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1일 일요일
[독서일기] 르네상스의 갈림길 - 배심재판과 조서재판
『르네상스의 갈림길 - 배심재판과 조서재판』, John H. Langbein 저 / 김희균 역, 한국형사정책연구원, 2012.
이미 절판된 책이지만 '국가정책연구포털' 사이트(https://www.nkis.re.kr:4445)에서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의 번역자이자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계신 김희균 교수님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프랑스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형사법을 공부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십니다. 형사법에 대해 엄청난 내공을 갖고 계시면서 글을 참 알기 쉽고 재밌게 쓰시는, 대단하고 존경스런 분입니다. 교수님이 쓰신 여러 학술논문들 중 특히 "CCTV를 본 증인의 진술의 증거능력"(서울법학 제20권 제1호, 서울시립대학교, 2012)이라는 논문은, 그 어려운 전문증거의 개념을 쉽고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주는 불후의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 『르네상스의 갈림길 - 배심재판과 조서재판』은 16세기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 각각 벌어진 형사법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원 제목은 『Prosecuting Crimes in the Renaissance』. 한참 전에 있었던 남의 나라 얘기, 사실 많이 지루하고 재미도 없습니다. 책 자체보다는 김 교수님이 쓰신 '역자 서문'이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교수님 유학생활의 애환도 들을 수 있고, 무엇보다 전문법칙과 크로포드 판결이 뭔지 쉽게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역자 서문만 읽어도 본전 뽑는 거라 생각합니다. 너무 좋은 글이기에 이 블로그에 찬찬히 정리해놓고 싶어 오랜만에 독서일기를 적어봅니다.
마지막 약간의 인사말 부분만 빼고 다소 길지만 역자 서문의 대부분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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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Crawford v. Washington 이라는 판례에 각주로 소개된 책이다. 보통 외국 판례를 읽을 때 각주까지 부릅뜨고 읽을 일이 거의 없지만 아주 개인적인 이유로 나는 그런 무모한 짓을 하고 말았다.
2004년 여름 박사학위 논문을 다 마치고, 귀국해서 무얼 할까 궁리하고 있었다. 미국에 가서는 절대 전공하지 말라는 전문법칙으로 논문을 거의 다 쓴 터라 그 다음 일이 걱정이었다. 그러던 차에 A 대학 공채에 서류를 냈고 총장 면접까지 무사히 올라갔으며, 나름대로 잘 치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니, 9월이었다. 학위논문 완성본만 있으면 얼른 고국으로 돌아가야지, 그런 생각에 적잖이 들떠 있었다. 마지막 구두심사를 하는 날 제일 비싼 커피를 열 잔씩이나 갖다 놓고 교수님들을 기다렸다. 전문법칙과 그 예외이론은 건드리기만 해도 다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Ohio v. Roberts 라는 1980년 판결에 대해서는 여러 층으로 분석을 끝낸 상태였다. 그런데 그날 심사에 들어오신 미국 교수 3명은 Roberts에 대해서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Crawford만 물어 봤다. 그런 판결이 금년 봄에 나왔다는 것쯤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뭐? 그게 어쨌다고? 그게 Roberts를 엎기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아니, 24년 동안 멀쩡하던 판결이 왜 하필 지금 뒤집혀? 나는 열심히 대답했지만 교수들은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끝자리에 앉아 있던 지도교수는 별다른 도움은 주지 않고 창문만 힐끔힐끔 쳐다봤다. 나만큼이나 곤란해 보였다. 나는 얼굴이 점점 노래져 갔다. 심사가 끝나고 지도교수가 아주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고치는 데 1년까지 걸리지는 않을 거야.”
서울 갈 짐을 싸고 있는 아내한테 뭐라고 말해야 하지...
