려 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Read More
레미제라블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는 대목이, 장발장이 받았던 무거워도 너무 무거운 형벌에 대한 비난입니다. 극도로 가난해 굶주린 사람이 배고픔을 견딜 수 없던 나머지 결국 빵 하나를 훔쳤는데, 딸랑 빵 하나 훔쳤다고 십 몇 년씩이나 사람을 징역 살리는 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 법에는 인정도 없느냐, 유전무죄 무전유죄 아니냐는 등의 비난이 그것이죠.
제가 읽고 있는 동서문화사 판 '레미제라블' 첫째 권 150쪽 이하 부분을 보면, 장발장이 총 19년의 징역형을 받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밤에 빵가게 창을 깨고 손을 집어넣어 빵 한 개를 훔쳐서 5년, 교도소 생활 중 4년을 마칠 무렵 첫 탈옥을 시도하다 3년, 6년째에 다시 탈옥을 시도하던 중 간수를 폭행하여 5년, 10년째에 세 번째 탈옥을 시도하다 3년, 13년째에 마지막 탈옥을 시도하다 다시 3년.
장발장은 이 19년을 꽉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 아닌 자유의 몸이 됩니다. 석방되고 나서도 가는 곳마다 노란색 통행증을 제시해야 하는, 즉 지금으로 치면 보호관찰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되지요.
장발장이 빵을 훔치기 전에는 딱히 다른 전과가 있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주림을 참지 못해 우발적으로 빵을 한 개 훔친 행위에 대한 벌 치고는 5년의 징역형이란 대단히 무거워 보이긴 합니다.
장발장이 빵을 훔친 게 1795년이라고 하니, 1791년에 제정된 형법(CODE PÉNAL Du 25 septembre – 6 octobre 1791)이 적용될 것 같은데요, 제2장 개인에 대한 중죄(TITRE II - CRIMES CONTRE LES PARTICULIERS) 중 제2절 재산에 대한 중죄와 경죄(SECTION II - CRIMES ET DÉLITS CONTRE LES PROPRIÉTÉS) 항목의 제3조와 제4조를 찾아보니, 밤에 남의 집에 침입해 물건을 훔친 죄의 징역형이 최고 22년에 이르는군요. 어마어마하긴 한데, 물론 법정형이 그렇다는 것이고 각 사건에서의 개개 사정에 따라 22년의 범위 내에서 형벌의 높낮이가 상당한 진폭으로 왔다갔다 하겠지요.
우리 형법에 의하더라도 특수절도죄(야간에 문을 손괴하고 타인의 건조물에 침입하여 재물을 절취)는 벌금형도 없이 징역형만 정해져 있는 중한 범죄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나라 기준에 의한다면, 초범에, 우발적 범행에, 피해가 크지 않은 점 등을 참작받아 기소유예 정도, 더 무거워봤자 집행유예 정도의, 형벌이라기보다는 사실상의 선처를 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348쪽 이하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합니다. '샹마띠외(Champmathieu)'라는 사나이가 남의 집 사과를 훔치다가 잡혔는데, 하필 장발장과 나이와 고향이 같은 데다 다른 사람들이 그가 장발장이라는 잘못된 증언을 하는 바람에 장발장으로 누명을 쓰고 중벌에 처해질 상황에 이르게 되는데요. 이 사람의 범행에 대해 자베르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담을 넘고 들어가 가지를 꺾고 사과를 훔친 것쯤은 어린아이라면 장난에 지나지 않고 어른이라 해도 경범죄에 불과하지만, 전과자라면 큰 범죄입니다. 가택 침입에 절도가 겹치는 것입니다. 이미 경범죄 재판의 문제가 아니고 중죄 재판입니다. 며칠 동안의 구류가 아니라, 종신 징역입니다.
자베르는 남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가 사과를 훔쳐도 전과만 없다면 단지 '경범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빵집 창을 깨고 손을 안으로 집어넣어 빵을 훔친 것이나, 남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가 나뭇가지를 꺾고 사과를 훔친 것이나, 서로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행위 자체도 비슷하고 피해 정도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왜 장발장은 징역 5년, 샹마띠외는 단지 경범죄인 걸까요. 장발장이 빵을 훔친 1795년과 샹마띠외가 사과를 훔친 1823년 사이에 법이 바뀌어 절도죄의 형벌이 가벼워진 걸까요. 절도죄를 바라보는 법의 시선이 불과 30년 사이에 그렇게 관대해졌을 것 같진 않은데요.
