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5일 토요일
플리바기닝 아닌 플리바기닝
며칠 전 법정에서 재판을 보다 문득 든 생각을 적어봅니다.
형사재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변호사들의 변론전략 중 이런 게 있습니다. 유무죄가 애매한 사건, 특히 어떠한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 건 맞지만 범죄의 고의가 있는지 애매한 사건, 고의도 그냥 고의가 아니라 미필적 고의가 있는지가 쟁점인 사건에서는 무죄를 주장하지 않고 그냥 유죄라고 인정한 다음 피고인이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으니 형량을 가볍게 해달라고 선처를 호소하는 전략입니다.범죄는 단순하게 말해서 행위(객관적 요건)와 고의(주관적 요건), 이렇게 두 가지로 구성됩니다. 피고인이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했는지 안 했는지부터 문제되는 사건이라면 무죄 가능성이 높겠지만, 행위를 한 건 맞지만 고의가 있는지 없는지가 애매한 사건이라면 무죄를 장담할 순 없을 겁니다. 앞의 사건이야 무죄 가능성이 높으니 무죄를 주장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뒤의 사건이라면 자칫 무죄를 주장하다 먹혀들지 않을 경우 처음부터 범행을 인정한 경우에 비해 형량에서도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위험까지 계산해서 그냥 범행을 인정하고 선처를 구하는 것입니다.
검사의 엄격한 입증이 필요한 형사재판에서 다소라도 무죄를 다퉈볼 만한 경우 피고인이나 변호인이나 무죄를 주장하는 게 이론상으로야 맞겠지만, 다소라도 무죄 가능성이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만으로 무죄를 주장하는 건 실제의 재판현장에선 위험한 전략입니다. 그리고 사실 자신에게 범죄의 고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피고인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고, 피고인을 가까이에서 변호하다 보면 변호인도 감이 올 것이잖아요.
1심에서 무죄를 주장하다(이런 경우는 보통 수사절차에서도 무죄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 되지 않아 유죄판결과 함께 무거운 형을 받게 되자 2심에선 전략을 바꿔 유죄를 인정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1심에서 유죄를 인정했는데도(이런 경우는 수사절차에서 유죄를 인정하는 경우도 있고 무죄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고 랜덤입니다) 기대보다 무거운 형을 받게 되자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2심에선 무죄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변호사들이 법정에서 이런 변론전략을 흔히 취하는 걸 보고 문득 플리바기닝 생각이 났습니다. 사실 이거 플리바기닝과 똑같잖아요. 자신의 죄는 피고인 자신이 제일 잘 알 테니 자신이 어떤 길을 갈지 선택권이 있는 것이고, 사법기관은 피고인의 선택에 따라 그에 맞는 적절한 답을 주면 되는 것이죠. 미국에선 검사 앞에서 이런 선택이 이루어지지만 우리나라에선 법정에서 판사 앞에서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만 다를 뿐이구요. 사실상 그 프로세스나 효과가 똑같습니다.
다만, 미국의 플리바기닝은 대개 형사절차 초기에 이루어지기에(재판 중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피고인이나 사법기관이나 수사와 재판에 들이는 수고를 모두 절약할 수 있는 데 반해, 우리나라의 변론전략은 형사절차가 이미 상당부분 진행된 후 법정에서 비로소 이루어지기 때문에 재판에 들이는 수고만 좀 절약되고 수사에 들이는 수고는 그대로라는 게 다르겠네요.
어느 나라나 사법기관의 사법자원은 인적으로나 예산상으로나 한정되어 있으니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모든 형사사건을 전부 다 (정식)재판으로 보내는 나라는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재판 전 단계에서 상당수의 사건을 걸러내고 극히 일부 사건만 재판절차로 들여보냅니다.
미국의 경우 모든 형사사건에 대해 배심재판(jury trial)이나 단독판사재판(bench trial)을 할 수는 없으므로, 절대다수의 사건을 그 전 단계에서 플리바기닝으로 종결시켜버립니다.
프랑스나 독일 같은 유럽 나라들은 재판 전 단계에서 예심절차(수사절차)를 운영합니다. 예심절차란, 판사와 동등한 ‘사법관’의 자격을 갖고 있는 예심판사나 검사(예심판사 제도가 폐지된 독일 같은 나라의 경우)가 주재하는 예비심리절차로서, 재판에 보낼 사건을 미리 검토하고 추리는 절차입니다. 모든 사건을 전부 다 재판에 보내면 재판 제도가 마비될 것이니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고, 재판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만 재판에 보냄으로써 재판 제도가 제대로 굴러가도록 미리 사건을 검토하고 추리는 절차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범죄를 하지 않았는데도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라면 아마 플리바기닝 제안을 덥석 받고 유죄를 인정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절대 억울해서 그렇게 할 수는 없죠. 끝까지 재판으로 가서 무죄를 받겠다고 하기 마련일 겁니다. 재판이란 반드시 진실이 밝혀진다는 보장이 없는 위험한 절차이므로 끝까지 재판으로 갔다가 자칫 잘못돼서 생사람을 잡게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정말로 억울한 피고인이라면 자신은 죄가 없으니 당연히 재판에서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굳게 믿는 게 보통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조심스레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나라에 플리바기닝 제도가 생긴다면, 죄명을 바꿔주거나 형량을 낮춰주겠다는 검사의 제안을 넙죽 받을 피고인은, 아마도 현재 혐의를 딱 잡아떼고는 있지만 사실은 죄를 지은 게 맞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우리 재판에서 종전의 무죄 주장과는 달리 유죄를 인정하며 선처를 구하고 있는 피고인들처럼 말이죠.
그럼에도 플리바기닝 얘기가 나오면, 우리는 이런 현실을 도외시한 채 영화나 드라마만 잔뜩 본 사람들처럼 완전 무죄인데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매우 극단적인 사례를 상상해가며 이 제도에 부정적인 인상을 갖곤 합니다. 이 세상이 완전무결할 수야 없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극단적인 일만 벌어지는 곳은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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