지도교수 말을 듣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2004년 3월에 나온 Crawford는 1980년 Roberts를 뒤집었다. Roberts를 근거로 썼던 책들은 다시 써야 할 처지가 됐다. 도대체 Crawford가 뭐길래 24년 간 요지부동이던 Roberts를 엎은 것일까. A 대학 교수로 가는 길이 막혀 버린 나는 그해 가을 눈을 부릅뜨고 Crawford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재판에는 원래 증인이 나와야 한다. 증인은 안 나오고 증인이 한 말을 들어서 다른 사람이 전하는(이걸 ‘전문’이라고 한다) 경우, 그 전하는 사람의 진술을 전문증거라고 한다. 전문증거는 증거능력이 없다. 왜? 반대신문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신문을 해야 약점을 노출시켜서 신용성을 높일 수 있는데, 그걸 못하니까 증거능력이 없다. 이게 전문법칙이다. 그렇다면 굳이 반대신문 하지 않아도 충분히 믿을 만한 진술은 어떻게 하나? 가령 증인이 재판 전에 죽어가면서 한 진술, “이제 죽으면서 하는 말이지만, 그 피고인이 스미스 부인을 죽이는 걸 내가 봤어” 이런 진술, 이런 건 반대신문을 하지 않아도 증거능력이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왜? 충분히 믿을 만하니까 말이다. 이런 진술을 우리는 전문법칙의 예외라고 한다. 반대신문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믿을 만한 불출석 증인의 진술은 예외적으로 증거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자. 범행 현장에서 피고인의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 그 머리카락에서 DNA를 추출한 결과 피고인 것이다, 라는 사실을 알아낸 사람이 과학수사담당관이자 증인인 W다. W는 그런 취지로 감정서를 썼다. 감정서에는 “현장에서 발견한 머리카락은 피고인의 것이다” 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그 감정서를 썼다는 W는 이미 퇴직해서 이민을 갔고, 그가 쓴 감정서만 증거로 제출됐다. 그러면 감정서는 전문증거가 된다. W가 직접 말하는 게 아니라 서류에 담겨서 법정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증거능력이 있는가? 있다. 왜? 전문법칙의 예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감정서 같은 공신력 있는 분석기관의 문서는 증거능력이 있다는 예외가 우리 법 제314조에도 있고, 미국연방증거규칙 제803조(8)에도 있다. 이런 조항들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DNA 분석 결과를 낼 때 직접 쓴 사람을 대기시켜야 한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쉬운 일은 절대로 아니다.
전문법칙의 예외 이론은 수사기관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다. 증인을 직접 내지 않고도 증인의 진술을 제3자나 서면을 통해서, 혹은 비디오테이프를 통해서, 녹음테이프를 통해서 법정에 내고 그걸로 유죄판결을 받을 수 있는 유용한 장치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전부 증거법이고, 헌법 상 문제가 남아 있다. 미연방헌법 수정 제6조는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자를 피고인이 대면할 수 있는 권리, 즉, 대면권(right of confrontation)을 규정하고 있다. 우리 예로 바꿔 설명하면 피고인이 W를 대면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게 보장되지 않으면 헌법 위반이라고 한다. 만약 이 대면권 조항을 곧이곧대로 적용하면 모든 전문법칙의 예외 조항은 다 위헌이 된다. 왜? 대면을 시켜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내 앞에 데리고 와라. 내 앞에서 말하게 하라. 그러면 내가 기꺼이 죽겠다”는 1603년 영국의 장군 Walter Raleigh의 외침이 있었고, 그게 대면권이 되었으며, 미국 헌법 수정 제6조에 등기되어 있다.
미국은 200년 동안 이 문제를 두고 골머리를 앓았다. 전문증거를 쓰기는 써야겠는데, 그러자면 헌법 위반이 된다. 대면이 옳은 것은 안다. 대면? 좋다. 하지만 어떻게 일일이 증인을 다 법정에 데려오는가 말이다. 이런 논쟁이 200년 동안 계속되다가 1980년 Roberts에서 매듭을 짓는다. “신용성이 있어서 예외적으로 증거능력이 인정되는 경우, 헌법 상 대면권도 보장한 것이 된다” 라고 연방대법원이 설시한 것이다. 즉, 피고인에게 증인의 얼굴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증인의 진술이 일단 신용성 심사를 받았고, 그걸 통과했으면 별 문제가 안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DNA 분석결과보고서와 같은 중요한 증거가 법정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당연히 나도 이 판결을 기초로 전문법칙을 썼고, 그 예외 이론을 썼고, 그간의 논의를 썼고, 결론을 내렸다. 전문법칙의 예외 규정을 맞추면 대면권도 보장된 걸로 친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Crawford가 이를 뒤집은 것이다. 어떻게 뒤집었겠는가. 짐작하시는 그대로다.
