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4일 일요일
[독서일기] '다섯 번째 증인' (feat. 미국 형사사법제도) 제3편
작성자:
iMagistrat
시간:
11/24/2019 11:30: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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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371쪽] 프리먼은 연방 수사 대상 통지서(federal target letter) 문제를 다뤄야 할 급박한 필요를 느낀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부른 다음 증인은 비밀경호국의 찰스 바스케즈 요원이었다.
---> 앞서 할러 변호사는 컬렌 형사에 대한 반대신문에서 '연방 수사 대상 통지서'라는 자료를 갖고 컬렌 형사를 공격하였습니다. 오파리지오가 연방 수사기관의 조사대상이 됨으로써 이 사건의 피해자 본듀란트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그렇다면 그런 동기로 인해 오파리지오가 피해자를 살해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프리먼 검사는 그 연방 수사 대상 통지서를 작성한 사람을 증인으로 불러 할러 변호사가 제기한 의혹을 해소하려고 노력합니다.
[375쪽] 나는 정원사가 망치를 발견하기 전에도 그 생울타리 주변에서 적어도 열두 번은 더 작업을 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배심원단을 위해 심은 작은 씨앗이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누군가가 거기에 망치를 갖다 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의 씨앗이었다.
---> 프리먼 검사는 다음 증인으로, 살인 사건 현장에서 한 블록 반 떨어진 곳에 있는 주택의 생울타리 안에서 망치를 발견한 정원사를 증언대에 올렸습니다. 검사가 범행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망치를 증거로 제출했으니, 그 망치를 발견해 수사기관에 넘긴 사람도 그 입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법정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재판은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석 달 정도가 지나 비로소 열리게 되었습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석 달이나 지난 시점에 범행도구가 발견되었으니, 할러 변호사 입장에선 당연히 그 발견경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작전을 씁니다.
[375-376쪽] 나는 굳이 반대신문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관리의 연속성이나 망치가 범행도구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 망치가 미첼 본듀란트를 죽게 한 무기였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것이 리사 트래멀의 것이었다는 사실까지 인정할 계획이었다.
예상치 못한 조치가 될 터이지만 모함이라는 변호인 측 주장과 잘 어울리는 유일한 조치였다.
---> 이번 검찰 측 증인은, 망치가 발견된 집의 소유자와 망치를 과학수사대 실험실에 인계한 경찰관들입니다.
비록 석 달이나 지나 발견되긴 했지만, 이 망치에는 피해자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그리고 리사 트래멀의 집 차고에 보관되어 있던 공구세트에 구비된 연장들 중에서, 사건 발생 무렵부터 지금까지 이 망치만 유일하게 행방이 묘연해 왔구요. 따라서 이 망치가 범행도구이고 피고인의 소유라는 걸 부인하긴 힘든 상황입니다.
때문에 할러 변호사는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하고서, 누군가 리사 트래멀을 모함하려 꾸민 짓이라고 주장하는 작전을 계속 고수하기로 합니다.
[378쪽] “...... 하지만 산은 갈수록 험해지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검사가 아직 과학을 끌어들이지 않았는데, 배심원들은 과학을 사랑해요. 과학이 그들에게 탈출구를, 군말 없이 남의 의견에 따르는 길을 보여주거든요. 사람들은 배심원이 되고 싶어 하죠. 직장도 빠지고 흥미로운 사건을 재판하는 법정의 맨 앞줄에 앉아서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실제 삶의 드라마를 구경하는 거잖아요. 집에서 TV로 보는 게 아니라. 하지만 조만간 배심원실로 돌아가서 서로를 쳐다보며 평결을 내려야 하는 때가 오죠.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아요. 근데 과학이 있으면 결정이 쉬워지는 거예요. ‘아, DNA가 일치하면 틀릴 수가 없잖아. 혐의대로 유죄.' 알겠어요? 이게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에요, 리사. 그리고 난 그 미래에 대해 당신이 오해나 착각을 하고 있지 않기를 바라요.”
