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2일 금요일
[독서일기] '다섯 번째 증인' (feat. 미국 형사사법제도) 제2편
작성자:
iMagistrat
시간:
11/22/2019 09:00: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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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소송
[제1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101쪽] 그다음 화요일 리사 트래멀은 밴나이스 법정에서 공식적인 기소인부 절차에 부쳐졌다(was formally arraigned).
---> 이제 한 주가 지나고, 우리말로 흔히 ‘기소인부 절차’라고 부르는 arraignment 절차가 시작됩니다. 이는 판사가 피고인에게 혐의사실을 인정하는지 여부를 묻고, 그에 따라 배심재판을 열지 말지를 결정하는 절차입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를 피고인의 답변을 기록하고 검찰의 신속한 재판 요구에 따라 재판일정을 짜는 게 주목적인 통상적인 심리 절차라고 설명하는데, 의뢰인이 구속 상태라면 모를까 보석으로 풀려나 있는 상태이므로 굳이 신속하게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소인부 절차에서 할러 변호사와 그의 의뢰인은 우선 혐의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정식재판을 받겠다는 굳은 의사를 표시합니다.
우리의 경우 기소인부 절차가 별도로 있지 않은 대신, 검사가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01-102쪽] 미첼 본듀란트 살인 사건의 기소인부 절차와 예심(preliminary hearing)은 다리오 모랄레스 고등법원 판사에게 배정되었다. 예심은 혐의에 대한 형식적인 확인 절차였다. 리사가 분명히 답변해야 했다. 그런 다음 주요 행사인 공판(trial)은 다른 판사에게 배정될 것이었다.
---> 할러 변호사의 친절한 설명에서 보듯, 기소인부 절차 다음으로 이어지는 절차는 예심, 그리고 공판이군요.
[114-115쪽] ...... 나는 반짝이는 사무실 마룻바닥에 안드레아 프리먼 검사에게 받은 8백 페이지에 달하는 증거물 서류를 펼쳐놓았다.
서류 대부분은 웨스트랜드 문건이었는데, 그중 상당 부분이 분량을 부풀리기 위해 집어넣은 것들이었다.
---> 앞서서 프리먼 검사는 할러 변호사의 지저분한 작전에 말려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갖고 있는 증거의 일부를 개시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할러 변호사는 이제 검사가 보내온 8백 페이지 분량의 서류더미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를 괘씸히 여긴 프리먼 검사가 서류더미 속에서 고생 좀 해보라는 심정으로 증거가치도 없고 쓸 데도 없는 자료들까지 구분 없이 한꺼번에 다 떠안긴 겁니다.
이 서류들은 모두 피해자가 근무하던 웨스트랜드 은행으로부터 입수한 것들인데, 그 안에서 할러 변호사는 유용한 자료 하나를 찾아냅니다.
[122쪽] 사실 우리가 무엇을 증명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문제 제기만 하고 나머지는 배심원단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면 되었다. 합리적인 의심(reasonable doubt)의 씨앗을 심기만 하면 되었다. 결백의 가설(hypothesis of innocence)을 세우기만 하면 되었다.
---> 할러 변호사가 신참 변호사 애런슨을 포함한 자신의 직원들과 변론전략을 의논하다, 피해자가 그의 사업상 파트너 중 한 사람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자는 전략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시나리오가 근거가 빈약하고 비약도 꽤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애런슨은 그게 가능한 얘기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자 할러 변호사는 그런 의혹은 제대로 입증할 필요 없이 배심원단 앞에서 대충 펼쳐놓기만 하면 된다고 대꾸합니다. 할러 변호사의 이 말이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형사재판에서 검사와 변호인은 원래 그렇게 각자의 역할이 다른 것입니다. 검사는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퍼즐조각들(증거)을 찾아 어떠한 그림(범죄사실)을 어느 정도 뚜렷하게 윤곽이 드러나도록 짜 맞추는 게 임무이고, 반면 변호인은 검사가 기껏 찾아서 짜 맞춰 놓은 퍼즐조각들을 흩트려놓아 이게 무슨 그림인지 알기 어렵게 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짜 맞추는 것과 흩트려놓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짜 맞추는 것은 기술이 필요하지만, 흩트려놓는 것은 딱히 기술이 필요 없는 것이죠. 그래서 입증할 필요 없이 펼쳐놓기만 하면 된다고 할러 변호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할러 변호사가 배심원들에게 그냥 아무 의혹이나 막 던져보자고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건 ‘합리적인’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인’ 의심을 불러일으키려면 그래도 어느 정도의 근거는 갖춘 의혹 제기여야 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제부터 이 의혹의 근거를 찾아내려 할 것입니다.
[133-135쪽] 예심은 재판으로 가는 통상적인 절차이고 전적으로 검사의 독무대이다. 검찰이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고 증거를 제시하면 판사는 배심원 재판으로 끌고 갈 만큼 충분한 증거가 있는지 판단한다. 이것은 합리적인 의심이 등장하는 단계가 아니다. 거기까지 가려면 아직도 멀었다. 예심 단계에서는 혐의를 뒷받침할 증거가 충분히 있는지를 판사가 판단만 해주면 된다. 만일 그렇다고 판단하면, 그 다음 단계부터는 진짜 재판으로 가는 거다.
---> 할러 변호사가 기소인부 절차 다음에 진행되는 예심 절차(preliminary hearing)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심 절차는 해당 사건이 과연 정식재판으로 가기에 적합한 증거가 갖추어진 사건인지 여부를 형식적으로 확인하는 절차라는 설명입니다.
1주일 이상의 긴 시간과 배심원 여비 등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정식재판을 아무 사건에서나 다 열 수는 없는 일이기에, 이걸 거르는 예심 절차는 비록 요식행위이긴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절차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형사재판에서는 예심 절차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격이 아주 다르긴 하지만 굳이 비슷한 절차를 든다면, 복잡하거나 중요한 사건에서 정식재판기일 전에 미리 재판장, 검사와 변호인이 법정에 한데 모여 증거의 인정 여부를 확인하고 앞으로의 증거조사 일정을 정하는 ‘변론준비기일’ 절차 정도가 되겠습니다. 변론준비기일 없이 바로 정식재판이 시작되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 이 경우에는 첫 번째 재판기일에 예심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절차가 진행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136쪽] 수사 중에 검경이 저지른 실수를 찾아내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검찰이 시인하게 만드는 것이 변호인이 할 일이었다.
---> 변호인의 제1전략은 사건의 내용적 측면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수사절차의 하자라는 형식적 측면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136쪽] 나는 변호 전술이나 증거물은 그 어느 것도 예심에서 내놓지 않기로 결심했다.
---> 형사재판에서 검사는 공격하는 입장, 피고인과 변호인은 수비하는 입장입니다. 공격하는 사람은 그의 무기를 겉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지만, 수비하는 사람은 공격하는 사람의 무기가 코앞에 닥치기 전까지는 굳이 자신이 사용할 무기를 상대방에게 미리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무런 무기도 없는 맨손인 것 같은 외양을 보여야, 공격하는 사람의 방심을 유발함으로써 반전을 노리는 수비가 가능한 거겠죠.
[169-170쪽] ...... 프리먼은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유죄인정 합의(a plea agreement)로 이 사건을 끝낼 가능성을 논의할 생각이 있다고 말하는 거였다.
......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검찰 측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다. 증거를 잃어버렸거나 증인이 말을 바꿨거나. ......
---> 자신만만해 보이던 프리먼 검사가 난데없이 먼저 플리바기닝을 제안합니다.
플리바기닝이라는 건 무엇보다, 검사 입장에서 봤을 때 무언가 이익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뭔가 이익이 있어야 검사가 피고인에게 먼저 협상을 제안하든가 피고인의 협상 제안을 받아들이기 마련입니다.
[169-170쪽] ...... 프리먼은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유죄인정 합의(a plea agreement)로 이 사건을 끝낼 가능성을 논의할 생각이 있다고 말하는 거였다.
......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검찰 측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다. 증거를 잃어버렸거나 증인이 말을 바꿨거나. ......
---> 자신만만해 보이던 프리먼 검사가 난데없이 먼저 플리바기닝을 제안합니다.
플리바기닝이라는 건 무엇보다, 검사 입장에서 봤을 때 무언가 이익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뭔가 이익이 있어야 검사가 피고인에게 먼저 협상을 제안하든가 피고인의 협상 제안을 받아들이기 마련입니다.
만약 검사가 유죄를 얻어내기에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냥 원칙대로 재판으로 가서 피고인이 죄에 합당한 벌을 받도록 하면 그만입니다. 그게 검사라는 사람들 입장에서 폼도 나고 뿌듯해 할 일일 겁니다. 굳이 죄를 저지른 사람이 가벼운 형벌을 받도록 허용할 이유가 없고, 형량을 다운시켜서 검사가 딱히 얻을 이익이 없습니다. 더구나 살인 사건인데요. 최소한 피해자와 유족 앞에서 면은 서고 봐야죠.
그런데 이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라는 심증은 충분히 있으나 물증이 부족한 경우라면, 그건 상황이 좀 다릅니다. 물증이 부족한데 그냥 재판으로 가게 되면 결국 재판하느라 힘은 힘대로 쓰고 판결은 무죄로 나서 피고인에게 면죄부만 주게 될 가능성이 많고, 무죄판결이 무서워 피고인을 그냥 풀어주고 사건을 끝내자니 검사의 체면상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을 겁니다. 바로 이럴 때 플리바기닝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순순히 죄를 자백하면 형량을 낮춰주겠다.’ 비록 검사가 당초 가졌던 생각보다 형량은 낮아지지만, 죄를 저지른 사람을 아무런 제재도 없이 놔주는 일은 생기지 않게 되는 이익이 검사에게는 있는 겁니다.
[179-181쪽] "...... 조건을 제시해봐요." ......
"...... 살인에 중간 수준(the mid-level) 징역형 어때요?"
---> 할러 변호사가 프리먼 검사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면서, ‘너, 유죄 받을 자신(증거) 없으니까 재판으로 가지 말고 그냥 협상이나 하자는 거지?’라며 속을 떠봅니다.
플리바기닝에는 이렇게 검사와 변호인 사이에 눈치싸움, 수싸움이 필요한 경우가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할러 변호사의 생각대로 검사가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도 이렇게 재판 없이 가자고 할 리가 없거든요. 재판하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자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죠.
그런데 이런 경우 변호인 입장에서 ‘아무래도 검사 쪽의 증거가 부족해서 검사가 협상하자는 거 같은데, 당장 합의해버리면 나중에 억울할 수도 있으니 일단 증거개시 절차를 통해 검사가 갖고 있는 증거가 뭐가 있나 먼저 보고나서 생각해볼까?’라는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떻게든 손해 보기 싫은 마음에 과감한 베팅보다 안전하게 가려는 생각이겠지만, 이건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직 사건이 일어나고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 수사도 덜 진행되어 지금 당장은 검사 쪽 증거가 부족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서, 그리고 수사가 계속 더 진척이 되면서 새로운 결정적인 증거가 수집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검사는 당연히 협상카드를 도로 집어넣을 것이고, 피고인과 변호인은 법정에서 승산 없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조금 미심쩍기는 하지만, 신속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열차는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검사가 마음을 바꾸면 곤란하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할러 변호사가 의뢰인에게 검사의 제안을 알려주면서 협상에 응할 의사를 묻느라 잠시 지체하는 사이, 검사는 협상 제안을 없던 일로 하고 맙니다.
[186쪽] 내가 예상했던 대로, 리사 트래멀은 최대 7년간 자신을 감옥에서 썩게 만들 유죄인정 합의를 거부했다. 재판에서 유죄 평결을 받으면 징역을 그보다 네 배는 더 살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줬지만 그래도 싫다고 했다. 그녀는 무죄 평결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
---> 리사 트래멀이 완강하게 검사의 협상 제안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할러 변호사는 의뢰인이 정말로 누명을 쓴 억울한 사람이 맞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였을 겁니다. 그래서 무고한 의뢰인을 위해 끝까지 한번 해보자는 결의를 갖게 되는 듯 보입니다.
[200-213쪽] "재판장님, 정말 기가 막히네요. 배심원단 선정 하루 전날에요? 이런 걸 이제 내민다고요? ......"
......
나는 발언 기회를 기다리면서 좌절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연 이것은 판세를 뒤집는 강력한 증거였다. 이것이 나오기 전까지는 전적으로 정황증거에 의존한 사건(a circumstantial case)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피고인과 범죄를 연결시키는 직접증거가 있는 사건(a case involving direct evidence)이 되었다.
---> 자, 이제부터 협상은 없던 일로 돼버리고,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됩니다.
먼저, 배심원단 선정기일을 하루 앞둔 어느 날, 이 사건의 재판을 맡게 된 콜맨 페리 판사의 법정에서 작은 재판이 열립니다. 할러 변호사가 신청한 증인의 채택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는데, 그에 대한 논의가 끝난 후 프리먼 검사가 피해자의 혈흔이 있는 피고인의 신발을 뒤늦게 증거로 제출하겠다고 하면서 할러 변호사의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할러 변호사가 증거개시 절차를 통해 검사로부터 넘겨받은 자료와 자신의 수사관 시스코로부터 은밀하게 입수한 자료를 종합해 보았을 때, 이제까지는 검사가 가진 증거라곤 범행 직전 범행장소 부근에서 리사 트래멀을 보았다는 한 목격자의 진술,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집을 압류당한 일 때문에 채권은행의 압류담당자인 피해자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던 리사 트래멀이 범행 직전 범행장소 부근에서 목격되었으니 피해자를 살해할 만한 사람은 이 여성 외에는 없다는, 일응 그럴싸한 정황논리만이 존재하는 사건이었습니다(여기서 그 목격자의 진술을 정황증거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정황논리에 불과할 뿐, 리사 트래멀이 피해자를 살해하였음을 인정할 직접증거가 없는 한 그러한 정황논리만으로 그녀의 범행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할러 변호사도 재판에 자신만만하게 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직접증거가 등장합니다. 피해자의 피가 묻은 리사 트래멀의 신발, 그녀가 피해자를 살해하였으리라고 볼 수 있는 강력한 증거가 이제 검사의 수중에 있게 된 것이죠. 할러 변호사는 그 증거가 너무 뒤늦게 제출되었음을 들어 저항해보지만, 증거가 늦게 발견된 게 검사의 잘못은 아니니 페리 판사는 이 증거를 채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대한 가치를 갖고 있는 증거를 단지 늦게 발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배심원들이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판사 입장에서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지요.
대신, 페리 판사는 당장 다음날로 예정되어 있던 배심원단 선정을 열흘이나 연기함으로써, 불의타를 맞게 된 할러 변호사가 새로운 재판전략을 준비할 시간을 갖도록 배려해줍니다.