“전문법칙이고 예외고 우리는 그런 거 모른다. 불리한 증인은 얼굴을 보여 줘라.” 라고 말이다.
이로써 내가 쓴 논문은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1999년 여름 크로포드는 Lee라는 자가 자기 부인을 강간하려고 했다는 얘기를 듣고 펄쩍 뛰었다. 여러 바를 전전하면서 ‘Lee, 어디 있어? 알아?’ 라고 수소문을 하고 다녔다. 크로포드 부인은 보다 못해 크로포드를 Lee의 아파트로 안내했다. 그런데 주소를 잘못 알아서 다른 집을 눌렀는데도 Lee가 우연히 자기 집 문을 열었다. 크로포드와 부인은 Lee의 집으로 들어갔고, 크로포드와 Lee 사이에 말다툼이 있었으며, 크로포드가 Lee를 칼로 찔러 상해를 입혔다. 이게 사건의 전말이다.
크로포드와 부인은 수차례 경찰 조사를 받았다. 두 사람이 말하는 바가 대부분 일치했다. 그런데 한 군데서 진술이 달랐다. 논점은, ‘크로포드가 칼을 들고 달려들 당시에 Lee가 칼을 들고 있었느냐?’로 모아졌다. 크로포드는 이 대목에서 그렇다, 고 대답했다. 즉, 상해한 것은 맞지만 정당방위라는 것이다. 반면에 부인의 진술은 약간 달랐다. 남편이 칼로 찌를 때 Lee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는데, 나중에 손을 꺼낼 때 보니까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부인의 진술에 따르면 크로포드는 정당방위를 한 게 아니라, 무기도 없는 자를 찌른 게 된다. 경찰이 부인의 진술을 그대로 녹음했고, 크로포드에게는 위험한 한 방(?)이 될 수 있는 증거였다.
크로포드는 재판에서 ‘부부 간 증언거부권’을 행사한다. 즉, 부부는 다른 일방의 형사사건에서 진술할 수 없다, 는 워싱턴 주법 조항을 원용한 것이다. 그래서 부인은 법정에 나올 수 없었고, 대신 녹음테이프만 나왔다. 전문증거만 나온 것이다. 피고인 측 변호사는 바로 손을 들었다.
“전문증거라서 증거능력이 없습니다.”
그러자 검사가 반박했다.
“전문증거인 것은 맞지만, 이 테이프는 예외에 해당해서 증거능력이 있습니다.”
“무슨 예외?”
“증인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로서 전문법칙의 예외에 속합니다.”
크로포드 사건에서 가장 신비로운 인물이 바로 부인이다. 부인은 자기 남편에게 무슨 애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편 성질을 뻔히 알면서도 남편을 Lee의 아파트로 인도한 것이다. 번지수는 약간 틀렸지만, 그래도 마침 Lee가 기어 나오는 바람에 사단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부인은 나중에라도 남편 편을 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심지어 잘 못 봤더라도 ‘저를 강간하려 했던 그 Lee라는 자가 손에 칼을 들고 있었어요. 그래서 남편이 별 수 없이 칼로 찔렀어요, 우리 남편이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닌데, 흑흑.’ 이렇게 흘러갔어야 맞다. 그런데 반대로 진실을 말해 버렸다. ‘저쪽은 칼도 들고 있지 않았는데, 남편이 칼로 찔렀어요’ 라고 말이다. 과연 이 진술은 믿을 만한가.
크로포드 부인이 이상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 진술은 전문법칙의 예외 이론에 의하면 믿을 만하다. 왜? 크로포드 부인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미연방증거규칙 제804조(b)(3)에 나오는 얘기다. 부인의 진술대로라면 부인 자신도 상해죄의 공범이 된다. 정범인 남편을 Lee에게 안내한 사람이 바로 부인이기 때문이다. 부인은 상해죄의 방조범이다. 그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피해자 손에 칼이 없었다고 진술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믿을 만하다고 보아야 한다. 이게 제804조(b)(3)의 취지다.
다시 공판으로 돌아와 보자.