---> 지금까지 진행된 재판상황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던 의뢰인에게 할러 변호사는 미리 김칫국물 마시면 안 된다고 초를 칩니다. 지금 상황이 꼭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만은 아니고 재판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자중자애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핵심을 찌르는 말을 하네요. 누구나 고통스런 선택의 순간이 닥치면 손쉬운 탈출구를 찾기 마련이고, 그런 자신의 선택에 대해 자기합리화를 시도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럴 때 바로 과학이 손쉬운 탈출구가 되고 자기합리화를 위한 훌륭한 근거가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렵디 어려운 결정과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 도처에 널려있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과학을 쉽게 맹신하는 이유 중 하나를 알 수 있는데요, 그래서 과학에 대한 지나친 맹신은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과학은 단지 우릴 도울 뿐이고, 우리가 과학으로 도피하거나 과학을 핑계거리 삼을 순 없는 것이며, 결국 결정과 선택은 인간 자신이 하는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인간이 져야 하는 것입니다.
[385쪽] 공판이 재개되자 검찰은 신시아 롱스트레치 형사를 증인으로 불렀다. ...... 영리한 계획이었다. 의문을 제기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을 내미는 거다. 컬렌과 롱스트레치를 통해 수사의 전반적인 경과를 설명하고, 법과학 전문가를 증인으로 내세워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종합한다. 그러고는 법의관을 불러 DNA 증거를 내놓으면서 증인신문을 마무리할 것이다. 치밀하고 깔끔한 계획이었다.
---> 프리먼 검사는 이 사건 수사에 참여한 롱스트레치 형사를 증인으로 불러 전반적인 수사 과정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과학수사의 결과물들을 내세워 이들의 사건 설명이 옳음을 증명할 것입니다.
밑줄 부분이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되지 않아 원문을 찾아봤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검사는 컬렌과 롱스트레치의 증언을 통해 수사 과정을 설명하고 이를 과학수사(the forensics)로 종합한다. 그녀는 법의학 전문가(medical examiner)와 DNA 증거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할 것이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386쪽] “우선 압수수색 영장 신청서(request)를 작성해야 합니다. 대상 건물을 수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게 만든 여러 사실과 증거를 열거해서 영장 신청의 상당한 이유를 진술(a probable cause statement)해야 하죠. 저는 은행 근처에서 용의자를 보았다고 한 목격자의 진술과 앞뒤가 맞지 않았던 용의자의 진술을 인용해서 수색 영장 신청 사유를 작성했습니다. ......”
---> 프리먼 검사는 롱스트레치 증인을 통해 주로 리사 트래멀의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 과정과 그때 발견된 증거물에 대한 설명을 이끌어내려고 합니다. 먼저, 증인에게 압수수색영장(a search warrant)을 발부받는 절차에 대해 묻자, 증인은 위와 같이 대답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을 때 필요한 요건은 범죄혐의, 필요성, 관련성이고, 이 요건들이 압수수색영장 신청서에 잘 설명되어 있어야 합니다. 즉, 대상자의 범죄혐의가 어느 정도는 인정될 가능성이 있어야 하고, 대상자의 범죄혐의를 밝히는 데 이 수색과 압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어야 하며, 이 수색을 통해 압수하려는 물건이 이 사건 및 이 피의자와 관련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롱스트레치 형사도 비슷한 취지로 압수수색영장의 신청절차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386-387쪽] “우리는 수색 중에 찾아낼 증거물을 잘 확보하고 처리하기 위해서 비디오 촬영기사와 범죄현장 감식반을 불러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수색의 전 과정이 비디오로 촬영되었나요?”
......
90분짜리 비디오가 배심원단 앞에서 재생되었고 간간히 롱스트레치의 설명이 곁들여졌다.
---> LA 경찰은 수색을 하러 나갈 때 경찰관들만 가는 게 아니라 비디오 촬영기사와 범죄현장 감식반을 대동하는군요. 특히 비디오 촬영까지 한다는 것은 그만큼 신중하게 수색과 압수 업무를 행한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신중하게 일을 한다는 것은 LA 경찰이 원래 법을 잘 지켜서 일을 꼼꼼하고 정확하게 처리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피고인과 변호인으로부터 수시로 경찰 수사에 절차적 하자가 있다는 어필을 받아 시달려온 때문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수색 과정에 참여한 경찰관의 증인신문 기회에, 이 수색 과정을 촬영한 동영상도 함께 배심원들에게 소개되는군요. 무려 90분짜리 동영상이라는데, 우리나라 법정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미국에서는 법정이 이렇게 ‘극장’이 되어도 괜찮은 모양입니다.