'레미제라블'의 원문을 한번 찾아봤습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애플 아이북스 버전입니다.
Si c'est Jean Valjean, il y a récidive. Enjamber un mur, casser une branche, chiper des pommes, pour un enfant, c'est une polissonnerie; pour un homme, c'est un délit; pour un forçat, c'est un crime. Escalade et vol, tout y est. Ce n'est plus la police correctionnelle, c'est la cour d'assises. Ce n'est plus quelques jours de prison, ce sont les galères à perpétuité.
재범이 아니라면 어른이 남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가 나뭇가지를 꺾어 사과를 훔친 행위는 'délit'이고, 재범이라면 'crime'이라는 설명이 나오네요. 프랑스 형법에서는 법정형의 경중에 따라 범죄를 중죄(crime), 경죄(délit), 위경죄(contravention) 등 3가지로 구분하여, 각각의 수사절차와 재판절차를 달리 규정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중죄와 경죄가 법정형 징역 10년을 기준으로 구분되는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당시에는 징역 5년을 기준으로 구분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경죄'는 이름만 가벼운 범죄로 보일 뿐, 법정형의 상한이 징역 5년에까지 이르는, 결코 가볍지 않은 범죄를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위 동서문화사 판의 '경범죄'라는 번역은 정확하지 않은 것이고, 중죄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범죄라는 의미로 그러한 표현을 쓴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일을 평가할 때는 지금의 기준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따져봐야겠지요. 물질풍요의 시대와 그렇지 않은 시대 사이에 빵 하나의 가치는 현격히 다를 것이고, 치안과 사회질서가 안정되어 있는 시대와 그렇지 않은 시대 사이에 법과 경찰활동의 역할은 매우 다를 것입니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장발장의 형벌을 바라봐야겠지요.
아무튼 장발장이 받은 과중한 형벌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타까운 연민을 보내는 한편으로, 그런 약자에게 인정사정 없는 무자비한 공권력을 비난하곤 합니다. 빅토르 위고 역시 마찬가지구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장발장의 19년 징역형에 대해서는 대부분 비판을 가하면서도, 지금 우리 일상에서는 '엄벌'이나 '처벌 강화' 같은 말을 너무나 쉽게 입에 올리곤 합니다. 어떠한 큰 사건이나 사고만 났다 하면 그에 대한 충분한 원인 분석이나 깊은 고민도 없이 즉각적으로 쉽게 나오는 대책이, 바로 엄벌, 처벌 강화입니다. 최근에 발생한 음주운전, 응급실 폭력 등의 불행한 사건, 사고들에 대해서도 언론과 정부는 매번 엄벌주의라는 익숙한 주문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엄벌주의로 그러한 사건, 사고를 미리 예방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전통적으로 매우 논란이 많은 문제입니다. 엄벌주의가 정답이라고 단정해 말하기 곤란합니다. 엄벌주의는 희생양을 만들어 온갖 비난을 집중시킴으로써 사건, 사고의 근원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엄벌주의를 구호로 만들어진 법은 자칫 약자에게 인정사정 없는 무자비한 공권력을 양산할 위험마저 있습니다.