[218쪽] ...... 우리는 이 재앙과도 같은 증거를 반영하여 변호 전략을 짰다. 과학적 증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내 의뢰인이 결백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모함(setup)을 주장하는 고전적인 전략이었다. 오파리지오를 희생양으로 삼는 전략에 음모 이론을 덧붙일 작정이었다.
---> 흔히 과학수사, 과학수사, 많이들 얘기합니다. 과학수사 하나면 모든 사건이 의문 없이 깔끔하게 해결되니, 이제는 사람 불러 놓고 자백만 강요하는 수사는 하면 안 된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과연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게 선과 악이 명쾌하게 분간되고, 정의와 적폐의 경계선이 뚜렷하게 줄 그어져 있는 것일까요. 당연히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든 일은 양면성이라는 게 있는 것이죠.
피고인의 신발에서 발견된 혈흔의 DNA와 피해자의 DNA가 서로 일치한다는 과학수사의 결론은, 분명 진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길을 비춰주는 강력한 등대 불빛인 건 맞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는 아직 진실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앞에 큰 길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아직은 소로길도 여러 개 놓여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혈흔이라는 강력한 직접증거를 공격하기 위한 할러 변호사의 구상은, 자신의 의뢰인이 모함을 당한 것이라 주장하겠다는 것입니다. 리사 트래멀의 신발에 피해자의 혈흔이 있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 사실이 ‘리사 트래멀이 그 신발을 신고 피해자를 살해하였다’라는 걸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를 살해한 진범이 리사 트래멀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그녀의 신발에 피해자의 피를 묻혀둔 것이다, 라는 주장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스토리가 이런 류의 영화, 소설,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죠. 그런 스토리가 흔해서 우리가 자꾸 음모론에 쉽게 빠지게 되는 걸까요?
[218쪽] 프리먼이 던진 또 하나의 패스트볼이 내 머리를 향해 날아온 것은 배심원단 선정이 시작된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선정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검찰과 변호인 양측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배심원단의 구성에 만족스러워하고 있던 보기 드문 한때였다.
---> 페리 판사가 허락한 열흘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배심원단 선정이 시작됩니다. 무작위로 연락을 받은 지역 주민들이 단체로 법정에 호출되어 오고, 그 중에서 검사와 변호인이 각자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배심원들을 12명 선정합니다. 이 자리에서 선정된 배심원들은 이제 몇 날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재판을 위해 직장도 못 나가고 하염없이 법정으로만 출퇴근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미국의 배심재판을 본떠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이름의 제도를 2008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넘게 실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미국 제도를 단지 모양새만 가져와서 흉내만 내고 있다는 점이죠. 10년 넘게 아직까지 시범실시만 하고 있고, 그 제도에 담긴 본래의 취지와 장점은 제대로 구현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예를 하나 들어보면, 우리의 국민참여재판은 대부분 하루짜리 재판입니다. 길어야 2일 내지 3일짜리이지만, 흔하지는 않습니다. 미국식 재판을 그저 최소한의 구색만 갖춰 우리식대로 빨리빨리 진행해서 그런 면도 있지만, 딱 하루만 재판하기 적당한 사건만 주로 대상으로 삼기에 그런 면도 있습니다. 딱 하루 만에 재판을 해치우려니, 하루를 있는 대로 꽉 채우고도 모자라 자정을 훌쩍 넘겨 재판이 끝나기도 합니다. 하루 종일 답답한 공간에서 긴 시간을 보내게 되니, 판검사와 피고인은 물론 가장 중요한 구성원인 배심원들의 집중력은 처참한 수준입니다. 딱 하루 하는 재판이니, 배심원단 선정은 반드시 오전 중에는 마쳐야 해서 신중한 배심원 선정도 곤란하고 그야말로 흉내만 냅니다.
리사 트래멀의 재판은 배심원단 선정에만 4일, 재판 자체도 8일이나 진행되었습니다. 공판중심주의의 취지에 잘 맞추어 재판을 꼼꼼히 제대로 진행한 결과, 살인 사건 1건에 대해 법정에서만 총 12일이 소요된 것입니다. 재판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되었고, 배심원들은 다행히 오후 5시면 귀가해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사건을 분명히 하루 이틀 내에 모두 재판하였을 것이고, 배심원들은 밤늦게까지 법정 안에 갇혀 극심한 피로에 파김치가 되어가고 있었을 겁니다. 신중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여건이 안 되는 것이죠.
[219-221쪽] 나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서 책상 앞에서 벗어났다.
"아, 나, 정말." 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
나는 법전들을 향해 돌아서서 깊이 심호흡을 했다. 여기서 뭔가 얻어내야 했다. 판사가 내게 뭔가를 빚지게 만들어놓고 이 방에서 나가야 했다.
---> 배심원단 선정 나흘째, 그리고 다음날은 드디어 첫 재판기일입니다. 그런데 할러 변호사가 무슨 일 때문인지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날 프리먼 검사가 새로운 증거를 또 갖고 왔습니다. 피해자의 뒤통수를 강타하는 데 쓰였던 망치가 범행현장 부근 어느 주택의 덤불 속에서 뒤늦게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망치는 리사 트래멀의 집 차고에 있던 망치입니다. 피해자의 피가 묻은 리사 트래멀의 신발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리사 트래멀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매우 유력하게 보여주는 직접증거입니다.
프리먼 검사는 너무 늦은 증거제출이라는 할러 변호사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 망치를 증거로 제출하려 합니다. 망치가 이제서야 발견되었다는데 검사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페리 판사는 역시 이 망치를 증거로 채택합니다. 대신 다음날인 금요일 시작하려던 첫 재판기일을 다음 주 월요일로 연기하여, 할러 변호사의 재판준비 시간을 약간 배려합니다.
할러 변호사의 독백 중 마지막 대목, “판사가 내게 뭔가를 빚지게 만들어놓고 이 방에서 나가야 했다”라는 부분은 로버티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상호성의 법칙(Law of reciprocality)을 의미하는 것이죠. 항상 상대방을 이기려고만 하지 말고 상대방이 나에게 뭔가 빚을 진 듯한 생각을 갖게 하는 게, 내가 ‘갑’이 될 수 있는 방법입니다.
[224쪽] 피고인이 계략에 빠졌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변호를 한다고 해도 수확 체감의 법칙(a law of diminishing returns)이라는 것이 있다. 신발에 떨어진 혈흔은 뭐 어떻게든 해명을 한다고 치자. 살인 무기를 의뢰인이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렇게 쉽게 해명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증거물이 하나씩 발견될 때마다 음모 이론의 성공 가능성은 급격히 떨어졌다.
---> 아무튼 리사 트래멀의 신발과 망치, 결정적 증거가 속속 발견되면서 할러 변호사는 당초 계획했던 변론전략이 무위로 돌아가 점점 불리한 상황에 빠집니다.
[230-231쪽] "...... 재판은 국가의 증거 대 트래멀 사건이거든. 다른 누가 그 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그게 누구냐를 다투는 문제가 아니라고. 다른 가능성은 중요하지 않아. 물론 오파리지오를 트래멀의 주택 압류와 전국을 휩쓰는 압류 열풍에 관한 전문가로 증인석에 앉힐 수는 있어. 하지만 트래멀을 대체하는 용의자로 그에게 접근할 수는 없을 거야. 관련성(relevance)을 입증하지 못하면 판사가 허락하지 않을 거거든. ......"
---> 할러 변호사와 애런슨 변호사가 새로운 전략을 위해 함께 머리를 쥐어짜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의 기본전략은, 피해자와 사업상 갈등관계에 있던 압류대행업자인 루이스 오파리지오가 이 사건의 진범이 아닐까라는 의혹을 배심원들에게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혹을 제기하려면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리사 트래멀이 범인이 맞냐 아니냐 하는 재판을 하고 있는데,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진범이니 리사 트래멀은 무죄라고 주장하려면 당연히 이걸 말로만 주장해서는 곤란합니다. 말 말고 뭔가 더 있어야 합니다. 이걸 할러 변호사는 ‘관련성(relevance) 입증’이라고 설명합니다.
피해자의 피가 묻은 신발과 망치, 검사 쪽 증거는 점점 탄탄해지는데, 아직까지 할러 변호사는 이렇다 할 무기를 손에 넣지 못하고 있습니다.
[243-244쪽] 프리먼이 먼저 모두진술을 했고, 나는 늘 그랬듯이 검사가 말하는 동안 배심원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이의를 제기할 준비를 하고서 검사의 진술을 귀 기울여 들었지만 단 한 번도 그녀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배심원들이 어떤 눈으로 프리먼을 보고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들에 대한 내 예상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 드디어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첫 재판날이 되었습니다. 재판은 먼저 모두진술, 즉 검사와 변호인이 배심원들에게 사건의 개요와 앞으로의 입증방법 또는 방어방법을 설명하는 절차로 시작됩니다.
할러 변호사의 눈은 시종 배심원들의 얼굴을 좇습니다. 배심원들이 검사의 말에 호감을 보이느냐, 아니면 자신의 말에 호감을 보이느냐를 알고 싶어서 말입니다.
[244쪽] 프리먼은 분명하고도 능숙하게 말했다. 과장되지도 않고 말이 너무 빠르지도 않았다. 정해진 목표만 보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스타일이었다.
......
"피고인 측은 엄청난 음모와 극적인 사연을 주장하면서 여러분을 속이려고 애쓸 겁니다. 이 살인 사건은 엄청난 사건이긴 하지만 사연은 단순합니다. 변호인의 주장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자세히 보시고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오늘 여기서 나온 말이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증거로 뒷받침되는지를 확인하십시오. 진짜 증거로 말입니다."
---> 프리먼 검사가 먼저 모두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하다’, ‘능숙하다’, ‘과장하지 않는다’, ‘적당한 속도로 말한다’, ‘당당하다’, 하나같이 다 검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꼭 갖추어야 할 자세들이네요.
그런데 “피고인 측은 ...... 여러분을 속이려고 애쓸 겁니다”라거나 “변호인의 주장에 현혹되지 마십시오”라는 프리먼 검사의 말은, 우리 정서에는 좀 과한 표현 같기도 합니다. 변호인이 배심원들을 상대로 사기를 칠 거라고 검사가 이렇게 변호인 면전에서 대놓고 말하다니, 미국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얘기해 놓고도 서로 싸움 안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다들 점잖은 척하는 우리 법정에서는 흔히 보기는 힘든 풍경입니다.
[253-254쪽] 공판 최초의 증인은 리키 산체스라는 이름의 은행 안내직원이었다. 주차장에서 피해자의 시신을 발견한 목격자였다. 그녀는 사망시각 추정을 돕고 배심원석에 앉은 일반인들에게 살인 사건의 충격과 공포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 재판의 꽃은 증인신문입니다. 증거에는 인적 증거(사람의 증언)와 물적 증거(물건의 존재 자체)가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과학수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진술보다 객관적 증거인 물적 증거가 유무죄 판단에 더 중요한 것이니 이제 자백을 강요하는 등 사람의 진술을 끌어내는 수사를 하지 말고 물적 증거 수집에 집중하는 수사를 해야 한다고 흔히 말들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물건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범인이 범인이 맞다고 확실하게 지목을 해주지 못합니다. 물건만 갖고는 우리가 기껏 ‘추정’이라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지요. 이 범인이 범인이 맞다고 확실하게 지목을 해주는 사람의 말, 즉 인적 증거가 결국에는 가장 중요한 증거인 것입니다. 아주 쉽게 얘기해서, 물건만 등장하고 증인은 하나도 없는 재판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증인신문은 검찰 측 증인들이 먼저 등장하고, 그 절차가 모두 끝나면 피고인 측 증인들이 나서게 됩니다. 검찰 측 증인은 덜 중요한 증인부터 시작해서 점점 중요도 높은 증인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 대목에서 프리먼 검사가 이른바 ‘검찰 측 바람잡이 증인들’과 함께 법정에 들어왔다고 묘사합니다. 그가 말하는 ‘검찰 측 바람잡이 증인들’은, 피해자의 시신을 발견한 피해자의 동료직원, 그 직원으로부터 신고전화를 받은 911 상담원, 그 상담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 등등, 사건발생과 관련한 기본적인 스토리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증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들의 증언은 피고인의 유무죄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지만, 검찰 측 주장의 토대가 되는 역할, 나중에 나올 결정적 증거의 무대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원문에서는 《 the prosecution’s scene-setter witnesses 》, 직역하면 ‘검찰 측 배경설정 증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살인범행 그 자체를 입증하는 것과는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증인들은 아니지만, 사건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배심원들로 하여금 사건발생 초기부터 하나하나 사건의 스토리를 잘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이런 증인들까지 동원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의 단점은, 이런 증인들까지 하나하나 다 불러서 증언을 듣다보면 당연히 재판은 한없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겠죠. 우리나라 재판에서는 피고인이 문제를 삼고 다투는 내용과 관련된 증인만 불러 신문하기 때문에, 아마 이런 ‘검찰 측 바람잡이 증인들’을 실제로 법정에서 만나는 일은 드물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이런 부분을 다투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러 변호사도, 이런 사람들이 허위증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신문을 간단히 하고 맙니다.
[255-256쪽] 다음 증인은 그날 아침 8시 52분 산체스로부터 신고 전화를 받은 911 상담원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르숀다 게인즈였고 주로 산체스로부터 걸려온 신고 전화의 녹음된 통화내용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통화내용 녹음테이프를 트는 것은 지나치게 극적이고 불필요한 일이었지만 공판 전에 내가 이의 제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판사는 통화내용 공개를 허락했다.
---> 역시 목격자로부터 신고전화를 받은 911 상담원이 허위증언을 할 리는 없겠죠. 할러 변호사도 반대신문은 생략합니다.
다만,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증인이 소개한 통화녹음 내용입니다. 이 통화녹음 내용은 ‘피해자가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직접증거이므로, 검사는 당연히 이를 증거로 제출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물건이 증거로 사용되려면 배심원들이 법정에서 그 물건을 직접 눈 또는 귀 또는 다른 오감을 사용해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이를 ‘협의의 증거조사’라고 합니다. 물건을 직접 확인하면서, ‘아, 이게 피고인의 행위와 이렇게 저렇게 연결되는 것이고, 그래서 피고인은 유죄이구나 또는 무죄이구나’ 하는 심증을 배심원들이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물건에 대한 ‘협의의 증거조사'를 따로 시간을 내어 하는 게 아니라, 그 물건과 관련된 증인이 있는 경우 그 증인의 증인신문 때 함께 진행하는군요. 당시 목격자가 당황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수화기 저 너머로 들었다는 상담원의 증언내용에 더하여, 목격자의 그런 목소리가 실제로 법정에서 울려퍼진다면, 배심원들로서는 당시의 심각한 상황을 어느 정도 실감하면서 피고인을 안 좋은 눈초리로 바라볼 수 있겠죠.