검사가 대답한다.
“증인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로서 전문법칙의 예외에 속합니다.”
판사는 검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부인은 못 나왔지만 자기 자신한테 불리한 내용인데도 경찰한테 말한 걸로 봐서 부인의 진술은 믿을 만하지. 증거로 받아도 되겠어.’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결과 크로포드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크로포드의 변호사는 이 대목에서 큰 판을 벌이기로 작심한다. 부인의 얼굴을 보여주지도 않고, 부인의 진술을 증거로 쓰는 것은 헌법 위반이잖아, 워싱턴으로 가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크로포드 사건은 연방대법원으로 갔고, 다음과 같은 판결을 얻어 냈다.
“전문법칙이 중요한 게 아니라 헌법이 중요하다. 헌법 상 크로포드에게는 불리한 증인에 대한 대면권이 있다. 그런데 부인을 대면시켜 주지 않았으므로, 부인의 진술은 증거로 쓸 수 없다.”
크로포드는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되었다.
사실 연방대법원은 크로포드를 구제해 주는 게 아니었다. 왜? 크로포드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 아니다. 지금 이 사건에서 경찰이 부인을 증인으로 못 나오게 한 게 아니다. 불리한 증인인 부인을 경찰이 어디로 빼돌린 게 아니다. 크로포드 본인이 못 나오게 했다. 그래 놓고서는 ‘내 부인을 데려와라!!! 내 앞에 와서 얘기하게 해라!!!’ 이렇게 말하는 건 생떼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방대법원은 크로포드의 손을 들어줬다. 왜 그랬을까?
연방대법원은 그만큼 진실 발견의 장으로서 법정을 중시한다. 진실은 법정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판사는 난데, 왜 경찰인 당신이 진술을 받아?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니, 판사님, 제가 증인을 못 나오게 한 게 아닌데요, 피고인이 못 나오게 한 건데요?’
‘그건 그거고. 어쨌든 증인이 못 나왔잖아? 그런데 왜 증인 진술이 증거로 나와? 당신들이 녹음한 거 아냐? 그런 거 하지 말란 말이야. 당신이 판사야, 내가 판사지? 뭐든 내 앞에서, 피고인 보는 앞에서 얘기하란 말이야. 왜 자꾸 테이프니 문서니 이딴 데 적어서 증거로 내밀어? 그건 우리 재판이 아니야. 우리가 무슨 대륙법이야?’
그렇다. 중요한 건 여기다. 연방대법원이 무슨 말을 길게 하든, 무슨 이유를 덕지 덕지 붙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연방대법원 판사들 속에 있는 확신이다. 무엇일까? 바로 미국법은 대륙법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사실 크로포드 판결의 나머지 구절들은 전부 그야말로 사족이다. 모두 들러리다. 연방대법원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단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대면권을 강조하는 이유는) 대륙법에서처럼 증인을 신문해서 공판 전에 진술을 받아내고 그걸 법정에 증거로 내는 일을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preventing the government from using hearsay statements at trial if the statements were obtained through a method that resembles a civil-law mode of interrogation)(Crawford, 541 U.S. at 51-52)
연방대법원이 대면권을 강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륙법 방식으로 하지 말라는 얘기다. 경찰이 뭘 적었다가 증거로 내는 것? 그게 대륙법이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 식이 있다. 그게 바로 증인을 데려오는 것이다. 이게 연방대법원이 하고 싶은 말이다.
이에 대해 누군가 반론을 제기한다.
‘잠깐만요, 판사님. 우리도 예전에 공판 전에 진술을 받아서 증거로 낸 적이 있습니다.’
‘뭐?’
‘판사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대륙법적인 예심절차를 도입한 적이 있다고요. 르네상스 시댄데요, 왜 그때는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 전부 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뭐? 우리가 조서재판을 했다고?’
연방대법원은 깜짝 놀란다. 그래서 부랴부랴 르네상스 시대 법제사 책을 뒤진다. ‘우리가 대륙식으로 조서재판을 했다니!’ 혀를 끌끌 차면서 연구원들을 동원해서 사료를 뒤진 것이다. 그 결과 발견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비로소 연방대법원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거 봐. 아니잖아. 우리가 한 건 조서재판과는 차원이 다르대잖아.’
