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9일 토요일
야구와 심판, 심판과 야구
해태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의 전성기를 이끈 코끼리 감독, 김응용 감독님의 발자취를 추억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했습니다. 그가 리더십을 발휘하는 요령도 소개되는데요, 대략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선수를 전적으로 믿고 선수에게 맡긴다는 겁니다. 이래라 저래라 일일이 잔소리할 거 없이, 그냥 믿고 맡기면 선수가 스스로 알아서 할 일 찾아서 잘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건 아마 리더마다 생각이 다를 거에요, 그냥 내버려두면 안된다는 의견도 분명 많을 거에요.
다른 하나는, 때를 잘 맞춰 고도의 심리전을 벌인다는 겁니다. 선수들의 집중력이나 사기를 끌어 올려야겠다 싶으면 난데없이 냅다 물건 깨부수고 집어던져 공포분위기를 조성합니다. 퇴장을 불사하고 심판에게 달려가 격하게 싸움을 거는 것도 공포분위기 조성의 일환입니다.
저는 다른 부분보다, 심판에게 싸움을 건다는 대목에 관심이 갔습니다. 꼭 심리전 아니라도, 감독이든 선수든 무엇인가 불만을 심판에게 분풀이하는 경우가 있어요. 스포츠 경기란 둘로 편 갈라 치고받는 싸움판인데, 간혹 둘끼리만의 싸움이 심판과의 싸움으로 넘어가기도 해요. 심판 일 하시는 분들에겐 죄송한 얘기지만, 그러면서 상대와의 직접적인 싸움 피하고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 어디다 하소연도 하고 스스로 속을 달래기도 하는 거겠죠.
물론 이것도 선을 넘지는 않아야 하구요. 심판에게 항의해서 불만을 보여주는 데서 그쳐야지, 폭력을 행사하거나 판 자체를 엎어버리거나 아예 심판을 없애버리겠다고 하면 안 되는 거겠죠.
그런데 싸움을 걸거나 분풀이를 하려면 심판이 뭔가 석연찮은 판정을 했다던가 하는, 싸움을 걸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야구는 공 하나 하나, 매 번의 플레이마다 심판의 판정이 이루어지죠. 이렇게 무수한 판정들이 있기 때문에 싸움 걸 명분도 잔뜩 널려있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가운데 놓고 심리전이나 분풀이가 용이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새 심판 판정에 대해 챌린지를 하고 비디오판독을 하고 있습니다. 의외로 판정 번복이 꽤 잦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사람한테 맡겨놨나 싶을 정도로 사람 눈이 기계 눈을 많이 못 따라갑니다. 비디오판독이 생기니까 이제 심판을 더 못 믿겠어요. 밑져야 본전이라고, 감독이나 선수들도 왠만한 상황에선 일단 심판 말 무시하고 두 손가락으로 네모를 그리거나 양손으로 두 귀를 덮는 제스처를 합니다.
심판에 대한 신뢰, 권위, 땅 가까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물론 실력 의심되는 심판도 있지만, 감각이나 시력의 한계, 심리적 영향 등 사람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어쩔 수 없는 측면도 분명 있는 걸 텐데요. 이유야 어쨌든 동네북 신세가 됐으니, 심판도 참 못해먹겠네요.
그래서 사람 심판을 없애고 로봇 심판, AI 심판을 도입하자는 얘기도 있죠. 근데 사람 심판이 없어지면 이제 백퍼 정확해진 판정 때문에 야구가 더 볼 만하게 될까요? 더 재미있어질까요?
오심은 대폭 줄 테니 심판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는 없어서 좋겠네요. 화도 안 나겠네요.
다만, 판정이 정확해진 대신 이제 심판에 대한 항의를 심리전으로 이용하는 작전은 더이상 볼 수 없겠네요. 이제 감독이나 선수가 어디 분풀이할 데도, 하소연하거나 속을 달랠 데도 없어지는 거네요. 드디어 야구가 볼썽 사나운 쌈박질 풍경 사라져, 아이들도 맘놓고 즐길 수 있는 점잖고 얌전한 스포츠가 되는 거네요.
근데 그게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낭만야구가 좋냐 너드야구가 좋냐는 질문을 받으면, 선뜻 뭐라고 답을 잘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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