처음 나온 리키 산체스 증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재판에서는 이런 증인이나 녹음테이프를 법정에서 만나는 일이 흔치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이런 성격의 증거에 대해서는 '증거동의'(검사가 제출한 유죄의 증거에 대해 피고인이 이의 제기 없이 인정하겠다고 하는 의사표시)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차를 생략하게 되니 재판은 후닥닥 빨리 진행되나 생동감은 전혀 느낄 수 없겠지요.
[256-259쪽] ...... 나는 그녀가 사건 현장에 처음 출동한 경찰관을 다음 증인으로 부를 거라고 예상했었다. 현장에 도착해 사건 현장을 확보한 경위를 설명하게 하고, 현장을 찍은 사진들을 배심원들에게 보여줄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프리먼은 경찰관 대신 사건 현장 근처에서 리사 트래멀을 보았다고 주장한 목격자 마고 섀퍼를 증인으로 불렀다. 나는 프리먼의 전략을 금방 알아차렸다. 배심원들이 사고 현장의 모습을 떠올리며 점심 먹으러 가게 하는 대신, '아하, 그랬구나'라고 생각하며 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
...... 나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마고 섀퍼에게 반대신문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누구를 증인으로 부르고 무슨 증언을 들을 것인지는 증거개시의 대상이 아닙니다. 정식재판이 열리기 전에 검사와 변호인은 일단 많은 수의 사람들을 증인신청 목록에 넣어 미리 재판부에 제출하긴 하는데, 실제로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일부만 증인으로 올리게 되고, 실제 누구를 증인으로 내세울지는 상대방이 미리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물론 사건 내용에 비추어 각자 상대방이 내세울 증인이 누구인지 대략은 예상할 수 있겠죠.
할러 변호사도 검찰 측에서 어떤 증인이 나올지 대략은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의 당초 예상대로, 최초 발견자, 그로부터 신고전화를 받은 911 상담원이 증인으로 나왔으니, 스토리 순서상 이제 등장할 세 번째 검찰 측 증인은 당연히 911 상담원의 연락을 받고 현장에 최초로 출동한 경찰관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점심시간을 바로 앞두고 검사는 중요도가 꽤 큰 증인을 퍽 일찍 불러냅니다. 중량급 증인의 증언을 통해 배심원들이 강한 인상, 즉 피고인에 대한 나쁜 인상을 점심시간 내내 갖게 하겠다는 것이죠. 이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방어방법은, 반대신문을 짧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이 점심시간 전에 반대신문을 마쳐서 검사의 증인에게 흠집을 내놓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재판이라도, 마고 섀퍼 정도면 검사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증인이고 분명히 피고인이 그의 증언 내용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므로, 반드시 증인으로 법정에 나올 필요가 있겠습니다.
[256-257쪽] 프리먼은 섀퍼와 배심원단 사이에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해 개인적인 질문을 몇 가지 더 던진 후 신문의 핵심으로 들어가 증인에게 살인 사건이 일어나던 날 아침에 대해서 물었다.
---> 프리먼 검사는 섀퍼 증인에 대한 주신문에서 우선, 증인이 육아휴직을 마치고 4년 전 복직한 은행 창구 직원이고, 출세욕은 없는 사람이며, 자기 일에 따르는 책임과 시민들과의 교류를 즐기고 있다는 진술을 이끌어냅니다.
‘메시지’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메신저’입니다. 사람들은 호감이 가는 메신저의 메시지만 접수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메시지보다 메신저’입니다.
재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증인일수록 배심원들에게 더 호감 가는 인상으로 비쳐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프리먼 검사는 본격적인 증언에 앞서, 육아, 직장맘, 은행, 출세욕 제로, 책임감, 시민의식 등등 증인으로부터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먼저 뽑아내려 합니다.
[261-262쪽] 나는 리걸패드(legal pad)에 뭔가를 끄적거렸다. 사실 아무 의미 없는 거였지만 배심원들 눈에는 내가 득점 상황을 기록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276-277쪽] 나는 리걸패드에 메모를 했다. 사실은 배심원들 보라고 하는 제스처였지 다른 의미는 없었다.
---> 할러 변호사가 검찰 측 증인을 상대로 반대신문을 하고 있습니다.
반대신문 중간 중간에, 특히 배심원들이 주의 깊게 보아주었으면 하는 중요한 대목마다 할러 변호사는 쇼를 하고, 연기를 합니다. 이를테면, 잠시 신문을 멈추고 고요한 상황을 만드는 거죠. 갑자기 정적이 흐르면 대개 사람들은 졸거나 딴생각을 하다가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이제까지 없던 주의를 새삼스레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고요한 정적을 만드는 데 그럴듯한 방법이 바로 ‘메모하는 척’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할러 변호사가 들고 있는 ‘리걸패드’는 아이패드 같은 태블릿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사실 저는 처음에 태블릿 같은 건 줄 알았습니다). 서양의 법률가들이 많이 애용한다는, 줄이 그어진 노란색 노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로 요런 거, 많이 보셨죠?
[264-266쪽]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내가 바라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섀퍼가 처음으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고 확답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배심원들은 그녀를 공정한 증인이 아니라 검찰 측 주장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하는 증인으로 보기 시작할 것이다.
......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완벽한 대답이었다. 나에게 완벽한 대답.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증인은 언제나 피고인에게 이로웠다.
--->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마쳐야 하기 때문에 할러 변호사는 열심히 반대신문을 합니다.
[308쪽] 프리먼은 형사팀의 증언을 따로 떼어놓는 영리한 전술을 구사했다. 지금 내가 컬렌 형사만 신문해서는 사건에 대해 응집력 있는 공격을 감행할 수 없을 것이다. 컬렌은 지금, 그의 파트너 롱스트레치 형사는 훨씬 나중에 신문하게 생겼다. 소송전략전술이 프리먼의 강점들 중 하나였는데 지금 그 경쟁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었다.
---> 앞에서 중요한 증인을 더 나중에 등장시킨다고 말씀드렸는데요, 할러 변호사의 설명에 의하면 프리먼 검사는 좀 다른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컬렌 형사가 수사의 총책임자이고 가장 중요한 증인임에도 그를 먼저 증인으로 내세우고, 컬렌 형사의 하급자인 롱스트레치 형사를 나중에 세우려고 합니다. 롱스트레치 형사가 400미터 계주의 마지막 주자로서 더 적합한 뭔가가 있는 거겠죠.
[309-370쪽] 나는 별 황당한 이야기를 다 들어본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사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컬렌이 처음으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바라던 게 그거였다. 그에게 창피를 줄 때 그가 오만한 모습을 보인다면 훨씬 더 좋을 텐데.
......
“그렇게 모아서 만든 큰 그림이 증인을 성급한 판단으로 이끌고 간 거로군요, 그렇죠?”
프리먼이 벌떡 일어나서 이의를 제기했고 판사가 이의 제기를 받아들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컬렌의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 질문을 모든 배심원들의 마음에 심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 컬렌 형사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반대신문 장면입니다. 이 부분의 내용을 길게 인용할 수 없어 몇 구절만 가져왔기에 느낌 전달이 쉽지 않지만, 이 부분에서는 증인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할러 변호사와 프리먼 검사 사이의 수싸움과 공방이 대단합니다.
처음부터 수사방향을 잘못 잡아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고는 나중에는 방향을 제대로 틀지 못해 잘못된 길인 걸 알면서도 그 길을 계속 고집하고 있다며 증인을 약 올리고 증인의 흥분상태를 유발하여 배심원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주게 하려는 변호인, 그런 변호인 때문에 자칫 흠집이 날까 걱정돼 잦은 이의 제기를 통해 증인을 보호하는 한편 탄력받은 변호인의 리듬을 깨보려는 검사.
이런 대목에서 보이는 양쪽의 심리 묘사와 공방 장면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 프리먼 검사의 이의제기를 인정한 재판장이 할러 변호사를 훈계하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가 컬렌 형사에 대한 반대신문 때 재판장도 검사도 알지 못하던 어떤 편지를 근거로 컬렌 형사를 공격했거든요.
이 편지는 전날 익명의 누군가가 할러 변호사에게 보낸 것이었고, 조금 전 시스코를 통해 그 편지에 관한 중요한 사실의 확인작업을 막 마쳤습니다. 사실 할러 변호사 입장에서도 재판장이나 검사에게 미리 이 증거를 개시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던 것이죠.
어느 누구든 불의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재판에서는 양 당사자는 물론 재판장도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공격과 방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재판장과 검사 모두 할러 변호사를 비난하고 있지만, 이 편지를 입수한 날이 전날인지 아닌지 밝혀낼 도리가 없는 이상 미리 알릴 시간이 없었다는데 더 뭐라고 하지 못하고, 할러 변호사는 일단 위기를 벗어납니다.
[371쪽] 프리먼은 컬렌을 15분 더 증인석에 앉혀놓고 재직접신문(redirect)을 하면서 그가 수사하면서 취한 모든 조치를 범죄에 맞서 싸운 용감한 노력으로 치장하느라 바빴다. 그녀가 신문을 마친 후 나는 재반대신문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컬렌 건에 있어서는 내가 검사보다 우위에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컬렌의 수사가 좁은 시야에 갇혀 한 곳만 보고 나아간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고, 성공했다고 믿었다.
---> 역시 컬렌 형사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공격전략은, 컬렌 형사의 수사방향이 처음부터 잘못되었고 성급했다는 의혹을 배심원들에게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라는 심증은 충분히 있으나 물증이 부족한 경우라면, 그건 상황이 좀 다릅니다. 물증이 부족한데 그냥 재판으로 가게 되면 결국 재판하느라 힘은 힘대로 쓰고 판결은 무죄로 나서 피고인에게 면죄부만 주게 될 가능성이 많고, 무죄판결이 무서워 피고인을 그냥 풀어주고 사건을 끝내자니 검사의 체면상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을 겁니다. 바로 이럴 때 플리바기닝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순순히 죄를 자백하면 형량을 낮춰주겠다.’ 비록 검사가 당초 가졌던 생각보다 형량은 낮아지지만, 죄를 저지른 사람을 아무런 제재도 없이 놔주는 일은 생기지 않게 되는 이익이 검사에게는 있는 겁니다.
[179-181쪽] "...... 조건을 제시해봐요." ......
"...... 살인에 중간 수준(the mid-level) 징역형 어때요?"
......
"좋은 제안이군요." 내가 말했다.
"그렇고말고요. 잠복했다가 저지른 계획적 살인을 버리는 건데."
"고의적인 살인(voluntary manslaughter)으로 가자는 거죠?"
"변호사님도 과실치사(a case for involuntary)를 주장하기는 힘들 거예요. 피고인이 우연히 그 주차장에 있게 되었다고 하긴 어렵지 않을까요? ......"
......
"...... 고의적인 살인에 낮은 정도의 징역형. 5년에서 최대 7년. 어때요? ......"
---> 할러 변호사가 프리먼 검사의 플리바기닝 제안에 흥미를 보이면서 조건을 제시해보라고 합니다. 이에 프리먼 검사는 죄명은 voluntary manslaughter, 그리고 중간 정도의 형량을 제안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죄명은 그대로, 다만 형량을 5년에서 7년 사이 정도로 더 낮춰 달라고 다시 요구하구요.
미국의 살인죄에는 크게 ‘murder’와 ‘manslaughter’가 있습니다. 전자는 계획적으로 저지른 살인, 후자는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을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흔히 각각 ‘모살(謀殺)’과 ‘고살(故殺)’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manslaughter’는 다시 ‘voluntary manslaughter’와 ‘involuntary manslaughter’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우발적이긴 하지만 음주나 마약을 복용한 상태 또는 기타 부주의한 상황에서 저지른 고의성이 많은 살인을 말하고, 후자는 중과실에 가까운 고의성이 덜한 살인을 말합니다.
당초 프리먼 검사는 리사 트래멀을 murder로 기소하였는데, 리사 트래멀이 순순히 자백을 하고 정식재판을 포기한다면 voluntary manslaughter로 단계를 낮춰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죠. 프리먼 검사의 말대로 피고인이 미리 주차장에서 피해자를 기다리고 있다가 살인에 이른 것이라면 이를 두고 ‘중과실에 가까운 고의성이 덜한 살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involuntary manslaughter는 탈락입니다.
물론 정말로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라면 5년 내지 7년의 형벌도 전혀 수긍할 수 없는 제안일 겁니다. 끝까지 재판으로 가서 무죄를 받겠다고 하기 마련이겠죠. 재판이란 반드시 진실이 밝혀진다는 보장이 없는 위험한 절차이므로 재판으로 갔다가 자칫 잘못돼서 생사람을 잡게 될 수도 있습니다만, 정말로 억울한 피고인이라면 자신은 죄가 없으니 당연히 재판에서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굳게 믿는 게 보통 아닐까요. 즉, 확증편향,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죠.
그래서 저는 조심스레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나라에 플리바기닝 제도가 생긴다면, 죄명을 바꿔주거나 형량을 낮춰주겠다는 검사의 제안을 넙죽 받을 피고인은, 아마도 현재 혐의를 딱 잡아떼고는 있지만 사실은 죄를 지은 게 맞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180-181쪽] "...... 전에도 이런 적이 있어서 잘 아는데, 보통 이 정도로 좋은 거래는 조건이 너무 좋아서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죠. 제안을 받아들이고 나서 나중에 알고 보면 검찰 측 주요 증인이 떨어져 나갈 상황이었거나, 피고인의 무죄를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해서 그런 제안을 했던 거더라고요. 조금만 더 버텼으면 증거개시 절차를 통해 알 수 있었을 그런 증거요."
"좋은 제안이군요." 내가 말했다.
"그렇고말고요. 잠복했다가 저지른 계획적 살인을 버리는 건데."
"고의적인 살인(voluntary manslaughter)으로 가자는 거죠?"
"변호사님도 과실치사(a case for involuntary)를 주장하기는 힘들 거예요. 피고인이 우연히 그 주차장에 있게 되었다고 하긴 어렵지 않을까요? ......"
......
"...... 고의적인 살인에 낮은 정도의 징역형. 5년에서 최대 7년. 어때요? ......"
---> 할러 변호사가 프리먼 검사의 플리바기닝 제안에 흥미를 보이면서 조건을 제시해보라고 합니다. 이에 프리먼 검사는 죄명은 voluntary manslaughter, 그리고 중간 정도의 형량을 제안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죄명은 그대로, 다만 형량을 5년에서 7년 사이 정도로 더 낮춰 달라고 다시 요구하구요.
미국의 살인죄에는 크게 ‘murder’와 ‘manslaughter’가 있습니다. 전자는 계획적으로 저지른 살인, 후자는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을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흔히 각각 ‘모살(謀殺)’과 ‘고살(故殺)’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manslaughter’는 다시 ‘voluntary manslaughter’와 ‘involuntary manslaughter’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우발적이긴 하지만 음주나 마약을 복용한 상태 또는 기타 부주의한 상황에서 저지른 고의성이 많은 살인을 말하고, 후자는 중과실에 가까운 고의성이 덜한 살인을 말합니다.