연방대법원은 의기양양했다. 그래서 아예 각주로 달아 세상에 공표하는 것이다.
‘이상은 J.H. Langbein, 『Prosecuting Crimes in the Renaissance』 참조’ 라고 말이다.
나는 그 각주에 나온 책을 대출해서 읽어 보았다.
그게 이 책을 번역한 계기다.
그런데 연방대법원이 한 가지 틀린 점이 있다.
이 책은 앞부분에서
“영국에서도 한 때 문서로 공판 전에 증인의 진술을 적었지만 그걸 그대로 증거로 쓰지는 않았고, 오히려 공판정에 증인을 불러서 구두로 진술하게 하는 방식을 썼다”
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건 맞다. 연방대법원이 읽고 싶어하는 바 그대로다. 하지만 문제는 연방대법원 혹은 그 소속 연구원들은 여기까지만 읽고 덮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면, 그 다음에는 더 엄청난 사실이 나오는데, 그게 더 중요하다. 저자는 연방대법원이 이름만 듣고도 몸서리쳐 하는 그 고약한 대륙법이 사실은 나쁜 법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적과 선을 긋다가 엉뚱하게 적을 추켜세우기에 이르는 것이다.
독자들도 들어 봤을 것이다. 캐롤리나라고. 캐롤리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알 5세가 만들어 반포한 16세기 형법 및 형사소송법이다.
보통 교과서에는 그게 악법으로 나온다. 규문절차의 금자탑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다. 고문과 자백을 중시하는 법은 맞지만 악법은 아니란다. 합리적인 법이고, 개혁법이란다. 19세기까지 독일 법학자들의 사랑을 받던 법이고, 자랑스러워 하던 법이란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연방대법원이 경멸해 마지않던 그 대륙식이라는 것이 사실은 미개하고 잔인한 제도가 아닐 수 있다. 아니,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 대륙에서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재판을 했다.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다. 미연방대법원 판사들이 짐작하는 것처럼 르네상스의 갈림길에서 영국은 천국으로 가고 독일이나 프랑스는 지옥으로 간 게 아니다.
나는 책을 덮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게 내가 이 책을 번역하고자 마음먹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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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균 교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미국 유학 시절 전문법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준비하다 크로포드 판결 때문에 국내 취업이 좌절되고 유학생활이 연장되는 곤혹스런 상황을 맞이합니다. 크로포드 판결은 미국법이 대륙법과 다르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획기적인 판결이라고 소개합니다. 미국법과 대륙법이 뭐가 그렇게 다르기에 연방대법원은 이런 판결을 만들어낸 걸까요?
영미법의 사법제도는 배심원에 의한 재판을 전제로 한 제도이고, 대륙법의 사법제도는 관료(직업법관)에 의한 재판을 전제로 한 제도입니다. 그로 인해 영미법은 수사기록이 없는 재판이, 대륙법은 수사기록 위주의 재판이 이루어집니다.
영미법에서는, 법을 모르는 배심원들에게 복잡하고 알아듣기 힘든 전문용어들이 잔뜩 쓰여있는 수사기록을 재판하는 데 참고하라고 주는 건 의미없는 일입니다. 간혹 글을 못 읽는 배심원이 있을 수도 있구요. 그래서 재판에 수사기록이 나오지 않고, 증인들이 우르르 나옵니다. 재판이 이렇게 진행되니 수사기관도 굳이 수사기록을 만들지 않습... 아니, 안 만드는 건 아닙니다. 수사기록을 만들긴 만들고 그 중 일부가 재판에 나오긴 합니다만(크로포드 사건에서도 경찰이 크로포드 부인을 조사하면서 음성녹음물을 작성하였고 이게 재판에 증거로 등장했죠), 이는 어디까지나 단지 수사 자체를 위한 목적으로, 즉 수사진행 상황을 그때그때 기록해두는 게 주된 목적(혹시나 수사담당자가 변경될 수 있고, 미제 사건으로 남을 경우 언젠가 재개될 수사를 위해서도 수사기록 작성이 필요합니다)이지 재판에서 증거로 쓰려는 게 주된 목적은 아닙니다.