빠르고 쉬운 길로만 가려 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피드 구독하기:
글
(
Atom
)
Search
Category
Tag
4월 이야기
(2)
가짜 뉴스
(1)
감독관
(1)
감찰관
(2)
감찰제도
(3)
강사
(1)
강의
(3)
강제수사
(2)
강제입원
(1)
개혁
(9)
건축
(4)
검사
(51)
검찰
(26)
검찰총장
(6)
검찰항고
(1)
경찰
(4)
고등사법위원회
(7)
골든아워
(1)
공감
(9)
공기계
(1)
공부
(4)
교도소
(2)
교육
(2)
구글
(10)
구글포토
(1)
구금대체형
(2)
구금시설
(1)
구치소
(1)
국가금융검찰
(4)
국가대테러검찰
(2)
국가사법재판소
(4)
국가정보기술감독위원회
(1)
국가정의재판소
(2)
국사
(1)
권리보호관
(1)
그리스
(1)
근무환경
(3)
금융전담 검찰
(3)
기생충
(1)
까페
(2)
나의아저씨
(1)
네덜란드
(1)
노란조끼
(1)
녹음
(1)
논고
(1)
대구
(1)
대륙법
(1)
대법원
(10)
대법원장
(2)
대테러
(3)
대통령
(2)
대학원
(6)
대화
(2)
데이식스
(1)
덴마크
(1)
도시
(1)
도피성
(1)
독립성
(17)
독서일기
(37)
독일
(1)
드라마
(1)
디지털
(8)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3)
디지털증거
(2)
라따뚜이
(1)
라트비아
(1)
레미제라블
(3)
루브르
(1)
룩셈부르크
(1)
리더
(1)
리투아니아
(1)
마이클 코넬리
(6)
마인드맵
(1)
마츠 타카코
(1)
마크롱
(2)
맥
(3)
메타버스
(1)
명예훼손죄
(3)
모노프리
(1)
모욕죄
(2)
몰타
(1)
문화
(1)
미국
(12)
미러링
(2)
미모자
(1)
미술
(1)
미키 할러
(6)
바울
(1)
배심재판
(1)
배심제
(7)
범죄
(4)
법률구조
(1)
법률용어
(2)
법무부
(19)
법무부장관
(11)
법원
(15)
법원서기
(1)
법정
(3)
법정소설
(6)
벨기에
(1)
변호사
(11)
변호사협회
(1)
보호유치
(4)
블로그
(5)
비상상고
(1)
비시정부
(2)
빵
(3)
사교
(1)
사기죄
(2)
사법감찰
(1)
사법개혁
(2)
사법관
(16)
사법정보
(2)
사법제도
(86)
사소
(1)
사용자 환경
(1)
사진
(1)
샌드위치
(1)
서기
(1)
서울
(5)
석방구금판사
(1)
성경
(2)
성희롱
(1)
센강
(1)
소년법원
(1)
소법원
(2)
소통
(7)
수사
(1)
수사지휘
(1)
수사판사
(4)
수용시설
(1)
수용시설 최고감독관
(1)
슈크르트
(1)
스웨덴
(1)
스트로스 칸
(1)
스티브잡스
(5)
스페인
(1)
슬로바키아
(1)
슬로베니아
(1)
시간
(1)
시스템
(1)
식도락
(14)
식전빵
(1)
신년사
(2)
신속기소절차
(1)
신원확인
(1)
심리학
(2)
아날로그
(2)
아웃라이어
(1)
아이디어
(9)
아이유
(1)
아이패드
(16)
아이폰
(24)
아일랜드
(1)
아카데미상
(1)
압수수색
(2)
애플
(8)
앱
(5)
야구
(2)
언락폰
(1)
언터처블
(1)
에스토니아
(1)
엘리제 궁
(1)
여행
(10)
역사
(11)
열정
(1)
영국
(2)
영미법
(1)
영상녹화물
(2)
영어
(1)
영화
(9)
예술
(1)
예심수사판사
(6)
예심판사
(3)
오스카상
(1)
오스트리아
(1)
올림픽
(1)
와이파이
(1)
와인
(1)
우트로 사건
(1)
웹사이트
(1)
위선떨지 말자
(1)
위헌
(1)
유럽사법재판소
(1)
유럽인권법원
(1)
유심
(1)
유튜브
(3)
음식
(1)
이국종
(1)
이준
(1)
이탈리아
(1)
인간관계론
(1)
인공지능
(1)
인사
(3)
인생
(1)
인왕재색도
(1)
일본
(1)
자치경찰
(1)
잡담
(40)
재판
(1)
재판의 독립
(1)
쟝-루이 나달
(1)
저작권
(1)
전문법칙
(3)
전원
(1)
전자소송
(4)
전자화
(5)
절차의 무효
(1)
정신병원
(2)
조서
(4)
조직범죄
(1)
중죄재판부
(2)
증거
(7)
증거법
(2)
지문
(1)
직권남용
(1)
직무교육
(1)
직무상 과오 책임
(1)
직장
(7)
직접주의
(1)
참고인
(1)
참고인 구인
(1)
참심제
(2)
체코
(1)
최고사법관회의
(7)
치료감호소
(1)
카페
(1)
캠핑장
(2)
케밥
(1)
크롬
(1)
크리스마스
(1)
키노트
(1)
키프로스
(1)
테러
(3)
통계
(1)
통신비밀
(1)
퇴사
(1)
트위터
(4)
파기원
(2)
파리
(21)
파리 지방검찰청
(1)
판결정보 공개
(3)