당초 프리먼 검사는 리사 트래멀을 murder로 기소하였는데, 리사 트래멀이 순순히 자백을 하고 정식재판을 포기한다면 voluntary manslaughter로 단계를 낮춰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죠. 프리먼 검사의 말대로 피고인이 미리 주차장에서 피해자를 기다리고 있다가 살인에 이른 것이라면 이를 두고 ‘중과실에 가까운 고의성이 덜한 살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involuntary manslaughter는 탈락입니다.
물론 정말로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라면 5년 내지 7년의 형벌도 전혀 수긍할 수 없는 제안일 겁니다. 끝까지 재판으로 가서 무죄를 받겠다고 하기 마련이겠죠. 재판이란 반드시 진실이 밝혀진다는 보장이 없는 위험한 절차이므로 재판으로 갔다가 자칫 잘못돼서 생사람을 잡게 될 수도 있습니다만, 정말로 억울한 피고인이라면 자신은 죄가 없으니 당연히 재판에서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굳게 믿는 게 보통 아닐까요. 즉, 확증편향,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죠.
그래서 저는 조심스레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나라에 플리바기닝 제도가 생긴다면, 죄명을 바꿔주거나 형량을 낮춰주겠다는 검사의 제안을 넙죽 받을 피고인은, 아마도 현재 혐의를 딱 잡아떼고는 있지만 사실은 죄를 지은 게 맞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180-181쪽] "...... 전에도 이런 적이 있어서 잘 아는데, 보통 이 정도로 좋은 거래는 조건이 너무 좋아서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죠. 제안을 받아들이고 나서 나중에 알고 보면 검찰 측 주요 증인이 떨어져 나갈 상황이었거나, 피고인의 무죄를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해서 그런 제안을 했던 거더라고요. 조금만 더 버텼으면 증거개시 절차를 통해 알 수 있었을 그런 증거요."
---> 할러 변호사가 프리먼 검사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면서, ‘너, 유죄 받을 자신(증거) 없으니까 재판으로 가지 말고 그냥 협상이나 하자는 거지?’라며 속을 떠봅니다.
플리바기닝에는 이렇게 검사와 변호인 사이에 눈치싸움, 수싸움이 필요한 경우가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할러 변호사의 생각대로 검사가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도 이렇게 재판 없이 가자고 할 리가 없거든요. 재판하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자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죠.
그런데 이런 경우 변호인 입장에서 ‘아무래도 검사 쪽의 증거가 부족해서 검사가 협상하자는 거 같은데, 당장 합의해버리면 나중에 억울할 수도 있으니 일단 증거개시 절차를 통해 검사가 갖고 있는 증거가 뭐가 있나 먼저 보고나서 생각해볼까?’라는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떻게든 손해 보기 싫은 마음에 과감한 베팅보다 안전하게 가려는 생각이겠지만, 이건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직 사건이 일어나고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 수사도 덜 진행되어 지금 당장은 검사 쪽 증거가 부족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서, 그리고 수사가 계속 더 진척이 되면서 새로운 결정적인 증거가 수집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검사는 당연히 협상카드를 도로 집어넣을 것이고, 피고인과 변호인은 법정에서 승산 없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조금 미심쩍기는 하지만, 신속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열차는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검사가 마음을 바꾸면 곤란하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할러 변호사가 의뢰인에게 검사의 제안을 알려주면서 협상에 응할 의사를 묻느라 잠시 지체하는 사이, 검사는 협상 제안을 없던 일로 하고 맙니다.
[186쪽] 내가 예상했던 대로, 리사 트래멀은 최대 7년간 자신을 감옥에서 썩게 만들 유죄인정 합의를 거부했다. 재판에서 유죄 평결을 받으면 징역을 그보다 네 배는 더 살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줬지만 그래도 싫다고 했다. 그녀는 무죄 평결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
---> 리사 트래멀이 완강하게 검사의 협상 제안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할러 변호사는 의뢰인이 정말로 누명을 쓴 억울한 사람이 맞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였을 겁니다. 그래서 무고한 의뢰인을 위해 끝까지 한번 해보자는 결의를 갖게 되는 듯 보입니다.
[200-213쪽] "재판장님, 정말 기가 막히네요. 배심원단 선정 하루 전날에요? 이런 걸 이제 내민다고요? ......"
......
나는 발언 기회를 기다리면서 좌절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연 이것은 판세를 뒤집는 강력한 증거였다. 이것이 나오기 전까지는 전적으로 정황증거에 의존한 사건(a circumstantial case)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피고인과 범죄를 연결시키는 직접증거가 있는 사건(a case involving direct evidence)이 되었다.
---> 자, 이제부터 협상은 없던 일로 돼버리고,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됩니다.
먼저, 배심원단 선정기일을 하루 앞둔 어느 날, 이 사건의 재판을 맡게 된 콜맨 페리 판사의 법정에서 작은 재판이 열립니다. 할러 변호사가 신청한 증인의 채택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는데, 그에 대한 논의가 끝난 후 프리먼 검사가 피해자의 혈흔이 있는 피고인의 신발을 뒤늦게 증거로 제출하겠다고 하면서 할러 변호사의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할러 변호사가 증거개시 절차를 통해 검사로부터 넘겨받은 자료와 자신의 수사관 시스코로부터 은밀하게 입수한 자료를 종합해 보았을 때, 이제까지는 검사가 가진 증거라곤 범행 직전 범행장소 부근에서 리사 트래멀을 보았다는 한 목격자의 진술,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집을 압류당한 일 때문에 채권은행의 압류담당자인 피해자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던 리사 트래멀이 범행 직전 범행장소 부근에서 목격되었으니 피해자를 살해할 만한 사람은 이 여성 외에는 없다는, 일응 그럴싸한 정황논리만이 존재하는 사건이었습니다(여기서 그 목격자의 진술을 정황증거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정황논리에 불과할 뿐, 리사 트래멀이 피해자를 살해하였음을 인정할 직접증거가 없는 한 그러한 정황논리만으로 그녀의 범행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할러 변호사도 재판에 자신만만하게 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직접증거가 등장합니다. 피해자의 피가 묻은 리사 트래멀의 신발, 그녀가 피해자를 살해하였으리라고 볼 수 있는 강력한 증거가 이제 검사의 수중에 있게 된 것이죠. 할러 변호사는 그 증거가 너무 뒤늦게 제출되었음을 들어 저항해보지만, 증거가 늦게 발견된 게 검사의 잘못은 아니니 페리 판사는 이 증거를 채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대한 가치를 갖고 있는 증거를 단지 늦게 발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배심원들이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판사 입장에서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지요.
대신, 페리 판사는 당장 다음날로 예정되어 있던 배심원단 선정을 열흘이나 연기함으로써, 불의타를 맞게 된 할러 변호사가 새로운 재판전략을 준비할 시간을 갖도록 배려해줍니다.
[218쪽] ...... 우리는 이 재앙과도 같은 증거를 반영하여 변호 전략을 짰다. 과학적 증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내 의뢰인이 결백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모함(setup)을 주장하는 고전적인 전략이었다. 오파리지오를 희생양으로 삼는 전략에 음모 이론을 덧붙일 작정이었다.
---> 흔히 과학수사, 과학수사, 많이들 얘기합니다. 과학수사 하나면 모든 사건이 의문 없이 깔끔하게 해결되니, 이제는 사람 불러 놓고 자백만 강요하는 수사는 하면 안 된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과연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게 선과 악이 명쾌하게 분간되고, 정의와 적폐의 경계선이 뚜렷하게 줄 그어져 있는 것일까요. 당연히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든 일은 양면성이라는 게 있는 것이죠.
피고인의 신발에서 발견된 혈흔의 DNA와 피해자의 DNA가 서로 일치한다는 과학수사의 결론은, 분명 진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길을 비춰주는 강력한 등대 불빛인 건 맞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는 아직 진실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앞에 큰 길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아직은 소로길도 여러 개 놓여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혈흔이라는 강력한 직접증거를 공격하기 위한 할러 변호사의 구상은, 자신의 의뢰인이 모함을 당한 것이라 주장하겠다는 것입니다. 리사 트래멀의 신발에 피해자의 혈흔이 있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 사실이 ‘리사 트래멀이 그 신발을 신고 피해자를 살해하였다’라는 걸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를 살해한 진범이 리사 트래멀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그녀의 신발에 피해자의 피를 묻혀둔 것이다, 라는 주장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스토리가 이런 류의 영화, 소설,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죠. 그런 스토리가 흔해서 우리가 자꾸 음모론에 쉽게 빠지게 되는 걸까요?
[218쪽] 프리먼이 던진 또 하나의 패스트볼이 내 머리를 향해 날아온 것은 배심원단 선정이 시작된 지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선정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검찰과 변호인 양측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배심원단의 구성에 만족스러워하고 있던 보기 드문 한때였다.
---> 페리 판사가 허락한 열흘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배심원단 선정이 시작됩니다. 무작위로 연락을 받은 지역 주민들이 단체로 법정에 호출되어 오고, 그 중에서 검사와 변호인이 각자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배심원들을 12명 선정합니다. 이 자리에서 선정된 배심원들은 이제 몇 날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재판을 위해 직장도 못 나가고 하염없이 법정으로만 출퇴근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미국의 배심재판을 본떠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이름의 제도를 2008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넘게 실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미국 제도를 단지 모양새만 가져와서 흉내만 내고 있다는 점이죠. 10년 넘게 아직까지 시범실시만 하고 있고, 그 제도에 담긴 본래의 취지와 장점은 제대로 구현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예를 하나 들어보면, 우리의 국민참여재판은 대부분 하루짜리 재판입니다. 길어야 2일 내지 3일짜리이지만, 흔하지는 않습니다. 미국식 재판을 그저 최소한의 구색만 갖춰 우리식대로 빨리빨리 진행해서 그런 면도 있지만, 딱 하루만 재판하기 적당한 사건만 주로 대상으로 삼기에 그런 면도 있습니다. 딱 하루 만에 재판을 해치우려니, 하루를 있는 대로 꽉 채우고도 모자라 자정을 훌쩍 넘겨 재판이 끝나기도 합니다. 하루 종일 답답한 공간에서 긴 시간을 보내게 되니, 판검사와 피고인은 물론 가장 중요한 구성원인 배심원들의 집중력은 처참한 수준입니다. 딱 하루 하는 재판이니, 배심원단 선정은 반드시 오전 중에는 마쳐야 해서 신중한 배심원 선정도 곤란하고 그야말로 흉내만 냅니다.
리사 트래멀의 재판은 배심원단 선정에만 4일, 재판 자체도 8일이나 진행되었습니다. 공판중심주의의 취지에 잘 맞추어 재판을 꼼꼼히 제대로 진행한 결과, 살인 사건 1건에 대해 법정에서만 총 12일이 소요된 것입니다. 재판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되었고, 배심원들은 다행히 오후 5시면 귀가해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사건을 분명히 하루 이틀 내에 모두 재판하였을 것이고, 배심원들은 밤늦게까지 법정 안에 갇혀 극심한 피로에 파김치가 되어가고 있었을 겁니다. 신중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여건이 안 되는 것이죠.
[219-221쪽] 나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서 책상 앞에서 벗어났다.
"아, 나, 정말." 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
나는 법전들을 향해 돌아서서 깊이 심호흡을 했다. 여기서 뭔가 얻어내야 했다. 판사가 내게 뭔가를 빚지게 만들어놓고 이 방에서 나가야 했다.
---> 배심원단 선정 나흘째, 그리고 다음날은 드디어 첫 재판기일입니다. 그런데 할러 변호사가 무슨 일 때문인지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날 프리먼 검사가 새로운 증거를 또 갖고 왔습니다. 피해자의 뒤통수를 강타하는 데 쓰였던 망치가 범행현장 부근 어느 주택의 덤불 속에서 뒤늦게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망치는 리사 트래멀의 집 차고에 있던 망치입니다. 피해자의 피가 묻은 리사 트래멀의 신발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리사 트래멀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매우 유력하게 보여주는 직접증거입니다.
프리먼 검사는 너무 늦은 증거제출이라는 할러 변호사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 망치를 증거로 제출하려 합니다. 망치가 이제서야 발견되었다는데 검사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페리 판사는 역시 이 망치를 증거로 채택합니다. 대신 다음날인 금요일 시작하려던 첫 재판기일을 다음 주 월요일로 연기하여, 할러 변호사의 재판준비 시간을 약간 배려합니다.
할러 변호사의 독백 중 마지막 대목, “판사가 내게 뭔가를 빚지게 만들어놓고 이 방에서 나가야 했다”라는 부분은 로버티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상호성의 법칙(Law of reciprocality)을 의미하는 것이죠. 항상 상대방을 이기려고만 하지 말고 상대방이 나에게 뭔가 빚을 진 듯한 생각을 갖게 하는 게, 내가 ‘갑’이 될 수 있는 방법입니다.
[224쪽] 피고인이 계략에 빠졌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변호를 한다고 해도 수확 체감의 법칙(a law of diminishing returns)이라는 것이 있다. 신발에 떨어진 혈흔은 뭐 어떻게든 해명을 한다고 치자. 살인 무기를 의뢰인이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렇게 쉽게 해명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증거물이 하나씩 발견될 때마다 음모 이론의 성공 가능성은 급격히 떨어졌다.
---> 아무튼 리사 트래멀의 신발과 망치, 결정적 증거가 속속 발견되면서 할러 변호사는 당초 계획했던 변론전략이 무위로 돌아가 점점 불리한 상황에 빠집니다.
[230-231쪽] "...... 재판은 국가의 증거 대 트래멀 사건이거든. 다른 누가 그 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그게 누구냐를 다투는 문제가 아니라고. 다른 가능성은 중요하지 않아. 물론 오파리지오를 트래멀의 주택 압류와 전국을 휩쓰는 압류 열풍에 관한 전문가로 증인석에 앉힐 수는 있어. 하지만 트래멀을 대체하는 용의자로 그에게 접근할 수는 없을 거야. 관련성(relevance)을 입증하지 못하면 판사가 허락하지 않을 거거든. ......"
---> 할러 변호사와 애런슨 변호사가 새로운 전략을 위해 함께 머리를 쥐어짜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의 기본전략은, 피해자와 사업상 갈등관계에 있던 압류대행업자인 루이스 오파리지오가 이 사건의 진범이 아닐까라는 의혹을 배심원들에게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혹을 제기하려면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리사 트래멀이 범인이 맞냐 아니냐 하는 재판을 하고 있는데,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진범이니 리사 트래멀은 무죄라고 주장하려면 당연히 이걸 말로만 주장해서는 곤란합니다. 말 말고 뭔가 더 있어야 합니다. 이걸 할러 변호사는 ‘관련성(relevance) 입증’이라고 설명합니다.