이렇게 영미법 재판에서는 수사기록이 없는 대신 증인들이 직접 법정에 나와 증언하고 배심원들은 이 말들을 듣고 재판을 합니다. 다만, 필요한 증인이 재판에 다 못 나오는 경우가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때는 크로포드 부인의 음성녹음물처럼 증인 대신 수사기록이 증거로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수사기록은 간혹 신용성이 없어 증거가치가 극히 적은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증거를 배심원에게 바로 주면 법을 모르는 배심원들이 그 증거가치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속아서 엉뚱한 판단을 할 수 있기에, 이를 막고자 전문법칙이란 걸 만들어 증거가치가 적은 수사기록들을 걸러내고 배심원들에겐 소수의 양질의 증거만 제공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심재판에는 시간과 자원이 과도하게 소요되기 때문에 모든 사건의 재판을 배심재판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 미국에선 95% 이상의 형사사건이 플리바게닝 등 정식재판이 아닌 간이한 방법으로 종결되고, 극히 일부의 사건만 배심재판이나 직업법관의 재판으로 진행됩니다. 직업법관이 하는 재판의 경우에도 기본적인 재판모델이 배심재판이기 때문에 배심재판에서의 원리가 대부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에 비해 대륙법에서는, 일찌감치 예심제도가 발달하였습니다. 법률전문가인 직업법관이 재판을 하지만, 직업법관이 아주 많지 않은 다음에야 모든 사건을 다 꼼꼼히 재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재판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재판절차 이전에 예심절차를 둡니다. 예심절차를 담당하는 예심판사 또는 (예심판사 제도가 없는 경우) 검사가 재판에 준하는 심리를 미리 해보고 재판을 할 만한 사건만 골라서 재판에 보냅니다. 예심판사나 검사도 자신이 모든 사건의 심리를 다 할 여력은 안 되어 경찰에게 조사를 위임하는 방법으로 예심을 진행합니다. 예심은 재판을 준비하는 절차이기 때문에 예심판사나 검사는 자신이 확인한 내용을 기록으로 만들어(경찰의 수사기록도 포함) 재판에 보냅니다. 이 기록은 재판에서 바로 증거로 쓰이기도 하고, 예심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심리를 하고 제대로 판단을 했는지를 재판법원 판사나 상급기관에게 알리고 심의를 받는 목적도 있기 때문에 비교적 꼼꼼한 내용과 방대한 분량으로 만들어집니다. 이 예심기록이 사실상의 수사기록인 거죠.
재판을 하는 판사는 이렇게 꼼꼼하고 방대하게 만들어진 수사기록이 있으니 정작 재판은 간이한 방법으로 진행합니다. 이미 같은 사법관인 예심판사나 검사가 열심히 사건을 들여다보고 필요한 사실을 확인하고 재판에 보낸 것이기 때문에 재판을 하는 판사가 필요한 증인을 죄다 다시 재판에 부를 필요가 없는 겁니다. 즉, 수사기록은 각 서류들을 증거와 증거 아닌 것으로 분류할 필요도 없이 기록 통째로 증거로 활용되고, 이런 구조에서는 전문법칙도 필요가 없는 겁니다(다만, 대륙법에도 가급적이면 재판에서 너무 수사기록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말라는 원칙이 있고, 이를 '직접주의' 내지 '직접심리주의'라고 부릅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 영미법보다는 많은 사건이 정식재판에서 처리될 수 있습니다. 물론 프랑스와 독일에도 미국의 플리바게닝을 본딴 제도들이 존재하지만, 이를 통해 처리되는 사건은 미국 플리바게닝 사건에 비하면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편입니다.
한편, 대륙법에도 배심재판과 닮은 참심재판 제도가 있습니다. 직업법관이 사실판단 과정에서 배제되어 있는 배심재판과 달리, 참심재판에는 직업법관도 일반인 참심원들과 함께 재판부를 구성해서 사실판단을 할 권한이 있습니다. 또, 직업법관은 수사기록도 미리 볼 수 있기 때문에 참심원들에게 직업법관이 갖고 있는 사건 관련 지식과 심증이 그대로 전달되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직업법관이 결론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더구나 만장일치로 평결을 하여야 하는 미국 배심재판과 달리, 대륙의 참심재판은 대개 다수결 평결 제도이기 때문에 직업법관의 판단과 크게 다른 결론이 나기 힘든 구조이기도 합니다.