[389-390쪽] “어떤 종류의 망치였죠?”
“장도리였습니다.”
......
프리먼은 망치를 가지고 롱스트레치에게로 걸어가 망치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롱스트레치 형사, 지금 증인이 들고 있는 망치가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프리먼은 롱스트레치에게서 망치를 돌려받은 후 검찰 측 증거물로 제출한다고 말했다.
---> 최근 범행현장 부근 덤불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범행도구인 망치도 롱스트레치 증인의 설명과 함께 배심원들에게 보여지는 기회를 얻습니다.
“롱스트레치 형사, 지금 증인이 들고 있는 망치가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프리먼은 롱스트레치에게서 망치를 돌려받은 후 검찰 측 증거물로 제출한다고 말했다.
---> 최근 범행현장 부근 덤불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범행도구인 망치도 롱스트레치 증인의 설명과 함께 배심원들에게 보여지는 기회를 얻습니다.
[391-392쪽] “망치 손잡이에서 혈흔을 발견했습니다.”
“몇 주 동안이나 관목 속에 있다가 발견됐는데도요?”
내가 벌떡 일어서서 망치가 관목 속에 있었던 기간에 대해서는 어떤 증언이나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재판장님, 망치는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몇 주가 지나서야 발견됐습니다. 그 기간 동안 망치가 관목 속에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리먼이 대응했다.
......
판사가 고함을 질렀다. “변호인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입니다. 프리먼 검사, 질문할 때 증거로 제출되지 않은 사실을 추정하지 않도록 잘 생각해서 하세요.”
---> 프리먼 검사가 롱스트레치 형사를 상대로 주신문을 하던 중, 할러 변호사가 끼어들어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 망치는 누군가가 피고인을 모함하기 위해 최근에 그 덤불 속에 놓아둔 것이라고 몰고 가려는 할러 변호사 앞에서, 프리먼 검사는 범인이 범행 직후 그곳에 버린 것이라는 ‘주장성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사자 쌍방의 공방이 치열하면, 중간에 있는 진행자 입장에선 규칙을 더 깐깐하고 엄격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범죄사실을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도록 입증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검사로서는,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주장은 함부로 하여서는 안 됩니다. 추정만 갖고 어떠한 주장을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때문에 재판장은 할러 변호사의 손을 들어줍니다.
[392쪽] 프리먼이 여기서 말을 멈추고 망치에 관한 DNA 분석결과 보고서(the forensic report)를 검찰 측 증거물(a prosecution exhibit)로 채택해줄 것을 판사에게 요청했다.
---> 이 망치에서는 혈흔이 발견되었고, 그 DNA와 피해자의 DNA가 서로 일치한다는 분석결과가 있었습니다. 이 분석결과 보고서 역시 망치와 별도로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됩니다.
[394쪽] “...... 근데 그 신발은 집 안이 아니라 차고에 있었습니다. 판지 상자에 들어 있었는데 상자에는 흙이 많이 묻어 있었어요. 아마도 정원에서 나온 흙인 듯했습니다. 그런데 신발은 아주 깨끗하더라고요. 그 점이 우리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
“그러니까 신발은 아주 깨끗한데 더러운 상자에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 의심을 샀다고 말씀하시는 거죠?(So you are saying that ......?)”
나는 검사가 증인을 이끌고 있다(she was leading the witness)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의 제기는 받아들여졌지만 검사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배심원단에 전달되었다.