피해자의 피가 묻은 신발과 망치, 검사 쪽 증거는 점점 탄탄해지는데, 아직까지 할러 변호사는 이렇다 할 무기를 손에 넣지 못하고 있습니다.
[243-244쪽] 프리먼이 먼저 모두진술을 했고, 나는 늘 그랬듯이 검사가 말하는 동안 배심원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이의를 제기할 준비를 하고서 검사의 진술을 귀 기울여 들었지만 단 한 번도 그녀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배심원들이 어떤 눈으로 프리먼을 보고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들에 대한 내 예상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 드디어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첫 재판날이 되었습니다. 재판은 먼저 모두진술, 즉 검사와 변호인이 배심원들에게 사건의 개요와 앞으로의 입증방법 또는 방어방법을 설명하는 절차로 시작됩니다.
할러 변호사의 눈은 시종 배심원들의 얼굴을 좇습니다. 배심원들이 검사의 말에 호감을 보이느냐, 아니면 자신의 말에 호감을 보이느냐를 알고 싶어서 말입니다.
[244쪽] 프리먼은 분명하고도 능숙하게 말했다. 과장되지도 않고 말이 너무 빠르지도 않았다. 정해진 목표만 보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스타일이었다.
......
"피고인 측은 엄청난 음모와 극적인 사연을 주장하면서 여러분을 속이려고 애쓸 겁니다. 이 살인 사건은 엄청난 사건이긴 하지만 사연은 단순합니다. 변호인의 주장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자세히 보시고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오늘 여기서 나온 말이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증거로 뒷받침되는지를 확인하십시오. 진짜 증거로 말입니다."
---> 프리먼 검사가 먼저 모두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하다’, ‘능숙하다’, ‘과장하지 않는다’, ‘적당한 속도로 말한다’, ‘당당하다’, 하나같이 다 검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꼭 갖추어야 할 자세들이네요.
그런데 “피고인 측은 ...... 여러분을 속이려고 애쓸 겁니다”라거나 “변호인의 주장에 현혹되지 마십시오”라는 프리먼 검사의 말은, 우리 정서에는 좀 과한 표현 같기도 합니다. 변호인이 배심원들을 상대로 사기를 칠 거라고 검사가 이렇게 변호인 면전에서 대놓고 말하다니, 미국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얘기해 놓고도 서로 싸움 안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다들 점잖은 척하는 우리 법정에서는 흔히 보기는 힘든 풍경입니다.
[253-254쪽] 공판 최초의 증인은 리키 산체스라는 이름의 은행 안내직원이었다. 주차장에서 피해자의 시신을 발견한 목격자였다. 그녀는 사망시각 추정을 돕고 배심원석에 앉은 일반인들에게 살인 사건의 충격과 공포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 재판의 꽃은 증인신문입니다. 증거에는 인적 증거(사람의 증언)와 물적 증거(물건의 존재 자체)가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과학수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진술보다 객관적 증거인 물적 증거가 유무죄 판단에 더 중요한 것이니 이제 자백을 강요하는 등 사람의 진술을 끌어내는 수사를 하지 말고 물적 증거 수집에 집중하는 수사를 해야 한다고 흔히 말들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물건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범인이 범인이 맞다고 확실하게 지목을 해주지 못합니다. 물건만 갖고는 우리가 기껏 ‘추정’이라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지요. 이 범인이 범인이 맞다고 확실하게 지목을 해주는 사람의 말, 즉 인적 증거가 결국에는 가장 중요한 증거인 것입니다. 아주 쉽게 얘기해서, 물건만 등장하고 증인은 하나도 없는 재판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증인신문은 검찰 측 증인들이 먼저 등장하고, 그 절차가 모두 끝나면 피고인 측 증인들이 나서게 됩니다. 검찰 측 증인은 덜 중요한 증인부터 시작해서 점점 중요도 높은 증인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 대목에서 프리먼 검사가 이른바 ‘검찰 측 바람잡이 증인들’과 함께 법정에 들어왔다고 묘사합니다. 그가 말하는 ‘검찰 측 바람잡이 증인들’은, 피해자의 시신을 발견한 피해자의 동료직원, 그 직원으로부터 신고전화를 받은 911 상담원, 그 상담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 등등, 사건발생과 관련한 기본적인 스토리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증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들의 증언은 피고인의 유무죄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지만, 검찰 측 주장의 토대가 되는 역할, 나중에 나올 결정적 증거의 무대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원문에서는 《 the prosecution’s scene-setter witnesses 》, 직역하면 ‘검찰 측 배경설정 증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살인범행 그 자체를 입증하는 것과는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증인들은 아니지만, 사건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배심원들로 하여금 사건발생 초기부터 하나하나 사건의 스토리를 잘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이런 증인들까지 동원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의 단점은, 이런 증인들까지 하나하나 다 불러서 증언을 듣다보면 당연히 재판은 한없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겠죠. 우리나라 재판에서는 피고인이 문제를 삼고 다투는 내용과 관련된 증인만 불러 신문하기 때문에, 아마 이런 ‘검찰 측 바람잡이 증인들’을 실제로 법정에서 만나는 일은 드물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이런 부분을 다투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러 변호사도, 이런 사람들이 허위증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신문을 간단히 하고 맙니다.
[255-256쪽] 다음 증인은 그날 아침 8시 52분 산체스로부터 신고 전화를 받은 911 상담원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르숀다 게인즈였고 주로 산체스로부터 걸려온 신고 전화의 녹음된 통화내용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통화내용 녹음테이프를 트는 것은 지나치게 극적이고 불필요한 일이었지만 공판 전에 내가 이의 제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판사는 통화내용 공개를 허락했다.
---> 역시 목격자로부터 신고전화를 받은 911 상담원이 허위증언을 할 리는 없겠죠. 할러 변호사도 반대신문은 생략합니다.
다만,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증인이 소개한 통화녹음 내용입니다. 이 통화녹음 내용은 ‘피해자가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직접증거이므로, 검사는 당연히 이를 증거로 제출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물건이 증거로 사용되려면 배심원들이 법정에서 그 물건을 직접 눈 또는 귀 또는 다른 오감을 사용해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이를 ‘협의의 증거조사’라고 합니다. 물건을 직접 확인하면서, ‘아, 이게 피고인의 행위와 이렇게 저렇게 연결되는 것이고, 그래서 피고인은 유죄이구나 또는 무죄이구나’ 하는 심증을 배심원들이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물건에 대한 ‘협의의 증거조사'를 따로 시간을 내어 하는 게 아니라, 그 물건과 관련된 증인이 있는 경우 그 증인의 증인신문 때 함께 진행하는군요. 당시 목격자가 당황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수화기 저 너머로 들었다는 상담원의 증언내용에 더하여, 목격자의 그런 목소리가 실제로 법정에서 울려퍼진다면, 배심원들로서는 당시의 심각한 상황을 어느 정도 실감하면서 피고인을 안 좋은 눈초리로 바라볼 수 있겠죠.
처음 나온 리키 산체스 증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재판에서는 이런 증인이나 녹음테이프를 법정에서 만나는 일이 흔치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이런 성격의 증거에 대해서는 '증거동의'(검사가 제출한 유죄의 증거에 대해 피고인이 이의 제기 없이 인정하겠다고 하는 의사표시)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차를 생략하게 되니 재판은 후닥닥 빨리 진행되나 생동감은 전혀 느낄 수 없겠지요.
[256-259쪽] ...... 나는 그녀가 사건 현장에 처음 출동한 경찰관을 다음 증인으로 부를 거라고 예상했었다. 현장에 도착해 사건 현장을 확보한 경위를 설명하게 하고, 현장을 찍은 사진들을 배심원들에게 보여줄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프리먼은 경찰관 대신 사건 현장 근처에서 리사 트래멀을 보았다고 주장한 목격자 마고 섀퍼를 증인으로 불렀다. 나는 프리먼의 전략을 금방 알아차렸다. 배심원들이 사고 현장의 모습을 떠올리며 점심 먹으러 가게 하는 대신, '아하, 그랬구나'라고 생각하며 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
...... 나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마고 섀퍼에게 반대신문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누구를 증인으로 부르고 무슨 증언을 들을 것인지는 증거개시의 대상이 아닙니다. 정식재판이 열리기 전에 검사와 변호인은 일단 많은 수의 사람들을 증인신청 목록에 넣어 미리 재판부에 제출하긴 하는데, 실제로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일부만 증인으로 올리게 되고, 실제 누구를 증인으로 내세울지는 상대방이 미리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물론 사건 내용에 비추어 각자 상대방이 내세울 증인이 누구인지 대략은 예상할 수 있겠죠.
할러 변호사도 검찰 측에서 어떤 증인이 나올지 대략은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의 당초 예상대로, 최초 발견자, 그로부터 신고전화를 받은 911 상담원이 증인으로 나왔으니, 스토리 순서상 이제 등장할 세 번째 검찰 측 증인은 당연히 911 상담원의 연락을 받고 현장에 최초로 출동한 경찰관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점심시간을 바로 앞두고 검사는 중요도가 꽤 큰 증인을 퍽 일찍 불러냅니다. 중량급 증인의 증언을 통해 배심원들이 강한 인상, 즉 피고인에 대한 나쁜 인상을 점심시간 내내 갖게 하겠다는 것이죠. 이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방어방법은, 반대신문을 짧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이 점심시간 전에 반대신문을 마쳐서 검사의 증인에게 흠집을 내놓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재판이라도, 마고 섀퍼 정도면 검사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증인이고 분명히 피고인이 그의 증언 내용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므로, 반드시 증인으로 법정에 나올 필요가 있겠습니다.
[256-257쪽] 프리먼은 섀퍼와 배심원단 사이에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해 개인적인 질문을 몇 가지 더 던진 후 신문의 핵심으로 들어가 증인에게 살인 사건이 일어나던 날 아침에 대해서 물었다.
---> 프리먼 검사는 섀퍼 증인에 대한 주신문에서 우선, 증인이 육아휴직을 마치고 4년 전 복직한 은행 창구 직원이고, 출세욕은 없는 사람이며, 자기 일에 따르는 책임과 시민들과의 교류를 즐기고 있다는 진술을 이끌어냅니다.
‘메시지’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메신저’입니다. 사람들은 호감이 가는 메신저의 메시지만 접수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메시지보다 메신저’입니다.
재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증인일수록 배심원들에게 더 호감 가는 인상으로 비쳐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프리먼 검사는 본격적인 증언에 앞서, 육아, 직장맘, 은행, 출세욕 제로, 책임감, 시민의식 등등 증인으로부터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먼저 뽑아내려 합니다.
[261-262쪽] 나는 리걸패드(legal pad)에 뭔가를 끄적거렸다. 사실 아무 의미 없는 거였지만 배심원들 눈에는 내가 득점 상황을 기록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276-277쪽] 나는 리걸패드에 메모를 했다. 사실은 배심원들 보라고 하는 제스처였지 다른 의미는 없었다.
---> 할러 변호사가 검찰 측 증인을 상대로 반대신문을 하고 있습니다.
반대신문 중간 중간에, 특히 배심원들이 주의 깊게 보아주었으면 하는 중요한 대목마다 할러 변호사는 쇼를 하고, 연기를 합니다. 이를테면, 잠시 신문을 멈추고 고요한 상황을 만드는 거죠. 갑자기 정적이 흐르면 대개 사람들은 졸거나 딴생각을 하다가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이제까지 없던 주의를 새삼스레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고요한 정적을 만드는 데 그럴듯한 방법이 바로 ‘메모하는 척’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할러 변호사가 들고 있는 ‘리걸패드’는 아이패드 같은 태블릿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사실 저는 처음에 태블릿 같은 건 줄 알았습니다). 서양의 법률가들이 많이 애용한다는, 줄이 그어진 노란색 노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로 요런 거, 많이 보셨죠?
[264-266쪽]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내가 바라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섀퍼가 처음으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고 확답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배심원들은 그녀를 공정한 증인이 아니라 검찰 측 주장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하는 증인으로 보기 시작할 것이다.
......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완벽한 대답이었다. 나에게 완벽한 대답.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증인은 언제나 피고인에게 이로웠다.
--->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마쳐야 하기 때문에 할러 변호사는 열심히 반대신문을 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 보이는 사소한 사항 또는 증인이 평소 주의를 기울여 보거나 생각하지 않았던 사항이라 증인도 잘 모를 법한 질문을 일부러 던져, 증인이 답변을 명쾌하게 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것 같습니다. 증인이 답변을 시원시원하게 못하면, 왠지 사람이 미심쩍게 보이기 마련이죠. 할러 변호사는 그렇게 증인을 흠집 내고 있습니다.
[265쪽] "그럼 이 사진 속 모든 유료 주차공간에 차들이 세워져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대니스에 온 손님들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까요?"
프리먼은 증인이 이 질문에 대답할 자격조건을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며 다시 한 번 이의를 제기했다.
---> 우리나라 형사소송규칙 제74조 제2항에는 증인신문을 할 때 이런 행위를 금지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위협적이거나 모욕적인 신문, 전의 신문과 중복되는 신문, 의견을 묻거나 의논에 해당하는 신문, 증인이 직접 경험하지 아니한 사항에 해당하는 신문 등입니다. 미국법에도 당연히 이와 동일한 취지의 규정이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는 마고 섀퍼 증인이 리사 트래멀을 목격하였을 당시 두 사람 사이에는 대니스 식당 앞에 주차된 차들로 인해 시야가 막혀있었는데 증인이 어떻게 피고인을 똑똑히 볼 수 있었느냐고 추궁하고 있습니다. 추궁을 하다 증인과 피고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차들이 모두 대니스 식당 손님들의 것인지를 증인에게 묻습니다. 물론 이는 증인이 직접 경험하거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검사는 바로 할러 변호사의 반대신문이 부당하다며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구요.
[273쪽] 점심시간이 끝난 후 프리먼 검사는 내 반대신문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마고 섀퍼를 다시 증인석에 앉히지 않음으로써 나를 놀라게 했다. 섀퍼의 증언을 살려낼 무언가를 나중에 내놓기로 계획한 것 같았다.
---> 아무튼 할러 변호사는 마고 섀퍼 증인에게 흠집을 내는 데 성공하고 즐거운 점심시간을 맞습니다.
[265쪽] "그럼 이 사진 속 모든 유료 주차공간에 차들이 세워져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대니스에 온 손님들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까요?"
프리먼은 증인이 이 질문에 대답할 자격조건을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며 다시 한 번 이의를 제기했다.