영미법이나 대륙법이나 각자의 나라에서 나름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역자 서문의 마지막 말처럼, 영미법과 대륙법 중 무엇이 더 낫고 무엇이 못하다 라는 우열관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대륙법을 그렇게 너무 무시하거나 미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륙법도 나름의 역사와 이유가 있어 지금의 제도를 갖고 있는 것이거든요. 16세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구요. 결국 각 나라마다 특유의 전통과 관습이 현재의 제도에 영향을 미친 것이고, 각 제도마다 각기 장단점을 다 갖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만 지고지선이라고 맹종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크로포드 판결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영미법 입장에서는 대륙법처럼 전문법칙도 없고 수사기록을 그대로 재판에 활용하는 제도는 참 미개하고 수준 낮은 제도라고 봅니다. 어떻게 판사가 사건관계인 진술도 안 들어보고 재판을 하느냐는 거죠. 그래서 전문법칙의 예외 영역이 자꾸 넓어지면서 점차 대륙법을 닮아가는 재판실무가 마음에 안 들어 헌법상의 대면권 규정을 들어 이러한 시류에 제동을 걸게 된 겁니다.
그러면 크로포드 이후의 미국 전문법칙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까요? 김희균 교수님의 다른 논문 "형사증거법의 재조명II: 크로포드 이후 전문법칙의 미래"(형사법연구 제25권 제1호, 한국형사법학회, 2013)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요. 크로포드 판결에서 지적한 것처럼 모든 증인을 죄다 법정에 불러 피고인의 대면권을 보장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고 제도 운영상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결론입니다. 연방대법원은 이에 대한 우회방법으로, 크로포드 판결의 적용범위를 제한하는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즉, 피고인의 대면권을 보장하여야 하는 진술은 '증언으로서 가치를 가지는(testimonial) 진술”(증언적 진술)에 제한되고, 그렇지 않은 진술(비증언적 진술)에 대해서는 피고인 앞에 증인을 부르지 않아도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증언으로서 가치를 가지는 진술'의 의미에 대해 연방대법원은, 사건관계인이 장차 재판에서 진술할 것을 염두에 두고 국가기관 앞에서 행한 진술을 주로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크로포드 이후의 판례들은 이러한 진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2006년 Davis v. Washington 사건에서는 범행 당시 피해자의 911 신고전화 진술은 위급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 것이지 장차 증언으로 쓰일 것을 염두에 두고 한 진술이 아니므로 비증언적 진술이라고 보았고, 2006년 Hammond v. Indiana 사건에서는 가정폭력 사건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격리한 후 피해자로부터 작성받은 진술서는 피해자가 이미 위험한 상태에서 벗어난 이후의 진술이어서 장차 증언으로 쓰일 것을 예상한 진술이므로 증언적 진술이라고 보았습니다. 2009년 Melendez-Diaz v. Massachusetts 사건에서는 마약 딜러로부터 압수한 물건이 코카인이라는 감정서의 내용은 증언적 진술이므로 감정인이 법정에 나와야 증거능력이 있고, 2011년 Bryant v. Michigan 사건에서는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자신에 대한 총격 직후 경찰에게 말한 피해진술은 피해자를 기준으로 한다면 이미 범행 후의 진술이기는 하지만 아직 다른 사람들에 대한 총격의 위험은 남아 있는 상황이어서 이 역시 위급상황에서의 진술로 볼 수 있으므로 비증언적 진술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2012년 Williams v. Illinois 사건에서는 피해자의 질에서 채취한 정액의 DNA와 피고인의 DNA를 비교한 감정서 내용이 비증언적 진술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아직 진범이 특정되기 전에 범행현장에서 채취한 DNA와 여러 사람의 DNA를 비교한 결과에 불과할 뿐 특정인을 처벌할 목적으로 만들어 낸 증거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 책의 주제와 비슷한 내용으로 법제사에 관심이 있는 분에게는 김희균 교수님의 다른 번역서 『대륙법 전통 - 비교를 통해 알아보는 대륙법과 영미법』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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