---> 롱스트레치 형사에 대한 프리먼 검사의 주신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증인을 신청한 당사자가 자신의 증인에 대해 먼저 신문하는 것을 주신문이라 하고, 그 반대편 당사자가 상대편 증인에 대해 증언의 신빙성 등을 문제 삼기 위해 공격적으로 신문하는 것을 반대신문이라고 합니다. 둘 간의 차이점 중 중요한 것은, 주신문에서는 유도신문이 금지된다는 것입니다. 주신문에서는 증인이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자연스럽게’ 법정에 내놓아야 합니다.
실제 신문에서 유도신문은 대개 “~~~라는 거죠?”라는 형태의 질문으로 나타납니다. “~~~라는 거죠?”는 어떤 특정한 방향의 대답을 끌어내려는 뉘앙스의 질문이어서, 신문하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묻게 되면 증인은 자기도 모르게 그에 이끌려서 “네, 그렇습니다”라는 식으로, 신문하는 사람이 원하는 방향의 대답을 하게 되기 쉽습니다. 원래 자기가 하려던 대답 방향을 잠시 잊고서 말이죠.
그래서 유도신문이 금지되는 것인데, 유도신문과 그렇지 않은 신문을 구별하는 게 실제로는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프리먼 검사의 질문도, 그게 증인으로부터 특정한 말을 유도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단지 증인이 한 말의 취지를 한 문장으로 명확하게 정리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증인의 말을 쉽게 이해하게 하려는 선량한 의도의 질문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396-397쪽] 프리먼이 왜 증언 순서를 정할 때 컬렌과 롱스트레치 사이를 떨어뜨려 놨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롱스트레치는 증언을 매우 잘했고 어쩌면 자신의 베테랑 파트너보다도 더 잘하는 것 같았다.
---> 이 대목에선, 증인이 여럿 있는 경우 이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하느냐도 중요한 재판전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네요.
[401쪽] “가정하는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증인. 증인은 살인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사람이 혈흔이 묻은 신발을 잠그지 않은 차고에 놔둘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특히 시간을 들여서 살인 무기는 갖다버리고 나서요?”
프리먼이 일어서더니 질문이 복잡하고, 증거로 제시되지 않은 사실들을 추정하고 있다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질문은 롱스트레치에게 던진 것이 아니었다. 배심원단을 향해 던진 것이었다.
“재판장님, 질문을 철회합니다.” 내가 선언했다. “그리고 이 증인에 대한 반대신문을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 롱스트레치 형사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반대신문 장면입니다.
프리먼 검사의 이의 제기 내용을 보니,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만 하여야 하는 거군요. 그리고 추정적 질문이나 가정적 질문도 하여서는 안 되는 거구요.
한편, 검사나 변호인이나 이렇게 증인을 신문하는 기회를 이용해서 배심원들에게 자기 자신의 논리와 주장을 전달하는 방법도 있을 수는 있겠군요.
그리고 할러 변호사는 배심원들에게 자신의 논리와 주장을 전달하는 중요한 말을 던진 다음, 그 순간 더 이상의 말 없이 신문을 종료함으로써 마지막 말의 여운이 배심원단의 마음속에 한동안 머물게 하는 변론기술도 쓰고 있습니다.
[412쪽] 목요일은 검찰의 모든 관현악적 요소들이 하나로 합쳐져 절정에 달하기로 되어 있는 날이었다. ...... 목요일은 과학의 날이었다. 모든 증거와 증언이 과학적 사실이라는 끊을 수 없는 끈으로 단단히 묶이는 날이 될 것이었다.
---> 재판은 월요일에 시작해서 이제 목요일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검찰 측 증인들에 대한 신문이 진행되고 있는데, 오늘 목요일에는 그동안 프리먼 검사가 아끼고 아껴둔 과학수사의 결과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럼 할러 변호사의 말대로 오늘 배심원들은 손쉬운 탈출구를 발견하고 스스로 자기합리화를 하며 안심들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413쪽] 목요일 아침 프리먼이 부른 첫 번째 증인은 미첼 본듀란트의 시신을 부검한 법의관보 요아킴 구티에레스 박사였다. 그 의사는 끔찍한 슬라이드 영상을 배심원들에게 보여주면서 모든 타박상, 찰과상, 부러진 이 등을 분류해서 설명했다. 나는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슬라이드 영상 사용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기각되었다. ......