---> 우리나라 형사소송규칙 제74조 제2항에는 증인신문을 할 때 이런 행위를 금지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위협적이거나 모욕적인 신문, 전의 신문과 중복되는 신문, 의견을 묻거나 의논에 해당하는 신문, 증인이 직접 경험하지 아니한 사항에 해당하는 신문 등입니다. 미국법에도 당연히 이와 동일한 취지의 규정이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는 마고 섀퍼 증인이 리사 트래멀을 목격하였을 당시 두 사람 사이에는 대니스 식당 앞에 주차된 차들로 인해 시야가 막혀있었는데 증인이 어떻게 피고인을 똑똑히 볼 수 있었느냐고 추궁하고 있습니다. 추궁을 하다 증인과 피고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차들이 모두 대니스 식당 손님들의 것인지를 증인에게 묻습니다. 물론 이는 증인이 직접 경험하거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검사는 바로 할러 변호사의 반대신문이 부당하다며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구요.
[273쪽] 점심시간이 끝난 후 프리먼 검사는 내 반대신문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마고 섀퍼를 다시 증인석에 앉히지 않음으로써 나를 놀라게 했다. 섀퍼의 증언을 살려낼 무언가를 나중에 내놓기로 계획한 것 같았다.
---> 아무튼 할러 변호사는 마고 섀퍼 증인에게 흠집을 내는 데 성공하고 즐거운 점심시간을 맞습니다.
변호인의 반대신문 후 검사는 오후에 다시 같은 증인을 상대로 ‘재주신문’이라는 이름으로 더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끌어내 할러 변호사가 만든 흠집을 땜질할 수도 있을 텐데, 검사는 그냥 포기해 버립니다.
좀 뒤에 보면 프리먼 검사는 글래디스 피켓이라는 증인을 내세우는데, 바로 이 증인의 존재로 인해 마고 섀퍼를 또다시 불러 신문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273-274쪽] 커빙턴을 통해서 범죄현장 사진이 소개되었고, 두 대의 프로젝터 스크린에 핏자국이 선연한 현장이 공개되었다. 커빙턴의 어떤 증언보다도 이 사진들이 이 사건이 살인 사건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이런 확신이야말로 유죄 평결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였다.
좀 뒤에 보면 프리먼 검사는 글래디스 피켓이라는 증인을 내세우는데, 바로 이 증인의 존재로 인해 마고 섀퍼를 또다시 불러 신문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273-274쪽] 커빙턴을 통해서 범죄현장 사진이 소개되었고, 두 대의 프로젝터 스크린에 핏자국이 선연한 현장이 공개되었다. 커빙턴의 어떤 증언보다도 이 사진들이 이 사건이 살인 사건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이런 확신이야말로 유죄 평결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였다.
......
그런 사진들은 내 의뢰인에 대한 편견을 심어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살인 사건 피해자를 찍은 사진은 항상 충격적이고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살인범을 엄벌에 처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사진은 아주 쉽게,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배심원단이 피고인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들 수 있다. ......
---> 살짝 순서가 엉키긴 했지만 다시 본래의 순서로 돌아와 프리먼 검사는 신고전화를 받고 최초로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 데이비드 커빙턴을 증인으로 세웁니다.
이번에도 프리먼 검사는 증인신문을 하면서 증거물을 효과적으로 활용합니다. 피해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처참한 사진을 배심원들에게 직접 보여주며 배심원들이 피고인에게 한껏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장 출동 경찰관의 진술이나 현장 사진 역시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증거동의' 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런 증거 역시 우리 법정에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구요, 그에 따라 당연히 재판진행은 빨리빨리, 재판상황은 지루지루......
[274-276쪽] 커빙턴에 대한 반대신문에서 나는 사진 한 장에 집중해서 배심원단이 망자를 위한 복수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배심원들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대답은 내놓지 않는다면 내 할 일은 다 한 것이다.
---> 할러 변호사가 이번엔 커빙턴 증인을 상대로 반대신문을 벌입니다.
사건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보면 쓰러진 피해자 옆에 피해자의 서류가방이 입구가 열린 채 나뒹굴고 있는데, 할러 변호사는 이를 두고 서류가방 속에 있는 물건을 노린 강도의 소행으로 이 사건을 몰아보려고 합니다. 강도의 소행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배심원들 마음속에 심어두려 합니다.
미키 할러 변호사 시리즈의 주인공은 공정이나 정의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교활하고 야비하고 돈만 밝히는 나쁜 사나이 캐릭터입니다. 다만, 시리즈 뒤로 갈수록 점점 바른 사나이 쪽으로 변신 중이고, 급기야 다음 작품에서는 무려 검사로서 활약할 마음을 먹고 LA 지역의 ‘검사장’ 선거에 출마하기까지 합니다.
아무튼 아직까지는 나쁜 사나이 캐릭터인 할러 변호사는 계속 꼼수를 노립니다. 계속 의혹을 던지자, 던지다 보면 하나 정도는 배심원들에게 가 닿는 것도 있겠지 하면서요.
[277쪽] 다음 증인은 피해자의 형인 네이선 본듀란트였다. 그는 유죄 평결을 위한 또 하나의 필수조건인 피해자의 신원 확인을 위해 불려 나왔다. 프리먼은 범죄현장 사진을 이용해 배심원들의 감정을 자극했던 것처럼 피해자의 형을 이용해 배심원들의 감성에 호소했다. 그는 형사들을 따라 법의관실에 가서 동생의 시신을 확인한 일을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했다. ......
---> 이제 검찰 측 증인으로는 다섯 번째 증인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이 ‘다섯 번째 증인'인 걸까요? 물론 당연히 아니겠죠. 책 제목을 좌우할 정도로 비중을 가진 증인은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할러 변호사는 피해자의 신원이 어떠한가가 유죄 선고를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살해된 사람의 존재'가 살인 사건의 핵심 요소이니 살해된 사람의 신원은 어떠한지도 빼놓을 수 없는 요건이라는 설명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재판이라면 이는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합니다. 피해자의 신원은 그의 신분증과 주민등록조회서와 같은 객관적 자료로 입증이 충분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해자의 유족이 신원확인을 위해 증인으로 나올 필요는 전혀 없고, 다만 피해자의 유족으로서 갖고 있는 ‘재판절차 진술권'을 행사하기 위해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가해자를 엄벌에 처해 달라는 등의 주장을 하는 경우는 흔히 있습니다.
[279-281쪽] 프리먼은 글래디스 피켓이라는 여자의 증언을 마지막으로 마이너 선수들에 대한 증인신문을 마무리했다. 증인석에 앉은 피켓은 셔먼오크스에 있는 웨스트랜드 내셔널 본점의 창구 직원 책임자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
"그러면 본듀란트 씨가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마고 섀퍼가 리사 트래멀을 봤다고 이야기를 지어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거네요?"
"그렇죠. 본듀란트 씨 살해 소식이 은행에 알려지기 전에 섀퍼가 먼저 리사 트래멀을 봤다고 보고했거든요."
---> 프리먼 검사가 여섯 번째 증인을 신문하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날 오전 재판에서 마고 섀퍼가 자신의 눈으로 보지도 않은 걸 보았다고 주장하며 허위증언을 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그녀를 몰아붙였었습니다. 그런데 피켓이라는 이 새로운 증인이 그런 할러 변호사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피해자가 살해된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기 이전에 이미 마고 섀퍼는 동료들에게 자신이 지금 막 요 앞에서 리사 트래멀을 보았다는 얘기를 하였다는 것이고, 그 사실로 인해 마고 섀퍼가 보지도 않은 것을 보았다며 허위증언하였을 가능성은 확 낮아진 것이죠.
그런 증인에게 승산이 없다는 걸 직감한 할러 변호사는 반대신문도 포기하고 깨끗하게 퇴각합니다.
우리나라 재판이라도, 이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글래디스 피켓은 마고 섀퍼라는 중요한 증인의 신빙성을 보강해줄 수 있는 증인이므로 당연히 검찰 측 증인으로 법정에 나올 필요가 있겠습니다.
[284-287쪽] 휴식시간이 끝난 후 프리먼 검사는 이른바 '검찰 측 증인신문의 사냥과 채집 단계'로 넘어갔다. 그녀는 범죄현장 전문가들을 증인으로 불렀다.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나중에는 수사책임자인 하워드 컬렌 형사를 부를 것이 틀림없었다.
---> 페리 판사의 법정은 하루가 이런 식으로 갑니다. 오전 9시 재판 시작, 오전 중간에 휴식 한 번, 점심시간에 쉬었다가 오후 1시 반부터 다시 재판 시작, 오후 중간에 또 한 번 휴식, 그리고 오후 5시 마감. 하루짜리 재판이 아니기에 가능한, 배심원들의 집중력 유지와 현명한 판단을 위한 인간적인 진행입니다.
오후 중간의 휴식시간이 끝난 후, 이제부터 보다 더 중요한 검찰의 증인들이 등장합니다. 범죄현장 전문가들이라는데, 그 첫 번째는 범죄현장에 출동해 시신을 검안하고 부검이 실시될 법의관실로 이송한 법의관실 조사관이고, 그 다음 증인은 범죄현장을 조사하고 증거물을 수집해서 과학수사대로 인계한 LA 경찰국 범죄현장 조사반의 선임 범죄학자입니다.
[290-292쪽] "...... 주택 압류를 놓고 은행과 분쟁을 벌였고 은행 밖에서 시위를 벌인 경력이 있어서요. 결국 은행 변호사들이 그녀에 대해 일시적인 접근금지 명령을 받아냈죠. 그녀의 그런 행동들이 위협으로 간주되었던 건데 결국 우리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이의를 제기했다. 머데스토의 진술 중 맨 마지막 말은 선동적이고 배심원단에게 선입견을 줄 수 있는 발언이므로 기록에서 삭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
---> 다음 증인은 피해자가 일하던 웨스트랜드 내셔널 은행의 경비실장입니다. 이 사건 이전에 그 은행 앞에서 시위를 벌이곤 했던 피고인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리사 트래멀은 평소 웨스트랜드 내셔널 은행의 블랙리스트에 등재되어 있는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은행까지 와서 시위를 벌이는 등 위세를 과시하는 방법으로 은행을 비방하고 있었던 과격한 채무자였기 때문이죠.
할러 변호사가 리사 트래멀을 살인범으로 단정하는 증인의 말을 가로막습니다. 그녀가 살인범이라는 판단은 배심원들만이 할 수 있는 권한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295-297쪽] "검찰은 하워드 컬렌 형사를 증인 신청합니다."
...... 그는 법정 출입문으로 들어와 증인석을 향해 걸어왔다. 편안해 보였다. 이런 일은 그에겐 일상인 것이다.
......
컬렌은 감색 정장을 맵시 있게 차려입고 밝은 주황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형사들은 증인 출석을 할 때 항상 가장 좋은 옷으로 차려입고 나온다.
......
컬렌은 증인석에 편안히 앉아서 솔직하게 대답했고, 증언하는 모습이 소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찰 측 증인이 매력적인 것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때를 기다려야 했다. ......
---> 컬렌 형사는 이 사건의 수사책임자입니다. 수사책임자인 경찰관이 검찰 측의 가장 중요한 증인입니다. 수사를 직접 담당하면서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범인 다음으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입을 통해 그동안의 수사 과정을 배심원들이 상세히 알게 되어 사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결국 피고인석에 있는 사람이 범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명쾌하게 설명될 것입니다.
할러 변호사는 경찰관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오는 것이 ‘일상’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는데, 이렇게 미국 법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빈번하게 등장하는 증인인 경찰관이 우리나라 법정에서는 어떤 지위를 갖고 있을까요?
우리는 재판 중인 사건의 수사를 직접 담당한 경찰관이 법정에 나와 그동안의 수사 과정과 피고인이 범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습니다. 단지 피고인을 직접 조사한 경찰관이 법정에 나와 피고인의 진술내용에 대해서만 증언하는 ‘조사자 증인 제도’가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2008년에야 뒤늦게 도입되었는데, 그나마 경찰관이 증인으로 나와 조사자로서 증언하는 경우도 극히 드뭅니다.
제도가 마련되어 있는데도 경찰관을 증인으로 만나기 힘든 이유는, 경찰관은 피고인의 반대편에 있는 일방 당사자에 불과한 객관적이지 못한 지위에 있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증인으로 나와 일방적으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 경찰관의 말은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증거로서의 가치도 없다는 식의 알레르기 반응을 법원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증거가 법정 안에서 생생하게 공개되고 이에 대한 치열한 공격방어를 통해 진실을 가리자는 의미의 ‘공판중심주의’가 이 시대의 절대진리라고 주장되는 오늘날의 우리 법정에서, 정작 사건의 처음과 끝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증인으로 나설 수가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이러고도 ‘공판중심주의’라니, 앙꼬도 안 들어간 빵을 찐빵이라고 우기는 격입니다.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이 증인으로 나오는 경우가 흔치 않다 보니, 배심원들은 이 사건 수사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정확히 알기 힘듭니다. 물론 검사가 배심원들에게 수사 과정과 피고인이 범인인 이유에 대한 설명을 하긴 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사실 전달에 불과하여 수사담당자가 직접 증언하는 것만큼 생생하거나 재미있지도 않습니다. 어쨌든 생생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재판이 빨리빨리는 진행됩니다. 형사재판에 있어서 신속성이라는 요소도 물론 매우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러려면 우리는 공판중심주의를 이야기할 때 각자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공판중심주의 하지도 못할 거면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자는 거죠.
한편, 할러 변호사는 컬렌 형사의 옷차림과 태도에 대해 언급하며 ‘메시지보다 메신저’를 되뇌이고 있네요.
[302-303쪽] "변호인이 입회하지 않은 자리에서는 형사의 조사에 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 헌법상의 권리를 먼저 피고인에게 고지하셨습니까?"
"그땐 안 했죠. 그땐 용의자(suspect)가 아니었거든요.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른 관심 인물이었을 뿐이니까요. 피의자로 전환할 때까지는 미란다 원칙을 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피의자로 전환할 수준에 가까이 가지도 않았고요. 트래멀의 진술과 목격자의 진술이 꽤 차이가 있더군요. 한 사람을 피의자(suspect)로 만들기 전에 우선 그 간극부터 줄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프리먼이 이번에도 한발 앞섰다. 내가 그 틈을 더 넓히기 전에 메우고 붙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맥이 빠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 컬렌 증인에 대한 프리먼 검사의 주신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컬렌 형사는 사건 당일 리사 트래멀의 집을 방문해서 그녀를 상대로 간단한 인터뷰를 한 뒤 경찰서로 데려가 다시 조사하고 체포하였습니다. 할러 변호사는 컬렌 형사가 리사 트래멀에게 미란다 원칙을 미리 고지하지 않고 그녀를 조사한 데 대해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점을 주장해서 경찰이 수집한 증거를 무력화하려는 계획이었지만, 프리먼 검사가 먼저 선수를 쳐서 할러 변호사가 할 말을 가로채고 있습니다. 공격은 먼저 하는 게 유리할 때가 많은 법이죠.