판례
(1)
판사
(7)
팟캐스트
(1)
페이스북
(2)
포르투갈
(1)
포토북
(2)
폴란드
(1)
프랑스
(26)
프랑스 국립사법관학교
(13)
프랑스 드라마
(1)
프랑스 사법제도
(131)
프랑스 생활
(36)
프랑스 언론
(3)
프랑스 영화
(3)
프랑스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
(9)
프랑스 장관
(1)
프랑스 총리
(1)
프랑스어
(4)
프레젠테이션
(1)
프리젠테이션
(1)
플뢰르 펠르랭
(2)
플리바기닝
(5)
피해자
(1)
핀란드
(1)
한식
(1)
한양도성
(1)
햄버거
(1)
헌법
(1)
헌법위원회
(3)
헝가리
(1)
형벌
(4)
형사소송
(37)
호텔
(1)
회식
(3)
AI
(1)
CEO
(1)
DELF
(3)
DNA
(1)
EU
(28)
gilets jaunes
(1)
greffier
(1)
IT
(56)
jeudigital
(1)
NFT
(1)
open data
(4)
RSS
(1)
transformation numérique
(1)
UI
(1)
Je-Hee. Powered by Blogger.
Blog Archive
-
2021
(15)
- 12월 2021 (2)
- 11월 2021 (1)
- 10월 2021 (2)
- 9월 2021 (3)
- 8월 2021 (1)
- 7월 2021 (2)
- 6월 2021 (1)
- 5월 2021 (1)
- 3월 2021 (2)
-
2019
(40)
- 12월 2019 (4)
- 11월 2019 (4)
- 10월 2019 (2)
- 9월 2019 (1)
- 8월 2019 (3)
- 7월 2019 (13)
- 4월 2019 (2)
- 3월 2019 (3)
- 1월 2019 (6)
-
2018
(36)
- 12월 2018 (7)
- 11월 2018 (3)
- 10월 2018 (4)
- 9월 2018 (2)
- 8월 2018 (2)
- 7월 2018 (1)
- 6월 2018 (3)
- 5월 2018 (1)
- 4월 2018 (6)
- 3월 2018 (6)
- 2월 2018 (1)
-
2017
(24)
- 12월 2017 (6)
- 11월 2017 (1)
- 9월 2017 (1)
- 8월 2017 (2)
- 7월 2017 (3)
- 6월 2017 (3)
- 5월 2017 (1)
- 3월 2017 (3)
- 2월 2017 (2)
- 1월 2017 (2)
-
2016
(33)
- 12월 2016 (6)
- 11월 2016 (1)
- 10월 2016 (5)
- 9월 2016 (1)
- 8월 2016 (1)
- 7월 2016 (2)
- 6월 2016 (3)
- 5월 2016 (6)
- 4월 2016 (2)
- 3월 2016 (3)
- 2월 2016 (3)
Popular Posts
-
얼마 전 어느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별의별 직업인들이 다양하게 등장하는데, 그 중엔 검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다고. 바로 사도 바울이 원래 검사였다는 겁니다. 바울이 검사라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말이라 의아했습...
-
5. 9. 어제 프랑스 법무부 사이트에 뜬 기사에 의하면 프랑스 법무부 장관이 국무회의에서 금융전담 검찰을 창설하는 법안을 제안하였다고 합니다. 대형 금융범죄, 탈세, 수뢰범죄 등을 단속하기 위해 금융전담 검찰을 창설하고, 이는 파리지방검찰청에 배치...
-
언젠가부터 고급 레스토랑은 물론 동네에 있는 흔한 파스타 집에서도 '식전빵'이란 걸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에피타이저든 주요리든 뭔가가 나오기 전에 가장 먼저 발사믹을 친 올리브 오일과 함께 나오는 빵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요...
-
2013년 5월 10일에 " 프랑스 금융전담 검찰 창설 "이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 법무부장관이 국무회의에서 전국의 대형 금융사건을 전담수사하는 '금융전담 검찰'을 창설하는 법안을 제안하였다는 내용인데요,...
© iMagistrat 2013 . Powered by Bootstrap , Blogger templates and RWD Testing To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