---> 지금은 프리젠테이션의 시대, 사진이나 영상은 말이나 글을 필요 없게 만드는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부작용을 생각할 때 물론 남용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런 시대에 없어서는 절대 안 되는 필수품입니다. 더구나 기나긴 재판에 지치고 지친 배심원들의 주의를 그나마 이런 방법으로라도 그때그때 적절히 환기시켜주어야 합니다.
[417-419쪽] 우월감 콤플렉스를 자극하라. ‘나는 의사다. 나는 틀리지 않는다’라는 자부심을 자극하라.
“예전에 법정에서 증언하셨을 때 잘못된 판단에 근거하여 잘못된 진술을 하신 적이 있죠?”
“누구나 실수를 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랬고요.”
“스톤리지 사건은 어떻습니까?”
내가 예상했던 대로 프리먼이 재빨리 이의를 제기했다. ...... 나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배심원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낸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배심원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별말 없이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과거에 구티에레스가 거짓 증언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내가 원한 건 그것뿐이었다.
[413쪽] 목요일 아침 프리먼이 부른 첫 번째 증인은 미첼 본듀란트의 시신을 부검한 법의관보 요아킴 구티에레스 박사였다. 그 의사는 끔찍한 슬라이드 영상을 배심원들에게 보여주면서 모든 타박상, 찰과상, 부러진 이 등을 분류해서 설명했다. 나는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슬라이드 영상 사용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기각되었다. ......
---> 지금은 프리젠테이션의 시대, 사진이나 영상은 말이나 글을 필요 없게 만드는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부작용을 생각할 때 물론 남용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런 시대에 없어서는 절대 안 되는 필수품입니다. 더구나 기나긴 재판에 지치고 지친 배심원들의 주의를 그나마 이런 방법으로라도 그때그때 적절히 환기시켜주어야 합니다.
[417-419쪽] 우월감 콤플렉스를 자극하라. ‘나는 의사다. 나는 틀리지 않는다’라는 자부심을 자극하라.
“예전에 법정에서 증언하셨을 때 잘못된 판단에 근거하여 잘못된 진술을 하신 적이 있죠?”
“누구나 실수를 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랬고요.”
“스톤리지 사건은 어떻습니까?”
내가 예상했던 대로 프리먼이 재빨리 이의를 제기했다. ...... 나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배심원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낸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배심원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별말 없이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과거에 구티에레스가 거짓 증언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내가 원한 건 그것뿐이었다.
......
“질문을 취소하겠습니다.”
---> 할러 변호사가 구티에레스 박사를 반대신문하고 있습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우월감 콤플렉스를 자극하기 위한 전략을 쓰기 위해, 미리 증인에 대한 뒷조사까지 하고 나온 모양이군요. 물론 증인에게는 이 사건과 관련해 증인이 경험한 사실에 대해서만 질문해야지, 할러 변호사처럼 이 사건과 관련도 없는 증인의 과거 개인적인 문제까지 거론해서는 안 됩니다. 할러 변호사는 금지된 질문을 던져 놓고는 재빨리 그 질문을 철회해버리는 방법으로 배심원들이 어떠한 예단을 갖게 만드는 꼼수를 동원합니다. 프리먼 검사가 흥분할 만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런 세세한 데까지 신경을 쓰며 배심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자신이 의도한 데로 사고방향을 이끌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배심원들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는 이 지루한 재판을 지켜보면서 과연 이런 세세한 부분에까지 모두 집중하며 할러 변호사가 의도한 상황을 제대로 알아채고는 있을까요? 사람의 집중력이 기껏해야 15분 정도밖에 못 간다고 해서 ‘TED’나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가 있는 거라는데요.
[421-426쪽] “증인은 방금 전 다른 부상들을 보면 ‘피해자는 서 있다가 곧바로 쓰러져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피해자가 뒤에서 공격을 받았을 때 서 있는 상태였다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시죠?”
......