검사는 컬렌 형사가 리사 트래멀을 상대로 진행한 절차는 interrogation이 아니라 interview이므로 미란다 원칙을 고지할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경찰 수사에 하자가 없다는 점을 배심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303-304쪽] 프리먼은 아주 능숙하게 컬렌을 밴나이스 경찰서로, 그가 내 의뢰인과 마주 앉아 신문을 한 조사실로 데려왔다. 그의 입을 통해 그 조사 내용을 녹화한 비디오를 소개했다. 그 비디오는 배심원단을 위해 두 대의 프로젝터 스크린으로 재생되었다. ......
---> 컬렌 형사에 대한 증인신문 기회에, 프리먼 검사는 리사 트래멀의 조사장면이 녹화된 영상을 상영합니다. 이 영상은 역시 검사에 의해 증거로 제출될 것입니다.
반면, 우리나라 법에서는 이렇게 조사장면을 촬영한 영상은 검사가 증거로 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법이 그렇게 되어 있다기보다는, 법원의 해석이 그렇습니다. 이걸 증거로 허용하면 법정이 ‘극장’이 된다는 이유도 듭니다. 법정에서 여러 증거들을 살펴보는 도중에 조사장면 영상을 한번 튼다고 극장이 된다는 논리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법정이 극장이 되는 게 무슨 큰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범인을 기소하기 전에 수사기관에 의해 충분한 수사가 이루어져 범인의 혐의가 거의 ‘증명’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는 우리의 형사사법절차와 달리, 미국에서는 수사기관이 아주 기초적인 수사만을 진행하여 범인의 혐의가 ‘소명’되는 정도에만 이르면 범인을 재판에 넘기고 법정에서 실질적인 ‘증명’ 활동이 이루어지는 차이가 있다고 흔히 이야기되곤 합니다.
물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 사건만 보더라도, 체포된 범인은 곧바로 내지 24시간 이내에 법원에 인계되어야 하므로 그 사이에 수사기관이 수사를 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미국의 수사기관도 분명히 용의자를 앞에 앉혀놓고 조사를 하는 등 어느 정도 우리와 비슷한 형태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사 결과는 수사책임자의 증언, 그리고 조사장면을 촬영한 동영상 등의 형태로 남아 증거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구요.
그런데 우리의 경우, 제가 계속 지적해오고 있는 것처럼 경찰관의 조사자로서의 증언은 법으로는 인정되면서도 실제 재판현장에서는 거의 인정되지 않고 있고, 조사장면을 촬영한 동영상은 법상으로도 아예 증거로 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 증거로 쓰이는 이 두 가지를 우리는 증거로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우리는 뭘 갖고 재판을 하는 걸까요?
[304쪽] 조사 동영상은 머리 위 높이의 스크린에서 방영되었다. 스크린 속의 하워드 컬렌은 덩치가 큰 남자이고 리사 트래멀은 왜소한 여자였기 때문에 피고인 측은 작은 점수를 땄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리사의 맞은편에 앉은 컬렌이 그녀를 압도하고, 궁지로 몰고, 심지어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건 우리에게 이로웠다. 반대신문을 통해 배심원들의 마음속에 심으려고 했던 이미지가 바로 이런 거였다.
---> 우리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그 하려고 하는 것의 실제 내용보다, 그것이 ‘보여지는’ 외양이 더 중요하다고들 얘기합니다(‘보여지는’은 이중피동이라 맞춤법상 안 맞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이 안 맞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 그냥 쓰겠습니다).
할러 변호사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네요. 조사 내용에 먼저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조사의 외관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배심원들도 사람인지라, 역시 느끼는 건 마찬가지일 거라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수사기관이 영상녹화조사를 할 때 나중에 진술의 임의성이나 특신상태가 다퉈질 경우를 고려해서 카메라 각도에 대해서도 신경 써야겠다는 점입니다.
[306-307쪽] "미첼 본듀란트를 공격했습니까?"
......
"미, 미첼 본듀란트가 공격을 당했어요? 괜찮아요?"
"아뇨, 실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당신에게 헌법상의 권리를 알려줘야 할 것 같군요."
컬렌은 트래멀에게 미란다의 원칙을 고지했고 트래멀은 마법의 말을, 이제까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 중 가장 현명한 두 마디를 말했다.
"변호사를 불러주세요."
그것으로 조사는 끝났고 컬렌이 트래멀을 살인 혐의로 체포하는 것으로 동영상도 끝났다. ......
---> 리사 트래멀의 조사장면이 촬영된 동영상이 법정에서 상영되고 있습니다.
컬렌 형사는 당초 단순한 참고인 신분이었던 리사 트래멀이 조사 도중에 종전 진술과 모순되는 진술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를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하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인용하지 않은 다른 부분에서 리사 트래멀의 진술내용을 읽어보면, 그녀가 딱히 모순된 진술을 한다거나 더 나아가 자백진술을 하였다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습니다. 컬렌 형사가 그녀에 대해 이미 마음속으로 혐의점을 두고 문답을 주고받다 보니 그만 의욕만 앞서서, 그녀가 거짓말을 하거나 자백을 한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비록 검사가 이 동영상을 증거로 제출하기는 했지만, 자백진술이나 모순진술이 들어있지도 않은 이상 이 동영상은 딱히 증거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이 영상은 이런 가치는 분명히 있을 겁니다. 범행이 있었던 바로 당일의, 피고인의 생생한 표정과 말투 등을 배심원들이 직접 바라보면서, 점점 이 재판에 깊이 빠져들고 관심을 가질 수 있겠다는 것이죠.
그런 사진들은 내 의뢰인에 대한 편견을 심어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살인 사건 피해자를 찍은 사진은 항상 충격적이고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살인범을 엄벌에 처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사진은 아주 쉽게,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배심원단이 피고인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들 수 있다. ......
---> 살짝 순서가 엉키긴 했지만 다시 본래의 순서로 돌아와 프리먼 검사는 신고전화를 받고 최초로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 데이비드 커빙턴을 증인으로 세웁니다.
이번에도 프리먼 검사는 증인신문을 하면서 증거물을 효과적으로 활용합니다. 피해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처참한 사진을 배심원들에게 직접 보여주며 배심원들이 피고인에게 한껏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장 출동 경찰관의 진술이나 현장 사진 역시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증거동의' 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런 증거 역시 우리 법정에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구요, 그에 따라 당연히 재판진행은 빨리빨리, 재판상황은 지루지루......
[274-276쪽] 커빙턴에 대한 반대신문에서 나는 사진 한 장에 집중해서 배심원단이 망자를 위한 복수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배심원들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대답은 내놓지 않는다면 내 할 일은 다 한 것이다.
---> 할러 변호사가 이번엔 커빙턴 증인을 상대로 반대신문을 벌입니다.
사건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보면 쓰러진 피해자 옆에 피해자의 서류가방이 입구가 열린 채 나뒹굴고 있는데, 할러 변호사는 이를 두고 서류가방 속에 있는 물건을 노린 강도의 소행으로 이 사건을 몰아보려고 합니다. 강도의 소행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배심원들 마음속에 심어두려 합니다.
미키 할러 변호사 시리즈의 주인공은 공정이나 정의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교활하고 야비하고 돈만 밝히는 나쁜 사나이 캐릭터입니다. 다만, 시리즈 뒤로 갈수록 점점 바른 사나이 쪽으로 변신 중이고, 급기야 다음 작품에서는 무려 검사로서 활약할 마음을 먹고 LA 지역의 ‘검사장’ 선거에 출마하기까지 합니다.
아무튼 아직까지는 나쁜 사나이 캐릭터인 할러 변호사는 계속 꼼수를 노립니다. 계속 의혹을 던지자, 던지다 보면 하나 정도는 배심원들에게 가 닿는 것도 있겠지 하면서요.
[277쪽] 다음 증인은 피해자의 형인 네이선 본듀란트였다. 그는 유죄 평결을 위한 또 하나의 필수조건인 피해자의 신원 확인을 위해 불려 나왔다. 프리먼은 범죄현장 사진을 이용해 배심원들의 감정을 자극했던 것처럼 피해자의 형을 이용해 배심원들의 감성에 호소했다. 그는 형사들을 따라 법의관실에 가서 동생의 시신을 확인한 일을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했다. ......
---> 이제 검찰 측 증인으로는 다섯 번째 증인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이 ‘다섯 번째 증인'인 걸까요? 물론 당연히 아니겠죠. 책 제목을 좌우할 정도로 비중을 가진 증인은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할러 변호사는 피해자의 신원이 어떠한가가 유죄 선고를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살해된 사람의 존재'가 살인 사건의 핵심 요소이니 살해된 사람의 신원은 어떠한지도 빼놓을 수 없는 요건이라는 설명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재판이라면 이는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합니다. 피해자의 신원은 그의 신분증과 주민등록조회서와 같은 객관적 자료로 입증이 충분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해자의 유족이 신원확인을 위해 증인으로 나올 필요는 전혀 없고, 다만 피해자의 유족으로서 갖고 있는 ‘재판절차 진술권'을 행사하기 위해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가해자를 엄벌에 처해 달라는 등의 주장을 하는 경우는 흔히 있습니다.
[279-281쪽] 프리먼은 글래디스 피켓이라는 여자의 증언을 마지막으로 마이너 선수들에 대한 증인신문을 마무리했다. 증인석에 앉은 피켓은 셔먼오크스에 있는 웨스트랜드 내셔널 본점의 창구 직원 책임자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
"그러면 본듀란트 씨가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마고 섀퍼가 리사 트래멀을 봤다고 이야기를 지어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거네요?"
"그렇죠. 본듀란트 씨 살해 소식이 은행에 알려지기 전에 섀퍼가 먼저 리사 트래멀을 봤다고 보고했거든요."
---> 프리먼 검사가 여섯 번째 증인을 신문하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날 오전 재판에서 마고 섀퍼가 자신의 눈으로 보지도 않은 걸 보았다고 주장하며 허위증언을 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그녀를 몰아붙였었습니다. 그런데 피켓이라는 이 새로운 증인이 그런 할러 변호사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피해자가 살해된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기 이전에 이미 마고 섀퍼는 동료들에게 자신이 지금 막 요 앞에서 리사 트래멀을 보았다는 얘기를 하였다는 것이고, 그 사실로 인해 마고 섀퍼가 보지도 않은 것을 보았다며 허위증언하였을 가능성은 확 낮아진 것이죠.
그런 증인에게 승산이 없다는 걸 직감한 할러 변호사는 반대신문도 포기하고 깨끗하게 퇴각합니다.
우리나라 재판이라도, 이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글래디스 피켓은 마고 섀퍼라는 중요한 증인의 신빙성을 보강해줄 수 있는 증인이므로 당연히 검찰 측 증인으로 법정에 나올 필요가 있겠습니다.
[284-287쪽] 휴식시간이 끝난 후 프리먼 검사는 이른바 '검찰 측 증인신문의 사냥과 채집 단계'로 넘어갔다. 그녀는 범죄현장 전문가들을 증인으로 불렀다.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나중에는 수사책임자인 하워드 컬렌 형사를 부를 것이 틀림없었다.
---> 페리 판사의 법정은 하루가 이런 식으로 갑니다. 오전 9시 재판 시작, 오전 중간에 휴식 한 번, 점심시간에 쉬었다가 오후 1시 반부터 다시 재판 시작, 오후 중간에 또 한 번 휴식, 그리고 오후 5시 마감. 하루짜리 재판이 아니기에 가능한, 배심원들의 집중력 유지와 현명한 판단을 위한 인간적인 진행입니다.
오후 중간의 휴식시간이 끝난 후, 이제부터 보다 더 중요한 검찰의 증인들이 등장합니다. 범죄현장 전문가들이라는데, 그 첫 번째는 범죄현장에 출동해 시신을 검안하고 부검이 실시될 법의관실로 이송한 법의관실 조사관이고, 그 다음 증인은 범죄현장을 조사하고 증거물을 수집해서 과학수사대로 인계한 LA 경찰국 범죄현장 조사반의 선임 범죄학자입니다.
[290-292쪽] "...... 주택 압류를 놓고 은행과 분쟁을 벌였고 은행 밖에서 시위를 벌인 경력이 있어서요. 결국 은행 변호사들이 그녀에 대해 일시적인 접근금지 명령을 받아냈죠. 그녀의 그런 행동들이 위협으로 간주되었던 건데 결국 우리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이의를 제기했다. 머데스토의 진술 중 맨 마지막 말은 선동적이고 배심원단에게 선입견을 줄 수 있는 발언이므로 기록에서 삭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
---> 다음 증인은 피해자가 일하던 웨스트랜드 내셔널 은행의 경비실장입니다. 이 사건 이전에 그 은행 앞에서 시위를 벌이곤 했던 피고인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리사 트래멀은 평소 웨스트랜드 내셔널 은행의 블랙리스트에 등재되어 있는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은행까지 와서 시위를 벌이는 등 위세를 과시하는 방법으로 은행을 비방하고 있었던 과격한 채무자였기 때문이죠.
할러 변호사가 리사 트래멀을 살인범으로 단정하는 증인의 말을 가로막습니다. 그녀가 살인범이라는 판단은 배심원들만이 할 수 있는 권한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295-297쪽] "검찰은 하워드 컬렌 형사를 증인 신청합니다."
...... 그는 법정 출입문으로 들어와 증인석을 향해 걸어왔다. 편안해 보였다. 이런 일은 그에겐 일상인 것이다.
......
컬렌은 감색 정장을 맵시 있게 차려입고 밝은 주황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형사들은 증인 출석을 할 때 항상 가장 좋은 옷으로 차려입고 나온다.
......
컬렌은 증인석에 편안히 앉아서 솔직하게 대답했고, 증언하는 모습이 소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찰 측 증인이 매력적인 것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때를 기다려야 했다. ......
---> 컬렌 형사는 이 사건의 수사책임자입니다. 수사책임자인 경찰관이 검찰 측의 가장 중요한 증인입니다. 수사를 직접 담당하면서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범인 다음으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입을 통해 그동안의 수사 과정을 배심원들이 상세히 알게 되어 사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결국 피고인석에 있는 사람이 범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명쾌하게 설명될 것입니다.
할러 변호사는 경찰관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오는 것이 ‘일상’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는데, 이렇게 미국 법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빈번하게 등장하는 증인인 경찰관이 우리나라 법정에서는 어떤 지위를 갖고 있을까요?
우리는 재판 중인 사건의 수사를 직접 담당한 경찰관이 법정에 나와 그동안의 수사 과정과 피고인이 범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습니다. 단지 피고인을 직접 조사한 경찰관이 법정에 나와 피고인의 진술내용에 대해서만 증언하는 ‘조사자 증인 제도’가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2008년에야 뒤늦게 도입되었는데, 그나마 경찰관이 증인으로 나와 조사자로서 증언하는 경우도 극히 드뭅니다.
