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일 토요일
예심판사? 수사판사? 예심수사판사?
프랑스 법원에는 두 종류의 판사가 일하고 있습니다. 재판절차를 담당하는 판사와 예심절차를 담당하는 판사, 후자가 바로 예심수사판사입니다. 예심절차란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사건이 재판절차에 보낼 만한 것인지, 유죄를 받을 만한 증거는 갖춰져 있는지 여부를 미리 심사한다는 의미인데, 단지 현재 있는 자료만 갖고 그냥 심사만 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증거를 수집하는 활동, 즉 수사를 한다는 게 특이한 점입니다. 예심절차를 담당하기 때문에 예심판사라고 하기도 하고, 수사를 하기 때문에 수사판사라고 하기도 하고, 이도저도 애매하니 한데 합쳐서 예심수사판사라고 하기도 합니다.
예심수사판사는 모든 중죄사건, 그리고 검사가 예심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예심수사를 청구하는 사건을 수사하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판사가 검사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쓴 글에서 프랑스의 juge d'instruction에 대해 설명한 대목입니다. 이 제도는 일찌감치 프랑스 사법제도를 받아들였던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 식민지 시대에도 시행되다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사라진 제도입니다.
일본법에서 juge d'instruction을 '예심판사'라고 번역하기 시작한 걸 계기로 '예심판사' 용어가 흔히 사용되어 오다, juge d'instruction이 사실상 수사에 가까운 일을 하는 점에 착안하여 '수사판사'나 '예심수사판사'라는 용어도 새로이 등장해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여러 글을 통해 '예심수사판사'라는 용어를 써왔습니다. '예심'이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좀 모호한 면이 있으니 '수사'라는 말을 쓰는 게 juge d'instruction의 성격을 잘 나타낼 수 있을 것 같고, '예심'이라는 말이 워낙 오랫동안 확립돼있던 용어라 아예 안 쓰기는 뭔가 허전하니 이 둘을 다 합쳐 '예심수사판사'라고 부르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최근에 juge d'instruction이 등장하는 어떤 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심'이란 게 과연 뭘까, '수사'와 다른 걸까, 혹시 그 둘이 같은 말은 아닐까, 그 둘을 한데 합쳐 쓰는 게 '역전앞'이라는 말처럼 동어반복은 아닌 걸까?
예심절차라는 건, 범죄혐의자를 비롯해 여러 사건관계인들을 만나 그 사건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고, 그것으로 부족하면 압수수색을 하기도 하고 계좌거래내역을 보기도 하고 통화내역을 보기도 하는 등으로 재판에 준하는 심리를 하면서 재판에 보낼 사건을 판단하고 추리는 절차입니다. 이 과정은 모두 기록을 해놓아야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들은 얘기는 조서에 기록하고 압수수색을 하거나 계좌거래내역이나 통화내역을 보면 그 내용을 수사보고서에 기록하게 되는데, 이 조서와 수사보고서가 바로 재판에서 증거로 쓰이게 되는 거죠.
즉, juge d'instruction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증거가 만들어지고 모이게 되는데, 이게 곧 증거를 수집하는 행위고 이게 바로 수사인 겁니다. 다시 말하면, 예심절차라는 건 범죄혐의자를 재판에 보낼지 여부를 판단(공소권 행사)하기 위해 이런저런 필요한 사실관계를 확인(수사)하는 절차입니다. 그래서 예심과 수사가 사실상 같은 말이라는 거고, 아울러 공소권 행사와 수사는 분리될 수 없다는 거죠.
프랑스에서 juge d'instruction 제도의 처음 모습은 수사기관이라는 것이었고, 지금도 juge d'instruction의 일은 수사라는 기능의 본래적인 모습(경찰의 수사가 수사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는 의미)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예심과 수사는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 말로 보는 게 타당하겠습니다.
물론 다른 반론도 있을 순 있겠지만, 동어반복인 '예심수사판사'보다는 '예심판사'나 '수사판사'가 적절한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예심판사'와 '수사판사' 이 둘 중에서는 어느 걸 선택할지도 고민되네요. '예심'이라는 말을 아예 안 쓰기도 어려운 게, '예심절차'와 같은 말을 단순히 '수사절차'라고 번역할 순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일단 '예심판사'라는 용어를 쓰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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