“그러니까 피해자는 치명적인 가격을 당할 당시 서 있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
“증인, 최초의 치명적인 가격이 있었을 당시 피해자의 자세와 두개골의 방향을 알 수 있다면, 범인이 살인 무기를 들고 있었던 각도를 알 수 있을 거라는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
“...... 우리가 피해자의 자세, 두개골의 방향, 무기의 각도 같은 이 모든 것들을 알고 있다면, 범인의 신장에 대해서 추측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
“...... 증인이 이 요소들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것 아닌가요?”
......
“키가 16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피고인이 자기보다 25센티미터나 큰 남자를 상대로 이 범죄를 저지르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 요소들이 보여줄 것이기 때문에 알고 싶지 ......”
“이의 있습니다!”
“......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요?”
---> 할러 변호사의 마지막 말에서 그의 전략을 알 수 있습니다. 작고 연약한 여성이 자신보다 25센티미터나 키 큰 건장한 남성의 뒤통수를 망치로 때려 쓰러뜨리는 게 가능하겠느냐며 상식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과학자든 의사이든 어떤 분야의 전문가이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고 모든 것을 아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설령 자기 분야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실제 그가 아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 대부분은 모르는 것투성이인 게 당연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바로 그 부분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전문가 증인이지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을 수밖에 없는데, 이 증인이 모르거나 대답하지 못할 만한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배심원들로 하여금 증인에 대한 신뢰감을 가질 수 없게 하려는 것이죠.
[428쪽] 점심시간 동안 나는 오후 공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리사 트래멀에게 설명해주었다.
...... 나는 검찰 측 증인신문이 마무리되고 변호인 측 증인신문이 시작되면서 우리가 무릅써야 할 위험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리사는 잔뜩 겁을 먹었지만, 나를 믿는다고 했다. 의뢰인에게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 족했다. 진실? 그건 아니고 믿음? 그거다.
---> 할러 변호사가 또 중요한 말을 하네요. 진실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한 거라고 합니다.
“질문을 취소하겠습니다.”
---> 할러 변호사가 구티에레스 박사를 반대신문하고 있습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우월감 콤플렉스를 자극하기 위한 전략을 쓰기 위해, 미리 증인에 대한 뒷조사까지 하고 나온 모양이군요. 물론 증인에게는 이 사건과 관련해 증인이 경험한 사실에 대해서만 질문해야지, 할러 변호사처럼 이 사건과 관련도 없는 증인의 과거 개인적인 문제까지 거론해서는 안 됩니다. 할러 변호사는 금지된 질문을 던져 놓고는 재빨리 그 질문을 철회해버리는 방법으로 배심원들이 어떠한 예단을 갖게 만드는 꼼수를 동원합니다. 프리먼 검사가 흥분할 만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할러 변호사는 이런 세세한 데까지 신경을 쓰며 배심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자신이 의도한 데로 사고방향을 이끌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배심원들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는 이 지루한 재판을 지켜보면서 과연 이런 세세한 부분에까지 모두 집중하며 할러 변호사가 의도한 상황을 제대로 알아채고는 있을까요? 사람의 집중력이 기껏해야 15분 정도밖에 못 간다고 해서 ‘TED’나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가 있는 거라는데요.
[421-426쪽] “증인은 방금 전 다른 부상들을 보면 ‘피해자는 서 있다가 곧바로 쓰러져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피해자가 뒤에서 공격을 받았을 때 서 있는 상태였다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시죠?”
......
“그러니까 피해자는 치명적인 가격을 당할 당시 서 있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
“증인, 최초의 치명적인 가격이 있었을 당시 피해자의 자세와 두개골의 방향을 알 수 있다면, 범인이 살인 무기를 들고 있었던 각도를 알 수 있을 거라는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
“...... 우리가 피해자의 자세, 두개골의 방향, 무기의 각도 같은 이 모든 것들을 알고 있다면, 범인의 신장에 대해서 추측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
“...... 증인이 이 요소들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것 아닌가요?”
......
“키가 16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피고인이 자기보다 25센티미터나 큰 남자를 상대로 이 범죄를 저지르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 요소들이 보여줄 것이기 때문에 알고 싶지 ......”
“이의 있습니다!”
“......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요?”