제도가 마련되어 있는데도 경찰관을 증인으로 만나기 힘든 이유는, 경찰관은 피고인의 반대편에 있는 일방 당사자에 불과한 객관적이지 못한 지위에 있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증인으로 나와 일방적으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 경찰관의 말은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증거로서의 가치도 없다는 식의 알레르기 반응을 법원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증거가 법정 안에서 생생하게 공개되고 이에 대한 치열한 공격방어를 통해 진실을 가리자는 의미의 ‘공판중심주의’가 이 시대의 절대진리라고 주장되는 오늘날의 우리 법정에서, 정작 사건의 처음과 끝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증인으로 나설 수가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이러고도 ‘공판중심주의’라니, 앙꼬도 안 들어간 빵을 찐빵이라고 우기는 격입니다.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이 증인으로 나오는 경우가 흔치 않다 보니, 배심원들은 이 사건 수사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정확히 알기 힘듭니다. 물론 검사가 배심원들에게 수사 과정과 피고인이 범인인 이유에 대한 설명을 하긴 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사실 전달에 불과하여 수사담당자가 직접 증언하는 것만큼 생생하거나 재미있지도 않습니다. 어쨌든 생생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재판이 빨리빨리는 진행됩니다. 형사재판에 있어서 신속성이라는 요소도 물론 매우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러려면 우리는 공판중심주의를 이야기할 때 각자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공판중심주의 하지도 못할 거면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자는 거죠.
한편, 할러 변호사는 컬렌 형사의 옷차림과 태도에 대해 언급하며 ‘메시지보다 메신저’를 되뇌이고 있네요.
[302-303쪽] "변호인이 입회하지 않은 자리에서는 형사의 조사에 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 헌법상의 권리를 먼저 피고인에게 고지하셨습니까?"
"그땐 안 했죠. 그땐 용의자(suspect)가 아니었거든요.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른 관심 인물이었을 뿐이니까요. 피의자로 전환할 때까지는 미란다 원칙을 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피의자로 전환할 수준에 가까이 가지도 않았고요. 트래멀의 진술과 목격자의 진술이 꽤 차이가 있더군요. 한 사람을 피의자(suspect)로 만들기 전에 우선 그 간극부터 줄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프리먼이 이번에도 한발 앞섰다. 내가 그 틈을 더 넓히기 전에 메우고 붙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맥이 빠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 컬렌 증인에 대한 프리먼 검사의 주신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컬렌 형사는 사건 당일 리사 트래멀의 집을 방문해서 그녀를 상대로 간단한 인터뷰를 한 뒤 경찰서로 데려가 다시 조사하고 체포하였습니다. 할러 변호사는 컬렌 형사가 리사 트래멀에게 미란다 원칙을 미리 고지하지 않고 그녀를 조사한 데 대해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점을 주장해서 경찰이 수집한 증거를 무력화하려는 계획이었지만, 프리먼 검사가 먼저 선수를 쳐서 할러 변호사가 할 말을 가로채고 있습니다. 공격은 먼저 하는 게 유리할 때가 많은 법이죠.
검사는 컬렌 형사가 리사 트래멀을 상대로 진행한 절차는 interrogation이 아니라 interview이므로 미란다 원칙을 고지할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경찰 수사에 하자가 없다는 점을 배심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303-304쪽] 프리먼은 아주 능숙하게 컬렌을 밴나이스 경찰서로, 그가 내 의뢰인과 마주 앉아 신문을 한 조사실로 데려왔다. 그의 입을 통해 그 조사 내용을 녹화한 비디오를 소개했다. 그 비디오는 배심원단을 위해 두 대의 프로젝터 스크린으로 재생되었다. ......
---> 컬렌 형사에 대한 증인신문 기회에, 프리먼 검사는 리사 트래멀의 조사장면이 녹화된 영상을 상영합니다. 이 영상은 역시 검사에 의해 증거로 제출될 것입니다.
반면, 우리나라 법에서는 이렇게 조사장면을 촬영한 영상은 검사가 증거로 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법이 그렇게 되어 있다기보다는, 법원의 해석이 그렇습니다. 이걸 증거로 허용하면 법정이 ‘극장’이 된다는 이유도 듭니다. 법정에서 여러 증거들을 살펴보는 도중에 조사장면 영상을 한번 튼다고 극장이 된다는 논리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법정이 극장이 되는 게 무슨 큰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범인을 기소하기 전에 수사기관에 의해 충분한 수사가 이루어져 범인의 혐의가 거의 ‘증명’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는 우리의 형사사법절차와 달리, 미국에서는 수사기관이 아주 기초적인 수사만을 진행하여 범인의 혐의가 ‘소명’되는 정도에만 이르면 범인을 재판에 넘기고 법정에서 실질적인 ‘증명’ 활동이 이루어지는 차이가 있다고 흔히 이야기되곤 합니다.
물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 사건만 보더라도, 체포된 범인은 곧바로 내지 24시간 이내에 법원에 인계되어야 하므로 그 사이에 수사기관이 수사를 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미국의 수사기관도 분명히 용의자를 앞에 앉혀놓고 조사를 하는 등 어느 정도 우리와 비슷한 형태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사 결과는 수사책임자의 증언, 그리고 조사장면을 촬영한 동영상 등의 형태로 남아 증거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구요.
그런데 우리의 경우, 제가 계속 지적해오고 있는 것처럼 경찰관의 조사자로서의 증언은 법으로는 인정되면서도 실제 재판현장에서는 거의 인정되지 않고 있고, 조사장면을 촬영한 동영상은 법상으로도 아예 증거로 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 증거로 쓰이는 이 두 가지를 우리는 증거로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우리는 뭘 갖고 재판을 하는 걸까요?
[304쪽] 조사 동영상은 머리 위 높이의 스크린에서 방영되었다. 스크린 속의 하워드 컬렌은 덩치가 큰 남자이고 리사 트래멀은 왜소한 여자였기 때문에 피고인 측은 작은 점수를 땄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리사의 맞은편에 앉은 컬렌이 그녀를 압도하고, 궁지로 몰고, 심지어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건 우리에게 이로웠다. 반대신문을 통해 배심원들의 마음속에 심으려고 했던 이미지가 바로 이런 거였다.
---> 우리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그 하려고 하는 것의 실제 내용보다, 그것이 ‘보여지는’ 외양이 더 중요하다고들 얘기합니다(‘보여지는’은 이중피동이라 맞춤법상 안 맞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이 안 맞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 그냥 쓰겠습니다).
할러 변호사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네요. 조사 내용에 먼저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조사의 외관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배심원들도 사람인지라, 역시 느끼는 건 마찬가지일 거라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수사기관이 영상녹화조사를 할 때 나중에 진술의 임의성이나 특신상태가 다퉈질 경우를 고려해서 카메라 각도에 대해서도 신경 써야겠다는 점입니다.
[306-307쪽] "미첼 본듀란트를 공격했습니까?"
......
"미, 미첼 본듀란트가 공격을 당했어요? 괜찮아요?"
"아뇨, 실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당신에게 헌법상의 권리를 알려줘야 할 것 같군요."
컬렌은 트래멀에게 미란다의 원칙을 고지했고 트래멀은 마법의 말을, 이제까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 중 가장 현명한 두 마디를 말했다.
"변호사를 불러주세요."
그것으로 조사는 끝났고 컬렌이 트래멀을 살인 혐의로 체포하는 것으로 동영상도 끝났다. ......
---> 리사 트래멀의 조사장면이 촬영된 동영상이 법정에서 상영되고 있습니다.
컬렌 형사는 당초 단순한 참고인 신분이었던 리사 트래멀이 조사 도중에 종전 진술과 모순되는 진술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를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하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인용하지 않은 다른 부분에서 리사 트래멀의 진술내용을 읽어보면, 그녀가 딱히 모순된 진술을 한다거나 더 나아가 자백진술을 하였다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습니다. 컬렌 형사가 그녀에 대해 이미 마음속으로 혐의점을 두고 문답을 주고받다 보니 그만 의욕만 앞서서, 그녀가 거짓말을 하거나 자백을 한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비록 검사가 이 동영상을 증거로 제출하기는 했지만, 자백진술이나 모순진술이 들어있지도 않은 이상 이 동영상은 딱히 증거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이 영상은 이런 가치는 분명히 있을 겁니다. 범행이 있었던 바로 당일의, 피고인의 생생한 표정과 말투 등을 배심원들이 직접 바라보면서, 점점 이 재판에 깊이 빠져들고 관심을 가질 수 있겠다는 것이죠.
[308쪽] 프리먼은 형사팀의 증언을 따로 떼어놓는 영리한 전술을 구사했다. 지금 내가 컬렌 형사만 신문해서는 사건에 대해 응집력 있는 공격을 감행할 수 없을 것이다. 컬렌은 지금, 그의 파트너 롱스트레치 형사는 훨씬 나중에 신문하게 생겼다. 소송전략전술이 프리먼의 강점들 중 하나였는데 지금 그 경쟁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었다.
---> 앞에서 중요한 증인을 더 나중에 등장시킨다고 말씀드렸는데요, 할러 변호사의 설명에 의하면 프리먼 검사는 좀 다른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컬렌 형사가 수사의 총책임자이고 가장 중요한 증인임에도 그를 먼저 증인으로 내세우고, 컬렌 형사의 하급자인 롱스트레치 형사를 나중에 세우려고 합니다. 롱스트레치 형사가 400미터 계주의 마지막 주자로서 더 적합한 뭔가가 있는 거겠죠.
[309-370쪽] 나는 별 황당한 이야기를 다 들어본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사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컬렌이 처음으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바라던 게 그거였다. 그에게 창피를 줄 때 그가 오만한 모습을 보인다면 훨씬 더 좋을 텐데.
......
“그렇게 모아서 만든 큰 그림이 증인을 성급한 판단으로 이끌고 간 거로군요, 그렇죠?”
프리먼이 벌떡 일어나서 이의를 제기했고 판사가 이의 제기를 받아들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컬렌의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 질문을 모든 배심원들의 마음에 심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 컬렌 형사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반대신문 장면입니다. 이 부분의 내용을 길게 인용할 수 없어 몇 구절만 가져왔기에 느낌 전달이 쉽지 않지만, 이 부분에서는 증인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할러 변호사와 프리먼 검사 사이의 수싸움과 공방이 대단합니다.
처음부터 수사방향을 잘못 잡아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고는 나중에는 방향을 제대로 틀지 못해 잘못된 길인 걸 알면서도 그 길을 계속 고집하고 있다며 증인을 약 올리고 증인의 흥분상태를 유발하여 배심원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주게 하려는 변호인, 그런 변호인 때문에 자칫 흠집이 날까 걱정돼 잦은 이의 제기를 통해 증인을 보호하는 한편 탄력받은 변호인의 리듬을 깨보려는 검사.
이런 대목에서 보이는 양쪽의 심리 묘사와 공방 장면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332쪽] “...... 하지만 그 편지를 반대신문에서 소개한 것은 대단히 옳지 못한 처사였습니다, 할러 변호사. 오늘 아침에는 재판부에 알렸어야죠. 우편으로 뭔가를 받았는데 지금 확인 중에 있고 진짜로 확인이 되면 법정에서 소개할 계획이라고 말이죠. 변호인이 판사와 검찰을 기습 공격한 겁니다.”
---> 프리먼 검사의 이의제기를 인정한 재판장이 할러 변호사를 훈계하고 있습니다. 할러 변호사가 컬렌 형사에 대한 반대신문 때 재판장도 검사도 알지 못하던 어떤 편지를 근거로 컬렌 형사를 공격했거든요.
이 편지는 전날 익명의 누군가가 할러 변호사에게 보낸 것이었고, 조금 전 시스코를 통해 그 편지에 관한 중요한 사실의 확인작업을 막 마쳤습니다. 사실 할러 변호사 입장에서도 재판장이나 검사에게 미리 이 증거를 개시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던 것이죠.
어느 누구든 불의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재판에서는 양 당사자는 물론 재판장도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공격과 방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재판장과 검사 모두 할러 변호사를 비난하고 있지만, 이 편지를 입수한 날이 전날인지 아닌지 밝혀낼 도리가 없는 이상 미리 알릴 시간이 없었다는데 더 뭐라고 하지 못하고, 할러 변호사는 일단 위기를 벗어납니다.
[371쪽] 프리먼은 컬렌을 15분 더 증인석에 앉혀놓고 재직접신문(redirect)을 하면서 그가 수사하면서 취한 모든 조치를 범죄에 맞서 싸운 용감한 노력으로 치장하느라 바빴다. 그녀가 신문을 마친 후 나는 재반대신문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컬렌 건에 있어서는 내가 검사보다 우위에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컬렌의 수사가 좁은 시야에 갇혀 한 곳만 보고 나아간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고, 성공했다고 믿었다.
---> 역시 컬렌 형사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공격전략은, 컬렌 형사의 수사방향이 처음부터 잘못되었고 성급했다는 의혹을 배심원들에게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프리먼 검사는 우리 제도로 치면 ‘재주신문'을 통해 할러 변호사가 만들어놓은 흠집을 되돌려 놓으려 애썼고, 그녀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컬렌 형사의 동료 형사인 롱스트레치라는 훌륭한 증인이 아직 뒤에 대기하고 있으니까요.
[제3편에서 계속됩니다.]
[제3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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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고급 레스토랑은 물론 동네에 있는 흔한 파스타 집에서도 '식전빵'이란 걸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에피타이저든 주요리든 뭔가가 나오기 전에 가장 먼저 발사믹을 친 올리브 오일과 함께 나오는 빵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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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15일자로 제가 이 블로그에 쓴 "아이폰과 아이패드 활용사례 소개" 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http://imagistrat.blogspot.kr/2012/01/blog-post_15.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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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을 써봅니다. 한동안 나태한 생활이 이어지면서 블로그도 제 생활에서 멀어졌었는데, 이제 다시 글이라도 부지런히 쓰면서 마음을 다잡아 볼까 합니다. 오랜만에 쓰는 글이니 가벼운 글로 시작을 해볼까 합니다. 제가 프랑스 파리에서 가장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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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4박 5일간의 짧은 파리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다음 여행의 준비를 위해 몇 가지 느낀 점을 두서 없이 적어 볼까 합니다. [이번에 묵은 숙소 창밖 풍경] 1. 이번 파리 여행은 중학교 1학년인 제 딸아이와의 단둘만의 여행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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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보르도에 있는 국립사법관학교(École nationale de la magistrature)는 사법관(판사, 검사)을 양성하는 연수기관입니다. 사법관이 되기 위해서는 이 기관에서 총 31개월 간의 연수를 받아야 합니다. 2019년 4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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