---> 할러 변호사의 마지막 말에서 그의 전략을 알 수 있습니다. 작고 연약한 여성이 자신보다 25센티미터나 키 큰 건장한 남성의 뒤통수를 망치로 때려 쓰러뜨리는 게 가능하겠느냐며 상식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과학자든 의사이든 어떤 분야의 전문가이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고 모든 것을 아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설령 자기 분야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실제 그가 아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 대부분은 모르는 것투성이인 게 당연합니다. 할러 변호사는 바로 그 부분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전문가 증인이지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을 수밖에 없는데, 이 증인이 모르거나 대답하지 못할 만한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배심원들로 하여금 증인에 대한 신뢰감을 가질 수 없게 하려는 것이죠.
[428쪽] 점심시간 동안 나는 오후 공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리사 트래멀에게 설명해주었다.
...... 나는 검찰 측 증인신문이 마무리되고 변호인 측 증인신문이 시작되면서 우리가 무릅써야 할 위험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리사는 잔뜩 겁을 먹었지만, 나를 믿는다고 했다. 의뢰인에게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 족했다. 진실? 그건 아니고 믿음? 그거다.
---> 할러 변호사가 또 중요한 말을 하네요. 진실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한 거라고 합니다.
진실이란 건 그게 실제로 진실이어서 진실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게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진실인 것이죠. 우리가 무엇인가를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결국 진실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428쪽] 나는 그녀가 검찰 측 마지막 증인이고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두 가지 사실을 진술할 거라고 추측했다. 회수된 망치에서 발견된 혈흔에 대한 유전자 분석조사 결과 미첼 본듀란트의 유전자와 완벽히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고, 리사 트래멀의 원예용 신발에서 발견된 혈흔도 조사 결과 피해자의 혈흔과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을 그녀가 확인해줄 것 같았다.
---> 드디어 검찰 측 마지막 증인이 등장합니다. 생물학 박사이고 교수이자 LA 지역 범죄과학 연구실 총책임자입니다. 그는 신발과 망치가 이 사건의 결정적 증거라는 점을 증언해줄 전문가입니다.
[428쪽] 나는 그녀가 검찰 측 마지막 증인이고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두 가지 사실을 진술할 거라고 추측했다. 회수된 망치에서 발견된 혈흔에 대한 유전자 분석조사 결과 미첼 본듀란트의 유전자와 완벽히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고, 리사 트래멀의 원예용 신발에서 발견된 혈흔도 조사 결과 피해자의 혈흔과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을 그녀가 확인해줄 것 같았다.
---> 드디어 검찰 측 마지막 증인이 등장합니다. 생물학 박사이고 교수이자 LA 지역 범죄과학 연구실 총책임자입니다. 그는 신발과 망치가 이 사건의 결정적 증거라는 점을 증언해줄 전문가입니다.
[429-432쪽] "재판 시간을 절약하고 배심원단이 DNA 비교 분석에 관한 길고 지루한 설명에 시달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변호인 측은 명기하겠습니다(the defense stipulates)."
......
“판사님, 우리가 자체적으로 실시한 분석검사에서도 일치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 변호인 측은 명기하겠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누군가가 고의로 그 신발에 피해자의 혈흔을 묻혀놨다는 것을 입증해 보일 겁니다. 진실은 거기 있거든요. 그것이 피해자의 혈흔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요. 우리는 그 혈흔이 피해자의 것임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프리먼 검사가 과학전문가 증인의 입을 통해 피고인의 신발과 망치에 묻은 피가 피해자의 것이라는 점을 주장해 나가려고 하는 순간, 할러 변호사가 끼어들어 stipulate하겠다고 합니다.
stipulate는 우리 법으로 말하면 ‘증거동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에 대해 증거로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말 번역서의 ‘명기하다’라는 표현보다 ‘증거동의 하다’ 또는 ‘증거로 하는 데 동의하다’라는 표현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할러 변호사의 증거동의로 인해 피고인의 신발과 망치에 대해 설명하러 나온 증인이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증인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으니, 모두에게 잘 된 일인 걸까요?
[432-434쪽] 나는 검찰 측 주장을 클라이맥스 없이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다. 검찰은 ‘저 여자가 범인이야! 저 여자가 범인이야! 저 여자가 범인이야!’라고 외치는 상징과 드럼과 증거를 가지고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고 돌아가는 대신, 입을 삐죽거리며 돌아갔다. 프리먼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녀는 점차적인 발전에 클라이맥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셰에라자드'를 앞의 10분은 듣고 뒤의 2분은 듣지 않고 꺼버리는 게 말이 되는가.
---> 아, 이 증거동의가 할러 변호사의 꼼수였군요. 검사의 마지막 증인신문을 무산시켜 검사로 하여금 입증전략에 차질을 빚게 하고 맥까지 빠지게 하려는 것이었군요. 프리먼 검사는 할러 변호사의 의도를 뒤늦게 알아채고 이의를 제기하지만, 재판장은 이를 기각합니다.
이 작품에선 검찰 측 마지막 증인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증거동의가 대단히 극적인 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제 생각엔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적 재미를 위해 과장한 것이고 실제 재판에서라면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즉, 변호인이 검사의 증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데 굳이 검사가 증인신문을 할 실익이 크진 않고 검사가 변호인의 증거동의에 반발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증인에게서 이끌어낼 수 있는 사실이란, 단지 DNA의 비교분석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신발과 망치의 DNA가 피해자의 것과 일치한다는 정도의 증언만으로는, 프리먼 검사가 배심원들 앞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기’에는 밋밋합니다. 잔잔한 클래식 반주에 맞춰 랩을 하겠다는 격이죠.
물론 결정적이거나 중요한 증언을 하러 나온 증인에게는 할러 변호사의 전략이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 프리먼 검사가 과학전문가 증인의 입을 통해 피고인의 신발과 망치에 묻은 피가 피해자의 것이라는 점을 주장해 나가려고 하는 순간, 할러 변호사가 끼어들어 stipulate하겠다고 합니다.
stipulate는 우리 법으로 말하면 ‘증거동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에 대해 증거로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말 번역서의 ‘명기하다’라는 표현보다 ‘증거동의 하다’ 또는 ‘증거로 하는 데 동의하다’라는 표현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할러 변호사의 증거동의로 인해 피고인의 신발과 망치에 대해 설명하러 나온 증인이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증인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으니, 모두에게 잘 된 일인 걸까요?
[432-434쪽] 나는 검찰 측 주장을 클라이맥스 없이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다. 검찰은 ‘저 여자가 범인이야! 저 여자가 범인이야! 저 여자가 범인이야!’라고 외치는 상징과 드럼과 증거를 가지고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고 돌아가는 대신, 입을 삐죽거리며 돌아갔다. 프리먼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녀는 점차적인 발전에 클라이맥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셰에라자드'를 앞의 10분은 듣고 뒤의 2분은 듣지 않고 꺼버리는 게 말이 되는가.
---> 아, 이 증거동의가 할러 변호사의 꼼수였군요. 검사의 마지막 증인신문을 무산시켜 검사로 하여금 입증전략에 차질을 빚게 하고 맥까지 빠지게 하려는 것이었군요. 프리먼 검사는 할러 변호사의 의도를 뒤늦게 알아채고 이의를 제기하지만, 재판장은 이를 기각합니다.
이 작품에선 검찰 측 마지막 증인에 대한 할러 변호사의 증거동의가 대단히 극적인 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제 생각엔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적 재미를 위해 과장한 것이고 실제 재판에서라면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즉, 변호인이 검사의 증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데 굳이 검사가 증인신문을 할 실익이 크진 않고 검사가 변호인의 증거동의에 반발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증인에게서 이끌어낼 수 있는 사실이란, 단지 DNA의 비교분석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신발과 망치의 DNA가 피해자의 것과 일치한다는 정도의 증언만으로는, 프리먼 검사가 배심원들 앞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기’에는 밋밋합니다. 잔잔한 클래식 반주에 맞춰 랩을 하겠다는 격이죠.
물론 결정적이거나 중요한 증언을 하러 나온 증인에게는 할러 변호사의 전략이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마지막 제4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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